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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30화 〉 포스트루드.(4) (130/173)

〈 130화 〉 포스트루드.(4)

* * *

이 일대는 영구동토가 아닌 탓에 지반이 그렇게 단단하지 않다.

게다가, 세실리아는 주변의 흙더미만으로도 모자라 산마루에서 밀려온 쇄설까지 끌어왔다.

겉으로 보기엔 아무렇지 않다곤 해도, 지저(??)는 분명 위태로운 상황일 터.

약간의 충격만 받아도 이 땅은 호수 아래로 가라앉을 것이 틀림없었다.

나는 역으로 그걸 노리는 중이었고.

차라리 약해진 지대를 먼저 공략하여, 우리가 서 있는 부분을 뭍에서 끊어내자는 취지였다.

진조를 수장시키기 위하여.

‘지면을 잘라낸다!’

예리한 검기가 모든 것을 끊어내며 나아갔다.

허나, 스티븐은 낙린참의 압도적인 기세에도 전혀 주눅 들지 않았는지, 살짝 몸을 비트는 것만으로 자색 절기(??)를 피해냈다.

‘확실히 괴물은 괴물이네. 이걸 피해?’

그래도 나 정도면 진조 선에서도 만만하게 볼 상대는 아닌 모양이었다.

오만하게 올라가 있던 입꼬리가 어느샌가 내려와 직선을 긋고 있었으니.

“제법이군. 세실리아, 마냥 애송이만 데리고 오진 않은 모양이야. 저 나이에 자색 기사단에 준하는 수준이라니. 과연 네가 너스레를 떨 만하구나. 하지만, 이 정도론 멀었다!”

스티븐이 시야에서 사라졌다.

흐릿한 잔상 정도는 보이고 있었으나, 본체의 움직임은 전혀 읽어낼 수 없을 정도로 빠른 움직임이었다.

우리를 추격하며 냈던 속도가 우스울 지경이었으니.

가까스로 반응한 세실리아가 어떻게든 이 상황에 대처하기 위해 겹겹이 토벽을 세워 보고 있었으나, 놈은 그런 것은 방해조차 되지 않는다는 듯이 순식간에 그 장해물들을 돌파해, 내 앞에 도달했다.

그리고 그의 손끝이 내 목젖을 강타했다.

“컥…!”

충격이 척추를 타고 온몸에 전해졌다.

정신만은 가까스로 붙잡을 수 있었으나, 격렬한 몸싸움 같은 건 한동안 할 수 없을 것만 같았다.

­그러게 왜 굳이 나서서는!

­질책하지 마세요. 카타리나 생도. 덕분에 우리가 매우 유리해졌으니까. 박성진 생도는 자기 몫을 다한 겁니다.

­그게 무슨 소립니까.

­곧 알게 될 겁니다.

세실리아의 생각이 들려오기가 무섭게, 격렬한 진동이 땅 전체를 휘감기 시작했다.

그 흔들림은 멎어 들 줄 모르고 점점 강해져만 갔으며, 내가 그었던 줄금에 불과했던 틈새는 완전히 갈라져 땅에서부터 멀어지려 하고 있었다.

평평했던 지면 또한 어느샌가 호수 쪽으로 기울었고.

끝자락은 이미 반쯤 잠긴 모양새였다.

“…설마!”

“그래, 여기서 끝장을 보는 거야. 스티븐.”

스티븐의 낯짝에 당황한 기색이 드리웠다.

뭍에서 멀어지는 순간 승산이 사라진다는 것을 그도 눈치챘는지, 공격적인 태도를 거둬들이고 재빠르게 반대편을 향해 내달리기 시작했다.

허나, 호락호락하게 당해줄 세실리아가 아니었다.

그조차 뚫을 수 없을 정도로 두터운 토벽을 세우고, 발아래는 진흙으로 묶어, 어떻게든 도주를 늦추고 있었으니까.

“이미 도망치긴 늦었어.”

“…그렇다면, 저승길 길동무로라도 삼아야겠군.”

스티븐의 눈에 귀기가 서렸다.

그리고 사력을 토해낼 기세로 우리를 몰아치기 시작했다.

작금의 공세와는 비교가 안 될 수준이었다.

세실리아의 수하 반절 이상이 5분 만에 리타이어할 정도였으니.

