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3화 〉 소개 좀 시켜줘라.
* * *
“아가씨, 어르신께서 부르십니다.”
“곧 가겠다고 했잖아.”
“벌써 두 번째입니다. 지금 당장 오지 않으면 경을 치시겠다고 명하셨으니, 조속히 안채로 와주시길.”
말은 단호하게 전한 시종이었으나, 행동거지는 단호하지 못했다.
안절부절못하며 방문 앞만 서성거리고 있었으니.
아이나라고 바로 앞에서 시종이 불안에 떠는 걸 눈치채지 못한 것은 아니었다.
그런데도 그녀가 밖으로 나서지 않는 이유는 고작 그런 사소한 일 따위보다 더 신경 쓰이는 일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보고 싶다고, 만나고 싶다고 해놓고선! 나흘째 연락이 없는 이유는 뭔데?’
박성진은 학기 중보다 방학 때 더 바쁜 인간이라는 것쯤이야 아이나도 알고 있었다.
무슨 헛짓거리를 하고 다니는지 알려주지도 않는 주제, 매번 그렇게 일정이 꽉꽉 차 있다는 건 좀처럼 믿기 어려운 이야기였지만, 아이나는 그래도 이해할 수 있었다.
그건 자신도 마찬가지였으니까.
게다가 바쁜 와중에도 안부는 매번 꼭 물어왔으며, 일단 일이 해결되고 나면 무슨 일을 하며 지냈는지 알려주긴 하였기에 이렇다 할 큰 불만을 가져본 적은 없었다.
하나, 지금은 달랐다.
자신은 어떻게든 빨리 시간을 내기 위해 노력하고 있는데, 박성진은 연락조차 하지 않고 있었으니까.
하루는 초조한 마음에 자신이 먼저 전화를 걸어 보기도 했지만, 돌아오는 건 상대방이 전화를 받을 수 없는 상태라는 음성 메시지였다.
혹여 무언가 잘못된 것일까 싶어, 몰래 심어두었던 반지 속의 그림자 조각까지 활성화해 봤지만, 조각이 전해준 소식은 ‘그는 멀쩡하다’라는 기쁘면서도 답답한 소식뿐이었다.
이렇다 보니, 아이나는 그에게 처음으로 서운함을 분노를 동시에 느끼고 있었다.
때때로 연락이 끊겨서 서운함을 느꼈던 일이야 종종 있었지만, 자신의 연락을 의도적으로 피한 적은 한 번도 없었으니 말이다.
“아가씨.”
“알겠어. 지금 나갈게.”
아이나는 마음을 가라앉히고 옷매무새를 가다듬은 뒤 시종을 따라나섰다.
이 자리에 있지도 않은 박성진에게 시위해봤자 피해가 보는 쪽은 자신의 식솔들이니까.
한데, 시종은 조마조마해 하던 아까와는 다르게 어째 밝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갑자기 무슨 좋은 일이라도 생겼어? 아깐 당주님 눈치 보느라 바쁘신 것 같던데.”
“늘 무표정하게 하명만 하던 아가씨께서 처음으로 화를 내고 계시니, 기쁠 수밖에요. 다른 어르신들은 어떻게 생각하실지 모르겠지만, 저는 아가씨께서 성장하신 것 같아 기쁘답니다.”
“…그래 보여?”
“그렇고 말고요. 물론 다른 사람들은 눈치채지 못하겠지만, 저는 미츠루 가의 일원으로서 아가씨를 보필해온 세월이 있지 않습니까. 제겐 보일 수밖에요. 혹시… 종자 주제 너무 건방진 일이었습니까? 그럼 사죄드리겠습니다.”
“아니야, 됐어.”
시종은 뭐가 그리 기쁜지 안채에 도착하는 순간까지도 싱글벙글 웃고 있었다.
심지어 평범한 느낌의 웃음도 아니고, 자식이나 아끼는 친인척의 성장을 보고 흐뭇해 하는 듯한 웃음이라, 아이나는 기분이 묘했다.
* * *
“당주님, 아가씨를 모시고 왔습니다.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그리하거라.”
“예. 그럼 저희는 이만 물러가도록 하겠습니다.”
시종들이 모두 자리를 비우고 나서야 아이나는 자리에 앉았다.
건너편에선 자신의 현 미츠루 가문의 당주이자, 아이나의 아버지 되는 자인 미츠루 카즈나리가 아이나와 눈을 맞대고 있었다.
“늦었구나.”
“예.”
