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2화 〉 이런 건 여행이 아니야!(4)
* * *
“누나, 저 몸이 이상해요…”
“뭐?”
세레나가 쓰러지는 내 몸을 붙잡았다.
그리고 걱정어린 눈으로 날 쳐다보기 시작했다.
이따금 진지한 눈이 되던 모습이야 몇 번 보긴 했다만, 항상 히죽거리는 얼굴로 능청맞게 상황을 모면하던 세레나의 표정이라곤 믿을 수 없는 눈이었다.
이렇게까지 민감한 반응을 보일 줄은 몰랐는걸.
처음엔 ‘장난이 조금 지나쳤나?’라는 생각도 들었지만, 정체조차 알 수 없는 이상한 약을 강제로 먹인 걸 생각하면 경각심을 심어주기 위해서라도 한 번쯤은 이런 행동이 필요하다고 판단됐다.
그래도 후환이 두려운 나머지 2절까지 할 생각은 차마 못 했다.
“구라에요.”
“감히 나한테 이런 장난을 쳐?”
세레나의 표정이 순식간에 뒤바뀌기 시작했다.
얼굴에 가득했던 미안함과 당혹감은 곧바로 모두 분노로 대체되었고, 굳게 쥔 주먹은 점점 위로 올라오는 중이었다.
난 그 모든 과정을 불과 한 뼘 정도 거리에서 지켜보고 있었기에, 앞으로 어떤 일이 일어날지도 대충은 짐작하고 있었다.
예상했던 대로, 머리 위에서 수박 깨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한국에는 ‘사랑의 매’라는 말이 있다지? 아주 마음에 드는 말이야.”
다만 예상치 못한 부분이 하나 있었는데, 그건 바로 꿀밤 세례가 한 번으로 끝이 아니었다는 거다.
작은 장난의 대가라 치부하기엔 너무나 혹독한 보복이었다.
* * *
결국 나는 ‘사랑합니다. 교수님.’이라는 말을 하고 나서야 그 고문실에서 풀려나 글렌류나크로 도망칠 수 있었다.
게다가 체감상으론 한나절 이상 시달렸던 것 같은데, 바깥 시간 기준으론 고작 1분도 채 흐르지 않았다는 사실이 날 더 슬프게 만들었다.
다음에 또 거기에 갇히게 되면 어떤 고문에 시달리게 될지 몰라서.
심지어 외부와 시차 때문에 바쁘다는 핑계조차 써먹을 수 없었다.
어째 여긴 둘이서만 쓰자고 할 때 표정이 지나치게 밝아지더라니.
저런 이유 때문이었나.
“생각보다 훨씬 일찍 돌아왔군. 말했던 사람이 약을 내어주지 않은 모양이지?”
니힐리스가 이렇게 반갑게 느껴지는 날도 다 오는구나.
스승이랍시고 있는 사람 셋 중 하나가 납치·감금범, 하나는 생체 실험을 일삼는 미치광이다 보니, 살해 협박범 정도야 선녀처럼 느껴졌다.
게다가 도무지 종잡을 수 없는 말과 행동만 일삼는 둘에 비하면 니힐리스는 비교적 온건하고 직관적인 성품을 가진 사람이기도 했고.
“이 불초 제자가 스승님을 뵙습니다.”
“어울리지 않는 소리를 하는군. 그래도 약을 받긴 한 모양이지? 약의 부작용으로 맛이 가버린 걸 보니 말이다.”
“섭섭하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이 제자가 드디어 부덕함을 깨우치고 성심성의껏 스승님을 모시려 하는 것뿐인데.”
“못 봐줄 것 같으니 거기까지 하도…”
니힐리스는 불현듯 말을 멈추고는 천천히 날 바라보기 시작했다.
가면 아래의 불그스름한 눈동자 또한 평소와는 다르게 강렬하게 타오르고 있었다.
“그 영약인지 뭔지 하는 물건이 실제로 효과는 있었던 모양이구나.”
“네?”
