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7화 〉 공포의 손님맞이.
* * *
이렇게 마음 편히 쉬어 보는 것도 참 오래간만이네.
다른 애들은 저마다의 성격이 워낙 강해서 그런지 함께 있을 땐 내 기가 다 빨리는 기분이라 쉬어도 쉬는 것 같지 않았거든.
그에 반해 프리실라는 둥글둥글하고 유순한 성격을 지니고 있었기에 전혀 그런 불편을 겪지 않아도 됐다.
“덕분에 너무 잘 쉬고 간다. 너희 부모님한테도 고맙다고 전해줘.”
“알겠으니까 어서 가기나 해. 걔도 기다리고 있을 거 아냐.”
“서운하네. 빨리 가버리라니.”
“그런 식으론 말 안 했거든? 그리고, 우리 아빠한테서 집 열쇠도 받았다며. 자주 보게 될 텐데, 뭘.”
얘는 나를 무슨 철면피로 생각하나.
이번은 미리 언질을 주기도 했고, 한 번쯤은 만나 뵈어야 할 사람이니까 그런 거지.
어떻게 매번 남의 집에 묵어.
자취 중인 친구네 같은 거면 또 몰라도.
그건 공공재니까.
“그건 너무 양심 없는 새끼 같아서 좀 그렇고.”
“본가에서 묵는 게 눈치 보이면 별장에 있으면 되지.”
“별장도 있었어?”
“할아버지가 젊었을 적엔 많았다고 하더라고? 지금은 다 정리하고 작은 거 하나뿐이지만. 그래도 관리는 계속해주고 있어서 깨끗해.”
그렇다면야, 뭐.
별장에서 쉬고 있는 순간에 갑자기 프리실라네 가족이 들이닥치는 게 아니라면 상관없겠네.
“그럼 나중에 같이 한번 가보자.”
“그래, 일단 비행기부터 타. 지금 출국 수속 밟고 있잖아. 이번 거 놓치면 다음 비행기까지 한참 기다려야 되는 거, 알지?”
“좆됐네. 비행기에서 연락할게. 다음에 봐!”
“잘…”
남들 눈에 띄지 않을 정도로 아주 가볍게 입을 맞춘 후 출국 게이트를 향해 뛰었다.
다행히도 프리실라의 표정은 밝았다.
* * *
“늦어.”
“최대한 빨리 온 거라고.”
“달렸어야지.”
“그래서 달려왔잖아.”
“경보는 달리기가 아니야. 전력 질주하라고.”
퉁명스럽게 대답했지만, 아이나의 표정은 솔직했다.
중간에 걸쳐있음에도 곧 솟아오를 것만 같이 샐룩거리는 입꼬리.
그 귀여운 모습에 장난기가 돋아 아이나의 볼을 잡고 살짝 들어 올렸다.
“므하는 그야.”
“웃고 싶으면 웃어야지. 안 그래?”
짓궂은 표정을 지어 보이자, 아이나는 못마땅한 눈초리로 날 흘기더니, 고개를 확 하고 젖혀 내 손을 물었다.
“아…!?”
당연히 깨무는 거라 생각하고 냅다 비명부터 지르려 했는데, 아니었다.
입에 문 손가락을 부드럽게 핥아 올리기만 할 뿐.
혹여 이빨이 닿을세라 세심하게 완급 조절을 하는 모습까지.
얘가 웬일로 나한테 이런 봉사를 다 해준담.
안 어울리게.
나야 너무 좋지만.
“…어땠어?”
숨을 고르며 천천히 손가락을 뱉어내는 아이나.
어땠냐고?
당연히 최고였지.
대답은 젖어있는 검지를 한 번 스윽 입 안에 집어넣었다 빼 보이는 것으로 대신했다.
“미친놈아, 좀!”
찰싹!
등짝에 불이 붙은 것만 같은 고통이 찾아왔다.
아니, 좋은 대답이었다고 생각하는데, 왜?
닦아 버리는 건 그것대로 예의가 아닌 것 같고, 말로만 좋았다고 대답하고 놔두는 건 또 성의가 없어 보이잖아.
“왜 때려?”
“행동하기 전에 이상하다고 생각해 본 적 없어?”
“행동하고 나서 생각하는 건 어때? 아, 생각하지 않았다는 말은 아니고. 심사숙고해서 내린 결정이니까.”
