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6화 〉 이런 건 여행이 아니야!(7)
* * *
현재, 나는 저녁 식사를 하기 위해 프리실라네 집으로 향하고 있다.
어쩌다 이렇게 된 거지.
난 그냥 몰래 잠입해서 잠만 자고 나오려고 했는데.
“그냥 따로 들어가면 안 돼? 눈치 보이는데.”
“아이, 참. 부모님께 미리 말까지 해뒀다니까? 괜찮을 거야.”
프리실라네 부모님을 뵙는 건 원래 예정에 없던 일이었다.
당연히 없었어야 할 일이고.
아무리 그래도 염치라는 게 있지.
무슨 낯짝으로 그분들을 뵙는단 말인가.
이 늦은 시간에 남자가 여자네 집에 가서 하룻밤 묵는다?
뻔하잖아.
뭘 의미하는지.
설령 내게 그럴 의도가 없었다 하더라도 다른 이들의 눈에는 분명 그렇게 해석되리라.
어떻게 당당하게 대문으로 들어가겠냐고.
“너희 부모님이 뭐라고 하지 않으셨어?”
“아니? 오히려 좋아하시던데.”
그런 의미로 좋아하시는 게 아닐 텐데.
조질 기회를 얻어서 잘됐다고 좋아하는 게 아닐까.
“그럼 무르기는 글렀단 이야기지?”
“쪼잔하게 굴지 말고 빨리 오기나 해. 뭐 때문에 걱정하는지는 알겠는데, 절대 그럴 일 없을 거라고 내가 보장할게. 애초에 만나 보고 싶다고 먼저 말한 쪽이 우리 부모님이셔. 레온 일 때문에라도 한 번은 보고 싶었대.”
아, 레온에 대한 이야기를 했구나.
그러면 안심이지.
아들 목숨을 살려준 은인한테까지 뭐라고 하진 않으시겠지.
마음을 편히 가지려던 순간.
“조금 엄하신 면이 있어서 네가 불편할 수도 있는데, 그건 네가 좀 참고.”
그 한 마디에 다시 긴장을 놓을 수 없게 됐다.
* * *
“네가 성진이구나. 어서 오렴.”
“늦은 시간에 죄송합니다.”
“아니야. 딸내미 남자친구가 온다길래 얼마나 기대하고 있었는데. 마침 식사 준비도 방금 끝났단다. 내 요리 솜씨가 그리 좋지는 않아서 네 입맛에 맞을지는 모르겠지만, 맛있게 먹어주면 고맙겠구나.”
“감사합니다.”
프리실라네는 대저택이라 불릴 수준까진 아니지만, 그래도 일반 가정집에 비하면 꽤 널찍했다.
가정부를 따로 두어야 할 정도의 규모였으니까.
그런데도 따로 프리실라네 어머니가 직접 식사를 차렸다는 걸 보면 어느 정도는 날 귀한 손님이라고 여기는 모양이었다.
“식당은 이쪽이야. 따라 와.”
프리실라를 따라 식당에 도착하니, 눈에 확 들어오는 게 하나 있었다.
근엄한 표정을 한 채 날 바라보고 있는 프리실라의 아버지 말이다.
그래도 죽일 것처럼 노려 보진 않아서 참 다행이란 생각이 들었다.
외모도 프리실라를 쏙 빼닮은 게 묘하게 친근감도 들었고.
아니, 이럴 때는 프리실라가 닮은 거라고 해야 하나?
아무튼, 프리실라의 가족에게서 친근감을 느낄 수 있었던 데엔 상당히 젊어 보이는 외관 또한 한몫했다.
나보다 열 살쯤 많은 세레나만 해도 두어 살 차이의 누나로 보이고, 불혹의 나이를 넘겼던 내 옛날 담당 교수 빈센트 또한 동네 형 정도로 느껴질 만큼 노화가 더딘 세계다 보니, 프리실라네 부모님도 외관상으론 애 딸린 아저씨, 아줌마라곤 믿을 수 없는 생김새였으니까.
“다녀왔어요. 아빠.”
“늦었구나.”
“애들이 좀 늦을 수도 있지. 너무 뭐라고 하지 마세요. 버트런드.”
“…그래. 앉아라.”
식사가 시작되었다.
밥 먹을 땐 개도 안 건드린다는 말은 물 건너에서도 유효했는지, 이 순간만큼은 버트런드도 날 빤히 쳐다보지 않았다.
덕분에 부담감 없이 저녁을 즐길 수 있었고.
