〈 150화 〉 쇼다운.(1)
* * *
이튿날.
아이나는 동이 터 오르기가 무섭게 나를 깨웠다.
평소 같았으면 ‘조금만 더 이대로 있으면 안 되겠냐’는 내 칭얼거림을 한 번 정도는 받아줄 법 하건만, 오늘의 아이나는 조금 달랐다.
바로 전날 나를 꼭 껴안은 채 잠들었던 사람의 표정이라곤 믿을 수 없는 표정을 한 채 ‘안된다’는 단호한 말만 해왔으니까.
‘이상한데. 너무 매몰차.’
아무리 아이나가 공과 사의 구별이 확실한 사람이라곤 해도, 이렇게 하루아침에 태도를 확 뒤바꿀 사람은 아니었다.
즉, 갑자기 이런 모습을 보이는 건, 무언가 기분이 나쁠 만한 일이 있었다는 것.
하지만, 몇 번을 되뇌어 봐도 아이나의 기분을 상하게 만들었을 사건 같은 건 떠오르지 않았다.
잠든 사이에 칠 수 있는 사고라 해봤자 뭐가 있겠는가.
설령 자다가 무언가 실수를 했다 하더라도 평소의 아이나라면 여느 때와 같이 따끔하게 야단만 치고 말았으리라.
그렇기에, 나는 무엇이 그녀를 화나게 만든 지 알 수 없었고, 결국엔 그 이유를 직접 물어봐야만 했다.
“무슨 일인데 그렇게 벌레 씹은 표정을 하고 있어?”
“별로 만나고 싶지 않은 사람을 만나 봐야 할 것 같거든. 그것도 너랑 같이.”
“나는 왜?”
“그 사람이 콕 집어서 너를 보고 싶다고 했거든.”
“그게 누군데?”
“무어라 설명하긴 어려운 사람이니까, 직접 만나 보는 게 가장 빠를 거야. 그래도 너무 부담가지진 말고. 일단은 나랑 아는 사이긴 하니까.”
두루뭉술한 대답만을 남긴 아이나는 그 말을 마지막으로 입을 열지 않았다.
더 이상 그 주제로 말하고 싶지 않다는 듯.
아무리 이야기를 이어나가려고 해도 말이다.
따라서, 내가 할 수 있는 거라곤 말없이 차에 오르는 아이나의 뒤를 쫓는 것뿐이었다.
* * *
어디 드라마 속 회장님들이나 타고 다닐 법한 검은 색 세단을 타고 달린 끝에 도착한 곳은, 다소 난데없는 장소였다.
“웬 선착장?”
“우리가 만날 사람이 여기 있거든.”
아이나와 아는 사람이라면 당연히 최고급 호텔이나 목 좋은 곳에 자리 잡은 별장 같은 조용한 곳으로 약속을 잡을 줄 알았는데 말이야.
비린내로 무장한 거친 바다 사나이들이 득시글거리는 부둣가로 올 줄은.
게다가, 조업은 어지간하면 아침에 시작되는 게 보통이기에, 이 부둣가는 시끌벅적하기 짝이 없는 장소였다.
아무튼, 그런 소란스러운 와중에도 가장 눈에 띄는 사람은 분명 있었다.
바로 저기 건너편에서 친근한 표정으로 손을 마구 흔들어 대며, 우렁찬 목소리로 누군가를 불러대는 사내 한 명 말이다.
“거기 예쁜 누나랑 형씨! 여기야! 여기!”
“설마 저 사람, 우리 부르는 거야?”
“그래, 맞아.”
웨이브가 잔뜩 들어간 금발 머리, 나른해 보이는 하와이안 셔츠, 그 위로 너저분하게 걸친 양복까지.
누가 봐도 ‘나 건달이오’하는 복장을 한 사내가 누구보다 들뜬 표정으로 우릴 반겨주었다.
그 건들거리는 행색에 어울리지 않게, 외모는 엄청난 꽃미남이었다는 점은 꽤나 우스꽝스러웠지만.
아이나는 그 모습이 갑갑하다는 듯, 한숨만 푹푹 내쉬었다.
“낌새가 별로 안 좋은데.”
“말했잖아. 별로 만나고 싶지 않은 사람이었다고.”
