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129화 〉 포스트루드.(3) (129/173)

〈 129화 〉 포스트루드.(3)

* * *

“전원, 전투 준비.”

세실리아가 그 난리를 치던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진조는 무너져 내리는 사면의 쇄설(??)보다 빠르게 질주하고 있었으니 말이다.

“저거, 정말로 이길 수 있는 겁니까?”

“물론이죠. 저는 이기지 못하는 싸움엔 걸지 않는 사람이에요.”

저건 내가 자주 하던 말인데.

분명 입 밖으로 낼 때까지만 해도 아무런 이상함을 느끼지 못했는데, 막상 듣는 사람 입장이 되어 보니 정신 나간 놈의 헛소리나 다름없는 말로 들렸다.

‘그러니까, 내가 저러고 다녔단 말이지? 미친놈 소리를 들을 만했군.’

이런 위급한 상황에서도 되도 않는 똥배짱이나 부리고 있었으니, 아주 복장이 터질 노릇이었다.

“프리실라 생도, 지금부턴 모든 판단을 전적으로 귀측에 일임합니다. 일일이 허가받을 필요 없이, 자신의 판단대로 움직이시면 됩니다.”

“저희는요? 저희도 알아서 하면 됩니까?”

“우리는 이야기가 다르죠. 일단은 대기하세요.”

세실리아는 그 자리에 가만히 있으라는 듯이 손으로 우리를 가로막고서는, 속도를 줄이고 천천히 다가오는 스티븐의 앞으로 나섰다.

뭘 믿고 저러는 것인지는 전혀 알 수 없었으나, 표정 또한 여전히 여유로웠다.

심지어 그녀는 아무런 무기조차 쥐지 않은 단신(??)이었는데 말이다.

“그래, 스티븐. 술래잡기는 즐거웠어? 옛날 생각도 나고, 좋지?”

“꾀어내려는 얕은 수임을 내가 모를 줄 알았나. 발레리 가도 어지간히 많이 몰락한 모양이군. 기껏 나와 대적하려고 부른 사람이란 게 그딴 꼬맹이 자식들이라니.”

“네 생각보단 훨씬 유능한 사람들이니, 그런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될 거야.”

“사소한 이야기 따위 궁금하지 않다. 마침 이곳은 묫자리 삼기에도 더할 나위 없는 절경이로군. 가주의 상징을 내놓고 이 자리에서 죽어라. 그렇다면 내 친히 안식을 찾게 해주마.”

“거절할게.”

“그렇다면, 조각내고, 짓이겨서, 칫솔로도 긁어모으지 못할 정도로 잘게 찢어 주겠다. 네년을 따르는 배신자 무리 또한 그리될 것이고!”

스티븐이 내달리기 시작했다.

눈으로 좇을 수조차 없을 정도로 빠른 속도였기에, 차마 반격이라는 것은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아무렇지 않게 그 공격을 받아내는 세실리아의 모습을 보기 전까지는.

‘안심하세요. 제 능력으로 보호하고 순간 동안은 스티븐이 여러분에게 큰 피해를 주지 못할 테니까. 생도 수준에선 반응할 수 없는 움직임일지라도, 제겐 하품이 나올 정도로 느린 공격에 지나지 않아요.’

머릿속에서 에스메랄다의 텔레파시가 들려왔다.

나라고 그녀의 사상력을 몰랐기에 이런 반응을 내비친 것은 아니었다.

저렇게 과감하게 받아칠 용기가 나지 않아서 그랬지.

일합(一?)의 풍압만으로 지면을 벗겨내는 괴물에게 맞서는 건 예삿일이 아니니까.

세실리아를 제외한 나머지 인원들도 그 광경에 두려움을 느꼈는지, 차마 앞으로 나설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었다.

언제나 초연한 태도로 대장부 같은 기백을 뽐내던 카타리나마저 이런 장면은 처음이라는 듯, 난색을 표했고.

오직 에스메랄다의 힘을 빌린 세실리아만이 힘겹게 스티븐의 공세를 버텨내고 있었다.

