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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5화 〉 사후 처리.(1) (105/173)

〈 105화 〉 사후 처리.(1)

* * *

기나긴 여정은 끝이 났다.

실제로 흐른 시간은 일주일도 채 되지 않았기에 결코 길다고는 볼 수 없는 시간이었지만, 나에게는 만고의 시간이었던지라 그렇게밖에 표현할 길이 없었다.

대신 고생한 만큼의 대가를 얻었으니, 섭섭하다거나 하진 않았지만.

“일이 잘 풀려서 다행이군.”

“그러게나 말입니다.”

“잠깐, 함부로 열지 마라. 내가 먼저 확인하고 들어가지.”

조심스럽게 접근해야 할 것처럼 말한 것과는 달리, 니힐리스는 문을 여는 데 주저함이 없었다.

그와 동시에, 나와 엇비슷하게 생긴 형체가 우리를 덮쳤다.

다행스럽게도 그것은 나와 눈을 마주치기도 전에 육편이 되어 분리됐지만.

“이래서 마지막 순간까지도 긴장의 끈을 놓아선 안 되는 법이다. 당해보기 전까지는 모르겠지만.”

“…감사합니다.”

심장이 멎는 줄로만 알았다.

니힐리스가 아니었다면, 그대로 도플갱어와 함께 이 세계에서 사라졌겠지.

“니힐리스. 본명은 사미르 클러크. 남아프리카 공화국 태생, 현 자색 기사단의 수장. 무슨 깡으로 이렇게 미친 짓을 할 수 있나 했는데, 당신이 배후에 있었다면 얼마든지 가능해 보이는군요.”

확실히, 레온의 외모는 프리실라를 많이 닮아있었다.

말하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다시피, 성격은 영 딴판이었지만.

하긴, 남매라고 성격마저 닮으리라는 법은 없으니.

“내가 누군지 알고 있다면, 그 이상의 저항도 무의미하다는 건 충분히 알고 있을 터.”

“알고 있습니다. 허튼짓은 하지 않을 테니, 부디 검을 거둬주시길.”

“그래서, 이런 짓을 한 이유는 뭐지?”

“거짓말 따윈 하지 않겠습니다. 단순히 믿지 못해서 그랬죠.”

나로서는 무척이나 억울한 상황이었지만, 그의 심정도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레온은 오로지 코스모스만을 위해 젊음을 희생한 사람이었으니까.

그런 자신조차 헌신짝 버리듯 내친 게 코스모스였으니, 좀처럼 다른 이들을 믿을 수 없게 된 것도 이해는 갔다.

“정말로 그랬더라면 우리를 버리고 도망치는 길을 선택했을 텐데.”

“시험이기도 했습니다. 저를 도와준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 안다면, 이 정도 얕은 수 따위엔 걸려들지 않았을 테니까요. 무례를 용서해주시길.”

“일리가 있는 말이군. 사과는 내게 필요 없다. 할 거면 이 녀석에게 해라.”

레온은 탐탁지 않다는 눈길로 나를 훑었다.

뭐가 그렇게 불만이 많은 건지 모르겠군.

그냥 고맙다는 말 한마디면 되는데.

“미안하다. 박성진.”

“괜찮습니다. 그나저나, 절 아세요?”

“알다마다, 유명하니까.”

내가 그렇게 유명했나?

독특한 능력, 가파른 성장세, 광대 기질까지.

많은 이들의 주목을 이끌 만하다는 것은 동의하지만, 코스모스 특임대가 눈독 들일 스타일의 사람은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코스모스가 저한테 관심이 있을 줄은 몰랐는데요.”

“시간과 관련된 사상력을 가진 녀석들은 언제나 코스모스에서 주목하고 있지. 기밀을 중시하는 집단과는 맞지 않는 성격을 가졌다는 이유로 크게 관심을 두고 있지는 않지만, 기본적인 조사는 미리 해두는 편이다. 언제 필요하게 될지 모르니까. 게다가, 넌 나에게 생체 샘플을 제공해주기도 했고.”

깜빡하고 있었네.

내가 레온한테 생체 샘플을 제공했었지.

미래 예지는 어느 집단이던 탐을 낼 능력인 게 당연하고.

“그러네요, 생각해 보니 뻔한 이야기였네.”

