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5화 〉 블레이크 크루제.(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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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범한 사옥처럼 생긴 건물로부터 검은색 코트를 걸친 양복쟁이들이 우르르 쏟아져 나올 때까지만 해도 난 무슨 마피아 조직이라도 지하 벙커 속에 숨겨놓은 줄 알았다.
도대체 이 많은 경호원들을 어디다 써먹으려고 그러는 건가 싶기도 했고.
제아무리 세계 최고의 유명 각성자 중 하나인 블레이크라곤 하지만, 조금 과하지 않나?
“…사장님은 자의식이 조금 지나치신 사람입니다. 그러려니 하고 넘어가 주시길.”
이해할 수 없단 말은 아니었다.
블레이크는 예지에 특화된 각성자지, 전투에 특화된 각성자가 아니니까.
‘모두가 탐나는 능력을 지닌데다, 자신의 몸을 지킬 수단은 없다.’
그 말인즉슨 빌런들의 아주 좋은 먹잇감이란 이야기였다.
따라서 이렇게 많은 경호원을 대동하고 다니는 것도 아주 이상하지는 않다고 여겼건만, 정작 경호원들은 블레이크가 지나치게 몸을 사리는 것이라 말하고 있었다.
‘둘 다 맞는 말이라는 거겠지, 뭐.’
뭐든 간에 자기 돈으로 해결하고 있으면 된 것 아니겠는가.
“들어가시죠. 사장님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네.”
경호원들의 안내에 따라 건물 내부로 들어서니, 영화나 만화 속에나 비밀 연구소를 방불케 하는 디자인이 눈에 들어왔다.
무엇에 쓰이는지 짐작조차 할 수 없는 요상하게 생긴 기계들부터 시작해서, 고대 유물처럼 생긴 골동품들이 여기저기에 전시돼있는 모습은 참으로 묘한 기분이 들 수밖에 없는 광경이었다.
“저것들은 다 어디다 쓰는 물건인가요?”
“사장님 말에 따르면 미래에 크게 떡상할 물건이라고 반드시 갖다 놔야한다는 그런 물건인데… 솔직히 그냥 본인이 모으고 싶어서 모으는 것 같습니다. 그런 것 중에서 판 것이 거의 없거든요.”
그 말을 들은 순간, 엄청난 충격에 휩싸였다.
‘씨발, 난 왜 저런 엄청난 생각을 못 했지? 진짜 병신인가?’
아무리 뻔히 보이는 거짓말이라곤 해도, 사람들은 미래를 확인할 방법이 없지 않은가.
주변 사람들이 쓸데없는 것 좀 그만 모아대라고 들들 볶아대도 ‘언젠가 반드시 떡상할 물건’이라고 일축하면 그만이었다.
게다가, 블레이크의 허풍에 속아 넘어간 개미들이 개잡주나 잡동사니들을 잔뜩 사모으다 보면, 해당 물건의 가치도 크게 올라갈 터.
물론 시간이 지난 뒤엔 그게 단순한 블레이크의 장난질에 불과했다는 사실도 알려지겠지만, 그걸 알아차릴 때쯤이면 블레이크는 진작 개미들 뒤통수를 후려갈긴 다음 손을 털고 나왔을 시기겠지.
물론 그 짓거리를 너무 많이 하다 보면 훗날에 양치기 소년 소리를 들을 수도 있겠지만, 그건 적당히 완급 조절만 하면 될 문제니까.
역시 천재는 달라도 뭐가 다르구나.
나중에 나도 한번 따라해볼까.
그런 엄청난 계획을 세우고 있다 보니, 나는 어느샌가 사옥 최상층에 위치한 블레이크의 사무실 앞에 도착해있었다.
“그럼, 모쪼록 즐거운 시간 보내시길. 차마 편안한 시간 되시라곤 못 하겠습니다. 사장님은 남을 피곤하게 만드는 데엔 굉장한 일가견이 있으신 분이거든요.”
“다른 분들은 들어가시지 않는 건가요?”
“사장님은 고객분들이랑 이야기할 때 옆에 누가 있는 걸 아주 싫어하십니다.”
“아, 네. 수고하세요.”
또라이도 보통 또라이새끼가 아닌 모양이었다.
나도 마찬가지긴 하지만.
그 때문일까, 이 장소에서 묘한 기시감이 느껴졌다.
