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7화 〉 블레이크 크루제.(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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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두에 제일 먼저 올라온 이야기가 워낙 충격이 커서 그런가, 나머지 대화거리는 이렇다 할 자극을 내게 주지 못했다.
그 내용 대부분이 내가 아는 미래와 블레이크가 아는 미래 간 교차 검증이었던 탓도 크겠지만.
“나, 자네 아버지, 그리고 자네. 모두 본 미래는 엇비슷하군.”
“그러게요.”
“솜니엄리버레이터 쪽이야 자네가 열심히 그 싹을 짓밟아주고 있으니 큰 걱정은 되지 않는다만, 역시 문제는 ‘자네 아버지가 경계하고 있는 그 사람’ 쪽이겠지. 그를 막을 만한 사람이 없으니.”
듣기만 해도 숨이 턱 막히는 이야기였다.
오스카를 막는다?
불가능한 이야기는 아니지.
클로에 정도 되는 각성자가 도와준다는 전제하에선.
근데 그게 어디 쉬운 일이던가.
나름 동시대에 활약했으며, 전설적인 인물로 남았던 니힐리스라면 어떻게든 버티는 것 정도야 해봄 직하겠지만 그 또한 내 추측에 불과하다.
원작에선 비중이 아예 없던 인물이니까.
성장이 끝난 베아트릭스 정도면 또 이야기가 달라질 수는 있겠으나, 언제까지고 베아트릭스에게만 의존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헌데, 사장님을 비롯한 다른 각성자들은 어째서 그런 미래를 보고도 아무런 이야기를 꺼내지 않는 겁니까?”
“자네와 똑같은 이유일세. 믿을 수 있는 이야기라야 믿든가 말든가 하지. 우리라고 늘상 진실만을 말하진 않잖아? 이따금 틀릴 때도 있다고. 이번에도 그렇겠거니 하는 거지. 솔직히 누가 이런 허무맹랑한 소리를 믿겠어? 듣보잡 빌런 조직, 많은 이들의 선망을 받는 최고의 히어로, 그리고 갑자기 등장한 의문의 빌런에 의해 세상이 망한다는 이야기를.”
“그래도 누군가는 꺼낼 만하지 않습니까. 어떻게 모두가 참고만 있죠? 벌거벗은 임금님 일화 같은 것만 봐도 그렇잖아요.”
“말해본 사람들이 있긴 하지. 별다른 이목조차 끌지 못한 채 정신 병동에 수감되는 게 대다수일 뿐. 특히나 예지를 가진 각성자는 정치권에서 프로파간다로 써먹는 일도 빈번해서 ‘높으신 분들이 또 히어로한테 압력을 넣으려 한다’ 정도로 치부해버리기도 쉽고. 쥐도 새도 모르게 사라지는 예언자들은 네 생각보다 많단다.”
예언자가 많으면 이런 일도 생기는구나.
확실히 예언자 노릇도 아무나 해먹는 건 아니네.
자기 자리를 지키려 노력했다는 블레이크의 말이 거짓은 아닌 모양이었다.
내담자의 상황, 환경, 성격 등을 철저하게 분석하여 최선의 해결책을 제시해준다는 말도 다 그럴싸한 포장인 줄로만 알았건만.
언제 자신도 그 실종 명단에 올라갈지 모르는 마당에, 지금까지도 멀쩡하게 잘 활동하는 걸 보면 정치·사업 수완이 대단한 사람임은 틀림없었다.
“그런 걸 보면 이 사업을 유지하고 계신 사장님도 참 대단하시네요.”
“당연하지. 난 분명 미치광이는 맞지만, 아무런 능력도 없는 바보는 아닐세.”
“근데, 사장님은 이 사안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하는 것치곤 꽤 여유로운 분위기인데, 걱정되거나 하진 않으십니까?”
“자네, 제프리네 가게에 대해선 알고 있겠지?”
제프리네 가게?
분명 어디선가 들어봤던 이름인데, 어디였더라?
아, 그래, 거기다.
무슨 채널을 사고, 판다고 했던 거기.
