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1화 〉 두 명의 사정.
* * *
러시아의 한 별장.
승리를 기리기 위한 파티가 열리는 장소치곤 다소 가라앉은 분위기를 띠고 있었다.
사실 그럴 수밖에 없는 상황이긴 했다.
이겼다는 사실도 분명 중요한 건 맞지만, 많은 사람이 죽었다는 사실도 그에 못지않게 중요하니까.
그들을 추모하기 위해서라도 지나친 방종은 자중하는 분위기였다.
“다들 살아 돌아온 건 그래도 다행이네.”
“그러게나 말이다.”
불가피한 희생이었다 치부하고 넘기기엔 흘린 피가 너무 많았다.
심지어 이번 사건에서 죽은 이들 대다수는 전투에 휘말려서 죽게 된 것조차 아니었다.
그냥 더럽게 재수가 없어서, 그뿐이었다.
“이렇게 될 줄 알았으면 한다고 하지 말았어야 했는데.”
“히어로가 되기 위해선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렇게 생각하는 수밖에.”
의외로 담담하게 대답한 것은 천현우였다.
분명 ‘솎아내기’ 때문에 멘탈이 엄청나게 깨져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자책하지 마라. 박성진. 여기 있는 모두가 자신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지 않았나. 게다가, 마지막에 네가 그런 기지를 발휘하지 못했더라면, 난 살아서 돌아오지 못했을 수도 있었다.”
“이 정도 일이 될 거라곤 진작 각오하고 있었어. 실전은 냉혹한 법이니까.”
“풀 죽어 있을 이유가 뭐가 있어. 우린 할 만큼 한 거야.”
하기야 클로에와 에스메랄다조차 외람된 임무를 맡은 것치곤 무척이나 수습을 잘한 것이라며 전언으로 우릴 칭찬했으니, 이 정도면 목표 이상의 성과를 거뒀다 봐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 과정에서 불미스러운 일이 일어났다곤 해도 말이다.
다만 그 일을 주도하고, 눈앞에서 목격한 천현우나 아이나가 괴로워하지 않을까 하는 걱정은 있었다.
아니라서 다행이었지만.
죄책감보단 안도감이 느껴지는 대화가 오가고 있었으니까.
그렇게 다들 이번 사건에 대한 감상을 정리하던 중, 별장을 관리하던 세실리아의 시종 중 한 명이 다가와 놀라운 소식을 전했다.
“대화 중에 실례지만, 여러분을 찾아오신 손님이 계십니다. 세레나라는 분이던데.”
“설마 저희 교수님이라고 소개하시던가요?”
“네, 맞습니다. 옥루에서 여러분을 기다리고 있겠다고 하셨습니다.”
이 먼 곳까지 찾아올 생각을 했다니.
제자들을 아낀다는 말이 빈말은 아닌 모양이었다.
클로에처럼 축하한다는 말로 적당히 넘어가도 충분했을 텐데, 짧은 휴가를 버려가면서까지 이곳을 찾아올 줄은.
“전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지금 찾아가겠습니다.”
“그럼 모쪼록 편안한 시간 되시길.”
시종은 할 일을 마쳤다는 듯이 고개를 꾸벅 숙이고는 자신의 자리로 돌아갔다.
나를 비롯한 세레나의 제자들 또한 그녀가 있는 곳으로 발걸음을 옮겼고.
* * *
“이 자식들아! 걱정돼서 한달음에 달려왔건만, 환대 정도는 해줘야 하는 거 아니니?”
“저 죽어요! 진짜!”
세레나는 날카로운 이빨로 어깻죽지를 물어뜯으며 말했다.
당연하지만 그 희생양은 나였다.
“안 죽어. 이 안 세웠으니까.”
“흉 질 것 같은데.”
“사내자식이 엄살은. 허풍 떨 여유까지 부리는 걸 보면 정말 몸은 괜찮은가 보네.”
아무리 서운했어도 그렇지, 진짜로 깨물어버릴 줄이야.
이전에도 몇 번 농으로 했던 이야기긴 하지만, 그걸 실천으로 옮길 줄은 몰랐다.
“저희는 다 괜찮아요. 바쁘신 와중에 여기까지 찾아오게 만들고, 죄송합니다.”
“내가 오고 싶어서 온 건데 무슨.”
“걱정해주셔서 고맙습니다. 그런데, 일단 성진이한테서 떨어지는 게 낫지 않을까요? 크게 다친 곳은 없다지만, 정신적으로 안정을 취해야 한다는 의사의 말도 있었거든요. 그렇게 압박하고 계시면 없던 상처도 생길 것 같은데.”
