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0화 〉 이런 건 여행이 아니야!(2)
* * *
세레나는 흔쾌히 내 부름에 응했다.
물론 내가 불러낸 이유에 대해 알려주지 않았기 때문이겠지만.
그녀 또한 내가 속물적인 이유로 불러냈을 거라곤 상상조차 하지 못했는지, 후줄근한 평소의 모습과는 다르게 제법 예쁘게 꾸미고 나온 티가 느껴지는 차림이었다.
새하얀 블라우스에, 짝 달라붙는 부츠컷 슬렉스.
평소 그녀의 차림과 아주 크게 다르지도 않고, 본판 자체가 워낙 미인이라 그냥 조금 신경 썼구나, 하는 정도였으나, 나는 그것이 얼마나 남다른 의미가 있는지 알았기에 조금은 놀랐다.
세레나는 외모에 전혀 신경을 쓰지 않기로 유명한 사람이었으니까.
저런 프릴이나 장식 같은 게 달린 옷을 입는 모습은 본 적조차 없었다.
“네가 어쩐 일이야? 방학 때도 매번 수련만 한다고 들었는데.”
“저도 사람인데 조금 쉬어야죠. 이젠 딱히 바쁜 일도 없고.”
“그래도 조금 의아해서. 여유가 되자마자 가장 먼저 찾아온 게 이 누나라니 감격스럽지 않을 수 없잖아? 진작 이렇게 신경 좀 써줬으면 얼마나 좋아.”
장난기 어린 눈을 한 세레나가 헤드락을 걸어왔다.
언제나 그렇듯 그녀의 장난은 조금 많이 위험했으나 그만한 보상을 내게 안겨주기 마련이었다.
이번처럼.
모든 남자가 선망하는 몽실몽실하고 커다란 구형(??)의 살덩이에 합법적으로 머리를 파묻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주었으니까.
푹신푹신한 천연 쿠션에서 배어나오는 달큰한 향기가 비강 속으로 깊숙이 들어왔다.
오직 세레나에게서만 느껴지는 독특한 체향이었다.
마음 같아선 머리까지 처박은 채 이 상황과 향기를 조금 더 음미하고 싶었으나, 행동으론 옮기지 않았다.
아무리 세레나가 관대하고 호탕한 성격을 가졌다곤 해도, 그렇게 속 보이는 행동까지 용서해주리라곤 생각되지 않아서였다.
뭣보다 이건 몰래 하려 해도 숨을 들이쉬는 과정에서 반드시 들킬 수밖에 없는 행동이기도 했고.
“그래서, 뭐 하자고 불러낸 거야?”
“그냥 놀자고 부른 거죠. 누나 하고 싶으신 대로 하세요.”
이제 나도 입에 침 한 번 안 바르고 거짓말하는 수준에 이르렀군.
그래도 과정상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지금 상황에서 갑은 세레나니까.
최대한 기분을 맞춰줘야 내 부탁을 쉬이 들어줄 것 아닌가.
“또 딴생각하고 있구나? 다 보인다고. 자식아.”
“잠깐 정도는 딴생각할 수도 있죠. 누나를 제일 먼저 생각해서 여기까지 왔는데, 그 정도는 봐줄 수도 있잖아요.”
“그래? 그렇단 말이지?”
세레나는 여느 때와 다를 바 없는 사악한 미소를 지어 보이더니, 내 허리춤을 빠르게 휘감고 자신의 품으로 끌어당겼다.
그리고, 어딘가를 향해 뛰어가기 시작했다.
어째 모양새가 껴안긴 커다란 인형 같아 불편한 감이 있긴 했지만, 일단은 가만히 상황을 지켜보기로 했다.
난 세레나의 품에서 자력으로 벗어날 정도로 완력이 뛰어나지도 않을뿐더러, 설령 그럴 만한 힘이 있더라도 지금은 잠자코 그녀에게 어울려주는 게 현명한 판단이었으니까.