도시 전설 동아리가 필요하다는 어필을 하기 위해 예시로 들었던 곳이었지.
“예, 알고 있습니다.”
“그 채널의 실질적 주인이 날세.”
“예?”
조금도 예상하지 못했다.
이게 이렇게 연결되리라곤.
기껏해야 삼류 빌런 조직이나 무슨 비밀 단체 같은 데서 기획한 실험 정도라고 생각했으니까.
“뭘 그리 놀라나. 입수하는 정보가 많아야 이런 일을 하지. 대충 미래를 안다고 해서 바로 해결책을 제시해줄 수 있는 건 아니지 않나. 일단은 상담사무소라고 밝히고 있지만, 실제론 사설탐정에 더 가까운 일이니까. 보는 눈을 늘릴 필요가 있는 거지.”
“아이디어 자체는 분명 비상하다고 생각합니다만… 쓸만한 정보는 많이 못 구했다고 들었는데요. 로비로 언론들 입을 다물게라도 하셨습니까?”
“아니? 굳이 귀찮게 그런 짓을 뭐 하려 하겠나. 신뢰의 문제라네. 내가 뒷공작 같은 짓을 아무리 많이 해도 기득권이 날 손대지 않는 이유는 자문하러 온 히어로나 정치인의 비밀을 내가 아주 잘 지켜주기 때문이지. 서로가 윈윈하는 관계라 해야 하나?”
“상담을 요청하게 된 이유를 외부에 알리지 않는 대신, 사장님이 하는 일에 대해선 간섭하지 않겠다는 불문율이 생긴 거군요.”
“그렇다네. 언론 쪽도 마찬가지야. 그 짓거리를 오래 하다 보면 꽤나 재밌는 소식들을 많이 접하게 된다네. 아주 쏠쏠한 기삿거리들이지. 난 언론 쪽에 그 자료를 넘겨주고, 언론은 제보자인 내 정보를 숨겨주고.”
확실히 노는 물이 다르긴 하네.
인맥빨이 죽여주는 사람이야 내 주변에도 차고 넘친다지만, 클로에 같은 극소수의 예외를 제외한다면 눈앞의 이 사내만큼 발이 넓은 사람은 찾기 힘들어 보였으니까.
적어도 이쪽 분야에 한해선 최강자라 불려도 무방할 정도로.
이 세계에 온 뒤로 수많은 부류의 강자를 만나왔지만, 이런 영역의 강자는 또 처음이군.
“무섭다거나 하진 않으십니까?”
“불안하지 않다고 말하는 게 거짓이겠지. 내가 그렇게 많은 수의 경호원을 대동하고 다녔던 게 이제 이해되나?”
“되고 말고요.”
“아무튼, 그 채널을 통해 얻은 정보는 뭡니까?”
“좋은 소식과 나쁜 소식이 있네. 뭐부터 듣겠나?”
“나쁜 소식부터 듣도록 하겠습니다.”
나빠 봐야 얼마나 나쁜 소식이겠는가, 그렇게 생각했다.
매번 좋은 소식만 들을 수도 없고.
“오 아니, 우리가 경계하고 있는 그 사람이 코스모스의 유해를 입수했다는 소문이네.”
“코스모스… 요?”
이름은 등장했었다.
코스모스 특임대 자체가 그 사람의 이름을 따온 거기도 했고.
작중에선 ‘다른 빌런에 의해 격퇴되었다’ 이상의 이야기는 나오지 않았지만.
“그래. 현 코스모스 특임대의 전신이었던 레이븐의 회중시계를 이끌던 인물 중 한 명이지. 모르나?”
“잘은요.”
“이상하군. 자색 기사단의 제 1좌였던 양반인데? 자네 스승이 뭐라고 하지 않던?”
“기사단을 탈퇴한 검좌가 있단 이야기는 해주셨지만, 그게 정확히 누구라곤 말씀해주지 않으셨거든요.”
“뭐, 그건 중요한 게 아니지. 중요한 건 오랫동안 실종 상태였던 코스모스가 죽은 채로 발견됐고, 유해는 그 자의 손에 넘어갔단 거지.”
