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2화 〉 감시자.
* * *
나는 일찍이 그 의뭉스러운 가식을 세실리아로부터 벗겨내고자 노력했으나, 늘 실패로 돌아가기 마련이었다.
그렇기에 지금 이 상황이 더할 나위 없이 만족스러웠다.
원탁에 둘러앉은 이들 태반은 이제 세실리아에게 미심쩍은 구석이 있다는 걸 알아차린 데다, 충직한 수하들에게 보필조차 받을 수 없는 마당이 되어버린 탓에, 그녀는 꺼풀 아래의 본색을 드러내야만 했으니까.
그 귀찮은 짓거리를 더 이상 시도할 필요가 없어진 것이다.
“슬슬 이야기해주시죠. 뭘 숨기고 계셨는지.”
“그래요. 이제라면 말해도 상관없겠죠.”
마침내 터놓고 이야기할 수 있어서 후련하다는 듯한 말투였다.
숨기고 있던 속내를 드러내야 할 판에 어떻게 평온을 되찾은 걸까.
궁색한 변명 몇 가지를 떠올렸다고 안심하는 것은 아닐 터.
허튼소리에 순순히 속아 넘어가 줄 정도로 순진한 녀석은 여기에 몇 없다.
본인도 알고 있으리라.
약간이라도 물어뜯길 빌미를 주면 안 된다는 사실을.
따라서 세실리아의 다음 말이 궁금해질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제가 여러분을 섭외하면서 했던 말, 기억하세요?”
“대충은요. 저마다 꼭 필요한 구석이 있으니 이 사람들로 구성해야 한다고.”
“사실, 그 이야기는 제겐 별로 중요한 이야기가 아니었어요. 애초에 그 인원을 구성한 건 제가 아닌 감시자 측이었거든요.”
“세실리아씨도 감시자인 건 마찬가지 아닙니까. 책임을 돌리려 하지 마시죠.”
“‘감시자 해먹는 것도 신물난다’는 투로 말씀하시던 분이, 이제와서 상부의 명령이었다는 핑계를 대는 것도 이상한데요.”
오른쪽에선 카타리나가 쏘아붙이는 한편, 왼쪽에선 드물게 천현우가 그 책망을 거들고 있었다.
세레나는 흥미롭다는 듯이 그 광경을 지켜보는 중이었고.
둘은 어느 상황에서나 주로 과묵한 태도를 유지하는 편이었다는 점을 되짚어 보면, 유별난 장면임은 분명했다.
가까운 사이인 나조차도 한 번도 보지 못한 면모였으니까.
하나, 세레나 같은 시선으로 세실리아를 바라보는 이는 단 한 명도 없었다.
나머지는 그 비판에 동조한다는 듯이 가라앉은 입꼬리를 한 채 차갑게 세실리아를 응시할 뿐이었다.
아마 우리가 겪었던 것을 세레나 또한 고스란히 겪는다면 마찬가지로 비슷한 반응을 보일 것이다.
그러거나 말거나, 세실리아는 아랑곳하지 않고 자신의 이야기를 계속해나갔다.
“뭔가 이상한 걸 눈치채셨을 겁니다. 비대칭 전력으론 손꼽히는 조직 중 하나인 감시자가, 풋내기에 불과한 생도들 따위를 전선에 내보내고자 한 이유가 뭘까, 하는 모순 말이죠.”
“일찍이 감시자 측에서 우리를 주시하고 있었기 때문이겠죠.”
“정확해요. 미츠루 가를 장악하는 데 성공하셨다더니, 중요한 정보들도 많이 입수하신 모양이군요. 아이나 생도.”
“그럴 필요조차 없는 이야기입니다. 너무나 뻔히 보이는 수니까요. 미래시를 가진 각성자, 거짓과 참을 구분해내는 각성자, ‘칼라일’의 차녀. 모두 감시자가 탐을 낼 수밖에 없는 인재들 아니던가요. 저는 말할 필요도 없을 테고.”
“가문의 실권을 쥐게 된 것을 축하한다는 의미로 말한 것뿐이에요. 그렇게 뻔한 이야기를 제가 모르고 말했을 리는 없잖아요?”
감시자가 우리에게 눈독을 들이고 있었다니.
부끄럽지만, 나는 생각조차 하지 않고 있던 부분이었다.
심지어 감시자 이야기를 가장 먼저 꺼낸 것은 나였는데 말이다.
그나마 아이나를 제외한 나머지 생도는 예상치 못했다는 듯한 반응을 내비치고 있었으나, 세레나와 에스메랄다에겐 일말의 감흥조차 주지 못하는 너무나 당연한 이야기였는지, 지루하다는 기색으로 하품만을 뱉어냈다.
“그래서, 감시자가 뒤에서 그런 사주를 한 이유가 뭔데요? 애초에 세실리아씨는 감시자 자격을 포기하셨잖아요.”
