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5화 〉 프렐류드.(1)
* * *
“그러니까… 정리하자면, 우리더러 진조랑 싸워달라?”
“맞아.”
“정신이 나가도 단단히 나갔네.”
미친놈 취급받아도 할 말이 없긴 하다.
우리 같은 애새끼가 그런 거물 빌런을 상대한다는 건 말도 안 되는 짓이 분명하니까.
아무리 우리 재능이 일반적인 각성자들에 비해선 압도적인 편이라곤 해도, 진짜 빌런들을 상대하기엔 역부족인 게 사실이다.
때때로 격이 다른 사상력을 가지고 태어난 녀석들이 그런 일을 벌인다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아주 특수한 사례에 불과하다.
“그런 게 가능한 사람은 블레이크나 에블린 정도겠지. 그 사람들은 우리보다 어린 나이에 히어로가 됐으니까.”
“발레리 가문의 도움을 받을 수 있다는 말이 사실이라면, 불가능한 이야기는 아닐 거다.”
“그 점은 동의해.”
그 가문이 그렇게 대단한 가문인가?
진조와 직접적으로 관련이 있는 가문인 만큼, 작중에서도 몇 번 언급됐던 기억은 나지만, 딱히 큰 역할은 없었던 걸로 기억하는데,
등장해봐야 대부분은 진조와 관련된 이야기였고, 그 외엔 ‘특이한 각성자가 많이 소속된 가문이다’라는 이야기가 끝이었으니.
“뭐 하는 가문인데?”
“딱히 이름있는 귀족 혈통이거나, 재벌 집안이라든가 하는 그런 건 아니다. 하지만, 계승 사상력을 지닌 각성자들의 가치가 상승할 것을 예지하고, 그들을 대거 포섭하면서 이름을 알리게 된 가문이지.”
가주가 누구였는지는 몰라도, 머리는 잘 썼네.
좋은 사상력을 선점하는 것이나 다름없으니, 가문의 권세를 유지하는 데 큰 도움이 되리라는 건 확실하다.
물론, 계승되는 사상력이라 해서 죄다 진조 급 효율이 나오는 건 아니니까, 기본적으론 ‘가문에서 꽝인 사상력을 가진 각성자가 많이 등장해도, 몇 번 정도는 그걸 만회할 수 있다’ 정도에 불과하지만.
“뭐가 됐든, 난 반대야. 네가 모든 부담을 짊어지는 거나 다름없잖아. 나머지 사람들이야 진조와 직접 맞닥뜨릴 일은 없으니 괜찮겠지만, 너는 이야기가 다르지.”
“나는 괜찮…”
“절대 안 돼. 박성진, 너 혼자서 나 몰래 사고 친 게 몇 번이야, 어? 레온 때도 그래놓고, 이번에 내가 허락해줄 거 같아?.”
아이나는 나를 자신의 품으로 이끌며 말했다.
걱정해주니까 좋긴 한데, 이건 방관할 수도 없는 사건이란 말이지.
하데스가 풀려나는 건 차치해두고, 고작 진조‘따위’를 디스트럭트 오비탈에 가둔다니.
낭비도 그런 낭비가 없으리라.
“그… 애정 행각은 안 보이는 곳에서 하면 안 되냐? 나름 되게 중요한 이야기 중이잖아.”
그 말에 아이나가 허리춤에 두른 팔을 풀어주었다.
좋았는데, 아쉽네.
“너희들은 쪽팔리지도 않냐.”
“그런 생각이 들 리가 있나. 아이나 같은 여자가 연인이면 오히려 자랑하고 싶어서 안달 나는 게 정상이다.”
카타리나의 말이 백번 옳았다.
어차피 비밀 연애도 아니고, 남들 다 아는 마당에 숨길 게 뭐가 있겠는가.
“그래서, 어떻게 하면 허락해줄래?”
“안 해줄 거라니까?”
“그렇게 말해도 난 결국 저지를 사람이라는 거, 너도 알잖아.”
“그래… 차라리 지금이 낫네. 허락이라도 구하니까.”
아이나는 체념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여기 있는 사람도 다 알 거다.
한 번 미친 척하기로 마음 먹은 나를 말릴 사람은 없다는 거.
