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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8화 〉 새 학기.(2) (108/173)

〈 108화 〉 새 학기.(2)

* * *

새 학기 둘째 날.

그건 세레나의 진짜 강의가 시작되는 날임을 의미했다.

기대하는 사람은 딱히 없어 보였지만.

사실 당연한 이야기였다.

세레나는 정교수로 부임한 게 올해로 처음인데다, 누군가를 제대로 가르쳐 본 적도 없는 사람이었으니까.

나조차도 큰 기대는 품지 않고 있었으니, 다른 사람들의 생각은 말하지 않아도 뻔하겠지.

“세레나 교수님은 어떤 식으로 강의하려나.”

“좀 못 가르쳐도 되니까 학점만 잘 주시면 좋겠다. 우리한테 제일 중요한 건 졸업장이잖아.”

“그렇긴 하지.”

“그냥 못 가르치는 정도로 끝나면 다행이지. 세레나 교수님 의욕 장난 아니잖아. 못 가르치는데 의욕까지 넘친다? 그럼 뭐….”

“끝났다고 생각해야지. 그래도 그 정도로 별로일 것 같지는 않아. 조교수 하실 땐 나쁘지 않았으니까.”

“제발 그랬으면 좋겠네.”

다들 기대보단 걱정이 앞선다는 분위기였다.

조교수로 있을 땐 다들 자기 교수로 와달라고 안달이더니, 갑자기 이렇게 여론이 확 바뀔 수 있다는 건 조금 신기했다.

물론 졸업이 1년밖에 남지 않은 녀석들이 다수 포진된 게 U클래스다 보니, 이 정도로 예민하게 반응하는 것도 아예 이해 못 할 수준은 아니었지만.

“좋은 아침.”

이야기의 주인공, 세레나가 등장하자, 다들 약속이라도 한 듯 입을 다물고 자신의 자리를 찾아갔다.

정작 눈빛으론 여전히 미덥지 못하다는 말을 교환하고 있었지만.

“다들 너무 그렇게 걱정하지 않아도 돼. 나도 그렇게 인정머리 없는 사람은 아니니까. 강의에 열심히 참여하지 않아도 기본적인 학점은 넉넉하게 챙겨줄 거야.”

다들 그 말에 안도하는 분위기였다.

뭐가 됐던 졸업에는 큰 차질이 없을 거라는 소리였으니.

“분명 내 강의 방식이랑 성향이 맞지 않는 사람들도 많이 있을 거야. 배울 만한 것들은 이미 아카데미에서 모두 배웠을 거라고 생각하고. 그러니까, 내 강의에 꼭 열심히 참여하라고 강요하진 않을게. 자유롭게 하고 싶은 걸 해도 좋아. 다른 사람들에게 방해만 되지 않으면.”

요컨대, 자신의 도움이 크게 필요하지 않은 사람은 자신의 강의를 듣지 않아도 괜찮다는 소리였다.

너무 자유분방한 게 아니냐는 생각이 들 수도 있겠으나, 사실 그리 문제 삼을 건 없었다.

세레나의 말마따나, 여기 있는 대부분은 이미 트리니티 아카데미에서 썩을 만큼 썩은 녀석들 뿐이었으니까.

꼭 배우고 싶은 것들은 이미 안면을 터놓은 다른 교수들한테서도 얼마든지 배울 수 있고, U클래스 정도 되면 사소한 문제들은 충분히 자기가 알아서 해결할 수 있으니, 굳이 신임 교수인 세레나의 조언을 필요로 할 이유가 없지.

드물게 있는 몇 명을 제외하고 말이다.

우선 나나, 베아트릭스 같은 경우가 그랬다.

배울 건 여전히 산더미같이 많고, 조언을 구할 수 있을 정도로 친분이 있는 교수는 몇 명 되지 않았기에, 좋든 싫든 신입인 우리는 그녀밖에 찾아갈 사람이 없었으니까.

그 외에는 간혹 있는 노력파 캐릭터 일부?

카타리나나 천현우 같은 녀석들은 스스로가 아직 부족하다고 여기고 있으니.

“솔직히 말하면, 나는 각성자들 간에 벌어지는 전면전 이외의 것들에 대해선 아무것도 몰라. 그렇다 보니 너희에게 가르쳐줄 수 있는 부분이 지엽적이라서 이렇게 말하는 것도 있어. 다만, 그 부분에 한해서는 일가견이 있다고 자부할 수 있으니, 너무 걱정하진 않아도 돼.”

“그럼 최대한 전술 위주의 강의가 되겠네요.”

“그렇지.”

“해당 강의와 맞지 않는 사람들은 따로 자기 할 일을 찾아서 하면 되는 거죠?”

“맞아. 꼭 훈련실에 올 필요가 없으면 강의실에 남아있어도 좋고, 따라올 거라면 훈련실에서 혼자 훈련해도 돼.”

