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4화 〉 브릿지.(2)
* * *
정말 눈코 뜰 새 없이 바쁘게 지냈다.
진조와 맞서게 될 날이 얼마 남지 않은 상황이었으니까.
강의와 훈련을 하는 것만으로도 버거워 죽겠는데, 사건의 진행에 대한 논의 또한 빼놓을 수는 없었으니, 그 피곤함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지경이었다.
‘그나마 오늘은 몸이 고생할 필요는 없는 게 다행이지. 외출 나가서 하루 종일 떠들기만 하면 되는 거니까. ’
물론, 그마저도 쉬기 위해서 외출증을 끊은 것은 아니었다.
사건에 직접적인 연관이 있는 우리 쪽 동아리원들과 세실리아, 그리고 에스메랄다 간의 삼자대면이 있기 때문이었다.
‘사실상 일의 연장선상이나 다름없으니. 조금 덜 피곤할 뿐.’
그래도 에스메랄다와 세실리아 쪽이 어찌어찌 알아서 자기네들끼리 접촉하고, 의견까지 대충 조율해놓은 상황이라는 점은 고무적이었다.
내가 할 일을 덜어준 셈이니까.
마침 그 외의 상황도 내게 웃어주고 있었다.
다른 때 같았다면 사람들 눈치 보느라 외출할 생각조차 하지 못했을 테니.
그야, 이렇게 많은 사람이 약속이라도 한 듯이 다 같이 외출하면 뭔가 수상한 낌새를 알아챌 거 아냐.
사정을 알고 있는 세레나와 클로에야 요구는 승인해줬겠지.
근데, 다른 사람들이 우릴 어떻게 생각하겠냐고.
한동안은 계속 좋지 않은 소문에 휘말리게 될걸.
하지만, 지금은 막 중간고사 기간이 끝난 시점이라, 동아리원들끼리 놀러 가겠다는 핑계로 별 의심 없이 빠져나올 수 있었다.
“그래서, 지금 이 비행기는 어디로 가는 건데?”
“하와이.”
“놀러 가는 게 아니라는 점이 아쉬울 따름이네. 만날만한 가까운 장소가 거기뿐이니 어쩔 수 없지만.”
“아쉬운 건 내가 더 아쉽지.”
“왜?”
다 알고 있으면서 모르는 척하기는.
눈알을 옆으로 굴리니, 아이나는 알고 싶지 않다는 듯이 고개를 돌려 버렸다.
옛날에 비하면 많이 귀여워졌단 말이야.
“…그 독했던 아이나가 맞나 싶을 정도군. 대체 어떻게 뭘 한 건지 궁금해지는 수준이야.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유순해졌어.”
“저 녀석이랑 지내다 보면 너도 그렇게 될걸? 옛날엔 ‘얼빠졌지만 비범한 구석이 있는 사람’ 정도라고 생각해서 좋아했는데, 사실은 그냥 새카만 속내를 잘 숨기고 있는 녀석이었던 거지. 가끔은 속았다는 기분도 들어.”
“때때론 아이나보다 더 연기를 잘하는 게 아닌가 싶은 생각도 들긴 했어. 이사장님이 왜 여우라고 부르는지 알 정도로.”
“그간 대단히 많은 업보를 쌓아온 모양이군. 박성진. 성실하기만 한 줄 알았더니…”
“저 새끼가 알고 보면 제일 또라이 새끼라니까.”
대부분은 맞는 말이었지만, 한 가지 억울한 점이 있었다.
내가 또라이인 것은 분명 사실이지만, 남몰래 음습한 짓을 했던 건 나만이 아니었다는 거다.
아이나든, 프리실라든, 한 번 정도는 내게 비슷한 짓을 해오지 않았던가.
“아니, 아이나랑 프리실라 너희 둘은 그런 말을 하면 안 되지. 나만 쓰레기로 몰아가네.”
““우리가 언…””
“진짜로 기억 안 난다고 할 셈은 아니지?”
자신들이 정배 걸고, 스토킹한 건 쏙 빼놓고 이야기하네.
괘씸한 녀석들 같으니.
적어도 저 둘은 나를 매도해선 안 됐다.
“뭐야, 뭔데? 왜 너희만 재밌는 이야기 하냐?”
“그건 네 행동이 우리한테 옮은 거지. 근묵자흑 몰라?”
부정할까도 싶었지만, 이내 그 말이 옳다는 걸 깨달았다.
아이나는 저렇게 천연덕스럽게 헛소리를 하는 애가 아니었거든.
그런 면은 확실히 내게서 닮은 게 분명했다.
“…대충 알 것 같군. 그건 근묵자흑이라고 하지 않는다. 유유상종이라고 하지. 아주 잘 어울리는 녀석들끼리 모였어.”
아이나와 프리실라는 필사적으로 그 말을 부정했다.
카타리나는 평소 성격대로 자기 의견을 밀고 나갔고.
그러다 보니, 구도는 어느샌가 나와 아이나프리실라 동맹 간의 대립이 아닌, 카타리나와 그녀들 간의 대립이 되어가고 있었다.