“그럼, 이렇게 하자. 진조와 동급, 혹은 그 이상의 각성자를 조력자로 섭외해온다면, 그때는 다시 생각해 볼게. 단, 이사장님이나 학장님은 안 돼.”
“감시자나 중재자의 힘을 빌리는 건?”
“당연히 안 돼. 그러면 이 계획 자체가 의미가 없어지잖아. 우리의 최종 목표는 진조를 죽인다는 그 사실 자체보다, 세실리아가 스티븐으로부터 가문을 다시 탈환하고, 그 공적을 나눠 받는다는 데에 의의가 있어. 감시자나 중재자의 힘이 들어가게 되면 그게 불가능해져.”
아이나도 이 이상은 타협해주지 않겠다는 눈치였다.
고집으론 그녀도 어디가서 절대 지지 않는 사람이니, 이 정도면 사실상 많이 양보해준 것이라 볼 수 있었다.
그렇다고 저 협상안이 내게 만족스러운 조건이라는 건 아니지만.
그런 사람을 어디 가서 구한단 말인가.
물론, 내겐 거절의 여지가 없었기에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알겠어. 그렇게 할게. 너희들의 생각은 어때?”
“아이나 말마따나, 나는 딱히 거절할 이유가 없기는 해.”
“프리실라, 너는?”
“하겠어. 내 실력을 증명하기 위해서라도.”
“그렇다면, 그 조력자를 구해오기만 하면 되겠네.”
“잠깐, 나도 그 계획에 동참해도 되겠나?”
뜬금없이 합류를 선언한 것은 카타리나였다.
언제나 정의를 내세우며 움직이는 그녀의 성미에 어울리는 일이긴 하다.
진조는 이견의 여지가 없는 빌런이니까.
다만, 이렇게 다소 떳떳하지 못한 일에도 참여하겠다고 할 줄은 몰랐다.
“갑자기 왜?”
“난 누군가의 역경을 모른 척하고 지나치는 사람이 아니다. 그것이 나와 가까운 사람이라거나, 나에게 특별한 사람이라면 더더욱.”
“진조는 그렇게 호락호락한 상대가 아니라는 건 잘 알잖아. 특히나, 주먹을 맞대고 싸워야 하는 너에겐 더 위험한 일인데.”
“어차피 조력자를 구하지 못하는 이상 실현할 수 없는 계획이다. 그건 그때 가서 생각해도 늦지 않을뿐더러, 나의 퍼스트 어빌리티와 서드 어빌리티는 진조에게 상성이 유리한 편이니, 충분한 전력이 될 테지.”
틀린 말은 아니군.
제아무리 부활이 가능한 진조라 해도, 사망에 이르면 어느 정도의 피해가 누적되기 마련이다.
그런 점에 있어서 카타리나의 즉사 능력은 진조를 상대로 상성이 좋고, 부활하면 첫 공격에 한해 발동하는 치명타도 계속 터지는 것이나 다름없으니, 이론상으론 유리한 게 사실이었다.
문제는, 그걸 상쇄하고도 남을 정도로 극명한 격의 차이가 존재한다는 거지.
“그래도 다시 생각해 보는 게 나을 것 같은데. 넌 지목 받은 사람도 아니니까, 꼭 우리를 도와줄 필요는 없어. 게다가, 이건 목숨을 걸어야 할지도 모르는 일이라고.”
“괜찮다.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고, 설령 일어난다고 하더라도, 그건 가장 먼저 불구덩이 속으로 뛰어드는 너에게 일어날 가능성이 큰데다, 최악의 상황까지 가정하여 만일 나의 목숨이 위험해지는 일이 벌어져도, 네가 구해줄 거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대체 뭘 근거로 그런 소릴 하는 거야?”
“넌 그런 머저리니까. 아니라고 부정해도, 난 그렇게 확신한다.”
언제 내 주가가 이렇게 상승한 건지 모르겠네.
분명 작년 초만 해도 내 평가는 그냥 ‘무해한 인간 1’에 지나지 않았던 것 같은데 말이야.
“난 그렇게 정의로운 사람은 아니야. 상대가 진조라면, 널 구할 만한 여유도 없을 거고. 진짜로 도와줄 생각이라면, 목숨 정도는 알아서 지키겠다는 생각으로 와.”