심지어 그 시체로부터 피를 빨아들인 스티븐은 지칠 기미조차 보이지 않고 있었다.

­추리고 추려온 부하들이라면서요. 전혀 도움이 되지 않고 있는데.

­제 불찰입니다. 저렇게 많은 이들의 피를 빨아들였을 줄은 상상 못 했어요.

­이거, 승산은 있는 거 맞습니까?

­…아이나 생도와 천현우 생도 쪽의 상황에 따라 갈릴 것 같네요.

* * *

처음엔 쉬운 일이라고만 생각하던 그들이었다.

허나, 이 또한 현장에서 싸우는 것 못지않게 어려운 일이라는 걸 깨닫는 데엔 그리 긴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발작 증상을 일으키다 죽는 이들이 점점 많아졌으니까.

“끄아아아!”

“이래 가지곤 안 되겠어. 사상력 소모의 부담이 너무 심해. 구하지 못할 것 같은 녀석들은 미리 처리해야 할 것 같아.”

이는 공포에서 오는 착란 증세가 아닌, 몸의 양분을 흡수당하는 고통에 의한 것이었기에, 아이나가 통제하는 데도 한계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설마, 그냥 죽이자고?”

“그래, 내키지는 않는 방법이지만, 내가 정신을 통제하고, 네가 피를 뽑아내는 속도보다, 진조가 양분을 흡수하는 속도가 훨씬 빨라. 살려낼 수 있는 사람부터 살려야 해.”

“…꼭 그렇게까지 해야만 하는 거냐? 미츠루 가문의 일 처리에 손속이 없다는 것쯤은 나도 알지만, 너무한 처사라고 생각이 드는데.”

“그랬다면 처음부터 이 이야기를 꺼냈겠지. 나를 인정머리 없는 괴물로 몰아가지 마. 작업 속도로 보나, 내 사상력의 고갈 속도로 보나, 이 숫자의 인간들을 전부 구조하는 건 불가능해. 곧 있으면 지배가 모두 풀린다고. 좀비 아포칼립스 영화 한 편 찍어보자 이거야?”

천현우는 이를 악물었다.

‘그런 잡무 따위야 아무렇지도 않게 해치울 거라 으스대고 왔건만, 이 얼마나 무력한 자신인지!’

아이나의 탓을 할 수도 없었다.

방금까지도 그녀는 분명 최선을 다하고 있었으니까.

안 그래도 사상력 소모가 막심한 서드 어빌리티인데, 사용할 대상도 한둘이 아니니, 사상력이 바닥을 드러내고 있다는 말도 거짓은 아닐 터였다.

“…살려내지 못할 거라고 생각되는 사람들부터 추려내자.”

* * *

에스메랄다의 보호와 프리실라의 엄호를 받고 있음에도, 카타리나는 스티븐의 움직임을 따라가는 것조차 버거워했었다.

몸 곳곳에 생겨난 상처만 세어 봐도 스티븐의 적수가 되기엔 부적합하다는 게 뻔히 알 수 있는 사실이었다.

한데 어찌 된 일인지, 지금의 카타리나는 놀랍게도 놈과 호각을 겨루고 있었다.

아무리 보아도 스티븐의 기량이 급격하게 저하됐다는 것 말고는 설명이 되지 않는 상황이었다.

“인질들까지 죽여버리다니, 어지간히도 급했던 모양이군.”

“…인질들을 죽이다니?”

“내 피주머니들 말이다. 너희들이 죽이지 않았”

그는 대답할 수 없었다.

카타리나의 정권이 놈의 턱을 완전히 박살 내버렸기 때문이었다.

물론 스티븐의 답변 따위 듣지 않고도 세실리아는 금방 답을 유추해냈지만.

­이제야 알겠군요. 스티븐이 갑자기 약해진 이유.

­뭡니까.

­아이나, 천현우 조쪽에서 문제가 있던 모양입니다. 피주머니, 즉, 스티븐에게 생명력을 공급해주고 있던 사람들 몇몇을 죽인 모양인데요.

­그렇다는 말은, 놈은 붙잡고 있던 무고한 이들의 생명력을 흡수해서 강한 힘을 내고 있었다는 이야깁니까? 생명력이 빨려 나간 이들은 죽고?