“알겠습니다.”

생도들은 대체로 세레나의 방침을 환영하는 모양이었다.

자기들이야 손해 볼 게 전혀 없으니 당연한 반응이긴 하지만.

“그럼 바로 훈련실로 이동할게. 따라올 사람들은 따라오도록.”

* * *

예상했던 멤버로 얼추 맞아떨어졌네.

나, 천현우, 베아트릭스, 카타리나, 약간 의외의 인물로는 모용린.

물론 근접전을 선호하는 모용린의 특성상, 세레나와 일맥상통하는 면도 많으니 아주 이상할 건 없었지만.

“전부 빈센트 교수님을 거친 사람들 뿐이네? 그렇다면 주먹다짐은 어느정도 할 줄 알 거고.”

“카타리나랑 모용린을 제외하면 대부분 고만고만할걸요. 저희는 굳이 붙어서 싸울 필요가 없는 애들이니까.”

“그러면 카타리나와 모용린의 대련부터 한 번 보도록 할까. 바로 무기술로 넘어가도 괜찮을지, 아니면 같이 몸 쓰는 것부터 배워야 할지.”

보나 마나 같이 배우겠네.

생도 수준에서야 저 둘이 어나더 레벨이라고 해도, 세레나에겐 그놈이 그놈으로 보일 테니.

“저는 상관없습니다.”

“마찬가지예요.”

“그럼 어디 한 번 볼까. 세 판 정도만 해봐. 대신, 사상력은 일절 사용하지 말고.”

꽤 큰 제약이 걸었음에도, 둘은 군말 없이 훈련실 내부로 들어갔다.

이렇게 보니 훈련실이 엄청 넓어 보이네.

평소야 맨날 전격이 오가고, 하얀색 분진이 훈련실을 뒤덮고, 그림자가 공간 전체를 메우고 그러니까 좁다고만 생각했는데.

특수 효과 같은 걸 모두 제거하고 두 명의 사람만 세워 놓으니, 새삼 훈련실의 넓이가 얼마나 넓은지 알 수 있었다.

“최대한 실전에서 싸우는 것처럼 해. 알겠지?”

“알겠습니다.”

“네.”

“그럼 시작해도 좋아.”

카운트 다운이 끝난 5초 뒤, 둘은 천천히 거리를 좁혀가기 시작했다.

다만, 일정 거리 이상으로 가까워지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적당한 위치를 찾은 둘의 섬세한 공방만이 오갈 뿐.

하긴, 카타리나와 모용린이 다른 생도들에 비해서 난전을 선호하는 편이라곤 해도, 엎치락뒤치락하며 몸을 뒤섞는 것마저 좋아하는 스타일은 아니었으니까.

그러나, 세레나는 그 모습이 영 마음에 들지 않은 모양인지, 눈살을 찌푸리고 있었다.

“수고했다. 린.”

“너도.”

결과만 이야기하자면, 승자는 없었다.

보다 못한 세레나가 승부를 중지시켰기 때문이다.

“그냥 너희도 얘네랑 같이 배워야겠다. 그래도 기본은 잡혀있으니 무기술을 더 일찍 시작하게 되긴 하겠네.”

“어떤 부분이 부족한지 말씀해주실 수 있겠습니까.”

“내가 최대한 실전처럼 싸우라고 했지? 그러면 죽일 것처럼 달려들어야 할 거 아냐. 왜 여기서 격투기를 하고 있어?”

“실전에서도 격투기를 쓰니까요.”

“아니다. 내가 직접 보여줄게. 실전처럼 하라는 게 어떤 건지.”

누가 희생양이 될지는 몰라도, 정말 불쌍하다.

나는 세레나한테 자주 맞아봐서, ‘실전처럼 때린다’는 게 어떤 건지 잘 알고 있거든.

맞는 사람 심심하지 말라고 퍼포먼스용 기술도 골고루 걸어주시는 아주 친절한 분이시지.

로우킥이나 관절기 같은 건 상대가 여자라도 가끔 당할 만하지만, 살다가 여자한테 저먼 수플렉스를 맞아보는 일이 얼마나 있겠어?

다 좋은 경험이라고 생각하고 받아들이면 된다.

“들어와. 성진아.”

“예?”

귀를 의심했다.

잘못들은 거겠지?

아니, 잘못 들은 것이어야만 했다.

“너 말하는 거 맞아. 박성진.”

“아니, 왜 하필 저예요?”

“그냥 올라오라고.”

필사적으로 저항해보았지만, 소용없었다.

세레나와 나의 근력 차이는 니힐리스와 나의 검술 실력 차이보다 컸으니까.

“최선을 다해. 알겠지? 봐주면서 할 테니까.”

세레나는 웃고 있었지만, 나는 그럴 수 없었다.