“왜 나를 도와준 거지? 내가 그리 믿을 만한 위인이 되지 못한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을 텐데.”

“잘 알죠. 전 아저씨가 누명을 썼다는 것도 알고요.”

“고작 그 이유만으로 이런 위험한 짓을 계획했다고?”

“단순히 그것 때문만은 아니죠. 전 아저씨의 가치를 높게 평가하고 있거든요. 버려지기엔 아깝다고 생각했을 뿐이에요.”

레온의 비위를 맞춰주기 위해 하는 소리 따위가 아니다.

그는 정말로 그럴 만한 잠재력을 가진 사람이니까.

짬에서 나오는 바이브를 무시할 수 없듯, 레온이라는 사람이 가진 경험은 돈으로 환산할 수 없을 만큼의 큰 가치를 가지고 있다.

물론, 니힐리스 또한 많은 경험을 가진 사람이라곤 하나, 그것을 레온의 것과 비교하기는 어렵다.

그는 단순히 직접적인 전투의 경험이 많은 것일 뿐, 레온처럼 특수전의 경험이 많은 것은 아니니까.

“높게 평가해줘서 고맙군.”

“다른 이유는, 아저씨의 여동생이 제 여자친구라는 점도 있고요.”

“…프리실라를 말하는 거냐?”

“네, 다른 사람이 또 누가 있겠어요.”

“그년을 보지 못한지도 꽤 됐네.”

“프리실라도 아저씨를 보고 싶어 해요.”

말은 험하게 했지만, 레온도 가족들을 그리워하는 눈치였다.

하긴, 가족 얼굴이 생각날 만도 하지.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다, 도망자 신세가 된 뒤로는 가족들 근처엔 가보지도 못했을 테니.

“나도 가족들의 품으로 돌아가고 싶지. 그랬다간 내 가족들에게 폐만 끼치게 될 뿐이니, 그러지 않을 뿐이야.”

“계속 이렇게 계속 살 생각은 아니잖아요.”

“그럼 내가 어떻게 하면 좋겠나? 코스모스는 날 버렸고, 나 또한 그곳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아. 설령 돌아간다 해도 버리는 패로 쓰이거나, 영원히 코스모스에 묶인 채로 지내게 되겠지. 이니셜 넘버라도 해결하지 않는 이상은.”

이니셜 넘버?

맞아, 내가 왜 그 생각을 못 하고 있었지?

진작 이 방법을 알려줬더라면 됐을 텐데.

“잘 아시네요. 이니셜 넘버를 해결하면 돼요.”

이니셜 넘버.

코스모스라는 단체가 생겨난 이유이자, 최우선으로 여기는 임무.

비밀로 점철된 코스모스라는 단체에서 몇 안 되게 공개적으로 진행하는 임무 중 하나로, 해당 임무를 수행하거나, 해결한 대원에게는 특별한 혜택을 제공한다.

최고 난도를 자랑하는 임무인 만큼, 지금까지 종결된 임무는 하나도 없지만.

“이니셜 넘버에 지원하라고? 그냥 자살하라고 하는 게 낫지 않나?”

“No.5, 코드명 ‘아발란체’는 수년 이내로 임무가 종결돼요. 거기에 숟가락만 잘 얹으면, 아저씨는 자유가 될 수 있어요.”

“이니셜 넘버를 수행 중인 대원에겐 면책 특권이 있는 것도 사실이고, 그걸 해결할 수만 있다면 자유 따윈 얼마든지 얻어낼 수 있는 것도 사실이지. 하지만, 내가 네 말을 어떻게 믿지? 특히나, 아발란체는 수십 년째 진척이 없는 임무다.”

“제가 그 임무에 동참하겠다고 하면 믿으시겠습니까?”

아발란체 임무는 과거에 실종된 유명 빌런, ‘존 스콧’의 행방을 찾아내어 제거하는 것.

존이 마지막으로 관측된 곳이 남극이었기에, 사람들은 남극 대륙을 이 잡듯 뒤져대고 있었지만, 그는 이미 남극을 빠져나와 남아메리카 대륙으로 도망친 지 오래였다.

물론, 그렇다 해서 그가 천수를 누리다가 간 것은 아니지만.

노환과 병으로 별다른 저항조차 해보지 못하고 안데스 산맥에서 최후를 맞이하게 되니까.