* * *
세레나의 손에 질질 끌려 도착한 곳은 다름 아닌 그녀의 집이었다.
도시 외곽에 있는 작은 주택.
물론 세레나 혼자 살기엔 충분히 넓어 보였지만, 뭔가 대단한 게 들어가 있으리라곤 생각되지 않는 규모였다.
아니, 고작 자기 집에 오는 거였으면서 그렇게까지 들뜬 반응을 내비쳤다고?
여러모로 이해할 수 없었다.
이럴 거면 뭐하러 저렇게 차려입고 나왔담.
“그렇게 기대하는 눈빛으로 달려온 장소가 누나네 집이었어요? 그럴 거면 뭐하러 차려입고 나온 거예요.”
“무슨 소리야. 애초에 나오라고 한 건 너잖아? 적당히 어울리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분위기를 끌어 올리는 일 같은 건 필요 없다는 투로 말한 것도 너고. 곧바로 본론에 돌입하자고 하는데, 거절할 이유가 뭐가 있겠어?”
“그렇다고 딱히 집에서 할 것도 없잖아요.”
“할 게 없긴. 제일 중요한 일을 해야지.”
“그게 뭔데요?”
“남들 눈에 띄면 곤란한 일?”
어째 뭔가 상황이 심상치 않게 흘러가는 것 같았지만, 일단은 두고 보기로 했다.
설마 벌써 ‘그런 짓’을 하려 들진 않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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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 뭔가 생각했던 것과는 다르네요.”
“뭘 생각하고 왔는데?”
“그냥 아무것도 없거나 평범한 일반인의 가정 같은 느낌일 줄 알았거든요.”
집안은 온통 희한한 물건들로 가득했다.
판타지 세계나 중세 유럽에서나 볼법한 고서들과 엔틱 가구, 그 외엔 정체를 알 수 없는 낡은 도구.
즉, 좋게 말하면 골동품이었고, 나쁘게 말하면 잡동사니였다.
세레나가 저장강박증 같은 걸 앓고 있단 이야기는 못 들어봤는데.
그냥 취미 같은 건가?
“그래서, 이건 다 뭐예요?”
“너도 알다시피, 내 서드 어빌리티는 랜덤한 아티팩트들을 소환하는 능력이야. 당연하지만 고고학, 고전학, 신화학 등에 해박해야 그런 물건들을 다룰 수 있지 않겠어?”
그랬었지, 참.
세레나가 보기보다 굉장한 엘리트라는 사실을 착각하고 있었다.
하긴, 단순히 무식하게 힘만 센 빌런이었다면 엘리트주의가 만연하게 퍼져있는 트리니티 아카데미의 교수직을 꿰찰 수 있을 리도 없었겠지.
강의 시간 외에 그녀가 어떤 일을 하고 있는지 몰랐던 나로선 세레나에 대한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된 기분이었다.
어쩐지, 연구 성과나 전문성 같은 게 부족하단 평가도 들리지 않더라니.
아티팩트 방면에선 상당한 권위자로 교수들 사이에서 두각을 드러냈나 보네.
“그럼 이것들은 다 그런 것과 관련된 물건인가 보죠?”
“그렇지.”
“이건 어디에 쓰는 물건…”
“일단 제일 중요한 일부터 먼저 처리하자구.”
세레나가 내 등허리를 걷어차며 말했다.
앞으로 기울어진 내 몸은 바닥으로 곧장 처박히지는 않았고, 갑자기 생겨난 커다란 구멍 속으로 떨어졌다.
* * *
눈을 뜬 장소는 처음 보는 곳이었다.
온통 새까맣기만 한 이 세상은 마치 아이나의 그림자 속에 빠졌던 것만 같은 기분이 들게 하는 장소였다.
그렇지만 아이나의 그림자 속은 아니라 확신했다.
거긴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완벽한 어둠 그 자체였으니까.
어찌 된 영문인지 여긴 빛 한 줌 들지 않는 주제 내 모습과 주변 광경이 고스란히 보이고 있었다.