* * *

누군가가 쓰러져 있는 내 몸을 툭툭 건드렸다.

“성진아, 살아있어?”

“쉬게 놔둬라, 베아트릭스. 저 녀석도 마음고생이 많을 거다.”

“이 장면, 꼭 데자뷰 같아. 카타리나 너도 작년 이맘때쯤에 빈센트 교수님한테 엄청 많이 맞았잖아.”

“그거보다 더 치욕스럽겠지. 세레나 교수님은 봐주면서 하셨으니까.”

그래, 세레나의 실력은 확실히 인정한다.

근데 이건 너무 하잖아.

쉴 틈 없이 들어오는 로우킥이랑 펀치 견제만 해도 신경 쓰여 죽겠는데, 클린치랑 그라운드까지 허용하니, 도무지 저항할 엄두가 나지 않았다.

조금이라도 거리를 벌리려 하면 발차기에 골이 깨지고, 거리를 좁히면 테이크 다운당해서 팔과 다리 중 하나는 관절에서 뽑혀 나가는 게 다반사였으니까.

목이 부러지는 때도 있었고.

덕분에 세레나에게 합법적으로 신체접촉을 할 기회를 얻긴 했지만, 솔직히 말해 촉감이고 뭐고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았다.

그것들이 내 뇌리에 조금이라도 남아있었다면 이렇게까지 억울하진 않았으리라.

남은 게 없잖아.

“이렇게 적극적으로 파고들라고. 너희가 정말 압도적으로 강한 게 아니라면, 튼튼한 상대론 무조건 개싸움을 하게 돼 있어. 정 뭘 해야 할지 모르겠으면, 달라붙어서 눈깔이라도 푹 쑤시던가. 입식 격투기만 하고 살 건 아니잖아. 그나마 린은 조금 낫더라. 클린치 상태를 피하려고 하지는 않아서. ”

“…그건 세레나 교수님이 튼튼한 몸을 지녀서 그런 것도 있지 않습니까. 저희는 그렇게 강건한 육체를 갖고 있지 않습니다.”

“너희들, 수트 안 입을 거니? 수트 입으면 어느 정도의 피해는 막을 수 있잖아. 설마 쪽팔려서 입기 싫다는 건 아니지? 요즘 수트 디자인 괜찮게 잘 나와. 옛날 만화 영화처럼 우스꽝스러운 쫄쫄이 같은 거 아니라구.”

“물건에 전적으로 의존하는 건 더더욱 안될 말입니다.”

“그럼 이런 기술들을 익혀야지. 물건의 힘을 빌릴 수도 없는 상황에 누군가가 근접전을 걸어오면, 그대로 죽으려고?”

“하지만….”

카타리나의 마음이 이해는 간다.

친하지도 않은 사람이랑 부비적거리는 건 분명 좆같으니까.

허나, 언제까지고 그런 방식 위주의 공방만 주고 받을 수 없다는 세레나의 말도 사실이었다.

하다못해 마나글레이브 검법에도 혹시 모를 상황에 대비한 와류 같은 맨몸 기술이 존재하는데, 순수한 육체의 무력만으로 승부를 보는 카타리나 같은 녀석에겐 이런 기술들이 더 중요하겠지.

“너도 알 텐데. 왜 모용린을 상대로 상대 승률이 그리 높게 나오지 않는지를. 그런 전투 방식은 실전에서 한계가 있어.”

“저도 압니다.”

“그래서, 배울 거니, 말 거니?”

“하겠습니다.”

“좋아, 그럼 2인 1조로 조를 짜서 나누도록 하자. 어떻게 짜고 싶니? 불편할 것 같으면 동성끼리 나눠도 되고.”

절대로 안 될 말이지.

남자끼리 허용되는 신체접촉 범위는 딱 어깨동무까지다.

천현우도 전적으로 동감한다는 듯, 나와 같은 말을 동시에 내뱉었다.

““아뇨.””

“그럼, 어떻게 하고 싶니?”

“초보자랑 숙련자끼리 나누도록 하죠. 카타리나와 베아트릭스, 저는 린이랑 하겠습니다. 교수님은 성진이랑 하시면 되고요.”

약아빠진 천현우 새끼.

이럴 때만 선수 치는 속도가 빠르다니까.

결국, 나는 계속 세레나와 합을 맞출 수밖에 없었다.

이곳에서 제일 근접전에 능숙한 게 세레나다 보니, 가르침 자체는 크게 도움이 되었지만, 멘탈적인 측면에선 악영향만 주는 것 같았다.

이걸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불행이라고 해야 할지.

그것의 답을 구하는 데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세레나의 한 마디가 빠르게 상황을 정리해주었으니까.

“무기술로 넘어가기 전까지는 이 조를 계속 유지하도록 할게.”

그래, 불행이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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