우선 에피타이저로는 크림치즈 스프레드에 훈제 연어를 곁들인 카나페가 나왔는데, 가니쉬로 올라간 라즈베리 캐비어와 그린 올리브가 백미였다.
자칫하면 짜고 비릿해질 뻔한 훈제 연어와 크림치즈의 조합엔 새콤달콤한 라즈베리 캐비어와 톡 쏘는 그린 올리브의 허브 향이 적절히 어우러지니, 이보다 더 조화로울 수 없었다.
감칠맛이 사라지고 마지막에 남는 비릿함을 올리브와 라즈베리의 산뜻한 향과 맛이 잡아주었으니까.
“맛있네요. 제가 먹어본 요리 중에 제일 맛있어요. 진짜로.”
“빈말이라도 고맙구나. 하지만 아직 메인 디쉬를 먹어 보지 않았으니, 우선은 다 맛보고 천천히 평가해주렴.”
프리실라의 어머니는 내가 단순히 띄워주기 위해 이런 말을 했다고 생각한 모양인지, 거듭되는 칭찬에도 겸손한 대답만을 내놓았다.
아닌데, 진짜 맛있어서 그러는 건데.
최고급 호텔에서 나오는 일류 쉐프들의 멋들어진 요리들에 비하면 조금 아쉬운 감이 있긴 하지만, 그런 묘하게 아쉬운 감이 오히려 평범한 가정의 분위기를 느끼게 해줘서 더 좋았다.
이른바 손맛이라고 하는 그거.
“이것도 맛있는데요? 프리실라가 손재주가 되게 좋던데, 어머니를 닮아서 그런 거였네요.”
“후후, 이렇게 비행기 태워주는 것도 마냥 불편하지만은 않네. 고마워.”
“에이, 진짜라니까요.”
“그래? 하긴, 젊었을 때도 이런 방면에선 모자란단 이야기를 들어본 적 없었으니까. 모처럼 오랜만에 솜씨를 발휘해 봤는데, 효과가 있어서 다행이야.”
“…크흠.”
버트런드는 내심 불편하다는 듯이 내게 눈치를 줬다.
아니, 왜?
부족한 말주변이나마 최대한 화기애애한 분위기를 만들려고 얼마나 애썼는데.
이렇게 초를 쳐버리시네.
너무하구만.
그렇게 식사가 끝났음에도 다들 버트런드의 눈치만 계속 살피던 와중.
역시나 가장 먼저 말문을 땐 사람은 버트런드였다.
“박성진이라고 했나.”
“아, 네.”
“잠시 남아줄 수 있겠지?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어서 말이야.”
“나도”
“안돼. 이건 남자들 간의 대화다.”
버트런드는 프리실라의 개입을 원천 차단에 나섰다.
불안한데.
대체 무슨 이야기를 하려고 주변 사람을 죄다 물려버리는 거야?
“아빠! 유치하게 이러기야?”
“나가 있으라 했다. 기싸움이나 하려고 남으라 한 건 아니니까, 신경 쓰지 말고 네 방으로 돌아가 있어. 금방 돌려보낼 테니까.”
“네 아빠가 거짓말할 사람은 아니잖니. 남자는 남자끼리 통하는 게 있을 테니 따로 불렀겠지. 걱정되는 마음은 이해하지만, 일단은 두고 보자꾸나.”
화난 듯 보이는 프리실라는 대답조차 하지 않고 고개를 돌려 방에서 나가버렸다.
프리실라네 어머니는 은은한 미소를 지어 보이며 그 뒤를 따라 나갔고.
버트런드가 이야기를 시작한 건 그 둘의 발소리가 완전히 사라지고 나서였다.
“다른 딸 가진 아비가 했을 법한 사설(??) 따윈 하지 않겠네. 난 자네를 믿고 있으니까.”
“…예?”
뭐지.
이건 내가 예상했던 이야기가 아닌데.
다짜고짜 샷건 같은 걸 갈기진 않아서 참 다행이긴 하지만, 미친 새끼냐는 소리 정돈 감수하고 들을 생각이었다.
한데, 다짜고짜 나를 믿고 있다는 말부터 하니, 어안이 벙벙해졌다.
내가 뭘 했다고?
“레온에게서 이야기는 들었거든. 자신의 신변은 보장해주지 못하겠지만, 프리실라만큼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지켜내겠다고 그랬다지. 난 그 말을 믿고 있네. 자네는 딸 아이에게 단순한 교제 상대 그 이상의 존재니 말일세.”