“이유를 물어도 괜찮겠느냐. 당주로서 질문이다. 면목 없다, 죄송하다는 식의 지루한 사죄는 듣지 않도록 하마.”
“당주 승계가 확정된 자는 현 당주의 말을 거부할 권리가 있지 않습니까. 제 권리를 행사했을 뿐입니다.”
카즈나리는 흥미롭다는 듯이 한쪽 눈썹을 조금 들어 올렸다.
아이나는 미츠루 가의 일원으로서든, 자신의 딸로서든, 한 번도 자신의 말을 거역했던 적이 없었으니까.
갑자기 무슨 바람이 들어 저런 건방진 소리도 내게 될 줄 알았는가, 궁금해질 수밖에 없었다.
이미 어느 정도는 알고 있는 부분이었지만.
“그럼 아비로서 물으마. 아이나, 1년이면 자리에서 물러나 얼굴도 보기 힘들어질 이 아빠한테 문안 인사 좀 올리는 게 그렇게 힘든 일이니?”
카즈나리가 서글픈 미소를 지으며 아이나를 바라보았다.
겉으로 보기엔 서운했던 점에 대해 토로하는 평범한 부녀 사이 같겠지만, 아이나는 아버지가 자신을 내심 떠보기 위해 저런 말을 하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기에, 별로 주눅 들지 않고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해 나갔다.
“중요한 고민거리가 있었습니다.”
“그렇다니 책망하진 않으마. 사랑싸움 때문에 토라져서 아비한테 인사조차 올리지 않으려 하는 딸의 모습을 보는 게 영 시원찮기는 하지만, 네 나이엔 그런 걸 경험해 보는 것도 자식 된 도리를 다하는 것 못지않게 중요하긴 하니 말이다.”
“그럴 리가 없지 않습니…!”
오늘만큼은 저 미소가 싫다.
옛날엔 아버지의 저 미소 한 번을 보기 위해 갖은 애를 다 써왔는데, 오늘은 정반대로 무슨 수를 써서라도 저 표정을 짓지 못하게 만들고 싶었다.
“부끄럽지?”
“아닙니다.”
“너무 숨기려 드는 것도 좋지 않다. 넌 옛날부터 나를 아버지보단 당주라는 직책으로 대하려는 경향이 강했었어. 알고 있겠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내 실수였지만, 난 네 그런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서 너를 평범한 딸이 아닌 ‘후계자’로서만 대해 왔었지. 그러다 이런 순수한 딸의 모습을 보니 반갑기도 하고, 성장한 것 같기도 해서 기쁘구나. 네 연인에게 감사의 말이라도 전해야겠는걸.”
“아버지!”
결국 참다 못한 아이나는 빼액하고 소리를 질러버렸다.
참으로 아이나답지 않은 모습이었으나, 그마저도 카즈나리에겐 반가운 모습이 아닐 수 없었다.
“그래도 어디서 굴러먹다 온 놈인지 알아볼 필요는 있으니, 다음엔 꼭 이 아비 앞에 데려와 보거라. 딸의 첫사랑을 망칠 수는 없으니까.”
“…더 하실 말씀이 없으시면 이만 가보겠습니다.”
“그래, 편히 쉬도록. 너무 마음앓이는 하지 말고.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그 아이에게 직접 전하거나, 못하겠다면 아비에게라도 말해주거라. 힘들 적에도 군소리 한번 하지 않던 네 화내는 모습이 이리도 훤히 보일 지경이라니, 아비 마음이 다 아프구나.”
아이나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안채를 벗어났다.
그녀가 자신의 방으로 들어갔다는 소식이 카즈나리의 귀에 들려오자, 안채 뒤편의 작은 공간에서 다른 한 명이 모습을 드러냈다.
“어때 보이나.”
“한창 예민할 시기에 그렇게 오래 참고 지냈으니, 그에 대한 반발이 지금 표출되는 것이겠죠. 너무 신경 쓰진 않으셔도 될 것 같습니다.”
“그래서, 왜 화가 났는지는 알고 있나?”
“전자 기기랑은 담을 쌓고 지내던 아가씨가 하루가 멀다 하고 핸드폰만 들여다보고 계신 걸 보면, 연락을 기다리는 게 아닐까 합니다. 어지간해선 매일 같이 연락을 주고받던데, 갑자기 소식이 없으니 초조한 것이겠죠.”
“내 딸이지만 믿을 수 없는 이야기군. 저럴 거라곤 상상도 못 했는데 말이야.”