“아, 제자를 편애하는 게 싫다 이거지? 알았어.”
세레나는 사악하게 웃어 보이고는, 나머지 인원도 모두 공평하게 안아주었다.
반응은 저마다 달랐다.
프리실라와 아이나의 차갑게 가라앉은 눈에는 경멸이 깃들었고, 카타리나는 경악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으며, 천현우의 입꼬리는 귀에 걸려있었다.
그중에서도 가장 볼만했던 것은 역시 카타리나였다.
지금까지 이런 압박을 어떻게 견뎠냐는, 약간의 경외감마저 담긴 표정.
세레나의 그 돌발 행동 덕에 분위기는 느슨하게 풀어지는 듯했지만, 기뻐하긴 아직 이르렀다.
극도의 환멸감을 표하는 이가 둘이나 있었으니까.
“잘해주시는 건 감사하지만, 특정 인물 몇몇 사람에게 너무 정을 들이시는 건 좋지 않아요. 가르치는 사람은 모두에게 공평해야만 하니까. 저희도 언젠가는 이 아카데미를 떠날지 모르잖아요.”
“나라고 아카데미에 한평생 몸담으리라는 법은 없잖아? 떠나고 나면 정이 오갔던 제자를 찾아갈 수도 있는 거지.”
“교수님은 교수님의 책무를 다하는 것부터 해주시죠. 아직 떠난 건 아니니까.”
“내 가르침을 받은 이들이 잘해나가는지 점검하는 것도 내 책무의 일환이야.”
한쪽에서 무언의 욕설을 쏟아내고 있는 게 보였다.
다른 한쪽은 생글생글 웃고만 있었고.
어른의 여유라는 것을 이런 유치한 장난에서 엿보게 되다니, 참으로 아이러니했다.
“무슨 이야기를 하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소란스러워지기 전에 둘 다 그만하는 것이 어떨지.”
타이밍 좋게 들어간 카타리나의 중재 덕에, 그 이상 불화가 생기는 일은 없었다.
주변의 보는 눈을 의식한 것도 있었을 테고.
“아, 그랬었지. 뭐, 아직은 내게 자격이 없으니, 제자들을 응원하는 선에서 그쳐야겠군. 둘 다 잘해 봐. 나는 에스메랄다님께 볼일이 있어서, 이만.”
세레나는 붙잡고 있던 프리실라와 아이나의 목을 풀어주고는, 둘의 엉덩이를 톡 쳐서 내 쪽으로 밀어 보냈다.
그러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우리를 지나 별장 안쪽으로 향했다.
“…진짜 종잡을 수 없는 사람이야.”
“외모도 부담스럽고, 몸도 부담스러운데, 성격까지 친절하니 더 부담스러워.”
그게 좋은 건데, 다들 뭘 모르네.
이 중요한 사실을 입 밖으로 낼 수 없다는 사실이 야속할 따름이었다.
* * *
별장에서 제법 멀리 떨어진 곳에 위치한 작은 공터에선 선객이었던 에스메랄다가 세레나를 맞이하고 있었다.
“어서 오세요.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세레나 스튜어트씨.”
“우린 격식 차릴 사이도 아니니, 편하게 말하라고. 닭살 돋는 말투를 유지하는 것도 보기보다 어려운 일이거든. 태생이 그런 년이라서 말이지. 귀찮은 건 다 주먹으로 때려 부숴야 속이 편해지는.”
“그래도 전에 비하면 많이 유순해졌는걸?”
“그야 그렇지. 개과천선까지는 아니어도, 개망나니까지는 되지 않기로 했거든. 너랑 싸우면서, 감옥에 있으면서, 바깥 생활을 하면서 배운 것들이 좀 많아야지. 그래서, 날 찾아온 이유가 뭔데?”
“네가 아끼는 그 검, 최대한 사용을 자제해줄 수 있겠어?”
세레나의 머릿속에 여러 가지 계산이 오가기 시작했다.
아끼는 검이라 하면, 분명 다인슬라이프를 칭하는 말이었으니까.
‘다인슬라이프의 능력을 알고 있는 건 그리 놀랄 일이 아니지. 하지만, 왜 그것의 사용을 제한하려 드는지는 알아야만 해.’
세레나에게 다인슬라이프는 애검이었지만 전투에 있어 가장 선호하는 무기까진 아니었다.
