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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48화 〉 가화만사성? (148/173)

〈 148화 〉 가화만사성?

* * *

식사가 끝난 뒤, 아이나의 아버지, 카즈나리는 나에게 독대를 요청했다.

아이나에게 눈짓으로 구조 요청을 보내 보았지만, 이번만은 그녀조차 도와줄 수 없다는 듯, 작게 고개를 저었다.

결국, 이 작은 방에 남은 것은 나와 카즈나리 뿐.

정신 바짝 차려야겠네.

“뭘 그렇게 굳어있나. 겁을 잔뜩 집어먹은 채로. 말도 좀 편히 하게. 누가 보면 내가 기합이라도 주는 줄 알겠어.”

“지금 같은 상황에 느긋하게 정신줄 놓고 있을 사람이 몇이나 되겠어요. 다른 사람도 아니고, 그 미츠루 카즈나리가 제 앞에 있는데.”

“좋게 평가해주니 고맙군그래.”

칭찬의 의미로만 사용한 건 아니었는데.

그래도 본인이 좋게 받아들이니 된 거겠지.

“아무튼, 자네가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또 왜 그렇게 생각하는지는 알겠다만, 그렇게까지 긴장할 필요는 없어.”

“그게 어디 쉬운 일인가요.”

“관점을 바꾸면 그리 어렵지 않네. 미츠루 카즈나리가 아니라, 그저 여자친구의 아버지라 생각해보게.”

“시도는 해볼게요.”

그리 생각해도 어려운 사람인 건 매한가지다만.

“시원찮은 반응이군. 이해는 해. 하지만 조금만 이야기해 보면 내가 왜 그런 이야기를 꺼냈는지 알걸세. 나는 정말 평범한 질문만 할 생각이거든.”

“제발 그랬으면 좋겠네요.”

“약속하지. 부담스럽지 않은 질문 세 개만 하고 바로 보내주겠다고.”

“어휴, 그래 주시면 정말 감사하죠.”

“듣자마자 표정이 확 밝아지는군. 여기 오고 나서 제일 환하게 웃는 것 같아. 내가 그렇게 보기 싫나?”

카즈나리는 실망했다는 듯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뻔히 알아차릴 수 있을 정도로 티 나는 연기였지만.

“아뇨.”

“그럼 됐네.”

“그래서, 질문은 뭔가요?”

“자네는 꿈이 뭔가?”

그 질문이 나와버렸군.

뻔하지만 제일 듣기 싫은 바로 그 질문.

꿈이 없어서 이 질문을 싫어하는 건 아니다.

단지 그 꿈이 남들이 듣기엔 너무 허황한, 병신같아 보이는 꿈이라 그렇지.

‘세계 멸망을 막고 싶다’라니.

이보다 더 쪽팔린 대답은 없으리라.

따라서, 나는 두루뭉술한 가지는 최대한 쳐내고 가장 핵심인 부분만 이야기만 하기로 했다.

“어떤 빌런을 죽이고 싶습니다. 그게 전부에요.”

“희한하군.”

“뭐가요?”

내 대답이 다소 신기했던 모양인지, 카즈나리는 진심으로 놀랐다는 표정이었다.

아니, 소싯적엔 수백 명도 사람을 넘게 죽여봤을 사람이 고작 빌런 하나 잡고 싶다고 말한 게 그렇게 놀랄 일인가?

“별로 그러고 싶은 것 같지 않아서 말이야.”

“엄청 절실한데요.”

“그래, 절실함은 느껴져. 하지만 누군가를 죽이겠다는 의지는 보이지 않으니 희한하다는 거지. 살의가 필요한 경우는 보통 세 가지라네. 첫 번째는 복수를 위해, 두 번째는 돈을 위해, 세 번째는 명예를 위해.”

“무슨 말인지 모르겠는데요.”

“자, 잘 들어보게. 누군가를 죽인다는 건 굉장한 노력과 부담, 안위가 걸린 일이야. 쉽게 시도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는 거지. 그걸 불사하고서라도 반드시 그 목적을 이룩해야 한다면, 뭔가 계기가 필요하지 않겠나?”

“그렇겠죠.”