덕분에 한결 편안한 마음으로 사무실 안으로 발을 들일 수 있었고.
“오, 언제 오나 목 빠지게 기다리고 있었다네. 언론에서 이야기할 때 몇 번 보긴 했지만, 매번 봐도 신기할 정도로 평범한 외관이로군! 아, 못생겼다는 말은 아니야. 기백 같은 게 느껴지지 않는다는 뜻이지. 보통 세상을 움직이는 녀석들한테선 범상치 않은 기운이 느껴지거든!”
확신했다.
이 새끼는 나보다 더한 또라이 새끼라고.
듣기로 외국에선 외모에 관한 이야기는 엄청난 실례라서 하지 않는다고 들었는데, 블레이크는 가장 먼저 꺼낸 이야기가 바로 내 외모에 관한 이야기였다.
어디 그것으로 끝인가?
기운이 어쩌고저쩌고하는 것으로 보아 미신까지 신봉하고 있는 것으로 보였다.
“…반갑습니다.”
“그래, 내 쪽지는 잘 받았나? 마지막의 반전은 어땠지? 재미있지 않았나?”
“아무 생각도 없었습니다.”
“정말 재미없군. 왜 이렇게 애새끼가 맥아리가 없느냔 말이야! 난 자네의 설화를 듣고 정말 기대를 많이 했는데, 이렇게 실망시켜도 되는 건가?”
이게 진짜 광기인가.
어지럽네.
“저도 일개 생도에 지나지 않는 사람이니까요. 다 과장입니다. 과장.”
“거짓말 하지 말게. 난 다 알 수 있다고. 자네가 미래에 어떤 미친 짓을 벌이는지 다 눈에 훤히 보인다, 이 말이야.”
“그렇게 미래에 대해 잘 알고 있는 사람이 왜 저런 쓰레기들을 모아다가 전시해놓은 겁니까? 안 팔릴 것도 다 알면서.”
“어허, 내 컬렉션들에 대해 품평하지 말게. 다 투자라고. 투자.”
“솔직하게 털어놓읍시다. 우리. 그냥 수집하고 싶은 거라고. 전 취미 생활도 이해 못 해주는 좀스러운 사람이 아닙니다.”
“그 말은 내 아내가 좀스러운 사람이란 말이로군.”
‘본의 아니게’라는 말은 하지 않겠다.
욕하고 싶어서 한 게 맞으니까.
이 미치광이한테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냥 넘어가자니 속이 쓰리거든.
이런 걸 보면 확실히 나도 보통 미치광이는 아닌 것 같긴 하지만.
“그런 말은 하지 않았습니다. 그냥, 미래 예지라는 좋은 핑곗거리가 있어 부럽다는 이야기죠. 바가지 긁는 소리를 훨씬 덜 들을 것 아닙니까.”
“하, 그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군. 근데 자네가 간과한 사실이 하나 있어. 그게 뭔지 아나? 그래도 바가지 긁는 소리는 무조건 듣게 돼 있다는 거야.”
“어째서죠?”
“그건 결혼해보고 나면 알아. 자네도 언젠간 깨닫게 될 거야. 결혼하기 전에는 모든 게 다 사랑스럽게 느껴지겠지만, 한 집에서 한 밥 먹기 시작한 이후로는 모든 게 다 짜증스럽게 느껴진다는 걸. 솔직히 말해서, 난 꽤 나쁘지 않은 남편이라고 생각하거든? 돈도 잘 벌고, 가정에도 충실하다고. 그런데도 맨날 듣는 게 잔소리라네. 이유? 그런 건 없어. 그냥 내가 마음에 안 든대.”
“그런데도 잘 살고 계시는군요.”
“결혼은 그… 좆같지만 묘하게 중독성 있어서 멈출 수 없는 습관 같은 거야. 다리를 떠는 거나, 손가락의 관절을 꺾는 거랑 같은 거지. 병신 같다는 걸 알지만, 한 번 그걸 하기 시작하하게 되면 다시는 멈출 수 없게 되는 거야.”
시무룩한 표정을 짓는 블레이크가 불쌍하게 느껴지려다 말았다.
동정심을 불러일으켜 내 경계를 허물어트리려는 속셈일 수도 있으니까.
애초에 사업가란 놈들이 어떤 놈들이던가.
부흥을 위해서라면 영혼까지도 저당으로 잡을 수 있는 자들이다.
