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107화 〉 새 학기. (107/173)

〈 107화 〉 새 학기.

* * *

많은 힘든 사건이 있었지만, 그래도 즐거운 방학이었다.

모처럼 혼자만의 시간을 보낼 수 있었으니까.

굳이 아쉬웠던 점을 꼽자면, 기껏 비싼 돈 주고 사놓은 라이더 재킷이 애물단지가 되었기 때문이다.

면허 없이는 호버바이크를 몰 수 없다나 뭐라나.

터미네이터 2처럼 라이더 재킷을 입은 채 도로 위를 질주하는 건 남자의 로망인데.

물론 내가 그러면 아놀드 슈워제네거가 아니라, 유세이 하위호환 정도로 보이겠지만.

뭐 어때. 내가 좋으면 그만이지.

아무튼, 재밌는 시간이었다.

그리고 이젠 아카데미로 돌아가야 할 때고.

부디 올해는 별 탈 없이 무사히 지나갔으면 좋겠네.

* * *

새 학기가 시작되는 날이라 그런가, 못 보던 얼굴이 굉장히 많아졌다.

그중에서 나와 얼굴을 마주할 녀석은 없겠지만.

U클래스로 들어오는 신입생은 올해에 없으니까.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새로운 사람과 면식을 트는 건 생각보다 어려운 일이거든.

게다가, U클래스에 들어올 수준이라면 자기 능력에 취해 에고가 굉장히 강한 경우가 대부분인데, 이런 사람들과 친해지기는 특히나 더 어려운 일이지.

그나마 기존 U클래스에 다니고 있던 생도들은 대부분이 내가 아는 사람이었고, U클래스로 진급하는 사람 중에서도 특별히 관계가 나쁘다고 할 사람은 한 명도 없었던데다, 교수인 세레나 또한 나에게 사근사근한 편이었으니, 올해는 분명 편하게 아카데미를 다닐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야, 박성진. 잘 지냈냐?”

웬일이래.

천현우가 먼저 아는 척도 다하고.

“잘 지냈어. 너는?”

“나도 잘 지냈지. 그나저나, 너 그 이야기 들었냐?”

“무슨 이야기?”

“니네 동아리 폐부 될지도 모른다는 이야기가 있더라.”

아, 그런 게 있었지.

잊고 있었다.

동아리 활동이라 해봤자, 가끔 동아리실에 모여 발굴해낸 쓰레기 B급 영화를 보고 감상문을 제출하는 게 전부인 동아리다 보니.

근데, 그게 왜 갑자기 폐부 위기라는 거지?

“뭐? 왜?”

“찬욱이형 졸업하잖아. 사실상 그 형 인맥으로 유지되는 거나 다름없는 동아리여서, 졸업하니까 다른 부원들 다 나간다는 분위기인 거 같던데. 앨리스 교수님은 관리도 안 하시니까.”

“아… 좆됐네.”

완전 개꿀빠는 동아리였는데.

거기서 주는 소소한 크레딧이나 학점이 꽤 컸기에, 포기하긴 영 아쉬웠다.

그렇다고 내가 단장을 맡아서 동아리를 운영하기엔 좀 그렇고.

“유지할 생각이 있으면 앨리스 교수님이 알아서 단원들 모았을 텐데, 앨리스 교수님도 그럴 생각 없어 보이더라.”

“하긴, 앨리스 교수님은 동아리실에도 얼굴 비친 적도 거의 없긴 했어.”

“네가 맡아서 운영하는 건 어때?”

“그건 좀. 난 인맥도 별로 없고, 단원들 모을 만한 재주도 없어.”

“아닐걸, 네가 작정하고 모으면 충분히 모일 텐데?”

아카데미 내에서 내 입지가 꽤 커진 것은 사실이다.

분명 내가 작정하고 단원을 모으려고 하면 동아리를 부활시키는 것도 불가능한 일을 아닐 터.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부활이지, 동아리를 존속할 수 있다는 의미가 아니다.

날 보고 들어오면 뭐 해.

대부분 재미없어서 금방 나가버릴 텐데.

아쉽게도 난 리더로서의 재능은 없다.

“모르겠다. 다른 동아리를 알아봐야 할 거 같은데.”

“그래, 네가 그렇다면 어쩔 수 없고. 난 그냥 알려준 거야. 강의실 가는 동안 어떻게 할지 좀 생각해 보든가.”

당연하지만, 강의실에 도착하는 순간까지도 마땅한 아이디어는 떠오르지 않았다.

* * *

아우, 바글바글한 거 봐.

원래 U클래스는 이렇게 사람이 많은 클래스가 아니었는데 말이지.

기존에 U클래스에 재학 중이던 녀석은 모용린, 라일라 디아브, 도미닉 메이어, 다니엘 멘데스, 제롬 르클레어, 서찬욱, 그 외 이름조차 기억 안 나는 엑스트라 캐릭터 두 명으로, 총 8명이 있었다.

