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9화 〉 새 학기.(3)
* * *
“꿈의 잔재 회수는 잘 되어가나?”
엔리케가 옷깃을 매만지며 말했다.
“아니요. 별로 회수하지 못했습니다.”
“그렇다면, 분석 진척도는?”
“마찬가지입니다. 이렇다 할 소식이 없습니다.”
“서둘렀으면 좋겠군. 잔재야 나중이 되면 얼마든지 회수할 수 있으니 그렇다 쳐도, 연구가 늦어지면 잔재를 모아도 계획을 실현할 수 없게 된다. 아니, 어쩌면 복원조차 불가능해질지도.”
그가 눈길을 옮긴 곳에는 탁한 기운이 흘러나오는 하얀색 파편들이 모여있었다.
쌀알만큼 작은 크기부터, 주먹만 한 크기까지.
아무리 봐도 조금 특별한 돌멩이에 지나지 않는 물건이었지만, 엔리케를 비롯한 솜니엄리버레이터의 단원들은 그 광물 쪼가리에 사활을 걸고 있었다.
“그래도 좋은 소식이 한 가지 있습니다.”
“말해보도록.”
“드디어 힐다가 움직이려고 하나 봅니다.”
“이제야 움직이기 시작한 게 좋은 소식이라고? 퍽이나 그렇겠군. 그년은 진작 잘렸어야 해. 대체할 사람만 있었어도 갈려 나갔을 인물 1순위다.”
엔리케가 아니더라도 힐다를 좋아하는 사람은 내부에 그리 많지 않았다.
의욕만 넘치고, 행동은 하지 않는 사람을 곱게 볼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하지만, 저희로서는 힐다보다 능력이 좋은 사람을 구하기 어렵습니다.”
“그래, 그게 우리의 가장 큰 문제 중 하나지. 산 송장이나 다름없는 년을 업어 모셔야 한다니.”
“아쉽습니다. 그녀가 딸인 아스트리드를 반만 닮았더라도 좋았을 텐데 말이죠.”
“참 희한한 관계란 말이야. 아무리 봐도 모녀지간이라도 그렇지, 그렇게 상반된 성격을 가졌으면 서로를 좋아하기 힘들 텐데, 사이가 참 좋아. 아니지… 그 이전에 ‘어떻게 결혼할 수 있었는가’가 더 궁금하군.”
‘차라리 아스트리드가 그 자리에 있었다면…’
모두가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유감스럽게도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겠지만.
아스트리드는 히어로가 되기를 원했기 때문이다.
빌런 조직에 가담하고 있는 게으름뱅이를 어머니로 두고 있는 주제 히어로라니, 아무리 봐도 이상한 가족이 아닐 수 없었다.
“뭐, 게으르다는 것만 빼면 딱히 모난 데는 없는 사람이니까요. 의외로 주변 사람들도 잘 챙겨주고.”
“성격만 놓고 보면 힐다는 빌런 같은 걸 할 성격이 아니긴 하지. 단지 이해관계가 일치하니 같이 움직이는 것뿐. 그나저나, 힐다의 계획이 무엇인지나 들어 보고 싶군.”
“혹시, 예전에 기획했던 프로젝트 중 불사조와 연관된 프로젝트를 기억하십니까? 거기에 진조를 이용하자는 계획입니다.”
“불사조가 사라졌으니, 대체품으로 진조를 선택하겠다는 건가.”
“그렇습니다. 어차피 폐기가 논의되던 프로젝트니, 힐다에게 맡겨도 큰 문제는 없지 않겠습니까.”
엔리케는 나쁘지 않은 아이디어라고 생각했다.
불사조나, 진조나, 자신들이 통제할 수 있는 영역 밖에서 움직이는 사람이라는 건 매한가지였으니까.
어차피 둘 다 통제할 수 없다면, 히어로에 가까운 성격을 가진 불사조 쪽보단 단순하게 본능에 몸을 맡긴 채로 행동하는 진조 쪽을 회유하는 게 나았다.
“좋은 계획이군. 어차피 우리의 본래 목적은 디스트럭트 오비탈에 있는 하데스를 꺼내는 것이니까. 몸을 사리는 불사조 쪽보단 진조 쪽이 낫긴 하겠어. 다만, 그 녀석이 우리의 기대를 만족할 수 있을 지는 모르겠군. 요즘들어 악명을 떨치고 있다곤 해도, 불사조만큼 강할까?”
“그건 저도 모르겠습니다. 자세한 이야기는 본인과 나눠보심이.”
“알겠다. 수고 많았다.”
가볍게 관리인의 어깨를 몇 번 두들긴 엔리케는,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연구소를 떠났다.
더 이상 그의 얼굴을 보지 않을 수 있어 다행이라고 생각한 관리인이었다.
* * *
힐다 베르펠은 멍하니 창밖을 주시하고 있었다.
이따금 창틀에 쌓인 눈이 흘러내리며 그녀의 사색을 방해하려 들었으나, 그녀는 아랑곳하지 않고 먼 산만을 바라볼 뿐이었다.
