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9화 〉 이런 건 여행이 아니야!(1)
* * *
투쾅!
파고든 주먹을 빼내자 더미가 산산조각이 나며 털썩하고 앞으로 고꾸라졌다.
카타리나의 초살에 비견될 수준까진 아니라지만, 방어에 능력치를 몰아 찍은 더미의 내구성을 생각했을 때 이 정도면 그래도 어디 가서 꿇린다고 할 화력은 아니었다.
‘여기에 처음 이곳에 왔었을 적엔 고작 실 몇 가닥 만들어 내는 것조차 힘겨워했었지. 그때와 비교한다면 엄청난 성장을 이룩해낸 거긴 해.’
그럼에도 여전히 석연치 않은 기분이었다.
마치 성장이 멈춰버린 것만 같은 느낌.
벌써 한계를 맞이한 거라면 심히 곤란해지는데.
“소문대로 성장세가 엄청 가파르시네요… 이 정도면 B레벨 히어로들이랑 견주어도 손색없으시겠는데요?”
“베테랑 히어로가 아닌 견습 히어로를 기준으로 한다면 그쯤 되지 않을까 싶긴 해요.”
“근데 어째 표정은 어두우시네요.”
“성장이 멈춘 느낌이라.”
“음, 저야 성진 학생 본인이 아니니 정확히 어떤 상황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럴 때 많이 답답하긴 하죠. 슬럼프를 겪고 계신 거라면, 잠시 쉬면서 마음을 정리하는 기간을 가져보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해요. 어차피 지금 방학 아닌가요?”
슬럼프라.
그런 느낌은 아닌데 말이지.
쉬는 건 이미 잘 쉬고 있다고 생각하고.
“슬럼프는 아닌 것 같네요. 쉬는 것도 충분히 잘 쉬고 있다고 생각하고.”
“에이, 그게 어떻게 쉬는 거예요. 매일 훈련장에 살다시피 하시면서. 모름지기 방학이라면 어디 여행이라도 가봐야 하지 않겠어요? 물론 성진 학생 나이면 밖에 나가기만 하면 뭘 해도 재밌을 나이긴 하지만.”
예전엔 해외만 나가면 다 여행이라고 생각했었다.
직장인 아재들이 해외 출장 가는 것도 다 반쯤은 놀러 가는 거라 여겼고.
근데 막상 경험해보니까 아니더라.
이리나 잡겠다고 남아공 갔을 때랑, 진조 잡겠다고 러시아 갔었을 때 뼈저리게 느꼈었지.
업무가 목적인 경우는 절대 여행이 될 수 없다고.
그렇게 생각하니 휴식을 목적으로 떠나는 여행도 마냥 나쁜 선택지만은 아닌 것 같았다.
“여행이라, 다시 보니 괜찮은 생각 같네요.”
“그렇죠?”
애초에 내 주목적은 여행이 아니지만.
프리실라랑 아이나를 만나는 게 목적이지.
언제까지고 아카데미에서만 데이트할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아무리 장거리 연애라곤 해도 가끔은 만나줘야지.
전이야 각자 사정 때문에 바쁘다는 핑계라도 댈 수 있었지만, 이젠 그렇지도 않고.
마침 개학까진 여유도 꽤 있으니, 제법 긴 시간 동안 같이 지낼 수 있겠네.
대략 영국 2주, 일본 1주 정도로 잡으면 되겠지.
당연하지만 프리실라를 편애해서 일정을 이렇게 잡은 건 아니다.
영국엔 겸사겸사 들러서 만나야 할 사람이 있어서 그런 거지.
그를 만나는 시간을 제외하면 프리실라와 지내는 시간 또한 실질적으론 1주일 정도인 셈이었다.
“그럼 전 이만 들어가 보도록 할게요. 슬슬 여기도 문 닫을 시간 다 돼 가니까. 여행 일정도 짜야 하고.”
“네, 성진 학생도 즐거운 방학 보내세요!”
일단 집에 가자마자 둘한테 연락부터 해봐야겠네.
* * *
다행스럽게도 둘 다 방학 내로 만날 여유는 있는 모양이었다.
지금 당장은 아니지만.
프리실라는 며칠이면 시간을 낼 수 있을 거 같다고 했고, 아이나는 가업 때문에 이래저래 바쁜 일이 많아 더 기다려야 하는 모양이었다.
그래도 어찌 보면 이게 차라리 나을지도 모른다.
귀찮은 일부터 먼저 처리하고 나서 노는 게 마음은 더 편하니까.
그럼 우선 영국에 가서 니힐리스부터 만나봐야겠네.
그 사람이라면 내 성장이 멈춘 이유를 잘 알고 있을 테니.
대충 문제를 해결할 때 즈음이면 프리실라도 시간을 낼 수 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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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나를 찾아오는 일이 생기다니. 놀라울 따름이군. 드디어 공경 의식이라도 생긴 게냐?”
