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1화 〉 이런 건 여행이 아니야!(3)
* * *
뜨겁다.
세레나의 후끈한 열기가 피부로도 느껴질 정도였다.
심지어 나와 그녀 사이엔 거리도 제법 있었는데 말이다.
‘그래, 어차피 이렇게 될 것 같았던 거. 그냥 빨리 끝내자. 막상 내가 역으로 강하게 나서니까 부끄럼을 타던 게 세레나니까, 오히려 이게 더 잘 통할 수도 있어.’
다가오는 세레나를 마주하고 서서히 앞으로 나아간다.
그러자, 그녀의 눈에 생기가 다시 돌아오기 시작했다.
역시나 내 생각이 맞았던 모양 이라는 생각이 들기가 무섭게, 뛰어오른 세레나가 날 덮쳤다.
“드디어 우리 성진이가 제자 된 도리가 뭔지 깨달은 모양이구나. 그럼 고맙게 받아들여야…”
“잠, 잠시만요!”
올라탄 세레나는 내가 허락만 내린다면 일말의 망설임조차 없이 블라우스를 벗어던질 기세였다.
그마저도 간신히 멈춰 세운 거지, 아마 조금이라도 늦었다면 위험했으리라.
‘아직은 안 돼. 나중이라면 몰라도.’
“왜? 뭔데? 빨리 말해. 나 참기 힘들어.”
“지켜야 할 상도덕이 있잖아요.”
“나, 빌런이었잖아? 그런 걸 신경 쓰겠어?”
“순서란 게 있잖아요. 다른 거라면 뭐든 괜찮은데, 이건.”
평소라면 세로로 찢어진 예리한 동공이 좁은 틈새 너머로 모든 걸 지켜보고 있다는 눈초리로 날 주시했을 터.
하지만 이번엔 달랐다.
세레나는 내가 한 말을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는 듯이 눈만 꿈뻑거리고 있었으니까.
그녀가 얼마나 당황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었다.
“뭐야, 너네, 설마 아직도?”
나는 말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그 ‘순서’와 ‘아직’은 서로가 뭔지 묻지 않아도 알았다.
“하, 원래 성질머리 같았으면 상도(??) 따위 알 바 아니고 그냥 후딱 해치웠겠지만… 이런 경우라면 이야기가 다르긴 하네. 참, 사랑받고 있어서 부러워.”
세레나는 아쉽다는 듯이 입맛만 다시더니 풀어 헤쳐진 옷섶을 주섬주섬 가다듬었다.
그러다가, 못내 다시 아쉽다는 듯이 나를 한 번 바라보았다.
“여기까진 괜찮겠지.”
입술이 포개졌다.
항상 저돌적인 모습만 보여주던 세레나라곤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부드럽고 가벼운 접촉이었다.
* * *
‘둘 다 얌전한 고양이라 먼저 부뚜막에 올라가 있을 줄 알았더니만, 아니었잖아.’
어처구니가 없었다.
죽고 못 사는 커플들처럼 티를 내지는 않더라도, 세레나는 특유의 기감으로 셋의 관계가 얼마나 깊은 가에 대해서야 잘 알고 있었으니까.
이따금 풋풋한 십대의 모습도 보였지만, 때때론 서로 볼 장 다 본 황혼기의 동반자 같은 인상을 줄 정도로 밀접한 사이였다.
그런데 아직도라니?
뭐가 문제였는지는 몰라도, 참으로 갑갑하다고밖에 생각할 수밖에 없는 노릇이었다.
하나, 세레나 또한 셋을 비웃거나 귀엽게 여길 자격은 없었다.
그녀 또한 ‘아직’이었으니까.
‘양쪽일 모두일 가능성이 크겠지만, 어느 한쪽뿐이라도 부럽구만. 사랑받고 있어서. 아니, 그냥 단순히 셋 다 병신인 걸지도.’
본인 또한 그 병신에 해당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에, 세레나는 피식하고 웃음을 지었다.
물론 그렇다고 자신이 평생 병신으로 있을 거란 이야기는 아니었다.
1년 반.
제자들에겐 딱 그 정도의 유예 시간만 줄 셈이었다.
만약 그때까지도 진전이 없다면, 자신이 첫 번째로 치고 나서도 전혀 이상할 게 없었으니까.
차려진 밥상을 계속 마다하고 있으면, 가로채는 사람이 나타나는 것도 당연한 이치 아니던가.
* * *
“그래서, 이제 어떻게 하죠?”
“몰라. 나도.”
