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116화 〉 프렐류드.(2) (116/173)

〈 116화 〉 프렐류드.(2)

* * *

“그러니까… 선생님이 맞는 거죠?”

에스메랄다의 눈에는 이미 눈물이 글썽이고 있었다.

“네가 깃털을 가지고 있다는 걸 아는 사람이 또 있어?”

“아뇨, 없죠.”

“그럼 나밖에 없잖아. 맹랑한 꼬맹이 자식아.”

대답을 들은 에스메랄다는 곧장 불사조의 품을 향해 뛰어들어, 소리 내어 울었다.

그녀의 체구가 아직 소년인 불사조, 아델에게조차 안길 수 있을 정도로 작았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 말을 들으니 선생님이 확실하네요. 그나저나, 어쩐 일로 저를 찾아오신 거예요?”

“부탁할 게 있거든.”

“무슨 부탁이요?”

“네가 도와줘야 할 사람이 생겼어.”

에스메랄다는 의아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불사조는 어지간해서 남에게 부탁 같은 걸 하는 사람이 아니었으니까.

특히나 제자인 자신에겐 더더욱.

“누구죠? 그게?”

“박성진이라는 친구를 알고 있니?”

모를 리가 없었다.

그가 유명세를 알리게 된 작년 트리니티 아카데미의 중간고사에서 추첨식을 진행했던 게 바로 본인이었으니까.

“알고 있어요. 만나본 적도 있고요. 잘 아는 사이는 아니지만요.”

“그래? 잘됐네. 그 아이를 좀 도와줬으면 하거든.”

“무슨 일인데요?”

“곧 진조랑 맞서 싸우게 될 거야. 네가 그 녀석의 조력자가 되어 줘.”

“네?”

에스메랄다는 황당하다는 반응이었다.

당연한 반응이기도 했고.

기껏해야 어느 히어로팀에 입단할 수 있게 도와달라거나, 보호자 역할을 자처해달라는 이야기 정도가 나올 줄 알았는데, 팀 차원에서 맡아도 모자랄 일을 부탁하고 있었으니.

“말 그대로야. 힘을 합쳐서 진조를 처치해 달라고.”

“젊어지시더니 농담 실력이 많이 느셨네요. 선생님.”

“한 번이라도 내가 이런 농담하는 걸 본 적 있어?”

“…단도직입적으로 말할게요. 그건 말도 안 되는 짓이에요.”

세간에서 떠도는 진조에 관한 이야기 태반이 헛소문이라는 것쯤은 그녀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고작 생도 따위가 상대할 적은 아니었다.

히어로로 살아온 지도 어느덧 20년이라는 세월이 지났는데, 가능한 일과 불가능한 일조차 구분하지 못할 정도로 배운 게 없었겠는가.

물론, 최고참 히어로들에 비해서야 아직 많이 미숙한 편이었다곤 하나, 그래도 먹은 짬밥이 얼만데.

“직접 모습을 드러내라는 게 아니야. 그냥 근처에서 적당히 돕는 척만 해주면 돼.”

“제 신변을 걱정하는 게 아니라, 그 아이의 신변을 걱정하는 거죠.”

“어차피 내전의 양상이 될 거라는 것쯤은 알잖아? 결과적으론 세실리아와 스티븐의 싸움이라고. 그렇게 위험한 일은 일어나지 않을 거야.”

“그렇긴 하지만… 만약 세실리아 측이 패배한다면요?”

“가만히 있는 것보단 도와주는 게 나으니까 돕자고 하는 거지.”

아델은 에스메랄다의 본심을 알고 있었다.

평생 좋아했던 사람이 갑자기 나타나서 한다는 소리가 이런 이야기라니, 기분이 좋을 리가 없겠지.

퉁명스러운 반응을 보이는 것도 당연했다.

하지만, 언제까지고 그녀를 응석받이로 놔둘 수만은 없었기에, 아델은 과감한 결단을 내리기로 하였다.

