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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26화 〉 믿음에 대한 의문. (126/173)

〈 126화 〉 믿음에 대한 의문.

* * *

과연 이 브로치를 누구에게 주는 게 맞는 일일까.

생각할 게 많아지는 문제였다.

이런 걸 손에 넣으리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었거든.

아니, 예상했다 하더라도 크게 달라질 건 없었을 것이다.

감시자는 아무에게나 맡길 수 없는 막중한 자리니까.

별거 아닌 물건이었다면 주인공인 천현우한테 대충 짬 처리를 시키면 그만이었을 텐데.

하필이면 여자한테나 어울릴 법한 장신구일 건 또 뭐람.

‘참, 괜한 걸 받아버린 게 아닌가 싶네.’

주려거든 좀 더 실용적인 걸 주든지.

어쩌면, 세실리아는 처음부터 날 시험에 들게 하도록 이런 걸 떠넘긴 게 아닐까?

그렇다면 완벽한 성공이라고 말해주고 싶었다.

별것도 아닌 걸 가지고 이 고생을 하게 만들고 있었으니.

그러거나 말거나, 손에 쥔 이 아티팩트는 여전히 대양을 머금은 채 푸른 빛만 발하고 있을 뿐이었다.

“고맙다. 박성진.”

“응? 뭐가?”

카타리나 얘는 또 언제 왔대.

아까 전부터 뭔가 하고 싶은 이야기라도 있는 것처럼 주변을 맴돌긴 했지만.

“내 의견이 채택되리라곤 생각도 못 했으니 말이다. 딱히 대단한 아이디어도 아니었는데, 그렇게까지 열성적으로 도와줄 필요는 없지 않았나.”

“그게 뭐 어때서? 내가 보기엔 충분히 좋은 생각이었는데.”

“아무것도 아니다. 그냥 고맙다는 이야기가 하고 싶었던 것뿐이니, 신경 쓰지 말도록. 그나저나, 한 가지 묻고 싶은 게 있다.”

“뭔데?”

“이야기는 들었다. 남몰래 엄청난 일들을 벌여왔다고.”

…누군지는 몰라도 쓸데없는 이야기를 했네.

얘는 성격상 이상하게 받아들이고 있을 게 뻔한데.

카타리나가 좇는 정의감 같은 것과는 아무런 상관도 없는 사건들인데 말이지.

그냥 어쩔 수 없이 하게 된 일일 뿐이었다.

“그랬었지.”

“너는 두렵지 않나?”

“뭐가? 언제 죽게 될지 모르는 곳에 뛰어드는 게?”

“아니, 그건 모두가 두려워하는 일이지. 단지, 사람들은 그걸 알고도 뛰어드는 것일 뿐이고. 내가 말하는 건, 생판 남이나 다름없는 나에게 등을 기대 목숨을 의존하는 것이 두렵지 않냐는 말이다. 직접적으로 전투하게 될 인원은 나와, 너, 프리실라 아닌가. 프리실라야 너와 긴밀한 사이니 상관없겠지만, 나는 다르지 않나.”

“믿을 수 있는 사이니까. 아니, 너는 다르게 생각할지도 모르니, ‘사이’라고 하는 건 잘못됐네. 단순히 너는 너의 정의를 실현하기 위해서 그런 선택을 한 것일 수도 있는 거니까. ‘믿고 있어서’라고 하는 게 더 정확하겠지.”

“그런가…”

대답이 영 시원찮았는지, 카타리나는 여전히 잘 모르겠다는 얼굴이었다.

내가 보기에도 썩 훌륭한 대답이 아니긴 했지만.

난 그저 사색적인 사람일 뿐, 철학적 주제를 놓고 설법을 펼칠 수 있을 만큼 뛰어난 달변가는 아니었으니,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피차일반 아냐? 너도 나를 믿지 않았다면, 애초에 이런 일은 지원하지도 않았을 거니까.”

“조금 부끄러운 이야기지만, 나는 두려움을 느끼고 있다. 도망치지 않으리란 자신도 없고. 그런 나를 정말로 믿어도 되겠느냐는 질문이다. 지금까지 도망치지 않고 맞선 너를 믿는 것과 이런 일에 처음 발을 들이는 나를 믿는 건 엄연히 별개의 이야기니까.”