그리고, 그 논쟁은 비행기가 도착하는 순간까지 계속됐다.
* * *
“여기예요.”
공항에 도착하니, 에스메랄다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대선배의 위용이라도 과시하고 싶었던 모양인지, 묘하게 어깨에 힘이 들어간 기색이 있었다.
워낙 작은 체구 탓에 안쓰럽게만 느껴졌지만.
“안녕하세요. 에스메랄다님.”
“꼭 한 번 가까이서 뵙고 싶었던 히어로인데, 이렇게 만나 뵙게 돼서 너무 기뻐요.”
“클레어 드 시엘의 비호 아래 있을 수 있어 영광입니다. 에스메랄다 아인 롤랑님.”
“도와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그렇게 띄워주시지 않아도 돼요. 여러분도 언젠간 동등한 자리에서 저를 만나게 될 테니까요.”
점잔빼기는.
누가 봐도 좋아하는 게 느껴지는데.
“아무튼, 여기까지 오느라 다들 수고 많았어요. 배고플 텐데, 자세한 이야기는 식사라도 하면서 나누도록 하죠. 세실리아씨도 기다리고 있어요.”
드디어 목소리로만 듣던 세실리아의 실물을 만나볼 수 있게 되는 건가.
진조가 되지 않은 세실리아는 어떠한 모습을 하고 있을까.
고상한 척하던 말투를 생각해보면 약간 나이 든 외모를 하고 있을 것 같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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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상은 한 치의 어긋남도 없이 적중했다.
그럼에도 나는 놀랄 수밖에 없었다.
그간 내가 만나왔던 인물은 대부분이 20대 언저리의 육체를 가지고 있었지만, 이 세실리아는 그렇지 않았으니까.
그녀는 대단한 성숙미를 자랑하고 있었다.
물론, 무르익은 몸매는 세레나도 가지고 있었고, 허스키한 목소리는 카타리나 또한 낼 줄 아는 것이며, 혼기를 맞이한 숙녀들에게서나 볼 수 있을 법한 화장은 클로에도 종종 하는 것이라지만, 세실리아는 어딘가 달랐다.
묘하게 애달파 보이는 용모라고 해야 하나.
두 개의 눈물점을 가진 아이나도 이따금 그러한 인상을 주곤 했지만, 그조차도 아이나와는 꽤 다른 느낌이었다.
그래, 미망인의 분위기라고 하면 좋으리라.
주변에선 이러한 외모를 한 사람을 좀처럼 보기 어렵다 보니, 예상하였음에도 놀랄 수밖에 없었다.
“어서 오시죠. 뭘 좋아하는지 몰라서, 있는 메뉴를 모두 주문했어요. 마음껏 드세요.”
“감사합니다.”
“이 정도로 뭘요. 하고 싶은 이야기가 산더미처럼 쌓여있는 마당에, 이 정도 대접도 못 해 드리면 오히려 서운하게 생각하셨을 거예요.”
“그래, 일단 먹으면서 생각하자고.”
예로부터 음식을 앞에 두고 딴소리하는 건 예의가 아니라고 했다.
우선 먹어야 싸울 힘이 나기도 하고.
“역시 산지에서 직접 잡힌 거라 그런가, 선도 자체가 다르네. 맛있다.”
“…트리니티 아카데미도 바다 한가운데에 있는 부유섬이다. 선도의 차이 같은 게 느껴질 리가.”
“갈! 대충 알아들어 먹어라. 급식으로 나오는 거랑 휴양지에서 먹는 게 어떻게 똑같을 수가 있나.”
“좋을 대로 생각하도록.”
다들 아직 한창 자랄 시기라 그런가, 밥 먹는 데 여념이 없었다.
나 또한 마찬가지였고.
다행스럽게도 세실리아와 에스메랄다는 우리들의 식사가 끝나는 시간까지 기다려주었다.
“잘 먹었습니다. 일이 끝난 뒤엔 저희가 한턱낼게요.”
“무슨 거사라도 치르는 듯이 말할 필요까지는 없… 아니죠. 여러분들께는 충분히 어려운 일이 맞을 테니. 실언이었습니다.”
“그래서, 저희의 제안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한여름의 시베리아 벌판으로 끌어낸다는 생각.”
“좋은 아이디어지만, 한 가지 문제점이 있어요. 스티븐이 타이가 삼림으로 도망치면 어쩔 셈이죠?”
…그 쉬운 파훼법을 생각 못 하고 있었네.
예상치도 못했던 질문에 나는 처음 의견을 제안했던 카타리나에게 구원의 손길을 요청했다.
그녀 또한 미리 염두에 두지 않은 상황이었는지, 약간 당황한 기색을 내비쳤으나, 금방 표정을 다잡고는,지도를 펼쳐 어떤 지점을 가리키며 내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이쪽, 중앙시베리아고원이 있는 곳에서, 분지처럼 형성된 곳으로 몰고 가면 되지 않겠습니까. 낮은 풀과 이끼만이 가득한 평원 쪽 말이죠. 물론 산은 침엽수로 빼곡하겠지만, 아무리 진조라 한들, 하루아침에 그 산지를 벗어나진 못할 겁니다.”