“이 깃털을 그 녀석에게 전해줘. 무슨 뜻인지는 너도 알겠지?”

“왜 이렇게까지 하는 건데요? 일면식도 없는 사이잖아요.”

“잘 들어. 나는 언제까지고 너를 지켜줄 수 있는 사람이 아니야. 오히려 이 세상에 신물이 나서 죽고 싶은 사람이라고. 만일 내가 죽고 나서도 평생 선생님 타령만 하면서 지낼 거니? 내 의지를 이어받기로 정했다는 말은, 너 스스로 제2의 불사조가 되겠다고 각오한 거나 다름없어. 알고 있잖아.”

“하지만…”

“후배를 잘 챙겨줘. 너에게 미안한 마음도 없지 않아 있지만, 지금까지 내가 널 위해서 했던 행동들을 생각하면 이 정도의 부탁도 못 할 사이는 아니잖니.”

에스메랄다는 눈가의 눈물을 닦아내며 고개를 끄덕였다.

사랑하는 선생님과 약속했었으니까.

* * *

“오랜만에 재회한 기분은 어땠나?”

“질질 짜고, 콧물도 흘리고 난리도 아니었지. 아직도 꼬맹이일 적 모습 그대로라 그렇게 못 볼 꼴은 아니었지만.”

“어지간히도 널 좋아했었나 보군. 아무리 여자라지만, 그 나이 먹고 추태 부리기 쉽지는 않은데.”

“어떤 기분이었을지는 나도 알아. 하지만, 그 녀석은 나에게 소중한 딸이나 다름 없어. 그런 사람의 인생을 망쳐놓을 순 없지.”

“이해할 수 없군. 뭐, 우리 성향이 양극단에 위치해있으니 어쩔 수 없는 노릇이지만 말이다.”

“나도 널 이해할 수 없는 건 마찬가지라고.”

수십 명의 제자가 있었으나, 모두를 잃은 니힐리스.

제자라고 지칭할 만한 이는 단 두 명뿐이지만, 모두가 살아있는 불사조.

구하는 방식도, 대하는 방식도, 보내주는 방식도 모두 완전히 달랐기에, 둘은 서로를 이해할 수 없었다.

그래도 둘은 서로를 존중해주었지만.

“그래도 의외란 말이지. 에스메랄다의 말마따나, 일면식도 없는 그 녀석한테 깃털까지 전해준 이유가 무엇인지는 아직도 모르겠군.”

“언제까지고 빛이 들지 않는 곳에서만 그 녀석을 품고 있을 생각은 아니잖아. 사람이든, 물건이든, 있어야 할 곳에 있어야 한다고. 물론 에스메랄다가 성장하기를 바라는 마음이 더 크긴 했지만, 그래도 친구의 제자가 그늘 아래에만 있기를 원치 않는 마음도 있었지. 깃털을 처음으로 받아 간 녀석은 내 제자였음에도, 네 영향을 더 많이 받은 녀석이었으니까.”

“빚지기 싫었다는 소리로 들리는군.”

“뭐… 틀린 말은 아니야.”

적막한 분위기 속에서도 벽난로의 불꽃은 여전히 타오르고 있었다.

요즘 같은 시대에 벽난로가 웬 말이냐는 이야기는 나오지 않았다.

그들에겐 그것이 더 익숙했으니 말이다.

“녀석이 살아 돌아온다면, 이 별장의 위치를 알려주기라도 해야겠군.”

“비워두는 것도 나름대로 운치 있지 않나?”

“주인 없는 채로 두는 것도 나쁘지만은 않지. 하지만, 나는 알려주는 편이 낫다고 본다. 이름을 잃어버린 이들의 유일한 도피처가 여기니까. 설령 우리가 떠난다고 해도, 그 녀석이라면 알아서 나머지 사람들을 잘 끌어모을 거라 믿는다. 이미 레온이라는 애송이도 포섭했으니.”

“그게 네 뜻이라면야.”