“솔직히 말하면, 큰 기대는 안 해. 제 몫을 해줄 거라곤 생각하지도 않아. 근데, 그건 나만 그렇게 생각하는 게 아니야. 세실리아나 에스메랄다도 날 보고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을 거라고.”

“그게 곧 미덥지 못하다는 이야기잖나.”

“뭐, 그렇긴 하지. 누군가를 전적으로 신뢰한다는 건 어려운 일이니까. 하지만, 보통 믿기로 한 순간부터는 어떤 일에 대해서 사사건건 따지고 들려 하지 않아. 믿는다는 것 자체가 자신의 선택이니까, 신뢰가 깨지기 전까진 남에게서 그 원인을 찾지 않는 거야. 그전까진 믿음은 오롯이 자신의 것이잖아.”

카타리나는 무언가 생각할 것이 있는 모양인지, 천천히 눈을 감았다.

늘 엄하고 굳센 태도를 유지하는 카타리나답지 않게, 그녀는 유하고 따스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좋은 대답을 듣게 되어 기쁘군. 그럼, 앞으로도 잘 부탁하지.”

할 말은 그걸로 끝이라는 듯, 카타리나는 고개를 홱 돌려 자신의 자리로 돌아갔다.

‘참 속내를 알기 어렵단 말이지. 옛날의 아이나를 방불케 하는 수준이라니까.’

다른 사람이었다면 분명 부끄럼을 타는 것이라고 생각했으리라.

하지만, 그 대상이 카타리나라면 이야기가 달랐다.

무던해도 보통 무던한 성격이라야 말이지.

평소에도 늘 저런 식으로 대화했으니까.

전해야 할 말만 전하고, 곧바로 자기 할 일을 찾아 떠나버리는 게 평소의 카타리나였다.

그렇다 보니, 나는 무슨 생각으로 저런 행동을 했는지 좀처럼 갈피를 잡기 어려웠다.

일단은 이 감시자의 눈을 가져갈 사람부터 정하는 게 급선무였기에 그 고민은 금세 머릿속을 떠나갔지만.

“야, 박성진. 그래서 그 감시자의 눈깔인지 지랄인지 하는 물건은 누구 주려고?”

“고민 중이다. 줄 사람이 없어서.”

“아이나나 프리실라 주면 되지. 그렇게 심각하게 생각할 게 있냐?”

천현우는 고작 그런 게 뭐가 대수냐는 듯이 되물었다.

당사자가 아니니 아무렇지도 않게 저런 말을 내뱉는 거겠지만.

“세실리아가 했던 말 기억 안 나냐? 이건 자격을 가진 사람이 가지고 있어야 의미가 있는 물건이라고. 물론 언젠간 그 둘이 자격을 갖출 수도 있겠지. 근데, 그날이 언제 올 줄 알고 세월아 네월아 기다리고 있어.”

“그것도 그러네.”

애초에 내 또래 중에서 감시자의 자격을 갖춘 녀석이 몇이나 있겠는가.

그 어떤 대단한 녀석을 끌고 와도 가능할 리가 없는 이야기였다.

속은 틀딱이나 다름 없는 불사조 같은 양반이라면 또 모를까.

“그럼, 세레나 교수님은 어때?”

“세레나 교수님한테 이걸 드리자고? 아무리 봐도 좋은 생각은 아닌데.”

아무리 생각해도 수틀리면 바로 주먹부터 나가는 그녀에게 감시자는 어울리는 직책이 아니었다.

게다가, 진작부터 나와 세레나의 관계를 의심하고 있는 아이나도 떡하니 버티고 있는 마당에, 이걸 전해줬다간 나한테 무슨 일이 벌어질지 가늠조차 할 수 없었다.

“왜? 설마 알아보는 사람이 있을까 봐? 이사장님이나 학장님 제외하곤 모르지 않을까? 알아본다 해도, 생도 신분인 우리가 달고 있는 것보단 교수님이 달고 있는 게 그럴듯하지 않나? 차라리 그쪽이 의심을 덜 살 거 같은데.”

“네 생각엔 감시자라는 직책이 세레나 교수님과 어울린다고 생각하냐? 진심으로?”

“근데 우리 주변엔 마땅히 줄 사람이 없는 것도 사실이잖아. 세레나 교수님도 석방 이후엔 자제하는 편인 것 같고. 아카데미 교수직이면 중립적인 위치 아니야?”