­그렇다고 생각해야겠죠. 저 자신이 진조가 아니니 정확하게는 알 수 없지만.

그 말에 카타리나의 머리에 핏줄이 돋아났다.

‘좆됐네.’

정의감이 투철하다는 건 분명 좋은 일이다.

하지만, 냉정을 유지해도 간신히 이길까 말까 한 녀석을 상대로 이성까지 잃었다?

맞설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진정해. 카타리나. 침착하지 않으면 이길 수 없는 상대야.

­박성진 생도 말이 전적으로 옳습니다. 차분함을 유지하셔야 해요.

­모두에게 사죄의 말씀부터 드리겠습니다. 책임은 나중에 반드시 지겠습니다. 죄송합니다.

그녀는 우리의 만류를 무시하고 앞으로 내달렸다.

진노가 담긴 권각엔 일말의 주저도 없었다.

그저 모든 것을 분쇄해 나갈 뿐.

그 파괴적인 위력에 스티븐조차도 주춤하고 뒤로 물러설 정도였다.

기회를 다시 잡은 스티븐에게 금세 나가떨어졌지만.

카타리나가 우위를 점한 것이 잠깐이었다곤 하나, 그사이에 입은 피해가 꽤 컸던 모양인지, 놈은 섣불리 앞으로 나서지 않았다.

그녀가 꽤 긴 시간을 벌어준 덕분에 나도 몸을 추스르고 대열에 합류할 수 있었고.

하지만, 전황은 내 참전에도 여전히 극단적으로 불리한 상황이었다.

어느 한 명이라도 더 쓰러지면 균형은 완전히 무너질 게 뻔했다.

‘일단은 어떻게든 시간을 끌어야겠군. 아까는 충격을 받아서 쓰러졌을 뿐, 몸은 멀쩡하니 조금은 버틸 수 있겠지.’

나는 덤비라는 의미로 손가락을 까딱였다.

도발의 효과가 먹혀든 것은 아니었겠지만, 놈도 나를 향해 달려들었고.

아마 현재 싸울 수 있는 사람 중에선 내가 가장 약한 게 사실이니.

­옵니다. 박성진 생도의 마나글레이브를 노리는 것 같군요.

­압니다. 그 정도쯤은.

애초에 낙린참처럼 단발 위력이 강한 기술부터 보여준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가장 근본적인 이유야 이 지대를 호수 아래로 가라앉히기 위함이었지만, 놈에게 검사라는 인상을 각인시키기 위함도 있었다.

그래야 내 주먹을 경계하지 않을 테니.

예상은 빗나가지 않았다.

스티븐은 검을 쥔 오른손부터 노려왔으니까.

‘클로에에게서 배운 게 효과가 있다면 좋을 텐데.’

곧바로 오른팔을 거둬들인 뒤, 마나를 잔뜩 실은 왼쪽 주먹으로 놈의 관자놀이를 후려쳤다.

그러자, 뇌수, 유리체액, 피, 그 외 기타 부산물들이 섞인 끈적한 덩어리가 눈앞에서 터져나갔다.

솔직히 말해 조금 당황스러웠다.

클로에는 아무렇지도 않게 막아내던 기술이었으니까.

누가 알았겠는가.

두개골조차 잘게 으스러트려 버릴 줄은.

상대가 이X야샤의 나락 같은 재생 괴물 새끼라 그렇지, 다른 놈이었으면 문자 그대로 ‘뼈도 못 추리게’ 만들 위력이었다.

심지어 재생조차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있었고.

­박성진 생도, 슬슬 이 곳에서 철수하도록 하죠. 이미 반 이상이 침수되었습니다. 스티븐도 이제 재생하는 데엔 제법 시간을 들여야 할 테니, 도망칠 여유 정돈 부릴 수 있을 겁니다. 다른 사람들의 안전도 생각해야죠.

­알겠습니다.

스티븐을 이대로 방치해야 한다는 점이 찜찜하긴 했으나, 다른 사람들의 안전이 더 중요했던 것은 사실이었기에, 나는 세실리아의 말을 따르기로 했다.

기절한 이들과 시신을 한곳에 모은 후, 뭍으로 옮기는 것이 일의 전부였지만, 이미 무게 중심이 망가진 땅 이제는 섬에 더 가까운 그것이 45도 이상의 각도로 기울어져 있었기에, 평지를 걷는 것보다 곱절로 힘들었다.