“누구 하나 묻어버릴 것처럼 생긴 양반이 나는 왜 찾는데?”
“가보면 알아.”
주변 뱃사람들은 친절하게도 우리를 그의 앞까지 데려다주었다.
의외였던 점은, 그 누구도 이 하와이안 셔츠 남자를 ‘두목’이나 ‘형님’ 같은 호칭으로 부르지 않았다는 거였다.
그저 평범하게 ‘잭슨 씨’라고만 부를 뿐.
“드디어 우리 차기 가주님이 오셨군! 꼭 한 번 만나 보고 싶었는데 말이야, 내겐 좀처럼 기회가 찾아오지 않더라고. 뭐, 이해는 해. 외부인인데다, 변방의 촌놈인 나 같은 자식에게 할애할 시간은 많지 않을 테니까. 그래서 사실상 체념한 상태였는데, 드디어 내게도 기회가 찾아왔구만!”
“얼굴 정도는 몇 번 마주친 적 있었던 것 같은데요.”
“나참, 그건 어디까지나 ‘마주친 것’뿐이잖아. 그것도 가족 행사에서 잠깐. 얼굴도 기억 못 할 수준이었다고. 똑똑하신 우리 아가씨께서야 뭐든 다 기억하시겠지만, 아쉽게도 난 아니거든? 난 내가 몇 살인지조차 기억 못 하는 사람이라고. 파하하.”
“돈에 관련된 이야기는 그 누구보다 잘 기억하시잖아요.”
“아, 뭐 그거야 내가 이 가문의 재정을 담당하고 있으니 그런 것 아니겠나. 그건 반드시 기억 해야지. 안 그럼 난 모가지라고? 이렇게 좋은 직장을 잃는 건 상당히 가슴 아픈 일이란 말이야. 아니, 잠깐, 설마 저번에 3만 달러 정도 몰래 떼먹었다고 날 자르려고 찾아온 건 아니겠지? 제발 그러진 말아줘! 우린 가족이잖아, 그렇지?”
그래, 잭슨은 엄청난 수다쟁이였다.
감당할 수 없는 수준의.
가만히 놔둬도 혼자서 무어라고 계속 재잘재잘 떠들어대는 게, 아이나가 싫어하는 이유를 바로 알 것만 같았다.
“…아무튼! 너는 나한테 궁금한 점이 없니?”
“네?”
슬슬 아이나와의 대화에 흥미가 떨어졌는지, 잭슨은 돌연 대화 상대를 나로 바꾸었다.
“뭘 그렇게 화들짝 놀라고 그러는 거야. 내가 물기라도 할까 봐 그래?”
“아뇨, 너무 갑작스러워서요.”
“아무 질문이나 괜찮으니, 궁금한 점이 있으면 눈치 보지 마음껏 물어보라고. 아까부터 질문할 게 많아 보이던데.”
“궁금한 점이 몇 가지 있긴 했죠.”
사실 몇 가지 정도가 아니었다.
저 괴상망측한 옷차림부터 시작해서, 나를 불러낸 이유까지, 하나하나 궁금한 점투성이였으니까.
“너무 사소한 건 물어보지 마. 대부분은 그냥 내 취향이니까. 세상에 괴짜가 어디 한둘이야? 나 같은 사람도 세상에 하나쯤은 있어 줘야 하는 법이라고.”
“그럼, 정말로 궁금한 점 세 가지만 물을게요. 잭슨 씨는 아무리 봐도 미츠루 가문이랑 전혀 연이 없어 보이는 사람 같은데, 아까 아이나보고 가족이 어쩌고저쩌고했던 건 뭔가요?”
“그거 말이야? 말 그대로지. 난 아이나의 아주 먼 친척 할아버지쯤 되는 사람이거든. 아, 이상한 착각은 하지 마. 아이나에겐 내 피가 한 방울도 섞이지 않았으니까. 직계와는 거리가 매우 먼 방계와 결혼했다고 생각하면 편해. 뭐, 그래도 어찌 보면 너랑 비슷한 사례라고 할 수 있겠지. 너도 원래는 ‘이쪽’이랑 전혀 상관없는 외부인인데도 우리랑 엮이게 됐잖아? 물론 네 쪽이 팔자는 훨씬 잘 핀 것 같지만 말이야. 파하하.”