“보인다. 조금씩이나마 마나가 흐르기 시작하는 게.”
“저는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는데요.”
“시간이 지나면 천천히 느껴지기 시작할 거다. 지금 당장은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는 게 당연하고. 내 눈에도 극도로 미세하게나마 보일 정도니까.”
그 소화제란 물건이 실제로 효과가 있었다고?
반신반의조차 하지 않고 있었는데.
나중에 세레나에겐 감사 인사라도 전해야겠네.
“그럼, 이제 다시 성장할 수 있다는 소리인 거죠?”
“그렇지. 다만 수련은 꾸준히 해야 할 거다. 수련을 그만두는 순간 마나의 순환도 멎어들 테니.”
“그거야 어렵지 않죠. 늘 열심히 하고 있는걸요.”
“매번 놀고먹을 생각밖에 하지 않는 네놈이 그렇게 말하니 신뢰가 없군.”
이건 진짜 억울하네.
놀고먹을 생각으로 가득한 건 분명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진짜 놀고먹은 적은 거의 없다.
여태까지 내가 얼마나 바쁘게 살아왔는데.
“아니, 정말로 제가 놀고먹기만 했으면 이렇게 강해질 수 없지 않았겠습니까. 지금까지 낸 성과도 많잖아요.”
“그건 다 네 인복 덕 아니더냐.”
실제로 내가 이룩해낸 것들은 숟가락 얹기가 대부분이긴 했다.
좋은 사람을 곁에 많이 두는 것도 능력이라면 능력이고, 그 많은 사람을 이끌고 통솔하는 것 또한 대단한 능력임은 틀림없지만, 이 세상은 그것만으로 살아가기 힘든 세상 아니던가.
블레이크처럼 물 밑에서 조용히 노는 인간이라면 또 몰라, 난 최전선에서 몸을 맞대고 싸우는 놈인 만큼, 자기 한 몸 정도 지킬 능력은 그래도 있어야 했다.
그렇다고 그 말에 순순히 수긍할 나는 아니었다.
가라앉아도 입 하나만큼은 둥둥 뜰 놈이 나인지라, 여느 때와 다를 바 없이 능청맞게 너스레를 떨어 재낄 준비는 얼마든지 되어 있었으니까.
“그걸 아니까 제가 이렇게 좋은 스승님을 모시기로 한 것 아니겠습니까.”
“…됐다. 검이나 들어보거라.”
가면 너머까지 들려오는 한숨 소리는 뒤로 하고, 우선 마나글레이브부터 꺼내 들었다.
“여기요.”
“전에 비하면 검신도 제법 많이 안정된 상태로군. 이 정도면 시도해볼 법하다.”
“뭘 말입니까?”
“너에게 알려줄 새로운 기술.”
새로운 기술!
이미 니힐리스로부터 많은 기술을 전수받긴 했다만, 솔직히 말해서 그것만 가지곤 부족한 느낌이 들었던 건 사실이다.
내가 배웠던 기술들은 대부분이 매체에서 흔히 묘사하는 ‘궁극의 오의!’라기엔 어딘가 하자가 조금씩 있는 기술이었으니까.
물론 영식 자체가 애당초 미완성인 기술인만큼 어쩔 수 없는 거긴 하다만, 그래도 기술의 폭이 늘어난다는 건 내게 상당히 좋은 일이었다.
“오, 어쩐 일이십니까? 평소에 다른 기술을 알려 달라고 했을 땐 ‘이 이상은 너 같은 애송이가 다룰 수 있는 영역이 아니다’라며 매번 거절하셔놓고.”
“스스로 인지하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네가 손댔던 일과 앞으로 손대려고 하는 일은 하나 같이 보통 일이 아니다. 머지않아 그 사건들은 너를 주축으로 모이고 모여,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거대한 소용돌이를 만들어낼 테지. 과연 네가 그 중심에서 버틸 수 있겠느냐.”
말로만 들으면 무슨 대단한 연대기나 영웅담의 도입부처럼 들리겠지만, 내겐 별다른 감흥이 없는 이야기였다.