“당연히 그럴 것이다. 남에게 폐나 끼치는 사람이 될 생각은 없으니까.”
“나도 한마디만 해도 될까?”
지금까지 잠자코 눈치만 보고 있던 알프레드가 손을 들었다.
설마 얘도 함께하겠다든가 하는 그런 말을 하는 건 아니겠지.
내 책임이 무거워지는 건 싫다고.
“얼마든지.”
“이 사건은 알릴 거야, 말 거야. 사람들의 조력을 구하기 위해선 알리는 게 좋긴 하겠지만, 그러면 외부의 개입 때문에 제대로 계획을 실현하기 어려워질 텐데.”
“활동 보고서로만 제출하고, 나중에 사건이 종결되면 그때 신문에 싣던가 해야지. 세레나 교수님이 그 정도 판단도 못 하시진 않을 테니까.”
“그럼, 보고서 작성이라든가, 잡무 같은 건 할게. 너희들은 바빠질 거 아냐.”
“고맙다. 혹시 뭐 필요한 거라도 있냐? 그냥 시키긴 미안해서.”
“사고 싶은 거 생기면 네 카드로 긁어도 돼?”
또 크레딧이 왕창 깨지겠군.
뭐, 알프레드는 그렇게 양심없는 놈은 아니니까.
적당한 가격 내에서만 사용할 거라 믿는다.
“그래, 그렇게 해.”
“고마워.”
“오늘은 여기서 해산하는 걸로 하자. 다들 수고 많았어.”
다들 짤막한 인사만 남긴 뒤, 동아리실을 빠져나갔다.
이야기가 잘 풀린 건 그나마 다행이네.
혹시나 꼬이면 어쩌나 했는데.
* * *
“보고서는 잘 받았어. 몇 십 페이지나 와 있길레, 눈알 빠지는 줄 알았다. 글을 안 본 지 하도 오래돼서 말이야.”
“생각보다 많이 놀라시진 않네요?”
“나도 어렸을 땐 사고 많이 쳤거든. 다 알잖아? 나 그리폰 교도소 출신이라는 거.”
아, 그랬었지.
이 사람이 저지른 일을 생각하면 그렇게 놀랄 일까진 아니긴 하네.
“아무튼, 교수님도 아시죠? 그거 절대 외부에 알리시면 안 돼요.”
“내가 그 정도 눈치도 없는 사람은 아니야.”
세레나가 내 머리를 쥐어박으며 말했다.
분명 장난으로 때린 걸 텐데, 어째 아이나의 진심 펀치보다 아프냐.
머리통이 웅웅 울리는 기분이었다.
“좀 살살 때리시면 안 돼요?”
“원래 사랑의 매는 아픈 거야.”
“많이 사랑했다간 사람 잡겠네.”
“그럼 앞으론 더 세게 때려줘야겠는걸.”
이 사람은 그걸 실천으로 옮길 사람이라 무섭다.
아마 빌런이랑 싸워 보기도 전에 죽을지도 몰라.
“사적인 자리라도 교수가 제자를 막 패는 건 아니지 않나요.”
“그럼, 그냥 아는 누나라고 생각해. 사적인 자리니까.”
“아니, 그런 뜻으로 말한 건 아니고요.”
“왜? 원래 사적인 자리는 친해지려고 만드는 거야. 마침 잘됐네. 세레나라고 불러 봐. 어서.”
“네?”
“얼른, 해봐.”
세레나가 천천히 내 앞으로 다가온다.
그녀 특유의 아찔한 향기도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갑자기 왜 이러는 거야, 이 사람.
“아니, 이런 장난치는 거 걸리면 짤리신다고요. 범죄자 되긴 싫을 거 아니에요.”
“나, 전에도 범죄자였는걸? 그리고, 장난 아니야.”
…그러네.
이 사람은 이미 무서울 게 없는 사람이라는 걸 잊고 있었다.
포기하는 게 가장 편해지는 길이라는 걸 깨닫고 나니, 마음이 편해졌다.
“알았어. 세레나.”
“옳지, 잘한다.”
세레나는 내 손을 잡아 자신의 무릎 위로 나를 앉히고는, 머리를 쓰다듬기 시작했다.
긴가민가하네.
