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110화 〉 새로운 국면. (110/173)

〈 110화 〉 새로운 국면.

* * *

근래 들어 인터넷 사용 시간이 확 늘었다.

잘 모르던 인터넷 문화의 재미를 갑자기 알아차리게 되어 늦바람이 든 건 아니다.

대부분 현대인에게 인터넷은 떼려야 떼놓을 수 없는 관계고, 나 또한 이 세계에 떨어지기 전까진 매일같이 커뮤니티나 웹사이트 등을 전전했었으니까.

그렇다면 왜 뜬금없이 인제 와서 인터넷에 관심을 갖게 되었는가, 하면 내 나름의 이유가 있다.

여태까진 바쁘거나 피곤하다고 해서 몸조차 가누기 어려울 정도로 힘들었던 적은 거의 없었다.

해야 할 일이 너무 많다 보니 인터넷을 할 시간도 별로 없었고.

하지만, 새 학기에 접어든 이후로는 매일 지쳐서 드러눕는 게 일상이다 보니, 생겨난 조금의 여유로는 여가 시간에 할 일이 인터넷밖에 없던 탓이 컸다.

강의가 끝난 지금도 인터넷만 구경하고 있으니.

[‘진조’ 스티븐 발레리, A레벨 히어로조차 패퇴하여 충격….]

[새롭게 등장한 빌런, 스티븐 발레리. 불사조에 이어 새로운 불사 각성자의 등장에 화제.]

[뭔 듣보잡 새끼가 이니셜 넘버를 함?]

[불사조님이 좆으로 보이냐?]

[추천 351] [비추 251]

└불사조 그 새끼 좆거품이잖아

└ㄹㅇ 히어로 수준 올라오고 나서 바로 사라진 거 보면 바로 답 나오지

└그래도 불사조보단 뱀파이어 로드가 더 멋있지 않냐?

└스카이림도 안 해본 새끼네

└모기견들 겨울 지났다고 또 설치네

└상특) 악으로 깡으로 견뎌냄

게이특) 처맞기 싫어서 뒤졌다가 부활함

여기서도 이런 걸로 온종일 싸우고 있네.

역시 어딜 가나 인터넷은 똑같은 모양이다.

심지어 이세계일지라도.

뭐, vs 떡밥이 재밌는 떡밥인 것은 사실이다.

이미 뒤진 지 수 천년은 지난 항우와 여포를 살려내서라도 싸움을 붙이고 싶어 하는 게 사람의 본성이니까.

그나저나, 진조의 등장 시기가 생각보다 묘하게 빠른 느낌인데.

물론 원작에서 진조가 등장하기 시작하는 시점은 에버라스팅으로 바뀌고 난 이후긴 하니, 지금은 명성을 쌓아 올리는 단계라고 생각하면 아예 말이 안 되는 것은 아니지만.

다만, 내가 문제 삼고 싶은 것은 등장 시기가 아니다.

바로 이름.

원작에서 등장한 진조와 이름이 다르다는 거다.

원래라면 세실리아 발레리였어야 할 진조가, 지금은 스티븐 발레리로 변해있었으니.

어떻게 된 일인지 알아볼 필요가 있는 거 같은데.

조금 대하기 어려운 사람이긴 하지만, 클로에를 찾아가 볼 필요가 있겠네.

이런 건 클로에가 가장 잘 알고 있을 테니까.

* * *

다행히 클로에는 이사장실에 잘 있었다.

어디로 튈지 모르는 사람이라, 혹여 자리에 없으면 어쩌나 했는데.

딱히 바빠 보이지도 않고.

마침 잘됐네.

나는 조심스럽게 이사장실의 문을 두드렸다.

“들어오세요.”

“안녕하세요. 클로에 이사장님.”

“박성진 생도가 나를 찾아오는 건 처음이네. 무슨 일로 찾아왔니?”

“여쭤보고 싶은 게 있어서 말입니다.”

“오늘은 한가하니, 얼마든지 대답해주도록 할게. 뭐가 궁금한데?”

클로에는 족히 수천 피스는 되어 보이는 커다란 직소 퍼즐에서 눈조차 떼지 않은 채 말했다.

그럼 그렇지.

이 사람이 바쁠 리가 있나.

중요한 일은 항상 오스카에게 떠넘기고 자기는 놀러 다니기만 하는 인간인데.

“혹시, 최근에 유명해지기 시작한 진조에 대해서 아는 게 있으십니까?”

“어느 정도는 알고 있지. 세간에는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선대 진조는 내가 활동하던 시대에도 몇 번 나타난 빌런이니까. 그래서, 궁금한 게 진조에 관해서니?”

“네, 제가 아는 것과 조금 다른 게 있어서요. 원래 진조는 세실리아 발레리 아니었나요?”

그제야 조금 흥미가 생겼다는 듯, 클로에는 고개를 들어 나와 눈을 마주치기 시작했다.

