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4화 〉 블레이크 크루제.(1)
* * *
쿵!
벌써 다섯 번째다.
처음 두드릴 때는 택배라고만 생각했다.
두 번째부턴 전도하러 온 아줌마 정도겠거니 하고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하나, 10분이 지난 지금까지도 문 앞을 떠나지 않는 걸 보면 그런 시답잖은 이유로 이 보잘것없는 원룸에 관심을 가지는 건 아닌 것 같았다.
“박성진 님, 안에 계신 거 다 아니까 슬슬 열어주시죠. 이쯤 되면 주민분들께도 민폐입니다.”
나는 현관 앞에 달린 카메라로 상대방을 살폈다.
무슨 MI6나 CIA 요원 같은 차림을 한 인간이 둘이나 서 있는 게 영 꺼림칙해서 열어주고 싶지 않았으나, 하는 짓으로 보아 몇날 며칠을 이 앞에서 대기하고 있을 것 같아 하는 수 없이 문을 열어주고야 말았다.
그 누구에게조차 알려주지 않았던 집 주소까지 알고 있는 마당에, 저항해봤자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납치나 살인 같은 게 목적이었다면 얼마든지 자행할 수 있었단 이야기인데.
그래도 혹시 몰라 마나로 기척까지 읽어내 봤지만, 딱히 위협적인 무기 같은 건 갖고 오지 않은 모양이었다.
살의 또한 전혀 느껴지지 않았고.
“…들어오시죠.”
“호의에 감사합니다.”
썬글라스를 낀 남성들이 꾸벅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
도대체 뭐 하는 양반들일까.
코스모스 쪽 사람들인가?
아무리 봐도 그런 것 같지는 않은데.
그것도 아니면, 감시자들?
짚이는 데가 너무 많아서 감조차 잡히지 않았다.
“내어드릴 만한 게 커피랑 과자 정도뿐인데, 그거라도 드릴까요?”
“뭐든 주시면 감사히 받겠습니다.”
역시나 이상했다.
지금까지 들쑤시고 다닌 데가 한두 곳이 아니라는 점을 고려해보면, 나에게 좋은 감정을 가진 인간들은 사실 그리 많지 않으리라.
정체 모를 괴한들이 우리 집에 쳐들어오는 것 정도는 얼마든지 일어날 법한 사태에 지나지 않았으나, 그런 것치고 이 사람들은 너무나 저자세였다.
마치 날 모시러 온 것 같다고 해야 하나.
“그래서, 여기까진 어쩐 일로 오신 겁니까.”
“갑자기 찾아온 데에 대한 무례를 용서해주시길. 무슨 수를 써서라도 반드시 데려오라는 명이 있었기에 어쩔 수 없었습니다.”
“아뇨. 이런 상황을 어느 정도 예견하긴 했거든요. 뭐 때문에 찾아 왔는지부터 알려주시면 좋겠습니다.”
양복쟁이들은 찾아올 줄 알고 있었다는 내 말에 흠칫하고는 자기들끼리 무어라 쑥덕거렸다.
뭐가 그렇게 대단한 비밀이라고 숨기려고 드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블레이크 크루제라고, 혹시 알고 계십니까? 과거에 히어로로 활동하셨던 분입니다.”
“아, 알죠.”
나 같은 구라쟁이랑 다르게 진짜 미래 예지를 지닌 각성자 중 한 명이다.
현재는 은퇴하여, 히어로들만 상대하는 상담심리사로 활동하고 있고.
사실 전자보단 후자로 더 유명할 것이다.
히어로로 활약한 기간이 워낙 짧아서.
성격도 괴짜 같은 데다 싸움질엔 소질이 영 없는 인간이라 들었으니 당연한 일이었을지도.
그래도 상담심리사는 적성에도 꽤 잘 맞고, 재능도 있었는지 그쪽 방면에선 알아주는 유명인이 됐다 들었다.
주된 상담 사유는 주식이나 부동산이라고 듣긴 했지만.
“그 블레이크님께서 만나 뵙기를 청하고 있습니다. 박성진 님의 아버지께서 고인이 되기 전에 신세를 졌다고 하더군요.”
“제 아버지요?”
“네, 꼭 사례를 하고 싶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당최 무슨 일일까, 이건.
블레이크 크루제와 내 아버지의 접점이라고 해봐야 진짜 미래 예지 각성자라는 점뿐인데.
비슷한 능력을 가진 사람이니 사제 관계였거나, 친구 관계였을 거란 추측이 그나마 가능성 있는 이야기인데, 따지고 보면 이것도 앞뒤는 맞지 않았다.
