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4화 〉 보이지 않는 전쟁.(2)
* * *
윌리엄이 재머를 넘겨주는 데엔 사흘이라는 시간밖에 걸리지 않았다.
사실, 그렇게 짧은 시간은 아니었다.
그사이에 벌써 한 명의 희생자가 추가됐다는 소문이 돌고 있었으니까.
다행스러운 것은, 사건은 여전히 시드넘에서만 발발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만약 그 녀석이 다른 도시로 포인트를 옮기기라도 했다면, 일은 겉잡을 수 없이 복잡해질 게 뻔했다.
‘행운을 빌지. 계획이 실행되기 위한 전제 조건만 마련돼 있다면 성공할 거야.’
윌리엄이 남겼던 말이다.
말이야 쉽지.
과연 그렇게 쉽게 찾을 수 있을까?
* * *
“말했던 장소입니다. 밀르너 애비뉴.”
나도다. 앰브로즈 스트리트. 그럼, 동시에 재머를 작동시켜 보도록 하지.
“2초만 키라고 했었죠?”
그 정도면 충분하다. 지금 바로 키면 될 것 같군.
짧은 심호흡과 함께, 스위치를 올렸다.
달칵 하는 소리가 귓가에서 메아리쳤다.
당연하지만, 실제로 들리는 소리는 아니었다.
고작 버튼 하나 눌렀다고 그렇게 큰 소리가 날 리는 없었으니까.
단지 지나친 긴장 탓에 들리는 환청일 뿐이었으리라.
찾았다. 두 명. 활발하게 움직이는 녀석이 하나. 가만히 있는 녀석이 하나.
“움직이고 있는 게 이리나, 가만히 있는 게 레온이겠네요.”
둘 다 이 도시 내에 있다는 점은 좋군. 하지만, 어느 쪽이 누군지는 아직 정확히 알 수 없으니, 일단은 지켜봐야 한다.
“그럼 저는 움직이고 있는 사람 쪽으로 이동하도록 하죠.”
그러도록. 이리나로 추정되는 녀석은 네가 있는 밀르너 애비뉴로부터 다섯 블록 정도 떨어진 거리에 있다. 마침 시드넘 로드를 통해 움직이고 있으니, 그쪽으로 이동해 보도록.
이렇게 쉽게 녀석들의 위치를 알아낼 수 있으면 그냥 가서 이리나를 죽이던가, 레온만 회유하면 되는 것이 아니냐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그렇게 쉽게 해결될 문제는 아니다.
우리 손으로 직접 이리나를 죽이게 된다면, 사후 수습이 어려워질 테니까.
그게 힘들다고 니힐리스를 대동하여 레온을 힘으로 회유하려 한다?
어림도 없는 소리지.
눈치채고 도망가 버리던가, 레온이 우리를 적대하게 될 가능성만 더 커질 것이다.
따라서, 이번 사건에서 우리의 포지션은 해결사가 아닌, 어쩌다 끼어들게 된 인물이자, 직접적인 사건의 해결은 레온이 하게 만드는 레온의 ‘조력자’여야만 했다.
그래야 레온으로부터 신뢰를 얻을 수 있을 테니.
나는 이제 감청의 위험 때문에 너에게 브리핑을 해줄 수 없다. 지나가는 사람들의 얼굴을 똑똑히 기억해야 하도록. 정신 바짝 차리고 집중해. 적당히 먼 거리가 되면 다시 연락을 취하도록 하겠다.
“네.”
사람이 거의 없는 거리였기에, 그 긴장감이 배가 되는 듯했다.
모두가 소극적이면서도 서로를 경계하는 눈빛을 하고 있었기에, 누가 누군지를 구분하는 것은 좀처럼 쉬운 일이 아니었다.
행동거지마저도 모두가 엇비슷했다.
다만, 그 점은 나에게 장점으로도 작용하고 있었다.
보통 때 같았으면 이렇게 긴장한 모습을 본다면 뭔가 이상하다는 점을 바로 알아차렸겠지만, 이곳에선 모두가 그러한 행색을 하고 있었기에, 내 모습이 딱히 특별해 보이진 않았기 때문이다.
물론, 아무리 그렇다 해도 사람들의 얼굴을 빤히 쳐다볼 수는 없었기에, 나는 가벼운 눈흘김만으로 그 사람들의 얼굴을 기억해야만 했다.
첫 번째 사람을 지나쳤다.
두 번째.
세 번째, 시드넘 로드의 가운데 지점에 도착했을 무렵, 재머의 스위치를 빠르게 올렸다 내렸다.
이 위험해 보이는 행동은 두 가지 의미를 내포하고 있었다.
하나는 니힐리스의 감지가 정확한지 확인하기 위함이었고, 다른 하나는 이들 사이에 섞여 있을 이리나, 또는 레온으로부터 나라는 존재를 각인시키기 위함이었다.
양쪽 모두 제 3세력의 방해를 원치는 않을 테니, 내 쪽에 신경이 쏠릴 게 당연했기에.