뽑았을 때 그만한 리스크를 동반하는 검이었으니까.
하지만, 그 위력만큼은 철저하게 보장되었기에, 필요한 상황에선 항상 믿고 꺼낼 수 있는 무기기도 했다.
“무슨 이유 때문인데?”
“네 검, ‘필살의 저주’가 담긴 검이잖아? 그렇다면 불사의 존재도 죽일 수 있을 테고.”
“그래본 적은 없었지만, 그렇다고 확신할 순 있지.”
“그래, 난 그걸 경계하고 있어. 내가 연모하는 이가 불사의 존재거든. 그와 동시에 죽음을 바라는 존재기도 하지. 아마 네 검에 얽힌 저주를 알아차리는 순간, 분명 자신을 죽여달라고 애원할 거야. 난 그걸 막고 싶은 거고.”
다인슬라이프에 걸려있는 저주는 막강하며, 지독했다.
제아무리 영원불멸의 불사조라 한들 견뎌낼 리가 없다는 것을, 겨뤄본 에스메랄다는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에스메랄다는 바라고 있었다.
부디 그 칼끝이 자신의 스승이자, 첫사랑이었던 이에게로 향하지 않기를.
“그러니까, 네 짝사랑이 방에서 도망가지 못하게 키를 숨겨 달라. 이 뜻이지? 열쇠를 쥐고 있는 건 나 하나뿐이니까.”
“정확하게 이해했어.”
“미친년.”
“사랑하는 이와 이별하는 것은 괴로운 일이지, 동경하는 이와 이별하는 것 또한 그에 못지않게 가슴 아픈 일이고. 그 둘을 함께 잃는다면 얼마나 힘들겠어? 그는 나에게 그런 사람이야. 동경의 대상이자, 연심의 대상. 동류인 너라면 잘 알 텐데?”
“무슨 말인지 모르겠는걸.”
세레나와 에스메랄다는 서로를 마주 보고 씨익 웃었다.
말하지 않아도 다 안다는 듯이.
그럴 수밖에 없는 처지에 놓여있기도 했다.
둘은 입장만이 바뀌었을 뿐, 다른 건 모두 똑같았으니까.
동경하는 이를 마음에 두고 있으며, 그이는 언제 자신에게서 멀어질지 모르는 사람이라는 거.
사제 관계가 역전된 것을 제외하면 완전히 빼다 박은 상황이나 다름없었다.
서로가 서로를 잘 이해할 수밖에.
“나도 그 검이 너에게 얼마나 큰 가치를 지니고 있는지는 알아. 그에 준하는 수준의 무기를 꺼내서 쓴다 한들 성에 차지 않겠지. 단도직입적으로 물을게. 뭘 원해? 그 검을 사용하지 않겠다는 약조만 한다면, 무엇이든 지불하도록 할게.”
“한 가지만 묻자. 만약 이 거래가 성사된 다음 날, 네가 좋아한다는 그 자식이 급사하면 어떻게 되는 거지?”
“너와 관계된 일만 아니라면 어떠한 경우에도 상환을 요구하지 않을게. 그냥, 그 검의 정보가 외부에 알려지지 않게만 막아주면 돼.”
“음, 조건은 나쁘지 않네. 문제는, 지금 내가 바라는 게 없단 거지.”
세레나는 자신이 있었다.
어떤 상황에서도 자신이 바라는 것을 쟁취할 것이란 자신감.
오만이라고 볼 수도 없었다.
실제로 그녀는 그럴 만한 능력도 있었을뿐더러, 원하는 것은 반드시 얻어내겠다는 악착같은 집요함도 갖추고 있는 사람이었으니까.
“그게 무슨 소리지?”
“번지수를 잘못 찾아왔다고. 난 뭐든지 내 손으로 이뤄야만 직성이 풀리는 성격인 거, 너도 알잖아? 내가 누군가의 도움을 필요할 정도로 부족한 인간도 아니고 말이야. 그러면, 누굴 찾아가는 게 맞았겠어?”
에스메랄다가 그 말을 해석하는 데엔 1초조차 채 걸리지 않았다.
“…원하는 대로 해줄게. 계약 만료는 대상자 둘 중 한 명이 죽을 때까지. 이것으로 만족해?”
“앙, 나쁘지 않네.”
에스메랄다는 색안경을 벗어 던져야만 했다.
눈 앞에 있는 이 자는 ‘보기보다 괜찮은 사람’이 아니었으니까.
그녀는 ‘보기보다 괜찮은 악마’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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