내 아버지가 예지 능력에 눈을 뜬 건 살 날이 얼마 남지 않았을 때였다고 하니까.
둘이 교분을 나누지는 않았을 터.
“믿을 수 없다는 눈치로군요.”
“뭐, 누구나 그렇지 않겠습니까.”
“블레이크님께서 남기신 쪽지입니다. 믿지 못하시겠다면 이걸 보시라고… 참고로 저희는 이 쪽지의 내용을 모릅니다. 당사자가 아니면 절대 열어보지 말라며 엄포를 놓으셨거든요. 밀봉 상태만 보셔도 아실 겁니다.”
대장 격으로 보이는 인물이 작은 쪽지 하나를 조심스레 내밀었다.
그리고, 그 쪽지엔 믿지 못할 이야기들이 잔뜩 적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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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친구 박성진에게.
갑자기 이런 쪽지를 받게 되어 많이 당황스럽겠지.
나도 안다네.
자네 아버지도 나에게 이런 황당무계한 내용의 쪽지를 보냈었거든.
처음엔 개소리라 치부하고 무시했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그 쪽지에 적힌 내용이 사실이라는 것만 확고해질 뿐, 변하는 건 아무것도 없었지.
그래서, 나는 지금 한 가지 증명에 나서고자 하네.
과연 어디까지가 진실이고, 어디까지가 거짓일지 말이야.
내 다시는 이 세계에 발을 들이지 않겠다고 맹세했지만, 며칠 전 나를 찾아온 그 모질이들이 자네 아버지와 비슷한 이야기를 하는 것을 듣고는, 그래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서일세.
물론, 믿기 싫다면 믿지 않아도 좋네!
돌팔이 한 명이 보낸 괴상한 쪽지 때문에 너무 심려치는 말게나.
나와는 다르게 자네는 비범한 인물이 틀림없으니까.
그럴 만한 이유도 있고, 내 감도 그렇게 말하고 있거든.
밑도 끝도 없이 이런 이야기나 적고 있으니 더욱 돌팔이 같군.
내가 ‘도를 아십니까’ 따위나 지껄이고 있는 한가한 아줌마가 아니라는 걸 증명하기 위해 ‘믿지 못할 사람’에 대한 정보를 조금 주겠네.
자네의 아버지가 경계하고 있던 그 자는 아직 타락하지 않았어.
떳떳하지 못한 일을 일삼은 건 맞지만, 지금까지 해왔던 일들은 모두 선한 의도로 자행한 걸세.
그가 완전히 변해버리지 않게끔 주도면밀하게 그를 관찰하도록 하게나.
나머지 이야기는 만나서 천천히 이야기하도록 하지.
추신. 이 쪽지는 밀봉이 뜯긴 이후 3분 뒤 폭발한다.
블레이크 크루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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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전히 이해가 안 가는…’
콰앙!
‘진짜 미친 새끼였네. 난 알아서 태워 없애라는 의미인 줄 알았는데, 진짜 폭발할 줄이야.’
폭발의 규모가 작았기에 충격파도 미약한 수준에 그쳤지만, 날 깜짝 놀라게 하기엔 충분했다.
쪽지는 순식간에 불타 사라졌고.
“…죄송합니다. 사장님이 기행을 일삼는 사람으로 소문이 자자하긴 하지만, 이런 유치한 장난이나 꾸미고 있을 줄은. 혹시 쪽지에 무례한 이야기가 적혀 있지는 않았습니까? 그렇다면 대신 사과드리겠습니다.”
“아뇨, 괜찮습니다. 확실히 제가 관심을 가질 만한 이야기가 적혀 있긴 하더군요.”
긍정적인 회신에 양복쟁이들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얼핏 보기엔 거의 티도 안 나는 수준이었지만, 포커페이스로는 따라갈 자가 없는 아이나가 연인인 나에겐 너무나 알기 쉬운 변화였다.
“그렇다는 말은 저희와 동행하시겠다는 겁니까?”
“일단은 조금만 생각할 시간을 주시죠. 정말 잠깐이면 됩니다. 잠깐 담배라도 한 대 피우고 오시든지 하면 될 것 같네요.”
“알겠습니다. 너무 부담 갖지 마시고 천천히 생각하셔도 됩니다. 비단 히어로뿐만이 아닌 생도 중에서도 사장님을 찾아뵈는 분은 제법 많으니까. 세간에는 평범하게 상담이나, 같은 예지 능력자들끼리 나누는 담론 정도로 알려지겠죠.”