* * *

도대체 어떻게 하면 진조에게 치명적인 피해를 줄 수 있을까.

세실리아는 분명 가능할 것이라고 말했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그럴 만한 방법이 떠오르지 않는다.

능력 대부분을 봉인하고 싸우는 거나 다름없는데, 어떻게 피해를 준단 말인가.

전과는 비할 바 없이 튼튼해진 실이라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비슷한 생도 수준에 한해서지, 진조같이 압도적인 신체 스펙을 가진 상대론 실이 먹힐 턱이 없다.

괜히 실을 쓰려고 들었다간 녀석 손에 질질 끌려다니기나 할 테니.

영식이야 놈에게 피해 자체는 줄 수 있겠지만, 문제는 내가 자색 검신을 유지할 수 있는 시간이 그리 길지 않고.

무한히 부활하는 녀석 상대로 일시적으로 폭딜을 쏟아붓는 게 무슨 도움이 되겠어.

물론 프리실라의 백화 분진이 놈의 재생을 억제할 수 있다곤 하지만, 솔직히 말해 큰 기대는 안 한다.

격의 차이가 그만큼 압도적이었으니까.

강의 시간 내내 어떻게 하면 좋을지 고민하던 와중, 핸드폰에서 알람이 울리기 시작했다.

[면회 요청. 에스메랄다 롤랑.]

에스메랄다 롤랑이라면, 그때 중간고사에서 추첨식을 진행했던 히어로잖아.

갑자기 그 사람이 나한테 면회 요청은 왜 하는 거지?

딱히 연락처를 달라고 한 기억도 없는데.

그래도 면회까지 하러 올 정도라면, 분명 중요한 이야겠지.

일단 만나는 봐야겠다.

…조금 쉬고 싶기도 하고.

“저, 교수님.”

“왜? 또 쉬게 해달라고 하는 거 아니지?”

“아뇨, 면회 요청이 와서요.”

나는 세레나를 향해 핸드폰을 내밀었다.

“뭐야, 진짜네. 갔다 와.”

“감사합니다.”

“쟤한테 면회를 올 사람이 있나?”

“모르지. 물 밑에서 좆목질 하는 사람이 한두 명도 아닌데, 친해진 히어로 생겼을지도 모르니까.”

“나도 누가 면회 좀 왔으면 좋겠다. 쉬고 싶어.”

“그만 땡땡이치고 빨리 다음 라운드나 준비해라, 이 자식들아!”

나는 부러워하는 눈길을 뒤로 하고, 지도가 표시하는 곳을 향해 움직였다.

그래도 만나기로 한 장소가 식당인 건 정말 다행이네.

진 빠져서 죽는 줄 알았는데, 뭐라도 뱃속에 들어간다는 이야기였으니까.

* * *

“안녕하세요. 박성진 생도, 저를 기억하시나요?”

“기억하죠. 작년 중간고사 때 아카데미에 방문도 하셨었잖아요.”

“맞아요. 추첨식을 진행하는 사람이 한둘이 아니라 당연히 기억 못 하실 줄 알았는데, 기억해주시니 다행이네요.”

“그래서, 무슨 일인가요?”

에스메랄다는 작은 상자를 하나 내밀었다.

기껏해야 펜이나 시계 같은 물건 정도나 들어갈 만한 사이즈였음에도, 특수한 봉인이 설정된 것으로 보아 보통 물건은 아닌 듯했다.

“뭐에요? 이게?”

내 질문에, 그녀는 텔레파시를 이용하여 대답했다.

‘불사조의 깃털이요.’

“네?”

불사조의 깃털이라니.

갑자기 이런 걸 나한테 왜 전해주는 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아니, 그 이전에 어디서 이런 걸 구해왔는지도 모를 노릇이었다.

‘쉿, 목소리를 낮춰요. 사람들에게 이목을 끌만한 짓은 하지 마세요. 박성진 생도도 알다시피, 사람들은 불사조를 찾는 데 혈안이 돼 있으니까요. 대답도 마음속으로만 하세요.’