다니엘과 서찬욱, 그리고 엑스트라 둘이 올해로 아카데미를 졸업했기에, 남는 건 고작 네 명뿐이었지만, 진급하는 녀석만 7명이나 됐기에, 결과적으로 U클래스의 인원수는 줄지 않고, 오히려 늘게 되었다.

많기도 하지.

“박성진이랑 천현우도 저기 오네.”

“U클래스가 이렇게 허벌이 되는 날도 다 오는구나. 사람 존나 많다.”

“제롬 너도 U클래스에선 제일 좆밥이나 다름없는 주제 뭔 허벌 드립을 치고 있냐. 너 S클래스로 강등당할 뻔했잖아. 병신아.”

“닥치시고.”

U클래스라고 다를 건 없군.

평소의 S클래스를 보는 기분이다.

멤버 구성이 기존 S클래스와 크게 변한 게 없어서 그런가.

“왔어?”

나를 부르는 목소리가 들려오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당연하게도, 그곳에는 늘 보던 이들이 있었다.

옅은 미소를 띠고 있는 아이나와, 내 쪽을 향해 손을 흔드는 프리실라.

나의 몸은 자연스럽게 그들이 있는 쪽으로 향하고 있었다.

“다들 방학은 잘 보냈어?”

“나한테는 제일 기분 좋았던 방학인 거 같네. 프리실라는 아닌 것 같지만”

“조금 힘들었어. 안 하던 훈련을 갑자기 하려니까 피곤하더라고.”

둘에게도 제법 많은 일이 있었던 모양이다.

아이나는 드디어 가문의 원로들에게 인정을 받아, 당주로서의 자리를 확고히 할 수 있었다는 소식을 전했고, 프리실라는 코스모스 특임대에 지원할 것을 대비하여 평소보다 훈련 강도를 높였다고 이야기했다.

그래도 학기가 시작하기 전에 푹 쉬어 둔 덕에 크게 피곤하지는 않다고.

“그렇구나.”

“너는 잘 지냈고? 또 무슨 사고치고 다닌 건 아니지?”

“아니, 거의 집에만 있었어.”

“앞으로도 그래줬으면 좋겠네.”

“그러긴 어려울 것 같은데.”

친구 사이에 오가는 만담처럼 들리겠지만, 모두 진심으로 하는 이야기다.

나든, 아이나든.

아이나야 원체 농담 같은 걸 즐기지 않는 스타일이니, 당연히 진심으로 하는 소리였을 것이고, 나 또한 아이나의 이야기만큼은 진지하게 경청하는 쪽이다 보니, 실없는 농담 같은 게 오가는 경우는 거의 없었으니까.

“다들 평범하게 살고 싶어서 안달인데, 왜 너는 불구덩이 속으로 뛰어드는 걸 그렇게 좋아해?”

“몰라, 이렇게 살 운명이었나 봐.”

뭐지, 분명 허튼소리 하지 말라며 화낼 거라고 생각했는데.

의외로 아이나와 프리실라는 묵묵히 고개만 끄덕일 뿐이었다.

그들의 기이한 반응에 어떻게 대화를 이어나갈지 고민하던 중, 강의실의 앞문이 열렸다.

“다들 착석.”

모자를 눌러쓴 장신의 여성이 명령했다.

평소의 세레나라곤 상상도 할 수 없는 모습이었지만, 의외로 그 모습은 제법 잘 어울렸다.

위압감도 느껴지고, 카리스마도 있고.

확실히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는 말이 괜히 있는 건 아닌가 보다.

물론, 세레나의 외모 자체가 그런 분위기와 어울린다는 점도 한몫했지만.

“이미 나에 대해서 알고 있는 생도들도 많겠지만, 모르는 사람이 있을 수도 있으니 내 소개를 하도록 할게. 내 이름은 세레나 스튜어트고, 앞으로 너희를 담당하게 될 교수야. 잘 지내보자. 신입생도 없으니, 주의사항 같은 건 생략하도록 하자. 혹시 나한테 질문 있는 사람?”

“세레나 교수님은 왜 여기서 일 하세요?”

이상한 질문을 할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굉장히 정상적인 질문을 하네.

사실, 이건 나도 꽤 궁금하긴 하다.

아무리 봐도 교수직에는 적성이 없어 보이는 게 세레나거든.

“음, 꽤 옛날이야기부터 해야겠네.”

세레나는 목소리를 한 번 가다듬고는, 이야기를 시작했다.

“난 말이지, 스스로를 멍청한 사람이라고 생각해. 아니, 멍청한 사람이 맞지. 머리가 좋았다면 그리폰 교도소를 습격하는 일 따위는 하지 않았을 테니까. 그러나 그 결정 자체를 후회해 본 적은 없어.”

