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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33화 〉 재미 있는 발상. (133/173)

〈 133화 〉 재미 있는 발상.

* * *

두툼한 책 한 권이 애먼 이의 머리통에 꽂혔다.

“지금 그 개소리를 나더러 믿으라는 거냐!”

“노여움이 이는 것은 이해합니다만, 저는 보고서에 나온 내용을 그대로 전달해드렸을 뿐입니다.”

“누구 하나 도움 되는 녀석이 없어! 꿈의 잔재를 빼앗긴 것으로도 모자라, 진조는 제대로 된 활약조차 하지 못하고 죽었다고?”

“…네.”

“썩 꺼져! 죄다 꼴도 보기 싫으니!”

엔리케가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그의 수하는 방에서 쫓겨나면서도 한 마디의 항변조차 할 수 없었다.

화가 머리끝까지 난 엔리케를 말릴 수 있는 사람은 없다는 걸 잘 알고 있었으니까.

그렇게 다시 고요를 되찾은 방 안.

엔리케는 무언가를 골똘히 생각하고 있었다.

‘의도적으로 방해하고 있다고밖에 생각되지 않아. 하지만, 진지하게 고려하자니 너무 허무맹랑한 이야기다. 다른 이가 듣는다면 드디어 미친 거냐고 묻겠지.’

솜니엄리버레이터는 작은 조직이다.

행사할 수 있는 영향력이나, 속해 있는 일원 한 명 한 명의 가치는 클지 몰라도, 규모는 그리 대단하다고 보기 어려운 단체임은 틀림없었다.

따라서 정보를 통제하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입이 가벼운 소수의 인원만 집중적으로 단속하면 그만이었으니까.

엔리케를 비롯하여, 솜니엄리버레이터에서 한자리를 꿰차고 있는 이들이 몸담은 곳에 대한 신뢰를 쉽게 저버리지 않는 이유도 이 때문이었다.

자신들의 비밀이 누설되지 않도록 철저하게 관리하고 있었기에.

하나, 지금은 반대로 그 점이 엔리케를 더욱 혼란스럽게 만들고 있었다.

‘정보가 새어 나갈만한 곳은 전혀 없다. 하지만… 그렇다면 어떻게? 작년 봄에 지시했던 습격이야 말단 녀석들의 실수로 인해 운 좋게 얻어걸린 셈이라 쳐도, 진조 사건마저 개입한 건 단순한 우연의 일치라 보기엔 수상하다.’

머리를 싸매고 고민한다 한들 답이 나올 리가 없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박성진은 빌런이나 히어로와는 일말의 접점조차 없던 평범한 민간인에 지나지 않았으니 말이다.

비록 예사롭지 않은 구석이 있다곤 하나, 그것도 어디까지나 신참 각성자치고 비범한 모습을 보여줬다 뿐이지, 진짜배기 천재들에 비하면 오히려 어리숙한 면이 더 많았다.

즉, 심증은 어느 정도 있으나, 물증은 전혀 존재하지 않는 상황이었다.

그 심증마저도 예민하기 그지없는 엔리케가 쥐어 짜낸 망상일 뿐이었고.

‘어지간히도 스트레스를 받은 모양이군. 이런 말도 안 되는 상상이나 하고 있다니.’

엔리케는 가까스로 비약으로 가득 찬 상념을 떨쳐내고는 의자를 뒤로 젖혔다.

그럼에도 잠을 청할 수는 없었다.

그 외에도 처리해야 할 일은 무수히 많이 남아있었으니까.

* * *

모처럼의 휴식 기간이다.

카타리나와 천마 사이에 어떠한 관계가 있는지 정도는 알아보는 것도 중요한 일이긴 하지만, 당장 처리해야 하는 급선무는 아니었다.

그보다 신경 쓰이는 건 솜니엄리버레이터가 지금 뭘 하고 있느냐였으니까.

오래도록 써먹어야 할 장기 말인 진조가 빠르게 퇴장당했으니, 분명 새로운 방안을 모색해야 할 터.

