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7화 〉 포스트루드.(1)
* * *
기나긴 준비가 끝났다.
윌리엄은 늦지 않게 물건을 준비해주었고, 세실리아는 중립적인 태도를 고수하고 있던 일족의 유지(??)들을 자신의 편으로 포섭했으며, 에스메랄다가 합류 지점인 노릴스크에 도착했다는 소식 또한 들려왔다.
우리 쪽의 상황이야 말할 것도 없고.
모두가 출진의 때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다들 준비는 된 거지?”
“준비는 네가 해야지. 총책임자도, 최전선에 나서는 것도 너잖아.”
“난 언제나 준비됐지.”
“하여간 말은 잘해요.”
다들 서로의 얼굴을 한 번씩 확인했다.
그러고는 잘 알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앳된 아이들이 하기엔 전혀 어울리지 않는 행동이었음에도, 마중 나온 이들은 별다른 말 없이 결연한 태도로 그 모습을 지켜보고만 있었다.
[안내 말씀드리겠습니다. 노릴스크행 시베리아 에어라인 31편을 타실 분은 출국 절차를 밟아 주시기 바랍니다.]
기다리고 기다리던 안내 음성이 떨어지자, 다들 전과는 비할 바 없을 정도로 의젓해진 태도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들 잘하고 돌아와. 다치지 말고.”
세레나는 걱정이 앞선다는 표정으로 나란히 선 이들을 한 명씩 안아주었다.
이토록 모성애 넘치는 장면이 또 있을까.
순수한 의미에서든, 다른 의미에서든.
아이나와 프리실라는 조금 아니꼽다는 눈치를 주고 있었지만.
“에잉, 쯧쯧. 애들은 강하게 키워야 하는데. 세레나 교수도 보기보다 참 마음이 여리군.”
“첫 제자들이잖아요. 아무래도 애착이 갈 수밖에 없죠.”
클로에는 아무래도 탐탁지 않다는 눈을 하고 있었다.
우리보다 훨씬 어린 나이에도 진조보다 강한 빌런들을 잘만 때려잡아 왔던 사람이니, 저렇게 말하는 것도 이해는 가지만, 그래도 조금 매정하다고 느껴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달리 할 말은 없다. 비공식이라곤 해도, 첫 임무를 맡은 셈이나 다름없으니, 최선을 다해 수행하고 오도록.”
클로에답지 않게 위엄을 실은 말투였다.
그래도 100년 넘게 리더 해먹은 짬밥이 어디로 가진 않았는지, 평소에 잘 하지 않던 태도를 보였음에도 썩 어울리는 편이었다.
““네.””
“반드시 성공하고 돌아오겠습니다!”
다들 가벼운 인사치레만 하고 넘기는 분위기였으나, 카타리나는 군기가 바짝 든 경례까지 선보였다.
그러자, 오히려 클로에가 당황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 그래. 행운을 빌어주지. 다들 늦기 전에 어서 가보도록.”
“다녀오겠습니다.”
카타리나의 위트 있는 어디까지나 그녀는 진지하게 한 소리겠지만, 아무튼 그 행동 덕에 무겁게만 느껴졌어야 할 발걸음이 한층 가볍게 느껴졌다.
물론 세레나와 클로에의 격려도 많은 도움이 되었고.
남은 일은 오롯이 우리만의 몫이었다.
임무를 잘 완수하는 것.
* * *
노릴스크 공항은 예상대로 한산했다.
진조가 출몰한다는 지역과 꽤 가깝다 보니, 당연한 일이었다.
예상치 못했던 점이 한 가지 있다면, 시베리아와 맞닿은 지역치곤 꽤 따듯했다는 거였다.
“뭐야, 생각 만큼 엄청 춥지는 않네?”
“여름이잖나. 여긴 북극이나 남극이 아니다. 그렇게 추운 동네였으면 사람도 많이 살지 못했겠지.”
혹시 추울까 봐 겨울옷을 몇 벌 싸 들고 왔는데, 괜한 짓이었네.
그래도 안 갖고 온 거보단 나으니까.
“그래서, 전투가 치러질 것으로 추측되는 날짜는 언제인가요?”
“기대하고 있는 듯한 말투네요? 자신이 좀 생긴 모양이죠?”
“아뇨, 그냥 빨리 끝내고 쉬고 싶어서요. 온종일 긴장하고 있는 게 얼마나 피곤한 일인데요.”
“나흘. 나흘 안에 결판이 날 것이라고 보고 있어요. 스티븐이 저희를 빠르게 뒤쫓고 있거든요.”
나흘이라.
틀림없이 힘든 여정이 되겠지.
이번 임무는 편안하게 쉴 틈 따위 없는 일이었으니까.
다른 사건들이야 몸으로 뛰는 시간을 제외하면 호텔에서 편하게 지낼 수 있었다지만, 쫓기는 신세가 됐는데 어떻게 한가롭게 커피나 타 먹을 여유를 부리겠는가.
“한시바삐 움직여야겠네요.”
“그렇죠. 그래도 오늘까지는 쉴 여유가 있으니, 움직이는 건 내일로 하죠.”
“그냥 빨리 가죠. 후딱 해치우고 집에서 쉬고 싶으니까.”
“맞아요. 어차피 하루 쉬나, 안 쉬나, 별 차이도 없는데.”
다른 녀석들도 내 말에 동조했다.
아니, 그럴 수밖에 없으리라.
얘네들은 사실상 내 손에 끌려온 거나 다름없는 사람들이니까.
한시라도 빨리 압박감에서 풀려나고 싶겠지.