도무지 믿을 수 없어 아이나 쪽을 향해 고개를 돌리자, 그녀는 맞다는 듯 조용히 고개만 끄덕였다.
진짜 가족이었다니.
믿을 수가 없네.
먼 방계와 결혼한 사례라고는 하지만, 이런 사람을 미츠루 가에서 받아줬다는 게 놀라울 따름이었다.
“혹시, 재정 관리도 옛날부터 해왔던 건가요?”
“맞아. 꽤 오래됐지. 적어도 50년은 넘은 것 같은데? 전부 내가 하는 건 아니지만 말이야. 예전에는 거의 나 혼자 담당하긴 했는데, 이젠 나도 좀 쉬려고. 늙으니까 지쳐.”
알면 알수록 이상한 점투성인 사람이었다.
기껏해야 나보다 예닐곱 살 많아 보이는 저 외모야 클로에처럼 모종의 사상력을 이용해 유지하고 있는 거라고 쳐도, 남의 집안 재정 관리를 수십 년 동안 혼자 도맡아 해오다니.
그것도 직계조차 아닌, 방계와 결혼한 외부인이.
이해가 가지 않았다.
“용케도 도망 안 치셨네요. 미츠루 가문 전체의 회계라면 보통 힘든 일이 아니었을 텐데. 부인을 굉장히 사랑하셨나 봐요?”
“도망을 못 가니까 이러고 있는 거지. 누군들 좋아서 이러고 있는 거겠어? 아, 내가 아내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뜻은 아니야. 그래도 귀에 들어가면 분명 바가지를 박박 긁어댈 테니, 이건 비밀로 해줘. 늙어도 잔소리할 기운은 잔뜩 남아있는 모양이더라고.”
‘도망치다 잡힌다’가 아니라, ‘도망을 못 간다’라니.
약점이라도 잡혀있나 보네.
도대체 어떤 약점이기에 장장 50년이라는 세월을 남의 집안을 위해 바칠 수 있나 궁금했지만, 개인적인 이야기일 것 같아 물어보지는 않았다.
“그래서, 저를 만나려 한 이유는 뭡니까?”
“따라와 봐.”
잭슨은 나와 아이나를 데리고 정박한 어느 함선의 조용한 밀실로 데려갔다.
그 곳에는 줄곧 내가 찾아다니던 정체불명의 돌이 있었다.
여태껏 보지 못한 엄청난 크기를 자랑하는.
“이건…”
“이걸 찾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거든. 난 어디다 쓰는 물건인지 통 알 수 없어서 말이야. 잘 아는 사람한테 맡기는 편이 낫지 않겠어?”
“대체 이걸 어디서 구하신 거죠?”
“이 선착장은 내 소유지. 엄밀히 말하면 미츠루 가의 소유지만, 실질적으론 내가 주인이나 다름없어. 그러므로 이곳을 드나드는 배가 뭘 싣고 있는지 알아볼 권리도 있지. 그러다가 나온 물건이야. 밀반입하려다 걸렸거든. 빼앗느라 고생 좀 했다고.”
그렇겠지.
솜니엄리버레이터 녀석들이 이걸 호락호락 넘겨줄 리가 없을 테니까.
“공짜로 주실 리는 없을 거고, 뭔가 요구하시는 게 있을 것 같은데.”
“이해가 빨라서 좋군. 나랑 게임 한 판만 하는 거, 어때?”
“아뇨, 안 돼요. 잭슨. 성진, 너도 잭슨의 제안에 응하지 마.”
줄곧 나와 잭슨을 바라만 보고 있던 아이나가 다급하게 제지에 나섰다.
“워, 워, 진정해. 나도 차기 가주님 원한을 사고 싶진 않거든? 사랑하는 낭군님은 털끝 하나 건드리지 않을 테니, 이야기는 마저 들어 보라고.”
“쓸데없는 소리를 했다간, 그대로 보관 중인 물건을 박살 내버릴 줄 아세요.”
“명심하지.”
잭슨은 십년감수했다는 듯이 가슴을 쓸어내렸다.
드러나는 성격상 과장된 몸짓임은 분명했으나, 눈에 깃든 자그마한 공포로 보아, 도발을 위한 허세 같지는 않았다.