“글쎄, 너는 세실리아 발레리에 대해서 얼마나 알고 있어?”

“거의 아는 게 없습니다. 광인이라는 것 정도밖에는.”

“그럼, 스티븐 발레리에 관해서는?”

“아예 모릅니다.”

원작에서 코빼기도 비치지 않는 녀석인데, 알 턱이 있나.

당연히 모른다.

“세실리아 발레리는 스티븐 발레리의 먼 친척이야. 그리고 세실리아는 현재 행방이 묘연한 상황이지. 항간에는 죽었다는 소문도 돌더라.”

세실리아가 죽었다고?

그렇다면, 원작에서는 어떻게 세실리아가 진조로 등장했단 말인가?

“이상한데요. 제가 알기로는 세실리아 발레리의 사상력이 진조에 훨씬 어울리는 능력이라고 생각했는데.”

“그거야 계승 받기로 한 녀석이 스티븐이면 얼마든지 변할 수 있는 이야기지.”

계승.

극히 일부의 사상력에서 발현되는 성질로, 해당 사상력을 보유하고 있던 각성자가 사망하게 되면, 그 사상력을 다른 이가 인계받을 수 있는 성질이다.

현재는 디스트럭트 오비탈에 갇혀 있는 천마가 가진 사상력이 대표적인 계승형 사상력이고.

당연하지만 기존에 가지고 있던 사상력은 사라진다.

그건 밸붕이잖아.

근데 진조의 사상력이 계승형이라는 말은 처음 듣는데.

“그렇다면 가능한 이야기긴 하지만… 조금 당황스럽네요. 제가 아는 것과는 뭔가 다른 느낌이라.”

“별로 관심 없는 이야기라 크게 생각해 본 적은 없지만, 딱히 이상하게 여길 필요는 없어. 선대 진조는 자신의 사상력이 스티븐에게 더 어울린다고 판단한 모양이지. 애초에 세실리아는 진조의 능력을 계승 받지 않아도 될 정도로 강한 사람이니까. ”

“그렇다면 굳이 세실리아가 자취를 감출 필요가 있었을까요?”

“세실리아와 스티븐은 원래 그리 사이가 좋지 않은 편이라고 들었어. 계승자 자리를 놓고 경쟁하던 사이니 당연한 이야기긴 하지만. 아무튼, 현재는 계승이 끝난 상황이고, 스티븐은 눈엣가시 같았던 세실리아를 없애버리고 싶겠지. 설 자리를 잃은 세실리아는 제거당하지 않으려면 모습을 숨길 수밖에 없고.”

발레리 가문의 사정이 어떤지는 모르겠지만, 대충 이야기가 어떻게 흘러 가는지는 알 거 같다.

원래 계승자로 지목되던 사람은 세실리아였으나, 모종의 사건을 계기로 세실리아가 신뢰를 잃고, 스티븐이 계승자가 된 상황인가 보네.

하지만, 그 모종의 사건이 뭔지는 나로서 알 수 없었다.

“왜 세실리아는 계승자가 되지 못한 걸까요?”

“그건 나도 모르지. 내가 발이 넓다곤 해도 가문의 개인 사정까지 알 수 있는 건 아니니까. 다만, 조금 이상하다고는 생각해. 정통성은 직계인 세실리아에게만 있거든. 부랑아 소리나 듣던 방계의 스티븐과 달리 세실리아는 엘리트 중에서도 엘리트고. 명분상으로는 스티븐에게 줄 만한 이유가 별로 없는 건 맞아.”

들으면 들을수록 이상하네.

왜 세실리아는 계승자가 되지 못한 걸까?

누가 봐도 세실리아가 계승자가 돼야 했을 상황인데.

물론, 이렇게 고민한다고 해서 뚜렷한 답이 나올 것 같지는 않았기에, 나는 대충 이야기를 마무리 짓고 기숙사로 돌아가기로 했다.

“알겠습니다. 귀찮게 해서 죄송해요.”

“다음에도 궁금한 게 있으면 얼마든지 찾아와. 바쁘지만 않으면 답변해줄게. 아, 혹시 과자 좋아하니?”

“당연하죠.”

“자식 같아서 주는 거야. 물론, 내 아카데미에 있는 생도들은 모두 자식 같고 귀엽지만.”

평소에는 클로에의 나이를 실감하기 어렵지만, 가끔 이런 행동을 보일 때는 클로에의 진짜 나이를 알 것 같단 말이지.

* * *

자정에 가까운 시각.

갑자기 핸드폰의 벨이 울리기 시작했다.

대체 누구야?

이 시간에 전화를 거는 게.

심지어 처음 보는 번호다.

“여보세요.”

“박성진씨, 맞으시죠?”

“맞습니다. 누구세요?”

“전 세실리아 발레리라고 해요.”

당황스러움에 아무런 말도 나오지 않았다.

장난이라고 치부하기엔 상황이 너무 절묘하게 맞아떨어졌고, 사실이라고 하기에는 그녀의 태도가 지나치게 뻔뻔했다.