“그런데 그런 짓을 했어?”
“아깝잖아.”
“하아, 모르겠다. 너무 당돌하니 오히려 내가 이상해지는 기분이네.”
난 원래 상식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었다고.
예전부터 그랬는데, 새삼스럽게 호들갑 떨긴.
아이나도 비로소 그 점을 인지했다는 듯, 어느샌가 원래의 무표정하던 모습으로 돌아와 있었다.
전과 다른 점이 있다면, 내 옆에 찰싹 붙어있다는 거.
“오늘따라 묘하게 착해진 기분인데.”
“언제는 안 그랬다는 것처럼 말하네?”
“솔직히 맞잖아. 아니야?”
“당연히 아니…”
그래, 이건 선뜻 대답 못 하겠지.
네가 거짓말을 하는 성격은 아니니까.
“거봐, 맞네. 그래서, 오늘은 무슨 이유로 이렇게 잘해주는 건데?”
“아버지가 널 만나보고 싶어하셔.”
“뭐? 왜?”
산 넘어 산이라더니, 프리실라네 가족이랑 대면하는 것도 쫄려 죽는 줄 알았는데, 그 미츠루 가문의 현 당주를 만나야 한다고?
‘차라리 죽으라고 하지 그러냐.’
이건 프리실라네 가족을 만나는 것과는 완전히 다른 레벨의 문제였다.
칼라일 가문이 아무리 대단한 과거를 지녔던 가문이라곤 하나, 현재는 그냥 좀 잘사는 집안 정도 아닌가.
‘여자친구의 엄한 아버지’라는 점을 빼놓고 생각한다면 버트런드와 이야기를 나누는 건 내게 그리 힘든 일도 아니었다.
하나, 미츠루 가문은 나는 새조차 떨어뜨린다고 할 정도로 엄청난 권세를 아직도 유지하고 있는 가문 중 하나였다.
하다못해 평범한 귀족 가문이었다면 또 몰라, 사람 잡는 귀신으로 유명한 미츠루 가(家)의 대장과 얼굴을 맞대라니.
“첫 교제 상대라서 그런 것 같아.”
“별일 없겠지?”
“나야 모르지. 아버지는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기 어려운 사람이거든.”
“도망가는 건 어떻게 생각해?”
“그게 될 것 같니?”
역시 그렇겠지.
하긴, 아이나부터가 내 일거수일투족을 낱낱이 다 알고 있는 마당에, 그보다 높으신 분이라면 잘 알면 더 잘 알았지, 모를 리는 없을 테니까.
과연 아이나네 아버지는 뭐라고 이야기하시려나.
버트런드 때처럼 고운 말만 오가는 것까진 바라지도 않으니, 잘 해결되기라도 하면 좋겠다.
뭐라고 하실지 예상은 전혀 가지 않는다만, 우선 각오는 단단히 해둬야겠네.
“그래, 가자.”
“그 쪽은 우리 집에서 정 반대 방향인데?”
“그래도 뭔가 선물 같은 거라도 가져가는 게 맞지 않나 싶어서. 빈손으로 가긴 좀 그렇잖아.”
그나마 아이나네 아버지를 만나 뵈어야 한다는 걸 알게 된 게 낮 시간대라 다행이네.
선물 고를 여유 정돈 있을 테니.
당연히 프리실라네에 묵을 때도 선물을 챙겨드렸었다.
오밤중에 갑작스럽게 내려진 결정이라 첫날에 준비해 가지 못한 게 조금 아쉽긴 했지만, 뭐, 그래도 성의라도 보인 게 어디야.
“내 아버지가 뭘 좋아하시는지는 알고?”
“모르지. 그래서 너랑 같이 가는 거잖아.”
“참, 어떻게 그렇게까지 뻔뻔할 수 있는 건지.”
* * *
“다녀오셨습니까. 작은 주인님.”
“아버지는?”
“안채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준비해서 올라가겠다고 전해둬.”
“그리 전하겠습니다.”
으리으리하다.
정말로.
저번에 장원(??)이 어쩌고저쩌고하던데, 그냥 막 뱉는 말이 아니었구나.
‘이 정도 부지면 상가 단지가 들어서고도 남을 규모인데?’
아이나가 시종들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나는 집안 이곳저곳을 돌아보고 있었다.