처량한 신세 한탄 정도로 좋은 거래를 얻어낼 수 있다면 얼마든지 써먹겠지.
특히나 블레이크같이 수완이 좋은 양반이라면 더더욱 그러한 기질이 강할 테고.
“참 안된 이야기군요.”
“내가 불쌍하다고 생각하지 않나?”
“사업하는 작자들의 말은 매번 의심하고 봐야 하지 않겠습니까. 하물며 사장님은 그 사업하는 작자 중에서도 독보적인 수준의 광인인데, 더더욱 조심해야 하는 법이죠.”
“보기보다 세상 물정에 밝은 친구군.”
블레이크는 어깨를 으쓱해 보이고는 순식간에 표정을 뒤바꿨다.
역시 속내가 따로 있는 게 천생 장사꾼이구나 싶었다.
“아, 자네를 떠보려던 건 맞지만, 했던 이야기는 모두 진실이라네. 결혼은 나쁜 습관이야. 하물며 내 아내만 해도 결혼 전까지는 욕지거리라곤 전혀 모르는 순진한 여인에 불과했어. 하지만 지금은 어디서 배워왔는지 모를 못된 말들만 내게 퍼붓고는 하지.”
“그래서, 저를 부르신 이야기가 다른 아저씨들이 다 똑같이 하는 이야기 중의 하나인 ‘결혼하지 마라’인 겁니까?”
“물론 그건 아니지. 하지만 조심 정도는 해두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아서 해두는 이야기일세. 그나마 내 아내는 히어로나 빌런 같은 놈들 따위와는 거리가 먼 민간인인데다가, 아이를 가질 생각도 없는 사람이라 조금 나았지만, 자네는 아니지 않은가.”
듣고 보니 오싹한 데가 있었다.
아내보다 훨씬 잘난 블레이크조차 저렇게 기를 못 펴고 살게 되는 게 결혼이라면, 만약 나는?
…하루라도 더 빨리 강해질 필요가 있겠는데.
“그래, 보아하니 짚이는 데가 있나 보군. 그 생각 변치 않고 갖고 있게. 특히나 자네의 연인 아니지, 연인들은 죄다 자네보다 훨씬 잘난 사람밖에 없지 않나. 게다가 자네 못지않게 재능도 압도적이지. 지금이야 풋풋한 시절이니 좋게 좋게 해결되는 거지만, 나이 들고 나면 잡아먹히게 될 걸세. 자네가 할 수 있는 건 죽어라 발버둥 치고 노력해서 그들보다 앞서나가는 것뿐이야.”
“그것 또한 사장님의 예지가 알려준 겁니까?”
“글쎄, 어떤 것 같나? 내 상담료는 무척이나 비싸다네. 마음씨 좋은 내가 무료로 상담을 해줬다고 생각해도 좋고, 단순한 유부남의 경고라고 받아들여도 좋아. 더 나아가서는 내가 거짓을 말하는 것이라 생각해도 좋고.”
“그럴만한 이유가 있습니까?”
“왜 없나. 말했다시피 난 자네가 미래에 벌어질 사건을 해결할 것이라 믿고 있네. 하지만, 내가 만일 자네에게 낙관론적인 미래를 소개한다면 어떻게 되겠나? 자네는 이 정도 상황과 현실에 만족하며 안주하게 될 테고, 종극에는 바꿀 수 있는 미래조차 바꿀 수 없게 되겠지.”
블레이크의 눈에 생기와 빛이 돌았다.
이것만큼은 진심이라는 듯.
지금까지 해왔던 이야기는 다 이 말을 꺼내기 위해서라는 듯.
그제야 나는 그게 왜 넉살 좋게 아내 이야기나 꺼내서 날 떠보려고 했는지 알 수 있었다.
밑도 끝도 없이 미래에 관한 이야기만 하면 지루해할 게 뻔한데다, 자신을 경계하는 눈초리로 바라볼까 봐 그랬던 것이었다.
“그 이야기를 하기 위한 포석이었군요.”
“그래, 자네 아버지에 대해 이야기를 하기 위해서였지. 어디서부터 하면 좋을까. 아, 그게 좋겠군.”
블레이크는 긴장된다는 듯이 물 한 잔을 들이켜고는 호흡을 가다듬었다.
“천마는 머지 않아 자네 품으로 들어오게 될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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