“그렇게 되면 유인하는 과정에서 문제가 생기겠군요. 발상은 좋지만, 진조는 저희보다 훨씬 빠릅니다. 그렇게 깊숙한 곳까지 유인하기 전에 저희가 먼저 붙잡히게 될 거예요. 어느 정도의 지원은 가능해도, 일단은 가문의 실세를 쥔 게 스티븐인 만큼, 저도 첨단 장비와 이동 수단 등을 모두에게 보급해드리긴 어려워요.”
“역시 그런가요…”
첨단 장비와 이동 수단이라.
윌리엄 아재의 도움을 받으면 가능하지도 않을까?
이건 내가 해결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네.
“잠시만요. 그 방법, 어쩌면 가능할 지도 몰라요. 아는 사람에게 연락해볼게요.”
“무슨 수로요?”
“일단 기다려보시죠.”
나는 곧장 연락처에 등록된 윌리엄의 번호로 전화를 걸었다.
다행히, 그는 내 연락을 빠르게 받아주었다.
“여보세요.”
그래, 또 무슨 일이냐? 뭐, 호버바이크가 작동이 안 돼? 아니면, 그 이상한 돌쪼가리 소식이 궁금한 거냐? 유감스럽게도 전혀 듣지 못했다.
“아뇨. 혹시 위치추적용 발신기나, 생체 신호 탐지기 같은 걸 비롯한 추적용 장비와 설원에서 쓸 수 있는 이동 수단을 구할 수 있나 해서요.”
또 무슨 개짓거리를 하려고 그러나 보군. 구해주는 건 어렵지 않아. 어떤 용도로 쓰이느냐가 중요하지.
“진조 사냥에 필요한 도구입니다.”
윌리엄은 그때처럼 호탕하게 웃었다.
뭐, 우리에게나 험난한 시련이지, 남에겐 최고의 구경거리나 다름없으니, 그럴 만했지만.
역시, 넌 근래 들어서 나온 녀석 중에 제일 재밌는 녀석이야. 뭐, 구해는 줄 수 있지. 근데, 너 혼자서 하는 일은 아닐 테고, 다른 대원들이 있지 않아?
나는 세실리아에게 얼마나 주문하면 되겠느냐고 속삭였다.
그녀는 ‘여기 있는 사람 전원을 포함한 열일곱이면 충분하다’라고 대답했고.
‘충분하긴 지랄… 돈 잡아먹는 귀신이나 다름없네.’
한동안은 빈털터리로 살아야 할 게 틀림없었지만, 어쩌겠는가.
내가 하겠다고 나선 일인 것을.
“당연하죠. 17명입니다.”
후… 그 숫자면 물건 때오는 데도 고생깨나 하겠군. 돈은 있고?
“얼마면 되겠습니까.”
에누리 없이 80만 달러. 이것도 엄청나게 깎아준 거라고.
뭐, 장사꾼이라는 족속이 다 그렇지.
어느 와중에도 물건 팔아먹을 생각밖에 안 한다니까.
급한 건 나니까 어쩔 수 없이 그 계약을 체결해야만 했지만.
“알겠습니다. 일단 계좌만 보내주시죠. 자세한 내용은 더 상의해보고 연락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그래, 암호화폐 계좌를 보내 놓을 테니, 거기로 보내든가 하라고. 입금되는 즉시 물건은 준비해주도록 하지.
“감사합니다. 많이 파세요. 사장님.”
고객님도 즐거운 하루 되시길.
그는 껄껄거리며 전화를 끊었다.
그나저나, 이 상황에도 거래 흔적을 남기는 게 싫어서 암호화폐 계좌 타령을 한다니.
돈에 한해선 그 누구보다 철두철미해지는 게, 괜히 100년 넘게 저 자리를 지킨 게 아니구나 싶었다.
“준비할 수 있다는군요. 이걸로 카타리나의 의견이 실현 불가능이 아니라는 건 증명됐습니다. 물론, 반드시 카타리나의 말을 따르란 법은 없으니, 다른 더 좋은 의견이 있으신 분은 말씀해주시죠. 주문은 그때 취소해도 괜찮으니.”
“그렇게 막무가내로 정해도 괜찮은 거냐? 거래를 취소했다간 신임을 잃게 될 텐데.”
“막역한 사이까지는 아니라도, 고작 거래 한번 취소한다고 나한테 꼽줄 양반은 아니야.”
“꼭 나의 의견대로 하지 않아도 됐는데…”
다들 어안이 벙벙하다는 얼굴로 날 쳐다보고 있었다.
그제야 깨달았다.
천천히 이야기해도 상관없을 것을, 나 혼자서 너무 앞서 나갔다고.
카타리나 또한 어색한 헛기침만을 내뱉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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