하지만, 우리가 함부로 나서지 못하는 데엔 다 그럴 만한 이유가 있어서였다.

‘미친, 디X 브란도나 데X 진이냐? 기껏해야 힘 좀 센 괴물인 줄 알았더니만, 눈깔빔까지 쏴 재끼잖아! 이런 건 미리 좀 알려 줬어야지!’

사방에 더러운 피를 뿌려대는 것까진 이해한다 쳐도, 저 눈깔빔은 도대체 정체가 뭐냔 말이다.

“저놈들은 병풍이나 들러리로 세워 놓기 위해 데려온 거냐? 한심하구나. 역시 네년은 가주의 재목이 아니었다. 감시자 놈들과 손을 잡은 것도 다 가문을 몰락시키기 위해서였어.”

그 말에 여유로운 기색이 가득하던 세실리아의 얼굴에 싸늘함이 드리웠다.

그녀의 일그러진 표정을 대변하듯, 대지는 맥박치고, 초목들 또한 뒤틀리기 시작했다.

먼발치에서만 느껴지던 그 진동은 이내 우리가 서 있던 위치를 지나, 스티븐이 서 있는 지점을 향해 모여들었다.

마치 지면 아래에서 헤엄치고 있다는 듯이.

그 진동의 정체는 바로 토양으로 이루어진 거대한 아귀였다.

바닥에서 솟아오른 그 생물 아니, 지물(?物)은 큰 턱을 벌려 스티븐을 한입에 집어삼켰다.

­쿠궁!

위턱과 아래턱이 맞물리는 충격이 여기까지 전해졌다.

스티븐의 잔해는 폭발하듯이 사방에 흩뿌려졌고.

‘씨발, 납작포가 되는 정도로 끝날 줄 알았더니만, 압력이 너무 강해서 아예 터져버리는구나.’

워낙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라, 제대로 보지도 못한 장면이었지만, 주변에 널브러진 살점과 좁은 틈 사이로 흘러나오는 선혈이 어떠한 일이 일어났는지 친절하게 알려주고 있었기에, 별다른 문제는 되지 않았다.

“우욱 역겨운 장면이군. 분명 이런 것에 익숙해져 있다고 생각했거늘… 아니었단 말인가….”

카타리나와 마찬가지로, 속이 메슥거리는 건 나도 마찬가지였다.

미리 배를 비워두고 온 덕에 게워낼 것은 없었지만, 시큼하고 텁텁한 물이 목구멍에서 차오르는 것만은 막을 수 없었다.

비슷한 장면을 훈련 때 많이 봐왔다곤 하나, 그것을 실제로 접하는 건 또 다른 이야기였으니까.

심지어 이 엽기적인 스너프 필름은 아직 도입부에 지나지 않는 상황이었다.

흐르는 핏물과 꿈틀거리는 고깃덩이들이 한자리에 차곡차곡 쌓여, 다시금 진조의 형상을 갖춰가는 장면은 그보다 더했으면 더했지, 결코 덜하진 않았으니.

“애미.”

상상 그 이상의 것을 목격하고 나니,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그 한 마디가 입 밖으로 튀어나왔다.

다른 이들도 비슷한 반응만 내비칠 뿐, 그 누구도 섣불리 나설 엄두를 내지 못하고 있었다.

주변에선 한탄의 소리만이 들려올 뿐이었다.

‘저 사이에 들어가서 내가 뭔가를 해낼 수 있을까?’

그리고, 도처에 자리를 틀은 그 주저를 깨부순 것은 누군가의 격려도, 응원도 아닌, 단 한 발의 탄환이었다.

기묘하게 비틀린 형태를 그리는 특유의 사선(??) 덕에, 주인을 유추하는 것은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프리실라 칼라일.

분명 그녀였다.

‘그래, 생각해보면 이런 일이 한두 번 있었던 것도 아냐. 앞으론 더한 일도 많이 맡게 될 텐데, 이렇게 망설이고 있을 순 없어.’

니힐리스와 마주하고도 살아남은 나다.

그에 비하면 진조 따위는 양반도 되지 못하는 인물 아니던가.