“데려온 게 누나잖아요. 누나가 책임지셔야죠.”
“‘아직’은 책임질 일 같은 거 안 했거든?”
억울함과 분노가 뒤섞인 세레나의 대답에 분위기는 순식간에 어색하게 변했다.
물론, 이건 내가 말실수를 한 탓에 그런 거지만.
“저, 그럼 보물전에 대한 이야기라도 해주시는 건.”
“그래, 아무것도 하지 않는 거보다야 낫겠네.”
세레나는 보물산 꼭대기 위에 꽂혀있던 검을 뽑아내어, 평소에 항상 차고 다니던 권갑(??)과 함께 내 앞에 가져다 놓았다.
“누나가 아끼는 아티팩트들이네요.”
“그래, 내가 모은 것 중에서도 최고의 아티팩트라 불려도 손색없는 것들이지.”
내 심안이 그리 대단하진 않지만, 척 보기에도 엄청난 물건임은 확실했다.
이 많은 아티팩트 중에서도 단언컨대 가장 강력한 기운을 내뿜고 있었던 게 저 둘이니까.
무엇보다도 사용자인 세레나 본인이 최고라고 강조했으니 틀림없었다.
“저도 한 번 써봐도 될까요?”
“검은 저주가 걸려있어서 안 돼. 권갑은 괜찮아.”
아쉽군.
남자라면 누구나 한 번쯤은 마검을 잡아보고 싶은 로망이 있지 않은가.
요사스러운 기운이 너울거리는 게 보통 마검이 아니라고 알려주고 있었으나, 그럴수록 더더욱 만져보고 싶은 게 사람 심리였다.
하지만 바로 그 옆의 권갑 또한 그에 못지않을 정도로 강력한 물건임을 자랑하고 있었기에, 아쉽지만 이 권갑으로 만족하기로 했다.
…!
권갑을 손에 차자마자 힘이 흘러넘치기 시작했다.
고전을 면치 못하게 했던 진조조차도 이걸 끼고 있다면 한방에 부숴버릴 수 있겠다는 착각마저 들게 할 정도로.
‘인피X티 건틀렛을 찬 타노스의 기분이 이랬을까?’
엄청나네.
“신기하네요. 그것만 있으면 뭐든지 다 할 수 있겠다는 느낌이 들 정돈데요?”
“그건 네가 아직 약해서 그래. 조금 더 강해지면 결함을 느낄 수 있을걸? 이건 다른 신기가 모여있을 때 제대로 된 위력을 발휘하는 물건이거든. 토르의 삼신기 중 하나, 야른그레이프(Járngreipr)로 추측되는 물건이라서.”
들어본 적 있다.
손잡이가 짧은 망치인 묠니르를 제대로 다루기 위해서 토르는 저 권갑을 반드시 끼어야 했다지?
비록 편린에 불과했지만, 신의 무구라는 게 얼마나 대단한 힘을 담고 있는지 실감할 수 있었다.
“이런 걸 산더미처럼 쌓아두고 계시다니, 좀 불합리하게 느껴지네요. 다른 사람들은 한두 개만 가지고 있어도 난리 날 물건인데.”
“그 정도까지는 아니야. 이렇게 좋은 녀석이 나오는 경우는 거의 없으니까. 로또 맞을 수준의 확률로만 나와.”
“그럼, 나머지는 보잘것없는 물건들이란 소린가요?”
“그건 아니야. 분명 대단한 물건도 몇 개 있지. 다만 까다로운 녀석이라 주인을 가린다거나, 도무지 정체를 알 수 없는 물건이라 써먹지 못하는 게 대부분이라 그럴 뿐. 게다가 이 능력은 상대방이 이미 소유하고 있는 물건까진 훔치지 못해. 즉, 분실물에 대해서만 발동하는 능력이지.”
듣고 보니 꽤 리스크가 있는 능력 같네.
아무리 대단한 아티팩트라고 해도, 다룰 수 없는 물건이 소환되면 꽝이나 다름없는 거니까.
게다가 본래 소유자조차 제대로 다룰 수 없을 정도로 위험해서 폐기한 아티팩트까지 소환될 수 있다는 점을 고려하면 마냥 좋다고만 할 수는 없는 능력이었다.
“괜히 가까이 접근하지 말라고 한 게 아니었군요.”
“뭐, 도무지 감당이 안 될 정도로 위험하다 싶은 것들은 역소환시키거나 따로 보관하고 있어. 여기 있는 건 ‘그나마’ 안전하다고 볼 수 있지. 믿을 수 있는 사람의 손에 있거나, 이 공간 내에 있으면 적어도 아무런 일이 생기지 않는 것들.”