물론 안내해주는 사람이 없으면 길을 잃을 것 같아 그리 멀리 까진 나가지 않았지만.
“그만 기웃거리고 마음의 준비나 해. 이제 만나러 갈 거니까.”
“푸우”
심호흡을 한번 하고 아이나의 뒤를 따랐다.
앞서 나가던 그녀의 발걸음이 멈춘 곳은 가장 높고 커다란 건물인, 본채의 앞이었다.
“안으로 드시지요. 아가씨도, 영식께서도.”
우리가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한, 공손한 자세로 서 있던 시종이 먼저 말했다.
와, 나보고 영식이라네.
살다보니 이런 낯 간지러운 호칭을 들어보는 일도 다 있구나.
그래도 기분은 좋군.
“그럼 저는 이만 가보도록 하겠습니다. 모쪼록 편안한 시간 되시길.”
커다란 미닫이문 앞에 선 시종이 꾸벅하고 고개를 숙였다.
나 또한 그에 응해 가볍게 묵례했고.
그러자, 시종은 뜻밖의 이야기를 꺼냈다.
“친절하시군요. 하지만 일일이 감사 인사 같은 건 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조만간 저희가 모시게 될 분인데, 이 정도 에스코트는 당연한 것이라 생각하고 편히 받아들이시길.”
알쏭달쏭한 말을 남긴 시종은 눈 깜짝할 새에 사라졌다.
모시게 될 분이라니?
무슨 뜬구름 잡는 소리인가 싶어 아이나에게 물어보려다 그만두었다.
벌겋게 상기된 그녀의 기색을 보아하니, 괜한 이야기라도 꺼냈다간 뼈도 못 추릴 것 같아서.
이렇게 된 아이나는 가만히 내버려 두는 게 상책이라는 걸 수많은 학습 경험을 통해 알고 있다.
그렇게 말없이 안마루까지 들어가니, 평범하디 평범한 인상을 한 사내 한 명이 조용히 분재를 가다듬고 있었다.
“어이구, 우리 예쁜 딸, 이제 왔니?”
“…?”
이 사람이 아이나네 아버지라고?
도무지 믿을 수가 없네.
그냥 어느 집에 가도 흔히 볼 수 있는 친구네 아빠 같은 인상인데.
하나, 내 감은 그 푸근한 인상을 보자마자 위험하다는 신호를 보내고 있었다.
차라리 아이나처럼 자신의 감정을 완전히 죽여 버리는 사람이라면 몰라.
일말의 위화감조차 들지 않을 정도로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행동하는 게, 자신의 속내는 철저히 감추고, 남의 속내를 알아차리는 건 매우 능통한 인간이라는 느낌이 들었으니까.
“자네는 분명 이름이 ‘성진’이라고 했었나? 어서 오게. 아주 귀한 손님이 왔는데, 접대가 소홀해서 미안하네. 내 얼른 자리를 마련해놓도록 하지.”
“아, 아닙니다. 귀한 손님이라뇨. 그렇게까지 띄워주지 않으셔도 됩니다. 미츠루 가문의 당주님을 뵐 기회를 얻은 것으로도 전 만족합니다.”
나는 미세하게 떨리는 손으로 미리 준비해둔 선물을 그에게 건넸다.
“아니, 뭘 이런 걸 다 준비했나. 하지만 기왕 주는 거니 거절하진 않겠네. 내 나중에 열어보도록 하지.”
“에이, 서운하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빈손으로 오는 건 그래도 예의가 아니죠.”
어떻게든 주눅든 기색을 보이지 않기 위해, 최대한 밝게 대답하려 애썼다.
하나, 그 각오는 다음 한 마디에 곧바로 무너졌다.
“그래도 백년손님만 한 선물은 없지 않겠나?”
사내는 빙긋 웃으며 아니, 웃음도, 아무것도 아닌 표정으로 대답했다.
그야, 초승달처럼 휜 눈꼬리엔 아무런 감정도 실려있지 않았으니까.
“한국에선 이렇게 부른다고 하던데, 맞는지 잘 모르겠군. 뭐, 아무래도 좋지 않나. 요즘 시대에 고작 100살밖에 못사는 인간이 몇이나 있다고. 기왕 이렇게 된 거, 자네는 천년손님인 걸로 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