“언제는 제가 홀대라도 한 것처럼 말씀하시네요.”
“됐다. 그래서, 어쩐 일로 이 먼 글렌류나크까지 찾아온 거지?”
“성장이 멈춘 것 같습니다.”
니힐리스가 자세를 살짝 고쳐 앉았다.
가면 탓에 그 아래의 표정이 어떤지는 알 수 없었으나, 불편하다는 듯한 자세와 마찬가지로 좋은 안색은 아닐 듯싶었다.
“성장이 멈췄다… 좋은 소식은 아니군. 대충 짚이는 구석이 있긴 하다만, 확인해보지 않고선 모르는 거겠지. 이리 가까이 와라.”
“네.”
척안(??)이 내 이모저모를 훑어댔다.
그 눈빛은 점점 차갑게 가라앉아만 갔기에, 불안감이 들 수밖에 없었다.
“믿을 수 없군. 평생을 단련한 이의 몸이라 해도 믿을 수 없을 정도다. 아니, 이 마나친화력은 구시대의 검좌 이상이라 봐도 무방하겠어. 마치 그때 그 녀석처럼.”
“예?”
“알면서 외도를 걷기로 한 것은 아닐 테고. 지식이 굉장히 해박한 누군가가 몸에 손을 댄 모양이군. 나조차도 범접할 수 없을 정도로 뛰어난 누군가가. 외적인 조치를 취한 것이 맞나 싶을 정도로 군더더기 없는 완벽한 시술이다.”
클로에가 집도했던 끔찍한 생체 실험을 말하는 모양이었다.
의외인걸.
클로에에게 시술을 받았다는 사실을 알았음에도 니힐리스는 여전히 차분한 태도를 유지했다.
분명 무협지에 등장하는 정파 틀딱들처럼 ‘사술이다!’, ‘더러운 수작을 부렸구나!’ 같은 소리를 질러대며 빽빽거릴 줄 알았는데.
약간의 노기는 느껴졌지만.
“화내거나 하진 않으시는 겁니까?”
“켕기는 점이 있긴 한가 보구나. 설명해보도록.”
“그게, 클로에 뤼미엘 이사장님한테 이상한 실험을 당했습니다. 육체의 마나 친화도를 올린다는 명목으로.”
“기분 좋은 소식은 아니군. 다른 사람에게 제자를 빼앗긴 것 같은 기분이 들어서 말이다. 그와 별개로 시술 자체는 굉장히 정밀도가 높다. 도대체 누구이기에 이런 게 가능했을까 했는데, 클로에라면 말이 되는군.”
이게 정밀도가 높은 거라니.
그냥 우격다짐으로 대충 쑤셔 박았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는 시술이었는데.
“그래서, 성장이 멈춘 이유와 그 시술이 관련이 있는 겁니까? 외도라고 말씀하신 이유는 무엇이고요?”
“그 이유를 설명해주마.”
…!
살기가 담긴 니힐리스의 주먹이 내 어깨에 꽂혀 들어갔다.
드디어 이 미친 치매 빌런이 본색을 드러내서 내가 죽게 되는구나, 하고 눈을 감으려던 찰나.
이상함이 느껴져 살짝 눈을 떠보았다.
어깨에서 느껴지는 고통은 친구끼리 툭툭 치는 장난을 할 때 정도에 지나지 않았으니까.
“이게 뭐 하는 장난입니까? 죽는 줄 알았잖아요.”
“장난이 아니다. 진심이 담긴 공격이었으니까.”
“그럼 절 죽이려고 했다는 거잖아요.”
“그야, 네가 죽지 않을 거라는 확신이 있었으니 말이다.”
도대체 이게 무슨 말 같지도 않은 소리인가.
그래도 화가 치밀어 오른다거나 하진 않았다.
작년부터 니힐리스는 늘 이런 방식으로 가르쳐오던 양반이었으니까.
물론 이런 미친 훈련 방식을 아무렇지 않게 받아들이고 있는 내가 정상이란 말은 아니지만.
“그래서, 전 왜 죽지 않은 거죠?”
“영식에는 다양한 종류의 기술이 있다. 당연하지만, 개싸움을 위한 주먹 기술 또한 몇 가지가 포함되어 있지. 방금 내 공격 또한 그런 부류다.”
“그럼 물리적인 피해보단 마나로 주는 피해가 더 크겠군요.”
“그렇지. 네가 피해를 받지 않은 이유도 똑같은 이유다. 내 주먹에 실린 마나보다, 네 몸 안의 마나가 더 많으니, 아무런 피해를 주지 못하는 것이지. 그 정도로 밀도 차이가 극심하다.”
좋아해야 하는 건가?
잘 모르겠네.
나나, 니힐리스처럼 마나를 직접적인 공격 요소로 사용하는 각성자 간 전투에선 상당한 이점이 되겠지만, 아쉽게도 그런 각성자는 세상에 그리 많지 않았다.