“사실 저도 같은 생각이었어요. 단지, 장거리 비행을 하고 오느라 피곤할 여러분을 조금 배려해드리고자 한 건데, 여러분의 생각도 저와 같다고 하니, 지금 바로 이동해도 괜찮겠네요.”
세실리아가 핸드폰을 만지작거린 지 채 몇십 초도 지나지 않아, 거대한 차 두 대가 우리 앞에 다가와 멈춰 섰다.
가문 내에서도 힘깨나 쓰는 사람이라더니, 허풍은 아닌 모양이었다.
이놈이나, 저놈이나, 다들 잘사는 놈들 뿐이라 부럽네.
수발들어주는 사람도 있고.
“아시다시피, 여기선 갈라져야만 해요. 천현우 생도와 아이나 생도는 따로 하실 일이 있으니까.”
“저도 따라갈 수는 없는 건가요?”
“그건 어려워 보이네요.”
아이나의 진심 어린 부탁을 거절한 것은, 의외로 세실리아가 아닌 에스메랄다였다.
“어째서죠? 제 입으로 말하기도 웃긴 이야기지만, 저희 다섯 명 중에서 제일 강한 게 전데.”
그 말은 확실히 사실이었다.
알프레드가 있다면 다소 논란의 소지가 될 수 있는 발언이겠지만, 알프레드가 없는 이곳에선 분명 아이나가 최강이었으니까.
“죄송한 이야기지만, 아이나 생도는 객관적으로 큰 전력이 되기는 어려워요. 여러분은 아직 미숙할뿐더러, 상성만이라도 진조에게 우위를 점하는 나머지 셋과는 달리, 아이나 생도는 그렇지 못하잖아요? 저는 그렇게 많은 사람을 보조하는 데 특화돼있는 각성자가 아니에요. 아이나 생도까지 도와주기엔 무리가 있죠.”
“저도 있는 편이 더 좋은”
“세실리아씨는 몰라도, 저는 여러분의 안전을 보장해주기 위해 여기 온 겁니다. 아이들과 나들이 가는 선생들조차 사고가 나면 책임을 져야 하는데, 이건 그것 따위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일이라는 걸 알 텐데요. 게다가, 아이나 생도가 어디 보통 사람인가요? 단순히 아이나 생도의 고집만으로 그 부탁을 들어주기엔 제가 짊어질 리스크가 너무 커요.”
에스메랄다는 내 말을 끊음으로써 단호하게 자신의 의지를 표했다.
듣는 내가 다 기분이 나빠질 정도로 날 선 말투였지만, 논리적으론 반박할 수 있는 내용이 하나도 없었기에, 결과적으론 입을 다물어야 했다.
아이나 또한 분하다는 듯이 입술만 깨물고 있었고.
“…알겠습니다.”
“거칠게 말해서 미안해요. 한 번의 실수조차 용납해선 안 되는 일이다 보니, 예민하게 반응했네요.”
“아니에요. 대신, 단 한 가지만 약속해주세요. 모두 건강한 모습으로 다시 만나게 해달라고.”
다들 놀라는 표정을 지었다.
그 목석같은 카타리나조차도 미간을 움츠러트릴 정도였으니, 얼마나 보기 드문 일인지는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으리라.
“반드시 지켜드리죠. 그 약속.”
“그럼 그걸로 됐습니다.”
협상이 끝났음에도 둘은 아직 할 이야기가 아직 많이 남았다는 듯, 한참이나 서로를 마주 보고 있었다.
보다 못한 세실리아가 둘의 사이에 끼어들 때까지도 계속 그러고 있었으니까.
“이야기도 끝난 것 같으니, 슬슬 출발해도 되겠죠?”
“네.”
그 말에 모두가 자신이 올라타야 할 차량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나와 아이나는 약속이라도 한 듯, 그 짧은 거리에도 겹치는 경로를 만들었다.
그 교차점에서 만나는 순간, 우리는 서로의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
“무사히 돌아올게.”
“다치기만 해봐. 그때부터는 다시는 사고 못 치도록 장원(??)에다 묶어놓고 사육시켜줄 테니까.”
둘은 자연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내 쪽이야 반쯤은 공포가 뒤섞인 감정에서 비롯한 반사적인 행동이었지만, 크게 문제 삼을 것은 없었다.
처음부터 아이나는 그런 의도로 말한 것일 테고, 나 또한 그녀의 저런 매서운 면을 사랑하는 사람이었으니까.
오히려 아이나가 툴툴거리지 않았다면 그게 더 이상하게 느껴졌으리라.
이렇게 보니 참 죽이 잘 맞는 편이네.
나나, 쟤나, 급이 다른 미친 년놈들이라 그런가.
통하는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란 말이지.
이렇게 말하면 아이나 본인은 절대 그럴 리 없다고 땍땍거리겠지만.
“가끔, 스스로 기분 나쁘게 웃는다고 생각해본 적 있나?”
출발하기 전, 카타리나의 한 마디였다.
* * *
“그래서, 어디로 가는 거죠?”
“라마(Лама) 호수와 맞닿은 산맥 쪽으로 이동할 생각이에요. 그쪽에 막힌 산이 하나 있거든요.”
이 근방 지리도 모르는 내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 답변이었다.
아니, 내가 의미 없는 질문을 한 거구나.
“참, 물건은 잘 받았어요. 요긴하게 써먹을 수 있는 것들도 끼워서 주문하셨더라고요? 덕분에 한시름 덜었어요. 고마워요.”
‘그런 걸 넣은 기억은 없는데, 뭐지?’
물론 그게 뭐냐고 묻지는 않았다.
당사자가 고맙게 쓰고 있다면 된 거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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