그들은 내 의중을 금세 알아채고는 자리를 비워주었다.
그럼, 이 잠깐의 시간을 이용해 블레이크를 놀라게 할 방법이나 알아봐야지.
* * *
“사이먼, 어떤 것 같았나.”
“종잡을 수 없는 꼬마더군.”
“그래, 험상궂은 외모까진 아니어도, 이 차림새를 보면 주눅이 들 만도 한데, 새삼스럽다는 듯이 우릴 맞이하는 게.”
“우리가 올 걸 알고 있었다는 이야기가 되겠지.”
선글라스 아래의 눈동자가 반짝였다.
사이먼이 심상치 않은 것을 목격했을 때 주로 내비치는 반응이었다.
이것은 그들에게도 다소 이례적인 일이 아닐 수 없었는데, 자신들의 고용주 블레이크는 다른 히어로들과 사적으로 교류하는 걸 무척이나 꺼렸기 때문이다.
히어로들을 상대로 상담을 해주는 것도 어디까지나 비즈니스적인 관계일 뿐, 그 이상으로 발전시키고 싶은 의도는 절대 없다고 누누이 말하지 않았던가.
그런 그가 흥미를 보인 게 스무 살 남짓한 히어로 지망생이었으니, 참으로 이상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렇다는 이야기는, 역시 커다란 사건이 일어난다는 뜻이려나.”
“아무래도 그럴 수밖에 없지 않겠어? 예지 능력을 가진 각성자들은 자기가 아는 미래를 과신하는 경향이 강해. 같은 예지 능력이 있는 사람의 조언이 아닌 이상에야, 다른 사람들의 의견을 절대 안 들어 처먹는 족속들이라고. 우리 사장님만 봐도 그렇잖아.”
“확실히 그렇지.”
사이먼과 그의 동료들은 자신의 상사가 어떤 사람인지 아주 잘 알고 있었다.
틈만 나면 히스테리나 부려대고, 미래를 대비하겠다는 명목으로 온갖 귀찮은 일들은 자신들에게 다 떠넘기는 사람 아니던가.
그럼에도 이들이 블레이크 곁을 쭉 지켜온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적어도 추잡스러운 짓은 시키지 않는다는 점.
돈을 떼먹는다든가, 더러운 짓거리를 시킨다든가 등등.
인간 대 인간으로선 결코 가까이하고 싶지 않은 부류일지 몰라도, 고용주로선 썩 나쁘지 않은 인물이었다.
“사장놈이 누군가를 찾을 땐 보통 큼지막한 사건이 일어나곤 했어. 마침 저 박성진이라는 녀석의 능력도 ‘전 세계에 알려질 정도로 유명해지는 사건’을 예지하는 것이라 하더군. 그렇다면 뻔하지, 뭐.”
“또 귀찮은 일을 떠안을까 봐 걱정이야. 사이먼.”
“그래도 위험한 일은 우리에게 시키지 않는 게 참 다행이란 말이지. 물론 사장놈을 경호하는 것 자체가 위험한 일이라고 하면 할 말은 없다만, 그 이상으로 좆같은 짓은 시키지 않잖아?”
“그건 그래. 예전에 무슨 저주받은 물건인지 뭔지 하는 걸 구하러 오지까지 떠나야 했던 건 쌍욕이 나오긴 했지만.”
“그 뒤론 아무 일도 시키지 않았잖냐. 아무튼, 슬슬 시간도 적당히 지났으니, 다시 그 꼬마를 설득하러 가보자고.”
“안 그러셔도 됩니다. 동행하기로 했거든요.”
1층 현관문이 열리는 소리와 함께 들린 말이었다.
사이먼과 그의 동료들은 박성진의 그 담대함에 감사하다는 말만 연거푸 내뱉었다.
여태까지 그들이 대해온 인간들은 하나 같이 설득하기 힘든 인간뿐이었으니까.
심지어 그들의 고용주인 블레이크는 상대가 누구든 간에 아랑곳하지 않고 짓궂은 장난을 계속 일삼아댄 탓에, 알아서 잘 풀렸을 일을 스스로 망치기도 했다.
이미 나빠진 상대의 기분을 달래는 건 오롯이 사이먼과 다른 이들의 몫이었고.
그렇다 보니, 이렇게 빠르게 결정을 내린 사람은 사실상 그가 처음이었다.
“그럼, 출발합시다.”
“예! 최대한 편히 모시도록 하겠습니다. 배려에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