‘그래서, 이걸 저한테 전해주는 이유가 뭐죠?’

‘뭐겠어요? 당신을 돕겠다는 뜻이죠. 진조에게 대항할 거라면서요?’

‘불사조가 저를 직접 도와준다는 이야기인가요?’

‘그럴 리가요. 그분은 지금 누군가를 도와줄 상황이 아니시라는 걸 아시잖아요. ’

확실히 불사조는 지금 누군가를 도와줄 처지가 아니긴 하지.

안 그래도 에버라스팅에 대해 온 이목이 쏠려있는 상태니까.

‘그럼, 이건 왜 전해주신 겁니까?’

‘신뢰의 의미죠. 아무런 이유도 없이 도와준다고 하면 의심스럽잖아요. 물론, 실제론 그보다 훨씬 많은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 당신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가치를 가진 물건이지만, 저희가 아직 그 의미를 설명해도 괜찮을 정도의 관계는 아니니까, 그 정도로밖엔 설명할 방법이 없네요.’

‘즉, 불사조가 저를 신뢰하고 있다는 이야기인가요?’

‘그렇게 생각하시는 모양이던데요. 그래서 저보고 도우라고 하셨고.’

니힐리스의 입김이 들어간 모양이었다.

그게 아니고선 설명이 되지 않는 일이었으니까.

아니, 사실 지금도 설명이 되지 않는 건 마찬가지였다.

‘…솔직히 말해서 당황스럽네요. 뭐가 어떻게 돼가고 있는 건지도 전혀 모르겠고요. 일단 도와주신다는 점은 이해했습니다.’

‘저도 마찬가지예요. 죽은 줄만 알았던 선생님이 대뜸 나타나서 처음 한 말이 당신을 도우라는 이야기였는데, 얼마나 황당했는지 아세요?’

‘선생님이요?’

‘네, 어릴 적 제 선생님이셨죠.’

대충 어떻게 굴러가는지는 이해했다.

불사조를 만난 니힐리스가 에버라스팅에 관한 이야기를 전했고, 상황이 어떻게 흘러갈지 대충 짐작한 니힐리스와 불사조가 제자였던 에스메랄다에게 나를 돕게 시켰다는 거 아냐.

간략하게 정리한 게 이 모양이라니.

다들 인간관계가 뭐 이리 복잡한지 모르겠다.

‘대충 상황은 이해했으니, 자세한 이야기는 천천히 하는 걸로 하죠. 지금 당장 진행할 일도 아니고, 천천히 조율하면 되는 거니까.’

‘상자 안에 연락할 방법도 적어놨으니, 그대로 하시면 될 거예요.’

‘근데, 전 이 상자를 여는 방법을 모르는데요.’

‘그건 내 명령에만 열리게끔 되어 있어요. 오늘 저녁에 열어드릴 테니, 그때 확인해보세요.’

이렇게 꽁꽁 싸맨 게 뭔가 수상하긴 하지만, 별일은 없겠지.

만약 문제 있는 물건이었다면 아카데미로 반입하는 과정에서 진작 걸러졌을 테니까.

물론, 아카데미조차 걸러내지 못했던 특수한 사례가 있다곤 하지만, 에스메랄다가 그렇게까지 기를 써서 날 죽일 이유는 없고.

‘알겠습니다.’

‘마침 주문한 음식도 나왔네요. 일단은 식사나 하죠. 밥 먹으면서까지 이런 골치아픈 이야기를 나누고 싶진 않으니, 적당한 이야기나 하는 걸로 해요.’

그 뒤론 평범한 대화의 연속이었다.

히어로가 된 뒤엔 구체적으로 무슨 일을 하는지, 아카데미 생활은 어땠는지 등의 사소한 주제들.

당연하지만, 제대로 기억나는 건 없었다.

중요한 이야기도 아니라, 밥 먹는 데만 집중하게 되더라고.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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