“그래, 복수, 돈, 명예. 이 셋은 모두 사람을 가장 쉽고 빠르게 움직이는 원동력이지. 지극히 원초적인 감정에서 비롯한 것이니까. 대신 그런 만큼 그것에 미쳐있는 게 남의 눈에 아주 훤히 보인다네. 복수에 미친 사람에게선 끓어오르는 증오가, 돈에 미친 사람에게선 차가운 공허함이, 명예에 미친 사람에겐 오만함으로 가득 찬 광신이 느껴져. 하지만 이상하게도 자네에게선 그 무엇도 느껴지지 않는군.”

카즈나리는 자신의 말에 확신이 있는 눈치였다.

나와는 눈조차 마주치지 않은 채 느긋하게 차만 음미하고 있었으니까.

“대답하지 못하는 걸 보니 내 말이 맞는 모양이지?”

“…그렇습니다.”

“고생문이 열렸군. 저 셋 없이는 그 목적을 이루기 어려울 테니. 큰 리스크를 동반하긴 해도 목적 달성을 위한 수단으로선 아주 좋은 것들인데 말이지.”

“쉽지 않은 길이 되리라는 건 압니다. 그럼에도 해야만 하는 일이기에, 전 할 겁니다.”

“생각보다 확고한 면이 있군. 내 밑에 녀석들이라면 ‘포기하겠다’라고 하거나, ‘필요에 의해서라면 가지겠습니다’라고 답했을 텐데.”

그럴 수는 없었다.

차라리 싸우다 죽는 편이 낫지.

“절대 그럴 일은 없을 겁니다.”

“자네가 그렇다니 두 번째 질문으로 넘어가지. 사람을 죽여본 적은 있나? 자네 손으로 직접 말일세.”

“당연히…”

잠깐.

다시 생각해보니, ‘내 손으로 직접’ 죽여본 적은 없었다.

빌런 습격 사건 때도, 레온을 도와 이리나를 죽일 때도, 진조를 처치할 때도 모두 남의 손을 빌린 것이었으니까.

“없나 보군.”

“네.”

“딱히 자네를 책망하려 하거나, 살인을 저지르라는 의미에서 물어본 건 아냐. 다만.”

그는 중요한 이야기를 끊은 와중에도 여전히 느긋한 기색이 넘쳤다.

다과를 맛보고 입가심으로 차를 마시는 여유까지 선보였으니.

그런 모습에 오히려 초조해지는 건 내 쪽이었다.

“다만?”

“그게 니힐리스가 아니길 바랄 뿐.”

‘뭐야, 이 사람. 대체 나에 대해서 어디까지 알고 있는 거지?’

내가 니힐리스와 아는 사이라는 건 윌리엄이나 레온같이 직접적으로 엮인 사람을 제외하곤 아무도 없는데.

두려움이 일기 시작했다.

“제법 놀란 눈치군.”

“그럴 수밖에요. 제가 니힐리스와 친분이 있는 사이라는 걸 아는 사람은 극히 일부니까. 도대체 어떻게 알아차린 거죠? 설령 제 주변 경계가 느슨했다고 쳐도, 니힐리스는 분명 보는 눈을 눈치챘을 겁니다. 그걸 용납할 사람도 아니고요.”

“아이나의 조부, 즉, 나의 아버지께서 자색 기사단의 일원이었기 때문이지.”

아이나가 말해 주긴 했었다.

자신의 할아버지는 자색 기사단에 발을 들였단 이유로 가문에서 파문당했다고.

당연히 그의 아들인 카즈나리가 모를 리가 없는 게 더 이상한 상황.

그럼에도 내가 이렇게 놀란 건, 그 짧게 지나갔던 이야기가 이런 식으로 돌아올 거라곤 전혀 예상치 못했기 때문이었다.

“영식과 자색 기사단에 대해 어느 정도 알고 계셨기에 유추가 가능했던 거군요.”

“그래, 내 아버지와 관련 있는 이야기니까.”

“그런데, 왜 제 첫 살생이 니힐리스가 아니길 바란다는 건가요?”