작중에선 비중 있게 다루는 사건은 아니었던지라, 코스모스에 의해 해결됐다는 이야기만 짤막하게 등장해서 잊고 있었는데, 레온 덕에 기억이 났다.

“너 같은 녀석이 시도할 임무가 아니야. 나조차도 엄두를 못 낼 임무고. 이건 겁나고 말고의 문제가 아니다. 난이도의 문제지. 내가 과거에 이름 좀 날렸다고 해서 이니셜 넘버에 도전할 수준이 된다는 소리는 아니다.”

“쫄았다는 거랑 뭐가 달라요. 하기 싫으면 하지 마세요. 나중에 저 혼자서라도 할 테니. 아저씨는 계속 그렇게 도망만 다니시면 되겠네요.”

당연한 이야기지만, 그런 임무를 하고 싶은 생각 따위 추호도 없다.

나는 명령에 잘 순응하는 성격도 아닐뿐더러, 영하 70도 이하까지 내려가는 지옥에서 살아남을 수 있을 정도로 굳센 인간도 아니니까.

단지 레온을 꾀어내기 위해 하는 소리일 뿐이다.

“그렇게 꼬드겨 봐야 소용없다.”

“딱 3년, 3년만 거기서 냉동인간처럼 지내면 가족의 품으로 돌아갈 수 있어요. 목숨 건 혈투 같은 것도 필요 없습니다. 그냥 순찰 몇 번만 돌면 끝난다고요. 정말로 안 하실 겁니까? 생판 남인 사람 한 번 구해보겠다고 여기까지 목숨 걸고 온 저도 있는데?”

당연한 소리지만, 이 이야기엔 아무런 논리가 없다.

그냥 감정과 의리에 호소할 뿐이다.

보기엔 냉혈한 같아 보여도, 레온은 실제론 의리가 넘치는 성격이니까.

진짜 냉혈한이었다면 동료 대원들의 죽음 따위로 슬퍼하지도 않았겠지.

“마지막으로 이야기할게요. 저는 형님을 믿고 생체 샘플도 드렸어요. 언제든지 저를 죽일 수 있게 약점까지 제공했다는 소리라고요. 그런 사람이 하는 이야기 정도면, 한 번 정도는 믿어볼 만하지 않습니까? 이대로라면 쭉 가망 없는 삶만 살 텐데.”

레온이 고민하는 듯한 표정을 짓기 시작했다.

열심히 아가리를 턴 게 효과는 있었던 모양이다.

“만약, 내가 자유를 얻게 되면 뭘 요구할 셈이지?”

“제가 아저씨를 채용할게요. 죽을 때까지 굴려 먹을 생각이니, 걱정은 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럴 만한 돈은 있고?”

“이놈 보게. 물에 빠진 놈 건져놓으니 보따리 내놓으라는 심보 아니야.”

분위기를 풀어보고자 던진 가벼운 농담이었는데, 제법 효과가 있던 모양이다.

굳어있던 표정이 풀리고, 미약하게나마 피식 웃는 소리를 내었으니까.

니힐리스든, 레온이든 말이다.

“솔직해서 차라리 낫군.”

“그래서, 아발란체 임무는 하시는 겁니까. 마는 겁니까.”

“내가 안전할 거라는 보장은 할 수 있고?”

“프리실라가 안전할 거라는 보장 정도는 가능합니다.”

이것이 내가 내놓을 수 있는 최대한 솔직한 답변이었다.

때로는 과감한 결단을 위해 거짓말을 할 필요도 있지만, 이번 협상 테이블에선 그러지 않는 편이 차라리 나았다.

애초에 나는 거짓말을 그리 좋아하는 성격이 아니기도 하고.

“좋아, 네 말대로 해주지.”

“그렇다면 임무에 들어가기 전까지 푹 쉬어 두기나 하시죠. 남극까지 가면 고생깨나 할 테니.”

“별로 내키진 않지만, 고맙다는 인사 정도는 하는 게 맞겠지.”

“감사 인사는 프리실라에게나 하십쇼. 여동생 잘 둔덕에 살아남은 거니까.”

건방지기 짝이 없는 태도였지만, 나는 충분히 이런 태도를 보일 만한 자격이 있다고 생각한다.

왜냐고?

내 말을 따르기로 했잖아.

그럼, 이젠 내가 갑이라는 소리지.

반쯤은 농담이지만.