그럴 만한 여력이 있을지는 의문이지만.

원작에서 진조는 꽤 오랜 시간 동안 동유럽의 패자로 군림했다.

그런 놈이 채 1년조차 활약하지 못하고 사라졌으니, 나름대로 꽤 긴 시간을 번 셈이었다.

‘이젠 재미 좀 보며 살아도 되는 거겠지.’

방학 동안 뭘 하며 지낼지 고민하던 찰나, 전화기가 요란한 소리로 울어댔다.

“여보세요.”

­어, 나다. 윌리엄.

“예, 영감님. 무슨 일이세요?”

­전할 말도 있고, 안부도 물을 겸 전화했지. 살아있는 걸 보니 그 시건방진 모기 새끼는 잘 조져버린 모양이야?

“네, 그랬죠.”

­그것참 다행이구만! 죽었으면 조금 슬펐을 거야. 안타깝게도 자네 같은 병신은 드물거든!

그래, 이 영감은 항상 이랬다.

나쁘다는 의미는 결코 아니다.

정감 가서 좋다는 뜻이지.

나와 절친한 이들이라도 이렇게 자주 내 안위를 물어보는 인물은 그리 많지 않을뿐더러, 그 인물들조차도 연인을 제외하면 사실상 없다시피 하니.

스승을 자처하고 있는 니힐리스만 봐도 그렇지 않은가.

별다른 이야기도 없이 나타났다가, 할 말을 전하고 나면 또 홀연히 사라지는 그런 사람인데.

반쯤은 농담이지만.

“영감님 덕에 한시름 덜었습니다. 물건까지 알아서 바꿔 넣어주실 줄은.”

­원래 고객을 유지하려면 120%를 만족시켜줘야 하는 법이야.

“그나저나, 하실 말씀이란 건 뭡니까?”

­아, 그거 말이지. 크흠.

윌리엄은 보기 드물게 뜸을 들이며 운을 떼지 않았다.

보통 윌리엄은 화끈하게 일단 내뱉고 보는 성격이란 걸 감안하면 이상한 일이었다.

대체 무슨 일이길레 그러는 걸까.

­실은 말이지. 네가 말한 그 요상한 돌 쪼가리. 몇 개 구하는 데 성공했어. 근데 이거, 대체 뭐 하는 물건이야? 고작 이거 몇 개 구한다고 이런 위협을 겪어야 할 줄은 몰랐거든. 그래서 일단은 수집을 보류하고 있다.

위협이라 함은, 솜니엄리버레이터의 졸개 놈들이 따라붙은 걸 이야기하는 거겠지.

그나저나 그 자식들이 벌써 이걸 모으고 있을 줄은 몰랐다.

작중에선 중후반부는 되어야 등장하는 물건인데.

철저히 준비해왔다는 말이 사실이긴 한 모양이군.

“어떤 일이 있었는지 자세히 설명해주실 수 있겠습니까? 대충은 알 것 같거든요.”

­처음 이걸 구한 곳은 보츠와나 칼라하리 사막이었지. 워낙 외진 땅이다 보니 아무도 발견하지 못했던 모양이야. 그때까지만 해도 별것 없는 물건인지 알았는데.

“네.”

­문제는 그다음부터였어. 두 번째로 그 돌멩이를 발견한 곳은 암시장이었지. 예나 지금이나 특이한 보석은 수집가들에게 인기가 많다 보니, 어느 정도의 지출은 생각하긴 했었지만, 그걸 감안해도 이상할 정도로 높은 가격을 부르는 놈이 하나 있더라고. 심지어 미련이 많이 남았는지, 물건을 수령하고 나서도 내 부하를 졸졸 쫓아다닌 모양이더라.

“그 뒤론 분쟁까지도 이어졌겠군요.”

­맞아. 세 번째부터는 각성자까지 대동해왔더라고. 직접적으로 맞붙지는 않았지만, 살인까지도 마다하지 않겠다는 의지가 보이더라.