“저는 제 자신의 가문, 발레리를 내부에서 감시하기 위해서 감시자가 된 사람이죠. 저희가 계승 사상력을 독점하다시피 하고 있다는 사실은 공공연한 비밀이니까요. 외부에서 탐탁지 않은 눈으로 볼 게 뻔하기에, 스스로 감시자가 되길 자처했습니다.”
“그렇단 말은, 단순히 책무에 질려서 그만둔 것만은 아니라는 소리군요. 가문의 내란을 종식시키고 나면 가주 노릇까지 겸해야 하는데, 이는 감시자의 첫 번째 규칙, ‘중립을 유지할 것’에 위배되는 사항이니까요.”
“잘 아시네요. 그러면 거기서 한 발짝 더 나아가볼까요. 우리가 어떻게 생각할 것 같으세요? 눈먼 감시자만이 남은 가문에 발을 들이려 하는 미지의 3세력, 심지어 그들이 평소에 경계하던 이들이라면.”
모의를 가지고 작당했으리라고 여겼겠지.
아이나의 참전은 발레리의 핏줄로부터 계승 사상력들을 훔쳐내려는 미츠루 가(家)의 야욕으로 보였을 테고,
한때 코스모스의 번견으로 이름이 자자했던 레온, 그의 누이 프리실라의 갑작스러운 움직임은 코스모스와 적대적인 관계를 유지하던 감시자에겐 멸문한 발레리로부터 정보를 캐내려는 수작으로 보였을 것이며,
천현우는 진조의 피를 가장 효율적으로 써먹을 수 있는 인물 중 하나니,
그 모든 이와 친분을 가진 데다, 발레리 가(家)의 몰락이란 미래마저 예견할 수 있는 내가 뒷배에 존재할 거란 추론을 떠올린 것은 그리 편향된 시선은 아니었다.
“…꺼림칙하겠군요.”
“그래요. 우리는 여러분이 어떤 생각으로 움직였는지 알 수가 없어요. 음험한 의도를 가진 누군가가 배후에서 지령을 내렸을 수도 있잖아요? 아직 고등학생 나이에 불과한 애송이들이라곤 해도 의심할 여지는 다분해요.”
“난 귀여운 우리 제자들을 믿지만, 그래도 저 세실리아라는 인간의 말이 이해는 가. 요즘 애새끼들은 워낙 영악해서리.”
세레나가 킬킬대며 손을 마구 휘저어댔다.
어째서 말과 행동이 따로 노는 것인가 했지만, 이내 그 손짓이 뭘 의미하는지 알게 됐다.
손이 ‘명백히’ 누군가를 가리키고 있었으니까.
물론 그런 유치한 도발에 넘어갈 이들도 아니었다만.
“즉, 확인이 필요했다… 이 말씀이시군요.”
“맞아요. 정말로 선한 의도였는지, 아닌지 우리로선 알아볼 필요가 있었죠.”
“어쩐지, 인맥이라면 차고 넘칠 분께서 이렇다 할 장비나 대원조차 제대로 준비하지 못하는 것에 의구심이 들었었습니다만, 단순히 우리를 시험해보기 위함이었군요. 대양의 눈물도 단순히 우리를 지켜보기 위한 도구에 지나지 않았던 거고.”
“부정하진 않겠습니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나머지 이유에 지나지 않아요. 상부에선 여전히 지켜봐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저는 여러분을 믿어도 괜찮겠다고 생각했거든요. ‘감시자’는 도구로 이용했을지 몰라도, ‘세실리아’는 순수한 의도로 보낸 선물이었으니, 너그러이 용서해주시길.”
천천히 천현우 쪽으로 눈동자를 굴렸다.
녀석도 그 몸짓의 의미를 곧잘 알아차리고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참’이라는 뜻이었다.
“하아, 참 난감한 상황이 아닐 수 없네요. 결론적으로 말하면, 지금까지 우리는 감시자의 손에 놀아났던 것에 불과하다? 물론 뜻이 일치한다고 바로 손을 잡아버린 저 머저리 녀석의 문제도 크긴 하지만.”
“죄송합니다. 뭐라 드릴 말씀이 없네요.”
“으음. 애들을 강하게 키워야 한다는 말에 동의하는 편이긴 하지만, 이건 가벼이 넘어가긴 어렵겠는걸.”
줄곧 턱 끝만을 매만지고 있던 세레나의 손에는 어느샌가 칼이 쥐어져 있었다.
그 끝은 세실리아의 목 아래를 겨누다 못해 파고들어, 위험천만한 상황을 연출해내는 중이었고.
“전 감시자 언니, 난 무식한데다, 에둘러 말하는 것에도 익숙하지 않아서 말이지. 그렇게 베베 꼬아서 말하면 잘 못 알아먹거든? 좀 더 실용적인 이야기를 나누는 게 어떨까? 이를테면, 아직 실토하지 않은 이야기들이라든가. 잘못하면 조금 더 힘을 줘버릴 것 같아서 말인데, 최대한 빨리 말하는 게 어때?”