“분명 그렇게 말하긴 했죠.”
“물론 말만 번지르르하게 하는 놈팽이 같은 자식이었다면 당연히 나도 믿지 않았겠지. 하지만 딸아이의 이야기를 들었을 때 그런 놈은 아니라고 확신했네. 그 누구보다도 내 딸아이를 진솔하게 대해주고 있다는 게 느껴졌으니. 다만 교제 상대로선 조금 불만족스러운 면이 있는 것 같았지만.”
찔리는 구석이 있었다.
아이나와 비교하면 프리실라는 홀대에 가까운 대접을 받고 있었으니까.
그나마 프리실라가 날 좋게 이야기해 줘서 이 정도로 넘어간 거지.
만일 버트런드의 성미가 조금만 더 급했거나, 프리실라가 서운함이라도 느꼈다는 투로 이야기라도 했다면 난 진짜 샷건을 맞았을 수도 있었으리라.
“더 노력해보겠습니다.”
“됐네. 그런 식상한 답변이나 듣자고 부른 것도 아니거니와, 나 또한 이런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하자고 부른 건 아니니.”
“그럼 어쩐 일로…?”
“은인에겐 직접 감사함을 표해야 하는 법 아니겠나.”
그는 검의 형상을 하고 있는 작은 뱃지 하나를 꺼내보였다.
“이게 뭡니까?”
“칼라일 가문을 상징하는 문장이자, 열쇠일세. 검의 크로스가드를 장식하고 있는 보석을 누르면 열쇠로 변하지.”
“그럼”
“칼라일은 더 이상 귀족도, 뭣도 아닌 그럭저럭 조금 잘사는 집안에 불과하니, 허례허식일 뿐이지만, 이것보다 내 의지를 잘 표현할 방법은 없는 것 같아서 말이지. 자네는 스스로를 칼라일이라고 생각해도 좋네. 아니, 그건 조금 오만하게 들렸을지도 모르겠군. 다시 말하지. 우리 칼라일은, 자네를 가족으로 생각할 걸세. 설령 자네가 프리실라와 멀어진다 하더라도.”
뭐가 뭔지 하나도 모르겠다.
그냥 날 사위로서 인정했다고 생각하면 되는 건가?
자기 집 여벌 열쇠까지 따로 내어줬으면, 그런 의미로 받아들여도 되는 거겠지?
마음속으로 기뻐하며 그가 내민 뱃지를 받아 가려던 중, 버트런드는 가만히 있으라는 듯 손수 뱃지를 내 가슴팍에 달아주었다.
여태까지의 태도와는 눈에 띄게 다른 행보였다.
그도 그럴 것이, 그는 감사함을 표하는 입장치곤 줄곧 거만한 자세로 날 대하고 있었으니까.
“그리고… 고맙네. 내 아들을 구해줘서. 딸에게 가르침을 주어서.”
웅혼하고 담대한 울림이었다.
여전히 그는 나에게 고개 숙이고 있지 않았으나, 그 말에 실린 무게는 가볍게 숙이는 고개 따위보단 훨씬 무겁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에, 쉬이 무어라 대답할 수 없었다.
“제일 중요한 걸 이루지 못했습니다. 끝까지 프리실라를 지켜내는 것. 하지만, 반드시 그렇게 만들겠습니다.”
무심결에 내뱉은 대답이었다.
내 머릿속은 백지처럼 새하얀 상태였으니까.
하지만, 되지도 않는 머리를 쥐어 짜내서 내놓는 어쭙잖은 말 따위보단 훨씬 나을 거라 장담할 수 있는 답변이었다.
“참으로 마음에 드는 대답이었지만, 한 가지 충고는 해두어야겠군. 어려운 맹세는 함부로 하지 말게. 어린 시절에 내뱉은 말은 아무도 기억하지도, 책임지지도 않는다지만, 자네 나이에 내뱉은 말은 다시 주워 담을 수도 없는 주제, 책임은 져야 한다네. 늙어서 하는 소리야 책임질 기간이 짧으니 아무것도 아니라지만, 젊은 나이에 쓸데없는 소리를 했다간 남은 평생을 저당 잡힐 테니.”
나는 빙긋 웃으며 대답했다.
“그거야 이미 잡힌 지 오래라 괜찮습니다.”
비루한 목숨 따위, 내 모든 것이 저당으로 잡고 있다.
이 세계 속으로 날 떨어트린 책이.
모든 가르침을 하사하고 사라질 스승이.
마지막으로, 사라지지 말았으면 하는 이들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