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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6화 〉 사후 처리.(2) (106/173)

〈 106화 〉 사후 처리.(2)

* * *

뭐야, 이건 또.

부재중 전화 탭이 핸드폰 화면을 꽉 채우고 있었다.

골고루도 걸려 왔네.

프리실라, 아이나, 마지막으로 모르는 번호 하나까지.

우선은 친한 순서대로 천천히 전화를 걸어봐야겠네.

“여보세요.”

­야, 내가 하지 말라고 했어. 안 했어.

통화 연결음이 끝나는 즉시, 아이나의 잔소리가 날아들었다.

귀신 같은 년일세.

내가 레온이랑 만난 건 또 어떻게 알았지?

“아무 일도 없었으면 된 거지. 아니, 그건 그렇다 치고, 네가 그걸 어떻게 알아?”

­프리실라가 말해주더라. 레온이 자기한테 연락했다고.

그걸 아이나한테 알려주면 어쩌자는 거야.

아니지, 미리 프리실라의 입단속을 시켜 두지 않은 내 불찰이다.

그렇게 생각하는 게 속 편했다.

이것저것 따지고 들어봤자, 귀찮아지는 건 내 쪽이니까.

“그래, 맞아. 레온이랑 접촉했어. 일은 알아서 수습했으니, 너무 신경 쓸 필요는 없어.”

­왜 자꾸 쓸데없이 일을 벌여 놓는 건데? 그냥 좀 가만히 있으면 안 돼?

“아니… 레온 같은 사람의 도움이나 조언을 구할 수 있으면 좋지 않나? 큰 전력이 될 거라고. 프리실라에게도 좋은 일이고. 사건도 별 탈 없이 잘 해결됐잖아.”

­그래서, 앞으로도 계속 이렇게 위험한 짓만 골라서 하고 다닐 거라고?

아니라고 대답하는 것이 옳은 선택지겠지만, 그럴 수는 없었다.

내겐 아직 해야 할 일이 산더미같이 많이 남아있었으니까.

나라고 그것들이 좋아서 하는 것은 아니었다.

가만히 앉아서 세계가 멸망하는 꼬라지를 보는 것보단, 뭐라도 해보는 게 나았으니 그런 거지.

“응.”

­그럼 우리 한 가지만 약속해. 반드시 네가 해결해야만 하는 일이 아니라면 하지 않기로.

이건 그리 대답하기 어려운 부탁이 아니었다.

지금까지 나섰던 일들은 다 그런 일들 뿐이었으니까.

물론, 아이나에겐 전혀 그렇게 보이지 않겠지만.

“알겠어.”

­난 네가 위험해지지 않았으면 좋겠어.

“미안하다. 괜히 걱정하게 해서.”

­알면 됐어.

심술 잔뜩 난 게 느껴지는 대답이었지만, 오히려 그 점이 나를 안심되게 했다.

그만큼 날 걱정해주고 있다는 의미였으니.

“고마워, 용서해 줘서.”

“그래도 사랑하니까.”

그렇게 대답한 아이나는 전화를 끊었다.

딜교 실패네.

나도 그렇다고 대답해주고 싶었는데.

역시 한 마디도 지고 싶어 하지 않는 그녀였다.

다음에는 내가 먼저 그 말을 해주겠노라 약속하곤, 다음 상대인 프리실라에게 전화를 걸었다.

­미리 말할게. 나, 코스모스 특임대에 지원할 거야.

“뭐?”

갑자기 이게 무슨 날벼락 같은 소리냐.

프리실라가 코스모스 특임대에 지원한다니.

­레온한테 그렇게 말했다며. 구해줄 만한 가치가 있어서 구해준 거라고. 그러니까, 나도 그럴 만한 가치를 가진 사람이 될 거야. 네게 도움이 되는 그런 사람.

“아니, 그건 그거고, 이건 다른 문제지.”

­레온한테 많은 이야기를 들었어. 거기서 많은 걸 느낄 수 있었지. 내가 너무 세상을 편하고 쉽게만 생각하고 있었다고. 어쩌면 나는 네게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하고 있는 걸지도 모른다고.