그럼에도 작업 속도를 늦출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스티븐의 재생이 거의 끝나가는 마당이었으니까.

그렇게 간신히 마지막 멤버인 카타리나를 수습해갈 무렵, 등 뒤에서 그르렁대는 노성(??)이 들려왔다.

“이렇게 놓칠 성싶으냐… 진작 멸문했어야 할 발레리 가문을 이끈 게 나다. 배신자 년이 돌아갈 자리는 없어야 한단 말이다!”

그 울부짖음은 이제 날이 서린 귀기보단, 비탄이 깃든 광기에 가까웠다.

실제로 놈은 빠르게 맛탱이가 가고 있었고.

주변에 있는 것을 마구잡이로 때려 부수기 시작했으니 말이다.

‘좋지 않은데. 충격을 견디지 못한 섬이 파괴되기라도 한다면’

그런 내 생각을 비웃기라도 하듯, 마침 바닥에서 쩌적 하는 불길한 소리가 들려왔다.

떨리는 고개를 천천히 내려다보니, 바닥에는 거대한 균열이 생겨나고 있었다.

­망한 것 같은데요.

­…나도 그렇게 생각해요.

첨탑 형태의 뾰족한 섬이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다.

열심히 뛰어보고 있다곤 하나, 뭍에 도달하는 속도보단 호수에 가라 앉는 것이 빠를 게 확실했다.

‘될지 안 될지는 모르겠지만, 이렇게 된 이상 도박이라도 해 봐야겠군.’

“꽉 잡으세요. 세실리아씨.”

아래에서 무어라 떠들어대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마 ‘뭘 말하는 거냐’는 이야기였던 것 같은데, 지금의 나는 그런 것 따위에 할애할 시간이 없었던 고로, 정확하게는 기억나지 않았다.

그야, 지금 내가 하고 있는 짓은 근력과 집중력, 정신력을 모두 요하는 일이었으니까!

쏘아낸 실로 내 몸과 다른 이들의 몸을 한 줄로 묶은 다음, 떨어져 내리는 지면 파편들을 타고 역으로 올라가는 일이 어디 쉬운 일이겠는가.

게다가 조각 사이의 길이가 여간 먼 것이 아닌지라, 몇몇 구간에선 영식인 참우(??)까지 동반해야 할 지경이었다.

이렇게까지라도 발버둥 치지 않으면 이 상황을 모면할 수 없으리란 확신이 들어서였다.

그렇게, 뭍까지 한 걸음만이 남은 상황.

갑자기 몸이 무거워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아니, 실제로 내 몸이 무거워진 것이 맞았다.

조금씩이라도 앞을 향해 나아가던 몸이 이젠 밑을 향해 추락하고 있었으니까.

“세에실리아 내가 놓치지 않을 거라고 했잖아… 내가 없으면! 너도 이 세상에 없는 거야.”

놈이 저무는 해와 세실리아를 번갈아 보며 히죽거리며 웃었다.

지금까지 그가 내뱉던 말, 그리고 이 웃음에서 석연치 않은 점을 세실리아에게서 느낄 수 있었으나, 아쉽게도 그것에 신경쓸만한 여유는 없었다.

저 찰거머리 같은 새끼를 떼어낼 수 있을 정도로 마땅한 시간이 내게 주어지지 않았으니까.

솔직히 말하면, 이대로 끝이라고 봐도 무방한 상황이었다.

“물귀신 따위에 뒤질 팔자였다니, 그것도 양놈 물귀신. 애미.”

고개를 들어 지평선이 푸르게 물드는 순간만을 기약하고 있던 그 순간, 하늘과 산등성이의 경계가 흐려지는 하얀 능선에서 불빛이 번쩍였다.

그 작은 불꽃은 무수하게 놓인 파편 사이를 지나, 정확하게 스티븐의 팔뚝을 꿰뚫었다.

누군가에겐 백색 사신의 주마등이었으며, 누군가에겐 백의의 천사가 보낸 구원이었을 그것은, 나에겐 줄곧 프리실라 칼라일이었던 그녀의 손길에 지나지 않았다.

하지만, 그것으로 충분했다.

내가 바라던 것은 천사의 안배나, 사신의 인도 따위가 아니었으니까.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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