“너무 당황하지 마세요. 저는 당신에게 감사하고 있으니까.”

“예?”

“이야기는 들었어요. 에버라스팅이 불사조에서 진조가 변할 거라는 이야기는.”

“…그건 어디서 들었죠?”

대체 어디서 정보가 새어 나간 거지?

에버라스팅에 관한 이야기를 나눈 사람은 니힐리스 뿐인데.

하지만, 니힐리스는 그런 이야기를 함부로 떠들고 다닐 사람이 절대 아니다.

내가 신원 관리를 너무 소홀히 했나?

“그건 별로 중요한 게 아니에요. 지금 중요한 건 진조에 관한 이야기니까. 어차피 이 사실은 저희밖에 모르니, 안심하도록 해요. 이야기인 당사자인 내가 어디 가서 이 이야기를 떠벌리고 다니진 않을 테니.”

“…그렇긴 하죠. 그래서, 하고 싶은 말씀이 뭡니까?”

“저희 가문에서 이어져 내려오던 진조, 뱀파이어 로드 등으로 불리던 사상력은 분명 강력한 힘이죠. 저도 그것을 물려받길 원했었고요.”

“하지만 계승자가 되는 데 실패했잖아요.”

“그건 제가 포기한 거랍니다.”

분명 세실리아는 진조의 힘이 있어야 할 정도로 약하진 않다고 들었다.

하지만, 그 이유만으로 스티븐에게 계승자 자리를 양보해 주기엔 잃을 게 너무 많아 보이는데.

“왜 포기했죠?”

“진조의 힘을 얻은 사람은 미쳐버린다는 것을 깨달았거든요.”

즉, 세실리아 발레리는 원래 미치광이가 아니었고, 원작에선 진조의 힘에 의해 광인이 된 것뿐이다?

이건 이것대로 이상한데.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면 원작에서도 진조의 힘을 계승 받지 말아야 했잖아.

“그러면 그 전에는 그 사실을 몰랐기에 계승자가 되려고 했던 건가요?”

“아뇨. 그전에도 알고 있었죠.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능력을 과하게 사용한 사람에게 내려지는 리스크라고 생각했어요. 세대가 교체되면 광증도 사라질 것이고, 힘을 자제해서 사용하면 아무런 문제가 일어나지 않을 거라고 믿었죠.”

“음, 네.”

“유감스럽게도, 그 저주는 다음 계승자에게도 옮겨가는 모양이더군요. 당신의 말이 옳았던 거예요.”

내가 무슨 말을 했는데 내 말이 옳았다는 거야.

말의 과정을 죄다 생략해버리니 알아먹을 수가 없잖아.

“좀 더 상세하게 설명해주셨으면 합니다만.”

“당신은 에버라스팅이 불사조에서 진조가 될 것이라고 예언했었죠?”

“맞습니다.”

“저나, 스티븐은 정신적으론 아무런 문제가 없는 사람이에요. 강력한 힘을 손에 넣었다고 해서 그 힘으로 학살 같은 걸 저지를 사람은 아니라고요. 그럼에도 미래에 그런 일이 벌어진다는 이야기는 분명 선대 진조, 즉, 저희 숙부께서 앓고 계신 광증의 저주가 다음 계승자에게 넘어가, 그 힘을 통제하는 데 실패한다는 걸 의미하겠죠.”

이제 대충 상황이 이해가 간다.

첫째, 진조의 힘은 각성자를 광인으로 만드는 저주가 걸려있다.

둘째, 세실리아는 대를 거듭하면 그 저주가 사라질 것이라 생각하여, 계승자가 되길 원했다.

셋째, 어떠한 경위를 통해서인지는 알 수 없으나, 미래의 에버라스팅은 진조로 변한다고 말한 내 이야기를 듣게 된 세실리아는 대를 거듭해도 광증의 저주는 사라지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고, 계승자의 자리를 내려놓았다.

“…대충 어떤 상황인지 이해했습니다. 그래서 저한테 연락하신 이유는 뭐죠?”

“감사의 말을 전하기 위해서죠. 당신이 아니었으면 저는 괴물이 되었을 테니.”

“고작 그 이유 하나만으로 저에게 연락을 한 것 같지는 않은데요.”

“맞아요. 고작 그 이유 하나만은 아니죠. 어차피 자세한 이야기는 만나서 할 거니까,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된답니다.”

“저는 만나겠다고 약속한 적이 없는데요?”

“조만간 만날 일이 생길 거예요. 준비 단단히 하고 계시길.”

그렇게 대답한 세실리아는 전화를 끊었다.

뭐하는 미친 년인지 도저히 종잡을 수가 없네.

뭐, 별 걱정은 할 필요 없겠지.

아카데미 내부에선 누군가를 해코지하는 게 불가능에 가까우니까.

외부로 나가지만 않는다면 문제는 생기지 않으리라.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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