많이 나쁜 소식이네.
그 시체를 어디다 써먹으려는 건지는 알 수 없으나, 좋은 일에 쓰려고 가져가진 않았겠지.
게다가 어중이떠중이 빌런도 아니고, 니힐리스를 상회하는 실력자의 유해니, 되살려내기라도 한다면 큰 위협이 될 게 분명했다.
니힐리스의 움직임을 눈으로 좇는 것조차 버거운 마당에, 제 1좌를 상대해야 할지도 모른다니.
“…심히 좋지 않은 소식이긴 하네요. 그럼 좋은 소식은 뭡니까? ‘코스모스가 되살아나려면 아직 멀었다’ 같은 말장난이 아니라면 좋겠군요.”
“레이븐의 가석방이 허가됐다.”
“테일러 세스 말씀하시는 겁니까?”
“그럼 그놈 말고 레이븐이 또 있겠나?”
작년 1학기 기말고사 때 상대로 나왔던 빌런, 레이븐.
어마어마한 거물 빌런이었으나, 현재는 조용히 감옥에서 지내는 중이라 알려졌다.
근데, 그 자식이 풀려나는 게 뭐가 중요한 거지?
“그게 왜 좋은 소식이라는 겁니까. 빌런이잖아요. 저희와는 아무 상관도 없는.”
“왜 아무 상관도 없다고 생각하나? 코스모스는 ‘레이븐의 회중시계’의 부단장이었어. 단장은 레이븐 본인이었고. 무척이나 가까운 관계였단 말이지. 그런데, 과연 레이븐이 이 소식을 듣고도 가만히 있을까? 자기 동료의 시체를 가지고 농간질을 하는 놈이 있다는 소식을 듣고도?”
“하지만, 레이븐이 아무리 강하다곤 해도 학 아니, 그 사람을 이기진 못할 텐데요.”
“그래, 레이븐이라 해도 그건 못 이기겠지. 근데, 내 생각에 하데스 정돈 이길 수 있을 것 같거든?”
하데스!
왜 진작 그 연결고리를 파악하지 못했을까?
솜니엄리버레이터는 어떻게든 하데스를 풀어주기 위해 용을 쓰는 중이란 사실은 이미 알고 있었다.
현 트리니티 아카데미 학장 오스카와 솜니엄리버레이터 사이에 모종의 관계가 있다는 사실은 진작부터 안 사실이고.
그 말인즉슨, 오스카 또한 하데스가 풀려나기만 하면 그와 접점을 가질 수 있게 된단 말이었다.
“레이븐이 하데스를 죽이면, 더는 코스모스의 유해를 사용할 수 없게 되겠군요.”
“그래, 하데스만 없으면 코스모스의 유해는 애물단지에 불과해지지. 네크로맨시를 지닌 각성자가 아주 드문 건 아니지만, 코스모스 급의 강자도 무난하게 지배할 수 있으려면 하데스 정도는 되어야 하니까.”
“그래서, 이이제이를 노리겠다는 말입니까?”
“정확하네. 레이븐만 잘 구슬리면, 솜니엄리버레이터와 오 뭐시기, 둘 다 견제할 수 있게 돼.”
엄청난 소득이었다.
확실히 놈들이 꾸미는 음모의 규모가 점점 커지는 상황이라, 나 혼자선 미래에 벌어질 모든 사건을 막긴 버거울 거라 생각하고 있었는데.
양측에 모두 훼방을 놓을 방법이라니.
게다가 극강의 위력을 자랑하는 아군이 한 명 더 추가될 거란 소식까지.
이보다 더 좋을 수는 없었다.
“근데, 이렇게까지 저한테 잘해주시는 이유가 뭡니까?”
“돈을 받았으니까. 자네 아버지는 자신이 알고 있는 모든 미래와 자산을 상담료로 지불했네. 정확히는 자네의 상담료지.”
“상담 기간은요?”
“무제한일세.”
“그럼 아까는 왜 제가 고객이 아니라고 한 겁니까.”
“그냥 욕하고 싶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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