하지만, 행인들의 표정은 전혀 바뀌는 법이 없었다.
하긴, 고작 이 정도 일에 반응할 정도였다면 코스모스 특임대 따위 진작에 때려치웠겠지.
네 번째.
다섯 번째.
여섯 번째 사람이 지나가는 것을 마지막으로, 나는 어느샌가 이 긴 시드넘 로드를 횡단하는 데 성공했다.
솔직히 다른 것들은 하나도 기억나지 않았다.
오로지 사람의 얼굴만이 기억날 뿐.
더위로 인한 것인지, 긴장해서인지 모를 땀이 흘러내렸다.
만일 이곳이 한국이었다면, 나는 분명히 주변 사람들로부터 눈길을 끌었으리라.
이 추운 겨울 날씨에 무슨 땀을 그렇게 흘려대냐고.
허나, 다행스럽게도 그런 불상사는 일어나지 않았다.
현재 내가 머무는 이 남아프리카 공화국은 남반구에 자리 잡은 나라였기에, 한여름이나 다름없는 날씨였기 때문이다.
식은땀으로 흠뻑 젖은 이 모습을 보아도, 단순히 ‘더위를 많이 타는 사람이구나’하고 넘어가는 분위기였다.
그 착각에 나는 감사를 표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지 않았더라면, 행인 속에 숨어든 그가 위장을 해제하고 곧바로 내 목숨을 노렸을지도 모르니까.
그나마 이 환경들 덕에 나는 ‘애매하게 의심스러운 사람’ 행세를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이었다.
들리나?
“네… 잘 들리네요.”
수고했다. 행인들의 얼굴은 확실히 기억했겠지?
“네, 모두 확인했습니다. 전원 평범한 행인의 차림을 하고 있었지만, 프리실라를 닮았던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어요.”
그럼 시드넘 로드에 있는 그 녀석이 이리나군. 이제 레온을 꾀어내보도록 하지. 그 녀석은 지금 런디 로드에 있어.
“알겠습니다.”
기다란 시드넘 로드를 다시 횡단하는 수고로움을 겪어야만 했음에도, 나는 아무런 생각이 들지 않았다.
얼른 이 미친 계획이 성사되는 것을 보고 싶을 뿐.
* * *
지금 도착한 그 집이다.
“확실한 거죠?”
확실하다.
“알겠습니다.”
방금 다 마신 음료수 캔에 준비해둔 쪽지를 넣은 뒤, 최대한 무심한 표정으로 길바닥에 집어 던졌다.
그리고, 주머니에 넣어둔 재머의 영향력을 최소화한 뒤, 스위치를 달칵거리길 반복했다.
이리나에겐 영향이 가지 않고, 레온에게만 영향이 갈 수 있도록.
사람들의 눈에는 단순히 길에 쓰레기를 버리는 사람 정도로 보였으리라.
* * *
이리나는 아니야.
이렇게 대놓고 재머를 쓰고 다니는 녀석은 진작 교육 과정에서 탈락했어야 한다.
그렇다면, 대체 누구지?
정보가 너무 없어.
한참을 고민하던 와중, 바깥에서 음료수 캔이 부딪히는 소리가 들렸다.
그와 동시에, 또다시 내 마나 주파수 교란기가 먹통이 되기 시작했다.
진짜 제정신이 아닌… 잠깐.
이건 단순히 나를 놀리는 의미가 아니었다.
재머로 나에게 신호를 보내고 있는 것이었으니까.
일정한 주기로 재머가 작동되는 것을 보면, 모스 부호를 사용하고 있는 것 같았다.
이런 원시적인 방법을 쓰는 녀석이 아직도 있을 줄은 몰랐지만, 나만 알아들을 방법으로 교신을 요청해오는 것을 보니, 그냥 넘기기에도 애매했다.
일단은 해독이라도 해봐야겠군.
‘ㅅㅐㅁㅍㅡㄹㅇㅎ ㅣㅅㅜㅎㅐㄹㅏ’
샘플을 회수해라.
샘플?
무슨 샘플을 말하는 거지?
나는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렸다.
그리고, 주변에 있는 물건 중 작은 샘플이라도 될만한 것들은 모조리 확인해보았다.
그 결과, 그것은 샘플이라고 부를 만한 물건은 단 하나뿐이었다.
길바닥에 굴러다니는 음료수 캔.
입구에 묻어있는 타액 샘플을 채취하라는 의미였다.
물론, 이대로 모습을 드러내기엔 위험이 너무 컸기 때문에, 미리 만들어둔 집주인의 도플갱어를 밖으로 보내어, 빠르게 음료수 캔을 회수했다.
그리고, 그 안에는 작은 쪽지가 들어있었다.
「이 도시에는 세 명의 ‘나’가 있다.
나로서의 나.
‘나’가 된 이리나.
네가 만들어낸 나.
여섯 시 경, 런디 로드와 스테반히스 로드가 만나는 사거리에서 ‘첫 번째 나’가 지나갈 거다.
‘두 번째 나’는 이리나다.