“그것도 틀린 말은 아닌데… 모르겠다. 씨발.”

이 자리에 있지도 않은 세레나가 괜스레 원망스러웠다.

조금만 더 차분하고 조용한 사람이었다면 얼마든지 이 브로치를 믿고 맡길 수 있었을 텐데.

“천천히 고민해보라고. 어차피 감시자가 되고 말고는 이번 진조 토벌과는 상관없는 일이잖아?”

“그래야겠다.”

일단은 세레나를 지켜보다가, 정 안 되겠다 싶으면 내가 끼던가 해야지, 원.

아니면, 아예 장투한다는 생각으로 아카데미 졸업까지 기다려보든가 하는 방법도 있고.

그때면 아이나나 프리실라가 자격을 갖추게 될지도 모르는 일이니까.

* * *

들풀과 작은 나무들이 무성하게 우거진 오솔길을 따라 올라갔다.

사실, 길이라 하기에도 뭣했다.

정해진 경로를 따라 움직이는 것이 아닌, 그저 이 몸이 기억하고 있는 대로 움직일 뿐이었으니 말이다.

‘이쯤이면 그 녀석의 묘가 보일 법한데.’

기억이 잘못됐을 리는 없다.

어떻게든 양지바른 곳에 묻어주겠다고 묫자리를 닦아놓은 게 자신이었으니까.

하지만, 어찌 된 일인지 정호경의 묘는 보이지 않았다.

그것도 세 번씩이나 산을 오르락내리락하였음에도.

이쯤되니 초조함에 사로잡힐 수밖에 없었다.

해는 저물어만 가고 있는데, 찾고자 하는 것은 코빼기도 보이지 않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야산의 들짐승 따위를 두려워하는 것은 아니었다.

단지, 그 말이 사실일까 봐 두려워하는 것이었지.

‘정호경이 되살아났다.’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생각했다.

지금도 그렇게 여기고 있고.

허나, 마음과 다르게, 몸은 이미 그 사실을 어느 정도 받아들이고 있는 참이었다.

발걸음을 내디딜 때마다 주변에서 진노의 불길이 일었으니까.

나라고 그 사실을 모르는 건 아니었다.

다만,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이 화를 다스릴 수 없었을 것만 같았기에 가만히 두었을 뿐.

그리고, 나는 이 일대가 쑥대밭이 되고 나서야 이상한 점이 한 가지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모든 것이 숯과 검댕이 되었어도 이상하지 않았을 마당에, 여전히 자라난 초목으로 뒤덮인 장소가 있었으니까.

“설마.”

일렁거리는 화염이 팔에서 뻗어나가, 풀과 나무가 우거진 들판을 집어삼켰다.

하지만, 그것들은 그을음조차 생기지 않은 채 꿋꿋하게 그 자리를 지킬 뿐이었다.

‘이러니 찾지 못할 수밖에.’

어떤 새끼의 작품인지는 알 수 없으나, 대단한 실력자라는 것만큼은 확실했다.

이렇게까지 섬세한 잔영을 만들어낼 수 있는 각성자는 그리 흔치 않으니까.

공을 들인 흔적이 역력한 게, 들키지 않기 위해 단단히 애를 쓴 모양이었다.

마음을 가라앉히고, 천천히 녹색과 검은색의 경계 쪽으로 몸을 옮겼다.

그리고, 그 선을 지나자, 예상하고 있었지만, 상상하고 싶지는 않았던 장면이 눈에 비추어지기 시작했다.

파헤쳐진 묘지 위로 놓인 텅 빈 관짝.

틀림없이 정호경의 것이었다.

그의 말이 사실이라는 게 증명된 셈이었다.

정호경이 되살아났다는 그 말 같지도 않은 개소리가.

‘하지만… 이해할 수 없어. 이미 죽은 놈에게 무슨 가치가 있다고 되살려낸 거지?’

홀로 고민해봐야 답을 찾을 수 없다는 것쯤은 잘 알고 있었다.

가장 쉽고 빠르게 이 답을 알아낼 방법은, 역시 ‘꿈 해방자’라는 녀석들을 찾아내는 거겠지.

“후우”

죽을 수 없다는 현실에 적응하고 조용히 살려고 했건만.

아무래도 세상은 날 가만히 내버려 둘 생각이 없는 모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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