“여긴 또 어디야.”
“내 보물이 모여있는 보물전이지.”
산더미처럼 쌓여있는 물건들 맨 꼭대기에 앉아있는 세레나는 자신의 칼자루를 매만지고 있었다.
여기 오려고 자기 집에 들른 거였구나.
남들 눈에 띄면 분명 누군가가 같이 뛰어들었을 테니.
나는 세레나에게 다가가기 위해 천천히 잡동사니들의 산을 향해 나아갔다.
하나, 단숨에 내 앞까지 뛰어내린 세레나가 그 전진을 저지하고 나섰다.
“워, 가까이 오지 마. 여기에 있는 보물 중엔 극도로 위험한 저주가 서려 있는 것도 있거든.”
“그런 것치곤 누나는 아무렇지도 않게 그 한가운데에 서 계시던데요.”
“난 보통 사람들과 다르잖아. 어지간한 저주엔 걸리지 않아. 물론 규격 외의 저주를 담고 있는 물건이라면 이야기가 다르긴 하지만. 아무튼 나는 조금 달라.”
“그래서, 여기에 데려오신 이유는 뭔데요?”
“시공간의 영향을 거의 받지 않는 곳이거든. 훈련광인 네가 아주 좋아할 만한 장소 같아서 말이야.”
나도 모르게 번뜩하고 눈이 뜨였다.
‘미친, 드X곤볼에 나오는 정신과 시간의 방이잖아!’
이 장소의 가치를 모르는 사람은 없으리라.
당연히 나 또한 흥미가 동할 수밖에 없었다.
“그 반응을 보아하니, 대답은 듣지 않아도 알겠네.”
“아니, 이런 치트키 같은 장소에 눈독 들이지 않을 사람이 또 어딨겠어요. 여기에 대해 아는 사람이 또 있거나 해요?”
“아무도 몰라. 알려준 사람도, 데려온 사람도 네가 처음인 셈이지.”
그 말이 뭘 의미하는지는 말하지 않아도 뻔히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어떤 대답을 해야 하는지도 알았고.
“뭐, 당연히 너라면…”
“세레나 누나.”
“응?”
“여긴 누나랑 저만 쓰는 걸로 해요. 딱 저희 둘만.”
줄곧 말을 이어나가던 세레나의 입이 얼어붙었다.
그러고는 묘한 눈으로 나를 빤히 쳐다보기 시작했다.
내가 이런 대답을 할 거라곤 전혀 예상치 못했다는 듯.
당연히 그렇겠지.
예전 같았으면 눈치 없이 ‘다른 애들도 여기 불러와서 훈련하면 좋겠는데?’ 같은 소리나 내뱉었을 테니까.
하지만 지금의 난 그렇게까지 눈치 없는 병신은 아니다.
효율만 따지고 들다가 가장 중요한 걸 놓치던 그 시절의 내가 아니란 말이다.
다른 사람의 용기를 외면하거나, 배신하려 드는 짓 따위 하지 않겠다고 다짐했으니까.
물론 내 대답이 최고의 대답이라곤 생각하지 않는다.
나보다 사회성이 좋은 녀석들이야 수두룩하게 널려있으니까.
그래도 세레나의 반응을 보면 과오에 가까웠던 지난날의 대답들보단 지금의 대답이 훨씬 낫다는 건 확신할 수 있었다.
과연 세레나가 뭐라고 대답할지 궁금해하던 찰나.
어딘가 맛이 간 듯한 눈을 한 세레나가 천천히 내 곁으로 다가왔다.
“성진아.”
“네?”
“그렇게 기특한 소리를 하니까 달아오르는 게 주체가 안될 것 같잖아. 지금까지 열심히 참았는데.”
중요한 걸 잊고 있었다.
세레나는 무척이나 즉흥적인 성격이라는 걸.
그리고, ‘한번 하기로 마음먹은 일은 번복하는 일이 없다’는 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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