가만히 앉아 생각에 잠겨있는 것만으로 흘려보낸 시간이 어느덧 반나절이었음에도 힐다는 여전히 즐거움을 느끼고 있었다.
남들에겐 지루하게만 느껴질 이 행동이 힐다에겐 가장 큰 기쁨이었으니까.
아마 엔리케가 그 침묵을 깨지 않았다면 힐다는 날이 저물기까지 이러고 있었을 것이다.
“오랜만입니다. 힐다 베르펠.”
“무슨 일이야?”
“당신이 움직이는 건 이례적인 일이니까요. 입단 이후 처음 있는 일이죠.”
“생각할 게 많아서 어쩔 수 없어.”
엔리케는 치밀어오르는 화를 가까스로 참아내었다.
무의미한 행동을 정말 싫어하는 그에겐 힐다가 고깝게 느껴질 수밖에 없었다.
한 조직의 중책을 맡아놓고선, 하는 것이라곤 구석에 처박혀 가만히 앉아있는 게 전부였으니.
“별다른 이유로 온 건 아닙니다. 생각을 조금 듣고 싶어서요.”
“새로운 아이디어에 대한 걸 말하는 거지?”
“그렇습니다.”
“우선 마시면서 이야기하자고.”
힐다는 냉장고에 비치돼있던 맥주를 꺼내 엔리케에게 내밀었다.
단순히 본인의 목을 축이기 위한 행동이라는 걸 모르는 엔리케는 아니었지만, 정상적인 사고 자체가 불가능한 녀석들만 우글거리는 게 자신의 집단이었으니, 최소한의 성의라도 보이는 녀석이 있다는 사실에 감사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왜 불사조에서 진조로 대체하려는 거죠? 대충은 알 것 같습니다만.”
“중요한 점은 그거야. 결국 우리는 손잡은 녀석을 배신해야 하잖아?”
“그렇죠. 디스트럭트 오비탈에 있는 하데스와 교체하기 위함이니까요.”
“그래, 디스트럭트 오비탈의 존재 이유는 죽이는 게 오히려 손해인 녀석들을 가두기 위한 장치지. 불사조와 진조는 그 점에선 모두 부합하긴 해. 하지만, 과연 그들이 불사조를 사로잡았다고 해서, 디스트럭트 오비탈에 가두려고 들까?”
불사조는 흔히 생각하는 빌런과는 동떨어진 유형의 인물이었다.
잔혹한 면모는 있을지언정, 행동이나 사상 자체는 악당과 거리가 멀었으니까.
오히려 영웅적인 면모 때문에 그를 좋아하는 이들이 더 많았다.
히어로들 중에서도 그런 생각을 하는 이들이 많았고.
즉, 어쩌다 불사조를 생포하는 데 성공한다 해도, 그를 곧바로 디스트럭트 오비탈에 처박아 버릴 확률은 낮았다.
어떻게든 교화시켜서 자신들의 편에 서게 만들지.
“즉, 불사조와 손을 잡아봤자, 그가 우리들의 말을 곧이곧대로 따를 확률도 낮을뿐더러, 말을 잘 따라준다고 해서 최종 목표인 하데스를 꺼낼 수 있을 거란 보장은 없다는 소리로군요.”
“정확하게 이해했어.”
“하지만, 그 계획에는 한 가지 문제가 있습니다. 불사조는 누구나 알아주는 강자인 반면, 진조는 아직 불사조에 비해서 현저히 명성이 떨어지죠. 만약 진조가 계획대로 움직여준다고 한들, 하데스와 교환될 수 있을지는 의문입니다. 기껏해야 서킷브레이커 등급 교도소에 수감되고 말지 않을지.”
“진조가 불사조보다 더 악랄한 녀석이라고 대중들에게 인식시키는 과정이 필요하겠지. 어차피 불사조는 실종 상태니까, 진조의 악명이 더 올라가면 코스모스 녀석들도 알아서 No.7 에버라스팅을 진조로 교체하려 할 거야.”
이야기는 매끄럽게 흘러갔다.
그것 하나만으론 이 계획이 좋은지 나쁜지 판단할 수 없었으나, 적어도 모순점이 보이지 않는다는 건 확실했다.
“좋습니다. 여기까지는 괜찮다고 생각되네요. 이제 실현 여부에 관해서 물어보겠습니다. 어떤 방식으로 진조를 회유할 생각입니까.”
“회유? 귀찮게 그럴 필요는 없지. 불사조 쪽이야 머리도 잘 굴러가는 편이고, 이번 계획이 아니더라도 얼마든지 써먹을 만한 가치가 많은 사람이지만, 진조는 써먹고 버리게 될 패잖아? 그냥 열심히 띄워주면서 더 날뛰게 시킬 거야. 그런 녀석한테 굳이 우리 소개를 할 필요는 없지.”
“아, 진조와 직접적인 접촉을 할 필요가 없다?”
“맞아, 우리는 여론을 바꾸는 데만 집중하면 돼. 적당히 강하지만, 진조에게 이기지는 못할 녀석들을 진조 쪽에 물어다 주면서, 그 승리를 부풀린다면 알아서 이목이 그쪽에 끌릴 테니까.”