“당주님 젊었을 때랑 판박이군요. 결혼하기 전부터 안주인님께서 하루라도 연락을 거르면 불안해하시지 않으셨습니까. 친자 확인은 필요조차 없겠군요. 보통 세간에서 딸은 아버지를 닮는다고 하니까요.”
카즈나리는 그 사실이 영 불편했던 모양인지, 조용히 나가라는 신호를 보냈다.
연로한 시종장은 알겠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곤, 곧바로 기척을 지웠다.
다만 숙인 고개 아래의 올라간 입꼬리는 숨길 수 없었다.
* * *
‘너무 많이 변하긴 했어.’
숨기려 한다고 해봤자, 이미 소용없는 짓이라는 건 아이나 또한 알고 있었다.
이미 장원 내부의 시종들 사이에서 소문이 돌고 있었으니까.
‘아가씨께서 많이 밝아지셨다’라고.
그래도 거기까진 괜찮았다.
자신을 어렵게 대하던 시종들의 분위기가 많이 풀어진 것도 좋아진 점이라면 좋아진 점 중 하나였고, 가문의 원로들을 비롯한 친척들과의 관계도 많이 개선됐으니까.
다만 지금 이 상황만은 아이나에게 그리 달갑지 않았다.
자신이 한심한 놈 취급했었던 놈들과 다를 바 없지 않은가.
방탕한 짓만 하지 않을 뿐, 색에 빠져 제대로 된 사리 분별을 하지 못한다는 건 똑같았다.
특히나 이런 종류의 감정은 아이나에게도 처음이었기에, 더더욱 티가 많이 날 수밖에 없었다.
‘안 되겠어. 얼른 이 답답함을 해결하지 않으면 가까운 식솔과 친인척들이 아닌 다른 사람에게조차 티가 나고 말 거야.’
결국, 아이나는 한 번 더 자존심을 굽히기로 마음먹었다.
지금 전화를 받기만 한다면 지금까지 지은 죄는 모두 용서해줄 의향도 있었다.
다만, 이번에도 자신을 무시한다면 무슨 일을 벌이게 될지 아이나 본인조차 가늠할 수 없었다.
그렇게, 통화 연결음이 울린 지 고작 수 초 만에 기다리던 사람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이나?”
“너, 지금까지 뭐 한다고 내 전화도 무시한 거야…!”
“네가 전화를 했었다고?”
“그래!”
서러움과 진노가 뚝뚝 묻어나는 아이나의 목소리에, 박성진은 당황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그야, 그간 자신에게 연락했던 사람은 아무도 없었으니까.
그리고, 그가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린 결과, 나온 답은 하나였다.
세레나의 고유 이공간, 보물전 속에 들어갔을 때 연락한 것이었다고.
시간과 공간의 영향을 받지 않는 그곳 때문이었다고.
“미안, 미안해. 내가 전파가 안 잡히는 곳에 있었거든.”
“요즘 시대에 전파가 안 잡히는 곳이 어딨는데? 남극, 북극, 아니, 달에서도 통신은 가능하잖아!”
“그, 사상력으로 만들어낸 이공간 속이었어. 진짜야.”
박성진은 정말로 고의가 아니었다는 듯, 지금까지 있었던 일과 일정에 대해 줄줄 읊어놓기 시작했다.
횡설수설하면서도 미안하다는 이야기는 꼬박꼬박하는 게, 이전의 박성진과 전혀 다를 게 없었다.
그 익숙한 말투와 모습에, 아이나는 어느샌가 마음의 평정을 되찾아가고 있었다.
아니, 사실은 이야기가 다 끝나기도 전에 아이나는 이전과 다를 바 없는 상태로 돌아가 있었다.
단지 이야기가 끝난 순간엔 미소까지 되찾았을 뿐.
워낙 횡설수설해댄 탓에 그가 뭐라고 했는지 기억에 남는 것은 없었지만, 그런 것이야 아무래도 좋았다.
필요한 건 모두 다시 돌아왔으니까.
“…그렇게 된 거야.”
“성진아.”
“응?”
“지금 당장 보고 싶어. 많이.”
“나는 늘 그래.”
격앙되고 고조된 목소리는 더 이상 방안에서 들려오지 않았다.
고즈넉하게 가라앉아 있지만, 기쁨만큼은 숨길 수 없는 목소리만이 들려왔다.
표정 또한 마찬가지였다.
남이 보이면 실없어 보일 정도로 밝은 미소를 짓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굳이 그 미소를 고치려 들진 않았다.
적어도 지금은 활짝 핀 그 웃음을 유지하고 싶었다.
‘빨리 와줘.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