레온에게 괜한 이야기를 했나 싶다.

고작 저런 말로 프리실라의 경쟁심을 부추기게 될 줄은.

“너는 너대로의 가치가 있어. 굳이 그런 극단적인 방법을 취할 필요는 없잖아.”

­아냐, 마침 잘 된 것 같아. 다양한 무기를 다뤄 보기엔 거기만 한 곳도 없고.

이제야 비로소 아이나의 심정이 조금 이해가 가는 듯했다.

나는 이런 짓거리를 말도 안 하고 몇 번씩이나 해대고 있었으니.

심지어 프리실라는 아직 일을 시작조차 하지 않았다.

그냥 나에게 그렇게 될 것 같다는 통보만 전해준 것이었다.

그런데도 이렇게나 갑갑한데, 아이나 입장에선 오죽했겠는가.

이미 일을 한바탕 벌여 놓고 난 뒤에야 간신히 내 소식을 들을 수 있었으니, 그렇게 화를 내는 것도 당연해 보였다.

사실 그녀는 생불이었던 게 아닐까?

“진짜로? 진짜 코스모스 특임대에 지원할 거라고?”

­난 이미 정했어.

말리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내겐 그럴 자격이 없었다.

이미 내가 비슷한 짓을 한참 많이 해왔는데, 무슨 낯짝으로 그런 말을 한단 말인가.

“그렇다면 어쩔 수 없고. 근데, 정말로 괜찮겠어? 아카데미 생활이랑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힘들 텐데.”

­레온이 퇴역할 때까지만 같이 해보려고 해.

그나마 낫네.

그렇게 길게 있을 거라는 이야기는 아니니까.

아발란체 임무가 종결되는 건 수년 이내고, 아카데미 졸업까지도 2년이라는 유예 기간이 있으니, 그녀가 코스모스에서 보내게 될 실질적인 시간은 짧을 것이다.

“후, 알겠어. 열심히 해.”

­아니면, 나랑 같이 지원할래? 네가 그랬다며. ‘내가 지원하면 너도 코스모스로 돌아올 거냐’라고. 설마, 그냥 한 소리는 아니지?

아무 말이나 싸지르고 본 게 이렇게 스노우볼이 돼서 돌아올 줄이야.

‘입은 만악의 근원’이라는 말이 괜히 있는 게 아니구나 싶었다.

“생각 좀 해볼게.”

­뭐, 아직 시간은 많으니까. 2년 내로만 결정하면 되겠다. 그렇지?

프리실라가 신난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경쾌한 울림이었으나, 나에게는 무섭게만 들려왔다.

같이 지원하자는 협박이나 다름없었으니.

“그래, 너도 신중하게 생각해 보고.”

­결정하면 말해.

“…일단 끊을게.”

코스모스 특임대에 들어가는 것 자체가 문제 되는 것은 아니다.

그들의 힘을 빌릴 수만 있다면 솜니엄리버레이터나, 스토리 내의 기타 빌런들을 제거하는 게 한층 수월해지니까.

문제는, 지금 내가 책임져야 할 일이 한둘이 아니라는 거지.

우선은 아카데미를 졸업해야 한다는 문제도 있고, 아이나와 프리실라의 관계도 계속 유지해야 했으며, 니힐리스를 쓰러트려야 한다는 사명도 있다.

그 외에 천현우와 베아트릭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지 않는가 지켜보기도 해야 했고.

그런 와중에 코스모스 특임대에 들어간다는 것은, 이 모든 것을 포기하겠다는 소리나 다름없었다.

어떻게 하면 좋을지 고민하던 시각, 다시 한번 핸드폰의 벨소리가 울렸다.

아까 걸려왔던 모르는 번호였다.

“여보세요.”

­나야, 윌리엄.

“아, 아저씨. 남아공에선 신세 많이 졌습니다. 감사해요.”

­아니다. 덕분에 좋은 구경도 많이 했어.

“그래서, 어쩐 일로 전화하신 겁니까?”

­너, 전쟁을 준비하고 있다며?

틀린 말은 아니었다.