미리 모아두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외부에 자신들의 정체가 알려지는 걸 극도로 꺼리는 놈들이 전면전까지 불사하면서도 빼앗으려는 물건이라면, 필히 놈들에겐 무척이나 중요한 물건이란 소리겠지.

그 정체가 무엇인지는 아직 파악하지 못했지만 말이다.

­그러니, 자네는 나에게 이 물건이 뭔지 설명을 좀 해줘야 할 것 같아. 어디에 쓰는 물건인지도 모르는데 위험수당까지 지불해가면서 구할 가치가 있는 물건인지는 잘 모르겠거든.

“영감님을 쫓아다니던 놈들의 정체는 ‘꿈 해방자’, 또는 ‘솜니엄리버레이터’라는 이름으로 알려진 빌런 조직입니다. 놈들은 꽤 오래전부터 그 돌을 찾아다녔고요.”

­용도는?

“정확하게는 모르지만… 간략하게 설명하면 소원을 이루어주는 돌 정도로 압니다.”

“하, 무슨 돌멩이의 요정 지니라도 안에 들어있는 거냐? 뭐, 전 세계에 있는 인간들에게 저마다의 초능력이 생겼을 때도 비슷한 반응을 보였으니, 돌멩이의 요정이라고 없으리라는 법은 또 없겠지.”

지나치게 축약해서 설명한 감이 있긴 하지만, ‘소원을 이루어주는 돌’이라는 설명만큼 쉽게 설명할 수 있는 단어는 또 없으리라.

그야 저 돌은 현실을 조작할 수 있는 힘이 깃든 돌이니까.

당연하게도 아무 소원이나 마구잡이로 이루어주지는 않는다.

사용하기 위해선 특정 조건을 만족해야 한다는 이야기도 있었고.

게다가, 돌의 크기에 따라 그 힘이 제각각인지라, 대체로는 가벼운 현실만을 바꿀 수 있는 걸로 안다.

‘손에 쥔 사과를 바나나로 바꾸고 싶다’든가, ‘기분이 좋아졌으면 좋겠다’ 정도.

‘부자가 되고 싶다’나, ‘천재가 되고 싶다’ 등의 추상적이고 어려운 주문도 들어주지 못하는 건 아니지만, 그러기 위해선 그만큼 많은 양의 돌이 필요하다.

그래도 원숭이 손처럼 비틀어진 방향으로 소원을 해석하진 않는 게 그나마 다행이긴 하다만, 문제는 내가 아는 건 그뿐이라는 거지.

소원의 크기와 돌의 크기가 어느 정도로 비례하는지, 어떠한 조건을 만족해야 하는지, 그 돌의 정체가 무엇인지, 전혀 아는 게 없다.

“대충 설명한 거긴 하지만, 아무 소원이나 죄다 들어주는 행운의 요정과는 다릅니다. 사용하기 위해선 어떠한 까다로운 조건을 만족해야만 하고, 어떻게 그 조건을 만족해도, 대단한 소원을 빌기 위해선 아주 많은 양의 돌이 필요하다고 알고 있거든요.”

­음, 듣고 보니 영 이상한 내용이군.

“어떤 점이요?”

­설명을 들어 봐도 이 돌에 그만한 가치가 있는지는 전혀 모르겠거든. 비슷한 능력을 가진 이들이 이미 세상에 존재하고 있잖아? 자네의 말에 따르면, 이 돌은 ‘카오스 조작’과 비슷한 힘을 품고 있어. 어떠한 조건을 만족하면, 특정한 미래로 유도할 수 있는 능력 말이야.

“네! 네! 맞아요. 뭐라고 설명해야 할지 감이 안 잡히던 차였는데, 카오스 조작이 이라고 설명하니 딱 알맞네요.”