‘세 번째 나’와 ‘두 번째 나’가 마주치게끔 유도해주겠다.
일이 성사되면, 자정에 그쪽으로 찾아가도록 하겠다.」
이해했다.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제법 재치 있는 아이디어군.
일단은 이 녀석의 말을 한 번 따라보도록 하지.
* * *
저무는 태양은 어느샌가 스카이라인을 형성하는 마천루들 사이에 걸려있었다.
초침과 시침이 직선을 유지하는 시간.
그래, 6시가 얼마 남지 않음을 의미했다.
이리나의 마나 주파수가 변했다. 교란기 때문에 정확하게는 식별하기 어렵지만, 기본적인 주파수는 너와 흡사한 걸 보면, 너로 변한 것이 틀림없다.
“레온 쪽은요?”
완전히 너와 같은 주파수도 런디 로드에서 관측된다. 도플갱어가 만들어진 모양이군.
“그렇다면 슬슬 움직여야겠네요.”
정말 자신 있나?
“그럼요.”
좋아, 이리나는 밀르너 애비뉴에서 스테반히스 로드로 천천히 올라오는 중이다. 살아서 보지. 이제 통신을 끊겠다.
스테반히스 거리를 거닌 지 대략 5분경, 날 쫓아오는 듯한 희미한 발걸음 소리가 등 뒤에서 들려오기 시작했다.
이리나였다.
나를 죽이기엔 충분한 거리겠지만, 내가 죽는다든가 하는 일은 벌어지지 않으리라.
레온 행세를 하고 있는 동안은 날 죽일 수 없으니까.
누군가를 죽였다는 흔적이 남으면, 레온이 아니라는 게 들통나고 만다.
그렇다고 나를 가만히 내버려 두기에는 리스크가 너무 크니, 일단은 미행이라도 해보고, 각이 나오면 죽이든가 할 심산이겠지.
결국, 그 레온 코스프레가 계속 먹혀들기 위해선 대상의 ‘완전한 실종’이 전제로 깔려있어야 하는데, 이는 곧 그 사람을 생포해야만 가능한 이야기다.
하지만, 누군가를 생포한다는 건 단순히 그를 죽이는 것보다 훨씬 어려운 일일뿐더러, 나는 그렇게 호락호락 잡혀줄 녀석도 아니다.
더군다나 나에겐 니힐리스라는 든든한 우방이 있잖아.
물론, 상대가 어떤 무기를 숨기고 있는지는 나로서 전혀 알 방도가 없었기에, 마냥 긴장의 끈을 놓을 수는 없었다.
좋아, 두 번째 블록까진 무사히 지나왔다.
앞으로 두 개의 블록만 더 건너면, 계획은 성공적으로 이뤄질 것이다.
저 앞에 ‘또 다른 나’가 있는 게 느껴지니까.
어떻게 그걸 알 수 있는가, 하면 단순히 감이다.
나는 니힐리스처럼 사람의 주파수를 식별할 정도로 대단한 감지 능력을 가지고 있지는 않다.
하지만, 익숙하면서도 이질적인 기운이 넘실대고 있다는 것은 분명히 알 수 있었다.
앞에서도, 뒤에서도.
셋의 거리가 점점 가까워지는 게 느껴진다.
그러나, 나는 고개를 돌릴 수 없었다.
그랬다곤 곧바로 ‘또 다른 나’와 마주칠 테니.
혹여 그러한 일이 일어날까 두려워, 눈조차 감았다.
이제 내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곤, 앞을 향해 달리는 것뿐.
그렇게 정신없이 내달리다 보니, 뒤에서 둔탁한 소리가 들려왔다.
아마 두 명의 ‘나’가 충돌하는 소리였으리라.
하지만, 그 이상의 소리는 들려오지 않았다.
외마디 비명도, 바닥에 쓰러져 무릎이 부딪히는 소리도.
그래, 계획이 성공했다는 증거였다.
굉장히 도박적인 수였지만, 결국은 먹혀들었군.
될 것 같기는 했다.
니힐리스의 이야기를 들은 순간부터 말이다.
알다시피, 이리나의 ‘변신’은 단순히 누군가와 비슷한 모습으로 변하는 것이 아니다.
그와 완벽하게 똑같은 사람으로 변하는 능력이니까.
그래서 나는 생각했다.
나와 똑같은 사람으로 변하는 능력이라면, 레온의 ‘도플갱어’로 만들어낸 나와 마주쳐도 소멸하는 게 아닐까 하고.
그리고, 그 예상은 정확히 맞아떨어졌다.
대기한 장소에서 나타난 레온의 도플갱어와 나와 같은 사람이 된 이리나가 서로를 확인한 순간, 둘은 사라진 것이다.
더 이상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는 것이 그 증거였다.
…진짜로 성공할 줄은 몰랐다.
“제가 누굽니까.”
이리나가 대상과 완벽히 똑같은 사람으로 변한다는 점을 역이용해 도플갱어로 소멸시킨다는 발상은 확실히 대단했다.
“제가 잔머리 하나는 기가 막히게 굴리죠.”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