엔리케의 마음속에서 힐다의 가치가 재평가되고 있었다.
이따금 힐다가 쓸만한 아이디어를 제공해주긴 했어도, 솜니엄리버레이터가 그녀에게 들인 비용만큼의 일은 하지 않는다고 여겼는데, 이번에는 처음으로 그 값어치를 한다고 느꼈다.
“알겠습니다. 나름대로 생각이 있는 듯하니, 이번 계획은 전적으로 당신에게 일임하도록 하죠.”
“아마 본격적인 작업에 착수하는 데엔 시간이 좀 걸릴 거야. 진조는 아직 그리 유명하진 않으니까.”
“최대한 빠르게 나서주셨으면 하는군요. 시간이 남아도는 것은 아니라.”
“노력은 해볼게.”
힐다의 자세는 아무리 봐도 노력하겠다는 사람의 모습으로는 보이지 않았다.
의자에 앉아 느긋하게 창밖만 바라보는 꼴은 다른 이들의 복장을 터뜨리게 만들기엔 충분했지만, 엔리케는 구태여 쓴소리까진 하지 않았다.
이 정도면 힐다치고는 굉장히 노력한 게 맞았으니까.
물론, 엔리케라고 그 꼴을 가만히 두고 보고 있을 정도로 관용적인 성격은 아니었기에, 신속하게 그 자리를 빠져나왔지만.
* * *
최근에 하나 알게 된 사실이 있다.
그건 내가 존나게 약하다는 사실이었다.
아니, 진작 알고 있던 사실이지만, 또 한 번 느끼게 되었다고 해야 옳으리라.
기술적인 면에서는 크게 남들에게 뒤처지지 않았지만, 힘겨루기가 더 중요한 상황만 되면 맥을 못 추고 발라당 드러눕게 되었으니까.
“성진이는 오늘도 훈련실에 남자.”
다들 안쓰러운 눈으로 날 바라보고 있었다.
하지만, 그 중에서 나를 구제할 수 있는 이는 없었다.
“저, 그냥 오늘은 좀 쉬면 안 될까요?”
“왜? 급한 일이라도 있니?”
“아뇨. 그냥 보고 싶은 사람이 생겨서.”
진심으로 아이나가 보고 싶었다.
아이나 밑에서 마나글레이브 검법을 배우던 작년이 그리웠다.
그때라 해서 힘들지 않은 건 아니었지만, 적어도 지금처럼 살려달라는 말을 외치진 않았으니까.
“보고 싶은 사람은 나중에 봐야 더 기쁜 법이야.”
“누가 그랬는데요?”
“내가.”
“그럼, 근력 운동만 안 하면 안 될까요?”
“안돼.”
전생에서 헬스장을 다니던 기억이 새록새록 떠오른다.
당시엔 인터넷에서 좋은 헬스장을 찾아내는 방법이라고 해서 유행하던 글들이 있었다.
좋은 기구들과 예쁘고 잘생긴 트레이너들이 가득한 헬스장보단, 어디 후미진 곳에 있는 우락부락한 아재들이 가득한 곳이 헬스를 배우기엔 더 좋은 환경이라고.
수십 년간 쌓아온 경력을 바탕으로 너를 지도해줄 거라고.
그것도 무료로.
나도 그 말에 혹해서 그런 헬스장을 찾아서 등록했던 적이 있다.
그리고, 나는 그 결정을 후회했다.
그 헬창들의 정체는 고문 기술자였으니까.
어떻게 하면 죽지 않으면서 사람을 가장 힘들게 만들 수 있는지 잘 아는 인간들이었다.
한 곳만 아프지 말라고 각자 맡은 부위를 매번 색다르게 조져주는 그들의 헌신에 탄복하여, 헬스장을 금세 관두고 말았었지.
그 경험을 이세계에서 다시 하게 될 줄이야.
“자, 한 세트만 더 하자.”
사람이 진짜 죽을 만큼 힘들면, 그냥 쉬고 싶다는 생각밖에 안 든다.
잠에 들 여력도, 밥을 먹을 힘도, 심지어 무언가를 보고 꼴릴 기운조차 남지 않으니까.
하지만, 이 시간만 되면 나는 묘한 향기는 그것들을 가능케 하고 있었다.
강제로 몸을 움직이게 만드는 느낌이라고 해야 하나.
덕분에 내 괴로움도 배가 되었지만.
“교수님, 혹시 향수 같은 거 뿌리세요?”
“아니? 그런 쓸데없는 질문하지 말고 자세나 똑바로 잡아. 여기까지만 하면 보내줄게.”
다른 때엔 반응이 없고, 세레나와 있는 순간에만 이러는 걸 보면 분명 세레나와 연관이 있긴 할 텐데….
속 시원히 물어볼 수도 없고.
이걸 어떻게 대놓고 설명해.
결국, 나는 오늘의 보충이 끝나는 순간까지도 매일 맡는 그 향기의 정체를 알아낼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