­그래, 카오스 조작과 비견될 정도라면 충분히 대단한 돌인 건 맞아. 하지만, ‘그 값어치를 하느냐?’는 완전히 다른 문제거든? 세상엔 엄청난 능력을 지닌 각성자가 차고 넘쳐. 직접적으로 현실을 조작할 수 있는 각성자에게 대가를 지불하든, 자신의 진가를 깨닫지 못한 신출내기 허접 각성자를 꼬드기든, 여러 가지 방법으로 소원을 이룰 수 있다고.

그렇겠지.

나만 해도 미래 예지가 있다는 사실이 알려진 뒤로 로또 당첨 번호를 물어보는 사람이나, 대박 날 주식에 대한 정보를 조금 풀어달라고 부탁하는 사람이 엄청나게 꼬였었으니까.

그런 미래는 예지하지 못한다고 못 박은 뒤로도 관심은 좀처럼 끊어지질 않았고.

“그렇겠죠.”

­근데, 내가 이 돌에 얼마를 부었는지 알아? 자그마치 천만 달러야. 천만 달러. 손톱만 한 돌쪼가리에 요정님이 깃들어 있어 봐야 무슨 소원을 이뤄줄 수 있겠어? ‘버스 옆 좌석에 앉은 병신새끼를 쫓아내 주세요’ 정도가 끝일 텐데. 근데, 나와 같이 경매에 참가하고 있던 녀석은 돈만 있더라면 진짜로 이걸 살 기세였다니까?

“그만큼 필요한 이유가 있는 거 아닐까요?”

­그래! 놈들은 이 돌이 필요한 다른 이유가 있는 거야. 허접한 소원 따위를 이루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냥, 많이 모아서 큰 소원을 빌려는 게 아닐까요? 뭐 세계를 지배하겠다, 라는 둥. 그런 거요.”

­애 같기는. 그럼 돌을 악착같이 모을 이유가 뭐가 있겠냐? 그냥 돈을 풀어다가 빌런들 몇몇을 섭외한 다음, ‘적대적인 사이에 놓인 히어로들과 사이가 좋아지고 싶다’ 정도의 소원만 빌면 얼마든지 세계를 지배할 수 있어. 근데도 돌을 꾸준히 모으고 있다는 건, 그보다 훨씬 큰 스케일의 목적이 존재한다는 거야.

…그럴지도 모른다.

놈들은 어떤 계획을 진행하는데 차질이 생기더라도, 이 돌은 기어코 쓰지 않으려는 모습을 보였으니까.

그 말은, 최종적인 목표를 이루기 위해선 최대한 많은 돌을 아끼고 있어야 한다는 뜻이었다.

“듣고 보니 그쪽이 훨씬 일리 있는 주장이네요. 그런 시답잖은 목표라면 굳이 돌을 아끼고 있을 이유가 없을 테니.”

­흥미롭군. 어쩌면 진조 따위와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큰 사건이 될지도 모르겠어. 그래서, 앞으론 어떻게 할 참이지?

“영감님은 어떨 때 재미를 느끼십니까?”

­통장을 볼 때?

“아뇨, 그런 것 말고요. 남이 열심히 쌓아놓은 카드 탑, 무너트릴 때 즐겁지 않습니까?”

­아, 물론이지. 아주 즐겁고 말고.

윌리엄이 호방하게 웃었다.

내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깨달았다는 듯이.

“저는 이 돌을 사용할 겁니다.”

­놈들이 사용하지 못하게 말이지?

“물론 그 목적도 있지만, 그것보다 훨씬 재밌어지려면, 이런 소원을 빌어야하지 않겠습니까.”

­어떤 소원?

“‘이 돌이 내 수중에 더 많아지면 좋겠다.’, ‘솜니엄리버레이터 자식들에겐 이 돌이 모이지 않으면 좋겠다.’ 어떻습니까. 아주 재밌어질 것 같지 않아요?”

­…최고야. 내가 조금만 더 젊었더라면 자네를 사업 파트너로 삼았을 텐데. 아쉽군.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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