‘빌런도 아무나 해 먹는 건 아니었구만.’
지나치게 구시대적일 정도로 낡은 방식의 겁박 멘트였지만, 효과는 제법 괜찮았다.
방금까지 잘 대화하던 상대의 목덜미에 곧바로 칼을 쑤셔박을 수 있을 정도로 대담한 사람이 몇이나 되겠는가.
압도적인 무력을 앞세우고 있다곤 해도, 진정 악당스러운 사고를 가진, 오직 세레나만이 할 수 있는 행동이었다.
“여러분을 속여 위험을 감수하게 하고, 사지로 내몰았던 것, 회유하려 들었던 것까지, 다시 한번 진심으로 사과드리겠습니다.”
“회유. 드디어 본 의제가 나오셨군. 쓸데없는 미사여구 따윈 다 잘라내도 좋다 이거야. 위험을 감수하게 한다는 둥, 어쩐다는 둥, 그건 네가 말해주지 않아도 얘들이 진작 알고 있던 사실이었어. 앞선 사과들은 아무짝에 쓸모없다고.”
“박성진 생도는 어느 히어로팀에도 소속되지 않을 거란 의사를 표했었죠. 그 말인즉슨, 감시자 측에서 굴려 먹기엔 이보다 더 좋은 사람이 없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다른 이들도 박성진 생도의 말이라면 고분고분 잘 듣는다고 했고요.”
“그러니까, 구워삶아서 니들 개처럼 부려 먹으려고 했다는 거잖아. 맞아, 아니야.”
“그 정도까진 아닙니다만”
“어허.”
뭉툭한 칼자루가 세실리아의 가슴께를 쿡쿡 찔러댔다.
그럼에도 세실리아의 꼿꼿한 태도는 개선될 여지를 보이지 않고 평행선만을 그리고 있었다.
이는 세실리아가 거만한 인간이라서가 아니라, 지금과 같은 자세를 고수하는 편이 낫다는 걸 인지하고 있어서일 가능성이 더 컸다.
넙죽 엎드린 채 머리를 조아린다고 해서 처지가 나아질 거였다면 진작 그리했을 위인이니까.
문제는 지금 상대하고 있는 사람이 세레나라는 점이었다.
좀스럽게 굴었다간 되려 역효과만 되불러 일으켰을 터.
“…유일하게 다른 사람이 있다면 카타리나 생도 정도일까요.”
“카타리나? 얘는 어쩌다가 끼어든 애일 뿐이잖아? 이번 사건과 무슨 연관이 있다고?”
“급하게 참가 의사를 밝혔음에도 순순히 받아준 이유가 뭐겠어요. 상부에서 허락한 겁니다. 다른 이들에 비하면 관심도가 낮다곤 하나, 카타리나 생도도 주시해야 할 대상에 포함되어 있었으니까.”
“이유는?”
“정확하겐 모릅니다. 진심으로. 저도 감시자들이 어떠한 일을 추진하고 있는지 모두 알 수는 없으니. 그나마 아는 것이라곤, ‘정호경’이라는 인물이 되살아난 이후로 카타리나 생도에 대한 감시 빈도가 급격하게 증가했다는 것뿐입니다.”
‘정호경이라면 전대 천마잖아. 그것도 불사조의 손에 죽었다고 알려진. 그런 놈이 되살아났다고?’
여러모로 신빙성이 전혀 없는 이야기, 아예 불가능한 이야기는 또 아니었다.
부활 능력을 사용할 수 있는 각성자 또한 정말 드물게 존재했으니까.
아티팩트 중에서도 관련된 물건들이 몇 가지 있었고.
이미 주요 사상력인 천극천체가 뽑힌 마당에 그놈을 되살려서 어디다 쓰려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사용할 가치가 전무한 것은 아니었다.
그보다 주목해야 할 점은, 카타리나가 그 전대 천마와 연루되어 있다는 사실이었다.
대체 무슨 연결고리가 있어서?
“보아하니 거짓말을 하는 것 같지는 않네. 좋아, 이번엔 가볍게 넘어가 주도록 하겠어.”
은빛이 번뜩이자, 돌풍이 일었다.
몸을 뉘인 그녀로부터 색과 온기를 흡수한 카펫이 붉게 물들었다.
반 박자 늦게 원탁에서 떨어진 그것은 둔탁한 소리를 내며 본래 매달려 있던 장소를 향해 굴러가기 시작했다.
“걱정하지 마. 떨어지자마자 엘릭서 좀 들이부으면 다시 붙으니까. 좀 아깝긴 한데, 경고로는 그만한 게 또 없어요. 몇 번 실험해 봐서 잘 알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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