워낙 허물없이 사람을 대하는 성격이라, 진짜 이성으로서 날 좋아해서 이러는 건지, 아니면 단순히 제자를 귀여워하는 방식인지 분간이 안 된다.
그나저나, 인정하고 싶진 않은데, 이거 진짜 편하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시간이 한참 지나있을 정도였으니까.
“저, 좋긴 한데 보고서에 관한 답변을 듣고 싶은데요.”
“응? 아… 아이나 말대로, 그 정도의 조력자를 구할 수 있으면 해도 상관없어.”
“교수님이 해주시면 안 돼요?”
“해주고 싶긴 한데, 내가 개입하면 사건이 복잡해질걸? 아이나가 이사장님이랑 학장님을 제외한 것도 똑같은 이유일 거야. 아카데미는 최대한 그런 일에 관여하지 않는 게 좋거든.”
역시 그런가.
그래도 세레나의 도움이 있었다면 훨씬 편하고 좋았을 텐데, 하는 수 없지.
다른 사람을 찾아보는 수밖에.
“알겠습니다. 그럼 저는 이만 가볼게요.”
“알았어, 가 봐.”
뭐지, 생각 외로 굉장히 순순히 날 보내주는데.
분명 붙잡고 생떼라도 부릴 줄 알았건만.
* * *
나도 바보지만, 그 녀석도 참 바보라니까.
승낙하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지.
근데, 나도 최대한 참으면서 손대고 있는 게 그건데, 아카데미 밖에서 단둘이서 만나는 일이라도 생겨 봐.
분명 절대 못 참고 따먹어버릴걸.
* * *
“최근, 심상치 않은 이야기가 돌고 있다. 알고 있나?”
“심상치 않기는 무슨, 다 네 제자 덕분이지. 아니었으면 스티븐인지 뭔지 하는 녀석한테 관심도 없었을 텐데.”
“그렇기는 하군.”
니힐리스는 턱 끝 대신 가면을 매만지며 대답했다.
“결국, 도와달라는 이야기지? 그 녀석이라면 뛰어들게 분명하니까.”
“그래.”
“어려운 일은 아니지. 그러기로 약속했으니 말이야.”
“하지만, 괜찮겠나? 세간에 네 존재가 다시 알려지면 넌 계속 이니셜 넘버로 남게 될 거다.”
“그건 걱정할 필요 없어. 이번엔 내가 직접 나서지 않을 생각이거든.”
“그렇다면, 달리 대안이 있나?”
아델 슈나이더, 이명으론 불사조라 알려진 그는 곧장 대답하지 않았다.
입을 연 순간은 그가 와인 한 병을 다 비우고 나서였다.
“에스메랄다 롤랑이라고, 옛날에 내가 가르쳤던 꼬마가 있어. 아, 지금은 다 컸으려나. 아무튼, 그 녀석에게 부탁할 거야.”
“에스메랄다라면, 히어로 아니었나? 팀 소속인 그녀가 마음대로 움직일 수 있을지 모르겠군. 시간도 없을 테고.”
“아, 걱정하지 마. 나한테 빚진 게 아주 많은 녀석이거든. 내 말이라면 무조건 들을 거야. 거기다가, 그 녀석이 소속된 ‘클레어 드 시엘’은 극단적인 소수 정예 팀이라, 판단은 멤버에게 자율적으로 맡기는 분위기가 강해. 아마 빠져서 딴짓하고 와도 그러려니 하고 넘어갈걸.”
“도와줬다는 사실이 외부에 알려지지 않도록 할 수 있나?”
“상관없을걸. 어차피 걔는 싸움 잘 못 해. 태생부터 서포터야. 직접 나서지만 않으면 누구인지 모르겠지.”
“그렇다니 다행이군.”
아델은 이해할 수 없다는 제스처로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그렇게 걱정할 필요는 없어. 실제론 그렇게 강하지 않은 게 진조니까. 그냥 언론에서 띄워주는 것뿐이야.”
“부디 그랬으면 좋겠군. 단원을 찾아 헤매던 시절은 딱 질색이라서 말이지.”
“우린 구경만 하면 돼. 그러면 알아서 둘 중 하나는 뒈졌다는 소식이 들리겠지, 뭐.”
“그 녀석은 죽을 길만 골라서 찾아다니는 녀석인데도, 어떻게 죽지 않고 있는 건지, 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