내가 상대하게 될 녀석들은 거대한 조직이거나, 혹은 한 명 한 명이 어지간한 조직을 능가하는 수준으로 강력한 녀석이었으니까.

그나저나, 그건 어떻게 알았대.

“그건 어떻게 아셨습니까?”

­사미르가 말하던데?

“틀린 말은 아니지만, 본격적으로 준비하고 있는 건 아니에요. 전 그 정도의 능력도 없고요.”

­새끼, 자신감 없기는. 모처럼 좋은 구경도 했으니, 선물 하나만 줄까 해서 연락했다. 최근, 우리가 꽤 괜찮은 물건들을 입수해서 말이지.

“네.”

­필요하면 몇 개 선물해 줄까 하거든. 무기부터 차량까지, 종류는 다양해. 아, 그렇게 까지 대단한 물건은 없으니, 적당히 현실성 있는 걸로 불러.

무기부터 차량이라고 했지?

그렇다면 확실히 떠오르는 것들이 몇 개 있었다.

“혹시, .378 Caela와 호환되는 총도 그중에 있습니까? 코스모스 특임대에서 사용하는 것과 최대한 비슷한 사양으로요.”

­음… 있네. 근데, 그런 병신같은 물건은 어디다 써먹으려고?

“쓸 사람이 있거든요.”

당연하지만, 프리실라에게 줄 물건이었다.

기왕 코스모스 특임대에 들어갈 거라면, 최대한 비슷한 무기를 다뤄 보는 게 좋으니까.

­그래, 뭐 나야 고객이 필요하다는 물건을 제공해주면 될 뿐이니까. 다른 거는?

“호버바이크요. 오프로드에서 달릴 수 있는 물건으로.”

­그건 내 전문이야. 최고의 물건으로 준비해 놓도록 하지. 그거면 되겠나?

“이건 지금 구해달라는 건 아니고, 구할 수 있으면 구해달라는 겁니다. 혹시, 까만색 기체가 흘러나오는 하얀 돌 같은 건 보신 적 있으십니까? 약간 광채도 나고.”

소설 속 설정을 대부분 꿰고 있는 나지만, 이것의 정체는 나도 잘 모른다.

단지, 솜니엄리버레이터가 기를 쓰고 모으려 했다는 것, 그거 하나만 확실하게 알고 있었다.

­아니, 본 적 없군. 어디에 쓰는 물건인데?

“저도 잘 몰라요. 근데 일단은 필요한 물건 중 하나에요.”

­뭐, 입수하게 되면 말해주도록 하지. 아마 구할 일은 없을 것 같다만. 기계 장비에 관한 지식이라면 모르는 게 없다고 자부할 수 있지만, 광물에 대해선 나도 딱히 아는 바가 없거든.

“알겠습니다. 주소를 보내드릴 테니, 거기로 물건들을 전해주세요.”

­그리하도록 하지. 수고해.

통화만 했는데 벌써 진이 다 빠지는 기분이네.

레온 건으로 피곤해서 그런가.

집에 가서 좀 쉬어야겠어.

그 뒤론 벌었던 돈도 좀 쓰고.

남은 방학이라도 알차게 보내야 덜 억울할 거 아냐.

* * *

박성진에겐 직접 찾아보라는 식으로 말했던 니힐리스였지만, 사실 그는 오래전부터 불사조의 행방을 쫓고 있었다.

환생했다는 사실을 미처 몰랐기에, 지금까지 헛물만 켜고 있었으나, 그 정보를 입수한 현재는 불사조를 찾는 게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사미르?”

“정말이었군. 애새끼가 됐다는 게.”

푸른 머리의 소년이 니힐리스의 이름을 불렀다.

이제는 대부분이 잊어버린 이름이었지만, 그는 여전히 그 이름을 기억하고 있었다.

“어떻게 알아낸 거야. 아무도 몰랐던 사실인데.”

“주변에 좋은 정보통이 하나 있어서.”

“뭐, 너라면 작은 단서만으로도 충분히 찾아낼 수 있었겠지. 그래서, 무슨 일로 날 찾아온 거지?”