지금까지 해왔던 모든 일들.
다 그걸 위해 준비해온 것 아니던가.
각오야 이미 끝마친 지 오래였다.
“물론입니다.”
“늘 둘러댈 변명이나 생각하기 바쁘던 녀석이 어쩐 일로 그렇게 당돌하게 대답할 수 있는지 궁금하구나. 방금 그 질문은 다른 사람이었다면 그리 쉬이 대답할 수 있는 질문이 아니었다. 오히려 한참을 고민했겠지.”
“이 제자가 무례를 무릅쓰고 한 번만 스승님께 반문하겠습니다. 스승님은 패배할 걸 알면서도 물러서지 말아야 할 때가 어느 순간이라고 생각하십니까?”
“패배할 걸 알면서도 물러서지 말아야 할 때라.”
아마 사람들은 명예와 긍지가 걸려있을 때 그럴 거라고 답하겠지.
둘 다 나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단어지만.
그런데도 굳이 저걸 언급한 이유는 니힐리스가 명예와 긍지 없이는 곧 죽어도 못 사는 인간이라 넌지시 떠본 것뿐이다.
난 그깟 명예와 긍지 따위 없어도 아무런 상관도 없는 사람이고.
맞서 싸우는 이유?
그냥 물러설 곳이 없으니까 객기라도 부려보는 셈 치는 거지.
명예든 긍지든 그냥 내 행동을 그럴싸하게 포장하기 위한 명분에 불과하다.
“마음을 내려놓아야 하는 순간. 그게 패배할 걸 알면서도 물러서지 말아야 할 때다. 몸은 굴복하더라도, 마음만은 자신의 것이어야 비로소 살아있는 자다. 마음도, 몸도 온전히 자신의 것이 아니라면 죽은 자와 다를 바 있겠느냐.”
“그렇다면 다시 한번 묻겠습니다. 그 누구도 막을 수도 없으며, 돌이킬 수도 없는 일이 벌어진다고 할 때, 산 자로 죽기를 택하시겠습니까. 죽은 자로 살기를 택하시겠습니까.”
줄곧 나를 응시하고 있던 가면 아래의 적안이 느리게 감긴다.
그와 동시에, 항상 니힐리스에게서 느껴지던 중압감과 서슬 퍼런 살기 또한 자취를 감췄다.
사라진 것은 그뿐만이 아니었다.
늘 이 협곡 사이로 굽이치던 바람도, 이따금 내리던 안개비도, 이맘때면 진작 떠올랐어야 할 달과 별도 모두 숨어 버린 채였으니까.
그렇게, 모든 것이 멈춘 세계 속에서 마침내 움직이기 시작한 것은 검은 구멍 사이를 밝히기 시작한 붉은 반월이었다.
“나라면, 산 자로 죽기를 택하겠다. 이미 죽은 자로 살기를 택한 몸, 다시 선택할 수만 있다면 말이다.”
“…그렇습니까. 저는”
“대답하지 않아도 좋다. 네가 어떤 뜻으로 그런 말을 했는지도 이해했다. 아니, 설령 이해하지 못했더라도 좋다. 나는 네가 어떠한 선택을 하더라도 존중할 것이다.”
“감사합니다.”
“원래 가르쳐주려 했던 기술이 아닌, 다른 기술을 가르쳐 주도록 하지. 이제부터 넌 일인을 상대하는 검이 아닌, 만인을 상대하는 검을 익히게 될 것이다.”
“갑자기요?”
“막을 수도, 돌이킬 수도 없는 태풍의 한복판에 서 있다면, 견뎌내는 건 처음부터 불가능하다. 그렇다면, 바람을 떨쳐내는 법을 익혀야 하지 않겠느냐.”
그가 검을 휘둘렀다.
그러자, 멈춰있던 세상이 다시금 요동치기 시작했다.
“이제부터 네가 가야할 길은 살아남기 위한 검이 아니라, 살아서 이겨내는 검이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