“그렇지 않으면 모두가 불행해질 테니까. 자네는 주저하다 일을 그르치게 될 테고, 니힐리스는 하나 남은 마지막 제자를 잃게 될 것이며, 나와 아이나는 정당한 방법을 통한 가문의 복수를 할 기회를 영영 잃는 셈이 되겠지.”

내가 품은 의문 대부분을 관철하는 명확한 대답이 아닐 수 없었다.

분명 나는 사사로운 감정에 휩쓸리는, 이른바 정이 많은 스타일이다.

그런 마당에 첫 살생이라면, 여러 가지 잡념에 휘둘리다가 니힐리스와 최후의 결전을 말아먹게 될 가능성이 컸다.

자색 기사단 또한 니힐리스를 마지막으로 명을 달리할 테고.

하나, 마지막 마디만큼은 조금 이해하기 어려웠다.

“마지막 말은 무슨 뜻이죠?”

“내 아버지는 분명 정당한 결투를 치르다 돌아가셨다. 그 누구에게도 책임을 물을 수 없지. 애초에 도전하고자 한 건 아버지의 뜻이었으니까. 하지만, 내 아버지를 죽인 자에 대한 앙심 정도는 남아있는 게 사람으로서 당연한 마음 아니겠나. 복수를 이루고 싶다네.”

“그럼 하면 되는 것 아닌가요? 물론 니힐리스는 강해요. 하지만, 미츠루 가문 전체의 힘에 비할 바는 못 되지 않습니까. 이루려면 얼마든지 이룰 수 있다고 생각하는데요.”

“아니, 그렇게 쉽게 이루어선 안 돼. 비열하고, 잔혹한 술수를 쓰는 게 우리 특기라지만, 그것도 경우와 때를 가려서 하는 거다. 내 아버지는 자색 기사단의 관습에 따랐을 뿐이고, 니힐리스 또한 그런 아버지의 명예를 지켜주었지. 따라서 니힐리스에게 치졸한 방식으로 복수해봤자, 아버지의 이름에 먹칠을 하는 꼴밖에 되지 않아. 진정한 복수를 이루는 방법은, 같은 기사단의 일원으로서 니힐리스에게 도전하여 승리하는 것뿐이다.”

“하지만, 제가 하면 더 이상 가문의 복수도 뭣도 아니잖아요.”

“아니, 그렇지 않아. 자네가 아이나와 결혼하면, 자네도 미츠루 가문의 일원이 되는 셈이니까. 적법한 절차를 통한 복수가 되는 거지.”

카즈나리는 정신이 혼미해질 법한 소리를 내뱉으면서도 시종일관 초연한 자세를 유지하고 있었다.

혹여 그가 말했던 ‘복수에 미친 자의 타오르는 증오’나, ‘명예에 미친 자의 광신’의 편린이라도 보이지 않을까 싶어 그의 눈을 자세히 살펴보았지만, 그런 것은 커녕, 아무런 감정조차 찾을 수 없었다.

그는 진지하고 냉철하게 이런 소리를 꺼낸 것이었다.

“…진심으로 하는 말씀이세요?”

“물론이지. 난 자네가 마음에 들거든. 아이나는 내 딸이지만 참 감당하기 힘든 사람이라 데려갈 사람이 마땅히 별로 없었다네. 어쩌다 수준에 맞는 사람이 나타나도 모두 아이나 쪽에서 거절했고.”

“아이나는 ‘가문 내부의 일은 대부분 아버지께서 결정하신다’라고 하던데. 과거에 혼약을 맺었다거나 한 적조차 없었던 건가요?”

“정략결혼 같은 요청은 몇 번 있었지만 모두 거절했네. 그런 놈들의 자식새끼는 대체로 자기 잘난 맛에 사는 놈들 뿐이라, 맺어주면 혼약을 빌미로 우리 가문에 사사건건 개입해서 귀찮게 굴 게 뻔하거든. 대대로 일궈놓은 가문에 재를 뿌리려 드는 쓰레기들을 들일 생각은 추호도 없네.”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안 되는데.

그렇게 일일이 계산기 다 두드려보는 치밀한 인간이 내가 마음에 들었다는 게.

“어째 아이나보다 눈이 더 높으신 것 같은데, 저 정도로 성에 차는 게 신기하네요.”