약간 SCP 재단이 생각나게 하는 설정이네.
무척이나 위험한 물건일지라도, 보안에 따른 수칙만 잘 지킨다면 아무런 사고가 일어나지 않는다면 ‘안전하다’라고 말하는 게.
“그럼, 이 권갑은 이 중에선 그나마 얌전한 편인 거네요?”
“그렇다고 볼 수 있지. 왜? 뭐 마음에 드는 아티팩트라도 있어? 아까부터 자꾸 저 너머를 흘깃거리더니.”
“아뇨, 딱히 마음이 가는 물건 같은 건 없는데…”
“뭔가 필요한 게 있는 모양이지? 말해 봐. 들어보고 주든지 말든지 결정할 테니까. 어차피 여기 있는 것 중 대부분이 당장은 쓸 일이 없는 쓰레기에 불과하거든. 그냥 언젠가 쓰게 될 날이 올지 몰라서 임시로 보관하고 있는 거야.”
나는 세레나에게 현재 내 몸 상태에 대해 설명했다.
이런 종류의 상태 이상도 치료할 수 있는 아티팩트가 있을지 혹시 모르니까.
질병이나 저주 같은 게 아닌 만큼 치료 효과가 주인 아티팩트는 소용없겠지만.
“…될 것 같은데. 잠시만 기다려 봐.”
세레나가 산더미처럼 쌓여있는 보물들을 헤집기 시작했다.
그러길 십 수분 째, 마침내 그녀는 원하던 것을 찾았다는 듯 작은 용기 하나를 꺼내 들었다.
“맞는지 모르겠네. 표기상으론 정확하게 적혀 있는데.”
“뭔데요. 그게?”
“소화제라고 적혀 있는데.”
암리타, 에이트르, 공청석유, 넥타르 같은 대단한 걸 기대한 내가 병신이지.
하긴, 이 세계가 대놓고 판타지 세계도 아니니까, 뭐.
어차피 그녀가 가진 아티팩트 대부분도 신화 속 무구와 흡사한 능력을 지녔기에 그런 이름을 붙인 거지, 실제로 신화 속 무구인지는 알 길이 없지 않은가.
그마저도 영약은 몇몇 종류를 제외하면 대체로 불사를 가져다준다는 엇비슷한 효능을 지녔기에 뭐가 무슨 영약인지 확인하기도 힘들 테고.
효능만 얼추 맞아떨어지면 되는 거긴 했다.
문제는 왜 하필이면 소화제냐, 이건데.
“왜 하필 소화제인데요?”
“결국 체한 거랑 비슷한 거잖아? 몸 속에 얹혀있는 마나를 가라앉히는 것도 소화의 일부가 아닐까?”
이게 말이 되는 건가.
심지어 논리적으론 그럴싸해서 더 어이가 없었다.
전설이나 신화에 등장하는 약이라면, 맺혀있는 마나나 기 같은 걸 뚫어주는 효과가 있을지도 모르니까.
“도저히 납득하고 싶진 않은데, 따지고 보면 말이 또 되네요. 근데 그거, 먹어도 괜찮은 거죠?”
“물론이지. 봐, 양이 조금 줄어들어 있지? 내가 복용했다는 증거잖아.”
“누나한테 아무런 해가 없었다고 해서 제가 안전할 거라는 보장은 없잖아요.”
“위험했으면 이렇게 대충 적어놓진 않았을걸? 게다가 여기에 차고 넘치는 게 영약인데, 뭘. 상황 보고 위험하다 싶으면 다른 좋은 영약들 다 때려 부어줄게. 그럼 책임지는 거잖아?”
뭔가 속는 기분이 드는데.
그래도 저렇게 말하는 걸 보면 위험하진 않겠지.
나는 세레나에게 최대한 공손한 자세로 손을 내밀었다.
“잠깐, 세상에 공짜는 없잖아. 가는 게 있으면 오는 것도 있어야지.”
“그렇네요. 누나는 뭘 원하시는데요?”
“책임, 너도 누나를 책임져 줘.”
대답할 수 없었다.
세레나를 책임질 수 있냐, 없느냐의 여부를 놓고 고민하는 중이기에 대답할 수 없었다는 뜻이 아니라, 물리적으로 그럴 수 없었다는 뜻이었다.
그녀는 내 대답을 채 듣기도 전에 이미 입에다 그 정체불명의 소화제를 들이붓는 중이었으니까.
“거래 성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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