“휴, 그럼 다시 이야기로 돌아와 마저 설명해볼까. 성진, ‘살면서 절대 피할 수 없는 것 두 가지’라는 말, 들어 본 적 있지?”
“죽음과 세금, 말씀하시는 겁니까?”
“맞아, 난 그걸 거둬들이는 사상력을 가지고 있고. 말로 들어선 이해하기 어려울 테니, 직접 보여주는 게 빠르겠지. 혹시 가진 물건 중에 적당히 사라져도 괜찮은 물건 있나? 있다면 줘 봐.”
열심히 주머니 속을 뒤지자, 예전에 구매해두었던 기계 껌이 튀어나왔다.
살 때 제법 비싼 돈을 주고 샀던 물건인지라, 조금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래도 가진 물건 중에 사라져도 괜찮을 만한 것은 저것뿐이었기에 어쩔 수 없었다.
나머진 마나글레이브나 핸드폰 같이 사라져선 절대 안 될 물건이었으니까.
“이거면 되나요?”
“딱 적당하네. 잘 봐.”
잭슨이 허공에다 대고 손을 실룩거리자, 은색 양팔 저울이 하나 나타났다.
그 저울의 한쪽 접시에는 건네받은 기계 껌을, 그리고 반대편 접시에는 자그마한 금화 하나를 올려놓았다.
이윽고,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당연히 더 무거운 기계 껌 쪽으로 기울어져야 할 저울이, 순식간에 금화 쪽으로 기울어지기 시작한 것이었다.
“이 저울, 중심이 이상한 것 같은데요?”
“아니, 정확해. 이 저울은 무게를 재는 게 아니고, 그 물건의 가치를 재는 저울이거든.”
물건의 가치를 판별하는 능력이라니.
전투엔 하등 쓸모없을지 몰라도, 실 생활적인 면에선 이거보다 더 좋은 능력이 없어 보였다.
“굉장히 유용한 사상력인 건 알겠습니다. 근데, 이게 ‘죽음과 세금’이랑 무슨 상관이죠?”
“그럼 이렇게 한번 말해 봐. ‘나는 저울과의 거래가 끝난 뒤 잭슨 씨에게 금화 한 닢을 지불하겠다’고.”
“나는 저울과의 거래가 끝난 뒤 잭슨 씨에게 금화 한 닢을 지불하겠다?”
그 말 한마디에 저울은 기계 껌 쪽으로 다시 기울어지기 시작했다.
마치 내 말에 무게라도 생긴 것 마냥.
“설마, 방금 제가 말한 것 때문에 기울어진 겁니까?”
“그래, 대화 한 마디조차 가치로 환산할 수 있는, 엄청난 저울이지. 게다가, 만약 네가 금화 한 닢을 지불 할 수 없는 상황이라면, 나는 금화 한 닢에 해당하는 네 수명을 대신 대가로 받아 가게 돼.”
“그래서 ‘죽음과 세금’이군요.”
“그런 셈이야. 이제 내가 왜 재정 관리를 담당하고 있는지도 잘 이해했겠지? 나보다 적합한 사람이 없어서 그래. ‘이제 저울과의 거래를 종료한다.’”
그가 저울 위에 놓여 있던 기계 껌을 돌려주며 말했다.
“근데, 이건 잭슨 씨에게 너무 유리한 능력 아닌가요? 불리한 거래 같다 싶으면 언제든지 파투 내버리면 되잖아요. 지금처럼.”
“아, 그건 아니야. 거래를 종료할 권리는 더 가치 있는 물건을 올려놓은 사람에게만 주어져. 설령 그 거래 대상이 능력의 주인인 각성자 본인이어도 말이야.”
“그건 그나마 다행이네요.”
슬슬 이쯤 되면 잭슨이 원하는 걸 눈치채지 못할 리가 없었다.
이 저울을 이용해서 게임을 한 판 하자는 거겠지.
“그래서, 이 저울을 이용해서 게임을 한 판 하자, 이 말씀 아닙니까. 결국엔.”
“맞아. 어때, 네 안에서 꿈틀거리는 도박사의 정신을 걸고, 한 판 당겨 보겠나?”
“콜.”
다시 말하지만, 난 지는 싸움 따위 절대 하지 않는다.
절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