“아, 그렇다고 내가 했던 일이 잘했다는 뜻은 아니야. 결코 옳은 일은 아니지. ‘무식한 사람이 신념을 가지면 무섭다’라는 말의 예시로 내 이야기가 나올 정도니까.”

“내가 감옥에서 그 말의 의미를 제대로 이해했을 때, 든 생각은 그거였어. ‘만일 나처럼 자신의 신념을 위해서 얼마든지 멍청해질 각오가 되어 있는 사람들을 만난다면, 그들을 도와줘야겠다’라고.”

“왜냐면… 난 그런 병신들이 좋거든. 나를 닮아서 인지는 몰라도. 멍청하다고 해서 꿈을 이루지 말라는 법은 없잖아? 부디 나 같은 선택을 하지 않기를 바라며, 그 사람들을 응원하고, 잘못된 길에 접어들지 않도록 도와주는 거지. 그러고 싶은 녀석을 여기서 찾았고.”

누가 세레나의 뇌를 바꿔치기라도 했나 보네.

원래 이렇게 말을 잘하던 사람이 아니었는데.

세레나가 이렇게 멋있어 보이는 날은 처음이다.

다른 녀석들도 그녀에게 이런 면모가 있었는 지는 몰랐다는 듯, 눈만 껌뻑거리고 있었고.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기껏 용기 내 한 말일 텐데, 너무 반응이 심심하네.

무안해지지 않게 박수라도 쳐줘야지.

“고마워, 너무 시간을 길게 썼는지도 모르겠네. 앞으로 두 개의 질문만 더 받도록 할게.”

“그럼, 교수님이 가장 자신 있어 하는 건 뭐예요?”

“인내심? 난 참는 걸 잘하거든.”

아무리 봐도 맷집과 인내심은 별개인 것 같지만, 본인이 그렇게 생각한다고 하니 넘어가기로 했다.

괜히 태클 걸었다가 또 두들겨 맞기는 싫었기에.

“만약 교수님의 가르침을 받기 싫어하는 생도가 있다면 어떻게 하실 생각인가요?”

아이나는 세레나 되게 싫어하지 않았었나?

마지막 질문을 얘가 할 줄은 몰랐는걸.

“그런 경우는 어쩔 수 없지. 내가 강요할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다행스럽게도 그런 사람은 별로 없었지만.”

아이나는 깨달음을 얻었다는 표정으로 다시 자리에 앉았다.

그 깨달음이 뭔지는 잘 모르겠지만.

여전히 속내를 알기 어려운 게 아이나란 말이지.

“그래서 저희 이제 뭐 하면 돼요? 설마 오늘부터 바로 강의하는 건 아니죠?”

“바로 훈련에 들어가거나 그러진 않을 거야. 오늘 만큼은 편하게 지내. 대신 강의실 밖으로 벗어나지는 말고.”

““네.””

이 뒤의 분위기는 누구나 예상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 다들 시끄럽게 떠들기 바쁘지.

세레나 또한 그것을 제지한다거나 하지도 않았고.

* * *

강의 시간이 끝난 지금, 나는 프리실라를 불러내어, 미리 준비해둔 선물을 건네주었다.

“대체 이 관짝 같은 물건이 무슨 선물이라는 거야?”

“열어 봐.”

“이거, 슈타인호프 M17이잖아. 이런 걸 어디서 구했어?”

“그냥, 너 주려고 발품 좀 팔았어. 그거 .378 Caela랑도 호환된대. 코스모스에서 주력으로 사용하는 거라고 들었는데.”

“아니, 이건 발품 좀 팔아서 구할 수 있는 물건이 아니야. 엄청 귀한 거라고.”

그 뒤로, 프리실라의 진심 어린 설명이 시작됐다.

아무리 들어도 총기에 대한 설명이라기보단, 예찬에 더 가까웠지만.

물론 그 설명 부분조차 나로서는 전혀 알아먹을 수 없는 내용이라, 그러려니 하고 흘려들었다.

하여간 밀덕들의 총기 사랑은 알아줘야 한다니까.

“알았어, 굳이 설명 안 해줘도 돼. 나는 네가 잘 쓰기만 하면 그걸로 만족해.”

“진짜 고마워. 잘 쓸게.”

“써보고 후기 말해줘.”

“안 그래도 지금 바로 사격 연습하러 가려고 했어. 내일 후기 들려줄게!”

프리실라는 들뜬 마음을 감출 수 없다는 듯, 나를 한번 격하게 끌어안고는 곧바로 훈련장으로 뛰어가기 시작했다.

처음엔 과연 여자애한테 이런 선물을 주는 게 맞는 걸까 싶어 고민도 조금 했었는데, 정작 본인은 좋아하니 다행이네.

오랫동안 잘 썼으면 좋겠군.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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