“나는 드디어 죽을 날이 온 것 같다.”

짊어진 책임을 놓을 수 없어 죽지 못하는 니힐리스.

죽어도 끝없이 되살아나기에 죽지 못하는 불사조.

이 인연이 시작되게 된 계기는 그들이 바라는 소망이었다.

죽음.

흔히 찾아볼 수 없는 기묘한 소망을 공유하는 이들이었기에, 그들은 금세 친해질 수 있었다.

“진심으로 축하한다. 마지막 단원을 구한 모양이군.”

“그래, 비범한 녀석이야. 성장세로 보아하건대, 3년 정도면 날 넘어설 것 같더군.”

“부럽군그래. 그 녀석이 나도 죽일 수 있다면 좋으련만.”

“네놈을 죽이기 위해선, 신화 속의 무기라도 가져와야 할 텐데?”

불사조가 죽을 수 없는 존재라곤 하나, 그의 부활을 방해할 수 있는 것들은 분명히 있었다.

실제로 몇몇의 아티팩트는 환생을 지연시킬 수 있었고, 때때론 환생 자체도 불완전하게 만들 수 있었으니까.

따라서, 그들은 단순한 인간의 손에 의해 만들어진 허접한 아티팩트 따위가 아닌, 신화 속의 무기라면 그의 부활을 저지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결론을 내렸다.

단지 그것을 소유한 이들이 너무 적었기에 시도할 수 없었을 뿐.

“그래, 부디 그것들은 나를 죽일 수 있으면 좋겠군.”

“우습게도 미래에선 너를 죽었다고 생각하는 모양이더군. 에버라스팅 임무가 진조로 대체될 거라고 하던데. 하긴, 요즘은 나조차도 네 소식을 듣기 힘들 지경이니.”

“의욕 자체가 많이 사라진 것은 사실이다. 옛날엔 누군가는 날 죽여줄 수 있을 거라고 믿었는데, 어떤 방식으로도 죽을 수 없었으니.”

푸른 머리의 소년이 니힐리스의 허리춤에서 마나글레이브를 꺼내 들었다.

그리고, 그것으로 자신의 목을 베어 갈랐다.

그런다고 그가 죽는 일은 없었지만.

“이래도 죽을 수 없어. 환생하는 동안은 잠깐의 안식을 찾을 수 있지만, 그마저도 쉽지 않은 게 문제다. 가루가 되어 사라지는 수준이어야 죽을 수 있단 말이지.”

“나도 하루빨리 네가 안식을 찾을 수 있기를 바라고 있다.”

“그래서, 하고 싶은 이야기가 뭐야. 아직 할 말이 더 남아있는 것 같은데.”

“만일 내가 죽으면, 내 제자를 맡아줄 수 있겠나?”

“금세 널 넘어설 거라며. 굳이 그런 녀석을 돌봐줄 필요가 있나?”

“불나방 같은 놈이야. 위험한 일에만 골라서 뛰어들지. 지금이야 내가 관리할 수 있다지만, 내가 죽고 나선 그 녀석을 말릴 만한 녀석이 없다. 내가 아는 이중에서 그 녀석을 말릴 수 있어 보이는 자는 너뿐이고.”

자신을 뛰어넘는 것은 니힐리스에게 큰 의미가 없었다.

세상에는 여전히 니힐리스보다 강한 녀석들이 많았고, 박성진은 항상 그런 녀석들이 있는 곳만 찾아 나서는 사람이었으니까.

그렇기에 그는 불안했다.

박성진이 죽는다는 것은, 자신이 전수해준 모든 것들이 세상에서 사라진다는 이야기 아닌가.

니힐리스는 자신이 가꿔 놓은 기사단이 사라지지 않기를 바랐다.

“…진심인 모양이네.”

“내 명예를 걸고 하는 말이다.”

“그래, 약속하지. 그다지 어려운 부탁도 아니니까.”

“솔직하게 말하는 게 어떤가. ‘그놈 옆을 따라다니면 죽을 수 있을 것 같아서’라고.”

“잘 아는군.”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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