“한 가지는 확실히 알 수 있겠군. 이번 계획을 세운 게 너라는 사실.”

“왜요?”

“이런 상황에 뻔뻔한 소리를 잘도 내뱉는다 싶어서. 둘 다 정신머리가 제대로 박힌 놈이라면 할 짓이 아니거든.”

“제가 좀 대단하긴 하죠.”

정신머리?

그런 건 소설 속 세계에 빙의하기 전부터 제대로 박혀있지 않았다.

빙의한 뒤로 더 맛탱이가 가버렸을 뿐.

어차피 잃을 것도 없는데, 몸 사릴 게 뭐가 있었겠어.

그냥 대충 사는 거지.

“그래, 번호만 남기고 가라. 나중에 알아서 연락하지.”

당연하지만, 남긴 것은 내 번호가 아니었다.

프리실라의 번호지.

첫 전화는 가족이랑 하는 게 낫지 않겠냐는 의미에서였다.

어차피 프리실라와 연락하면 내 번호는 알아서 알 수 있을 테니까.

부디 둘이 감동적인 재회를 하길 빌며, 나는 자리를 떴다.

“프리실라도 남자는 좀 가려가며 사귈 것이지. 하필이면 저런….”

* * *

“수고 많으셨습니다, 스승님.”

“신경 쓸 것 없다. 오랜만에 고향도 들렸고, 그 김에 윌리엄 녀석도 만났으니. 나에겐 여행에 지나지 않았어.”

“다음에는 제가 도움을 드리든가 하겠습니다.”

“필요 없다. 대신 질문 한 가지만 묻지. 이니셜 넘버 중 No.7, 에버라스팅에 대해 아는 것이 있는지 묻고 싶다.”

에버라스팅이라하면, 진조 녀석을 말하는 건데….

진조와 니힐리스는 아무런 관계도 없었을 텐데?

“알긴 하는데, 무슨 사이신데요?”

“놈과 오랜 친구였었지. 네놈이 아는 걸 보면, 아직도 살아있나 보군. 언젠간 만나게 되겠어.”

“그 미치광이랑 아는 사이라고요?”

이상하네.

아무리 봐도 진조랑 니힐리스는 친하게 지낼 성격이 아닌데.

“미치광이라니. 그 녀석은 누구보다 이성적이고 온화한 성격이었는데.”

“진조를 말씀하시는 거 아닌가요?”

“아니다. 내가 말하는 것은 불사조지.”

불사조?

불사조는 지금 한참 나랑 똑같이 급식 먹을 나이일 텐데.

아직 사상력 발현도 안 됐을 거고.

“불사조는 지금 제 나이 또래일 텐데.”

“결국엔 또 죽지 못한 모양이군. 불쌍한 녀석.”

“무슨 말인지 알아듣게 설명해 주시면 안 돼요?”

“신경 쓸 필요 없다. 철 지난 넋두리일 뿐이니까. 혹여 나중에 불사조 녀석을 만날 일이 생기거든, 내 이름을 말해보거라. 자세한 사연을 들을 수 있을 테니.”

분명 불사조는 죽었다가 부활하는 게 특징인 환수였지?

아무래도 환생하기 전에는 니힐리스랑 아는 사이였던 모양이네.

환생하는 과정에서 진조가 현재의 No.7으로 대체되었고.

“그럴 일이 생길지는 잘 모르겠지만요.”

“그건 그때 가면 알겠지. 일단은 가보도록 해라. 이륙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으니.”

“다음에 또 뵙도록 할게요.”

그는 가볍게 고개를 한 번 끄덕이곤, 언제 거기 있었냐는 듯 금세 사라졌다.

볼 때마다 신기하네.

어떻게 저렇게 빨리 움직일 수 있는 거람.

그나저나, 불사조라….

대단히 강한 전력이라 가까이하고 싶은 사람이긴 하지만, 나와는 아무런 접점이 없단 말이지.

친해질 수 있다면 좋았을 텐데, 아쉽군.

있었던 사건과 생각들이나 정리해 봐야겠다.

…아쉽지만, 회고의 시간은 그리 오래 가지 않았다.

워낙 피곤했던 탓인지, 나도 모르게 잠들어버렸기 때문이다.

당연하게도, 내 핸드폰으로 걸려왔던 몇 통의 전화도 받을 수 없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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