성장이라는 막대한 대가로 바치고 얻은 게 고작 ‘특정 각성자 몇몇을 카운터 칠 수 있다는 소소한 이점’뿐 이라니.
오히려 내겐 손해나 다름없는 거 같은데.
“성장을 대가로 바치고 얻은 능력치곤 굉장히 초라해 보이는데요.”
“아니, 다른 이들이라면 성장이 멈추지 않았을 거다. 너라서 성장이 멈춘 거지.”
“그게 무슨 말이죠?”
“클로에가 그렇게 말하지 않았더냐? 네 성질은 부동이라고.”
“그랬었죠.”
“제어할 수 있는 마나량엔 한계가 있다. 마나친화력 또한 그에 정비례하지. 즉, 원래대로라면 네 몸속을 활보하는 마나량은 그렇게 많을 수 없다는 이야기다. 한데 네 몸은 시술의 영향으로 인해 네가 제어할 수 있는 마나량의 한계치를 아득히 벗어난 양의 마나를 수용하고 있지. 이제 어떤 상황인지 이해가 가나?”
내 몸엔 내가 통제할 수 없을 정도로 엄청나게 많은 양의 마나가 있고, 이 마나는 내 성질인 부동의 영향을 받아 움직이질 않으니, 성장하지 않는 것처럼 느껴진다는 이야기군.
논리 자체는 그럴싸해 보였으나, 내 의문은 여전히 풀리지 않은 채로 남아있었다.
그럼 마나통제력이 늘었을 땐 성장이 느껴져야 하는 거 아닌가?
“하지만, 전 근래 들어서 어떠한 변화도 실감하지 못하고 있는데요. 정말로 성장 자체가 멈춘 기분이란 말입니다.”
“그게 내가 외도라고 부른 이유다. 부작용을 낳거든.”
“무슨 부작용이죠?”
“네가 마나를 지배하는 게 아니라, 마나가 네 몸을 지배하게 되는 거지. 네가 마나를 움직이지 않게 만들어야 하는데, 마나가 너를 움직이지 않게 만들고 있어서 성장이 멈춘 거다.”
갑자기 클로에가 원망스러워졌다.
이런 중요한 부작용이 있는 시술을 알려주지도 않고 강행해버리다니.
차라리 시술을 안 받는 편이 나았 다시 생각해보니 그건 아니었다.
준수해진 외모 덕에 이래저래 득 본 점이 꽤나 많았으니까.
“그래서, 어떻게 하면 다시 원래대로 되돌릴 수 있는 겁니까?”
“두 가지 방법이 있다.”
“뭔데요?”
“첫 번째는 내 서드 어빌리티로 네 몸 안에 있는 마소를 모두 날려 버리는 거다. 당연하지만 시술 효과가 거의 사라지게 되겠지.”
“별로 내키진 않는 방법이네요. 나머지 하나는요?”
“몸을 움직여서 강제로 마나를 순환하게 만드는 방법이다. 그 외엔 약물 투여와 수술 등을 통해 육체를 재구성하여 마나를 움직이게 만드는 방법도 있긴 하다만, 이건 그리 추천하고 싶은 방법은 아니기에 제안 선상에는 놓지 않았다.”
아니다.
오히려 지금 상황엔 마지막 방법이 최선이라고 할 수 있었다.
마침 이 영국에 사는 세레나가 엘릭서를 비롯한 여러 가지 영약과 아티팩트를 소유하고 있지 않던가.
그런 물건이라면 다른 약물과는 달리 부작용도 거의 없을 터.
“그거라면 제가 어느 정도는 해결할 수 있어 보이네요.”
“애초에 한 가지 선택지밖에 없지 않느냐. 지금보다 더 열심히 노력한다는 방법밖에는.”
“아뇨, 영험한 영약과 아티팩트를 많이 갖고 계신 분을 알고 있어서요. 그분께 부탁해보려고요.”
니힐리스는 기가 막힌다는 듯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사내 다운 기개나 포부도 없고, 낭만도 없군. 자력으로 문제를 해결할 때만큼 보람차고 뿌듯한 일도 없거늘. 그렇게 게으르고 남에게 의존만 해서 어디 목표로 삼고 있는 것을 이룰 수 있겠느냐.”
“말씀이 너무하시네요. 효율적이라고 해주시죠.”
“정녕 네가 효율적인 인간이라고 생각하나? 온갖 비효율적인 일만을 효율적으로 처리하는 게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이냐. 효율적인 인간은 처음부터 비효율적인 일거리를 만들지 않는다.”
정곡을 찌르는 말이 그칠 줄 모르고 계속 날아들었다.
심지어 그 잔소리쟁이가 니힐리스였던 탓에 나는 그것을 경청할 수밖에 없었다.
설마 세레나마저도 이렇게 잔소리를 하는 건 아니겠지?
부디 그렇지 않길 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