새삼 쫄아있을 이유가 없다고 느껴졌다.

우리에겐 에스메랄다라는 든든한 우방도 있고, 프리실라라는 명사수의 지원도 받고 있지 않나.

약간의 자신감을 얻은 나는 천천히 앞으로 나아갔다.

‘물러서세요. 세실리아씨.’

‘뭐?’

‘비켜서 달라는 말입니다.’

세실리아는 내 의중을 눈치챈 모양인지, 군소리 없이 길을 터 주었다.

그 훤한 공간을 향해

* * *

“애송이, 검을 다룰 때 있어 가장 중요한 것 중 하나가 뭐라고 생각하나.”

“모르겠는데요.”

“따라와라.”

어디로 가느냐 물어도 대답하는 법이 없었다.

서운하다거나 하지는 않았다.

예로부터 그런 사람이었으니까.

떠나고자 한다면 홀연히 떠나 버리는 이었고, 오겠다 마음먹으면 어느 순간 내 앞에 나타나 있는 이가 니힐리스 아니던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곤 말없이 그를 따라 정처 없이 걷고, 또 걷는 것뿐.

그리고, 그의 걸음이 멈춘 곳은 세계의 끝이라 불러도 좋을 법한, 눈발이 휘몰아치고, 유빙이 흘러 다니는 어느 작은 섬이었다.

“이런 곳에 올 거면 말이라도 좀 해주시지 그랬습니까. 한 겹 더 껴입고 올걸.”

“지금의 모습을 잘 기억해두어라.”

그가 허공을 내리쳤다.

우스꽝스럽지는 않았다.

멋스럽지도 않았고.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는 동작이었다.

그렇기에 더욱 이상한 것이다.

본디 검이라는 것이 사람 몸에 달린 것도 아닐진대, 어찌 이리도 익숙하고 자연스러운 몸짓이란 말인가.

마치 숨을 들이쉬고 내뱉는 것처럼, 몸이 스스로 반응하는 듯한 움직임이었다.

“….”

하늘이나 바다가 갈라지는 일 같은 건 일어나지 않았다.

모든 것이 본연 그대로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었다.

비스듬하게 파인 거대한 공혈(??)이 생겨난 설산만을 제외하고.

그 모습은 기억 속의 무언가를 닮아 있었다.

“유성이 산허리에 묻힌 지도 오백일흔하고도 여덟 번째 해… 넉 달 하고도 이틀…”

그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이미 알고 있었다.

글렌류나크, 별의 계곡이 탄생한 날.

그래, 인위적으로 깎아낸 것만 같은 그 모습은 사실 사람이 아닌 별이 조각한 것이었다.

설령 그 탄생 일화를 몰랐다 한들 바로 알아차릴 수 있으리라.

이 산에 새겨진 상흔은 글렌류나크와 완벽하게 똑같이 생겼으니까.

“이 기술의 이름은 뭡니까.”

“별의 무덤. 나는 그렇게 부른다.”

“말하고 싶은 게 뭔지 어느 정도는 알 것 같습니다. 하지만 이건 오로지 저만의 생각이니, 스승님의 생각이 뭔지도 궁금합니다. 그래서, 검을 다루는 데 있어 가장 중요한 게 뭐죠?”

“….”

내가 깨달은 것이라곤, ‘도구는 주인을 닮는다’라는 지극히 놀랍지 않은 사실 뿐이었다.

무엇이 가장 중요한지는 끝끝내 알려주지 않았고.

내 생각이 맞느냐고 몇 번이나 되물어 보아도, 그는 옳다는 건지, 그르다는 건지 알 수 없을 정도로 애매하게 머리만 주억거릴 뿐, 대답은 들려주지 않았다.

‘흔히 말하는 물아일체의 경지가 그런 걸까?’

니힐리스의 말마따나 한낱 애송이에 지나지 않는 내가 그런 것을 분간할 수 있을 리는 없었다.

다만 그것을 흉내 낼 수 있겠다는 생각은 들었다.

‘별의 무덤’이란 기술이 아니라, 도구를 잘 다루는 비결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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