“아니, 자네만큼 딱 들어맞는 사람도 없을 거야. 안 그래도 그 문제로 골머리를 앓던 와중에 자네같이 완벽한 배필이 때마침 등장해서 얼마나 좋아했는데.”

“어째서죠?”

“우리를 집어삼키기엔 자네의 지지기반이 너무 약하거든. 만약 기반이 생겨도 자네가 미츠루 가를 먹어 치우는 일 따위도 일어나지 않을 거고. 자네는 그 정도로 똑똑하지 않거니와, 그 정도로 탐욕스러운 인간도 아니지 않나. 적당히 나른한 면도 마음에 든다네. 눈에 띄게 성실하면 노출되는 게 많다 보니 우리로선 여간 불편한 게 아니거든.”

“칭찬입니까, 욕입니까?”

“자네도 조금 전에 넌지시 내 흉을 보지 않았나. 그에 대한 응징이라고 생각하게.”

진짜 딜교 개좆망이란 소리가 나올 정도로 처참하게 발렸네.

차라리 쌍욕을 박든가.

이건 너무 하잖아.

“결국엔, 게으른데다 가진 건 쥐뿔도 없고, 적당히 멍청해서 마음에 들었단 말 아닙니까.”

“무슨 소리, 나는 그런 말은 한 번도 한 적 없다네. 피해 의식으로 괜한 생사람 잡지 말았으면 좋겠군. 그리고 그런 기분 나쁜 소리는 입에 담지도 말게. 마치 내 딸이 게으르고, 가진 건 쥐뿔도 없고, 멍청한 놈을 좋아하고 있다는 것처럼 들리고 있지 않나.”

몇 마디 나누지도 않았는데 벌써 진이 다 빠지네.

괜히 쓸데 없는 이야기로 기운빼지 말고, 마지막 남은 질문만 듣고 빨리 도망치든가 해야지.

맥이는 데엔 아주 도사가 따로 없는 인간이라, 이 이상 대화를 나눠봤자 나만 힘들어질 게 뻔해 보였다.

“후우, 알겠습니다. 그래서, 마지막 질문은 뭡니까?”

“지금도 내가 대하기 어려운 사람 같나?”

‘그러고 보니 어느샌가 친근하게 대화를 나누고 있었네.’

분명 니힐리스 어쩌고 이야기를 할 때까지만 해도 엄청 무거운 분위기였던 것 같은데, 순식간에 가벼운 분위기로 바뀌었잖아?

그것도 내가 스스로 긴장을 풀게끔 대화를 자연스럽게 유도해줬고.

아이나의 아버지, 생각했던 것보단 훨씬 인간미 있는 사람이었네.

대하기 어려운 사람이라는 건 변함 없었지만.

“조금은요.”

“솔직하게 대답해줘서 고맙군. 가봐도 좋네.”

“가기 전에 저도 질문 하나만 해도 될까요?”

“물론일세.”

“지금까지 했던 질문들의 의도를 잘 모르겠습니다.”

“별것 없네. 교차 검증 작업이지. 내가 들은 것, 내 딸에게 들은 것과 자네가 말하는 것이 일치하는지 확인하는 작업. 가화만사성(家???成)이라고 하지 않나. 난 내 딸과 가족이 행복했으면 하거든. 믿음직스럽지 못한 사람은 들일 수 없어.”

“만약에 아니었다면요?”

“글쎄. 여태까지 보여줬던 행동이 연기일 정도로 머리가 좋은 놈이었다면, 가늠할 수 없을 정도로 대단한 개수작을 부리려 했을 테니, 착한 생각을 할 수 있게끔 도와주는 좋은 곳에 보내주지 않았을까 싶군.”

능글맞고 뻔뻔스러운 게, 생긴 모습을 제외하면 둘은 전혀 닮은 구석이 없는 것 같았는데, 이 말을 듣고 나니 살벌한 말투 하나는 확실히 부녀가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도 많이 듣다 보니 이젠 친숙해질 지경이었지만.

물론 계속 듣고 싶다는 이야기는 아니었기에, 나는 얼른 인사만 남긴 채 그 작은 방을 빠져나왔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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