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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1화 〉 작별 인사. (101/173)

〈 101화 〉 작별 인사.

* * *

“나쁘지 않은 여행이었어. 모처럼 편하게 쉴 수 있었던 것 같네. 시간이 나면 일본에도 한 번 놀러 와.”

아이나가 기울어진 각도로 다가온다.

아마 짧게 볼에 입을 맞추려고 했던 모양이다.

물론, 나는 작별 인사를 그렇게 아쉽게 끝낼 생각이 없었기에, 다가오는 그녀의 방향에 맞춰 입술을 마주했다.

하지만, 아이나는 나의 화답을 기어코 거절하고는, 가볍게 뺨에 입을 맞대는 것으로 마무리를 지었다.

나는 어째서냐는 듯한 표정으로 그녀를 응시했다.

“이번만은 프리실라에게 양보해주도록 할게.”

싱그러운 미소를 지어 보인 아이나는, 고개를 돌려 활주로가 펼쳐진 방향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어떤 상황에서도 지지 않으리라는 각오가 엿보이는, 자신감 넘치는 발돋움이었다.

나와 그녀의 거리는 멀어져만 갔음에도, 그 올곧은 뒷모습은 결코 작아지는 법이 없었다.

“참, 이겨보기 힘든 사람이네.”

“나도 그렇게 생각해.”

확실히, 아이나는 지는 법이 없는 소녀였다.

어떤 의미로든.

그래서, 프리실라가 주눅 들어 하는 것도 이해가 갔다.

저런 사람이 라이벌인 것만큼 괴로운 일은 없겠지.

“그래도 언젠가 한 번 정도는 이기는 날이 오겠지?”

그럼에도 금세 활기를 되찾는 모습이, 역시 낙천적인 프리실라다웠다.

하긴, 그녀는 원래 그랬었지.

해맑다 못해 실없어 보일 정도로 긍정적인 사람이었으니.

이 정도 일로 좌절하진 않았으리라.

“성격은 네가 더 좋아.”

“그건 개개인의 특성일 뿐이니까, 이겼다고 하긴 좀 그렇지.”

잘 모르겠다.

프리실라가 말하는 승리의 진정한 의미가 무엇인지.

그렇다고 그것에 대한 의미를 묻지는 않았다.

본인 나름대로 그 승리란 것을 위해 열심히 노력하고 있는 모양이니, 언젠가는 자연스럽게 그것이 무엇인지 알아차리게 되리라 믿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나는 조용히 그녀를 응원하기만 하면 됐다.

[스코티시 에어웨이즈 13번에 탑승하실 손님들은 출국 수속을 밟아주시길 바랍니다.]

“슬슬 가봐야 할 것 같네.”

“잘가.”

“잠깐, 받을 건 받고 가야지.”

프리실라의 작별 인사는 조금 특별했다.

구애하는 듯한 아이나의 들러붙는 키스가 아니라, 간질간질하게 끝에서 스치는 것이, 자신의 쪽으로 나를 이끄는 느낌에 가까웠다.

나의 입안으로 침투하는 것 같으면서도, 백색 전선은 절대 넘어서지 않는 설면(??)이 그 증거였다.

결국, 나는 그녀의 영역으로 발을 들일 수밖에 없었다.

그러자, 비로소 프리실라도 혀를 포개어 놓기 시작했다.

습기를 머금은 말랑말랑한 살덩이가 여러 번의 포옹을 나눈 뒤, 우리의 거리가 살짝 벌어졌다.

끈적거릴 정도로 밀도 높은 입맞춤은 아니었기에, 가볍게 끝나리라 예상했건만, 현실은 그렇지 않았다.

가늘게 늘어진 실선이 우리가 나눴던 행동이 무엇이었는지, 얼마나 길게 이어졌었는지를 여실히 보여주고 있었으니.

그것을 본 프리실라의 안면이 홍조로 물들었다.

나 또한 그러했으리라.

“…처음이네.”

“뭐가?”

“방금 우리가 했던 거. 이렇게까지 진하게 했던 기억은 없는 것 같아서.”

…확실히 그랬던 것 같다.

기억을 더듬어 봐도, 프리실라와는 이런 경험을 공유한 적이 없다.

“아마 그렇겠지.”

“좋았어.”

“일단, 늦기 전에 빨리 비행기나 타러 가.”

“다음에도 이렇게 해줘야 해?”

나를 강하게 끌어안은 그녀가 얼굴을 비비적거린다.

마치 자신의 향기를 남기겠다는 듯.

키 차이가 크게 나지 않았기에, 목덜미에 안면을 문지르는 듯한 요상한 꼴이 되었지만, 오히려 좋았다.

맨살이 맞닿는 감촉을 느낄 수 있었으니까.

“갈게. 오빠에 대한 소식을 전해줘서 고마워.”

프리실라는 날쌘 몸놀림으로 문을 향해 뛰어갔다.

처음엔 고민도 많이 했었다.

과연 이 이야기를 그녀에게 전해도 되는 것일까.

아무리 그녀라 해도 형제의 진실을 알게 된다면, 분명 상실감과 고통의 늪에 빠져 헤매지 않을까.

하지만, 그것은 단순히 나의 기우에 지나지 않았다.

그녀는 진실을 마주하고도 좌절하지 않았으니 말이다.

물론, 속으로는 그녀도 슬퍼했을지 모른다.

그럼에도, 프리실라는 내색 한 번 하지 않았다.

실로 대단하고 고무적인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어지간히 굳센 심지를 가진 사람이 아니라면 불가능한 일일 테니.

그래서, 나는 그런 프리실라를 믿고 응원한다.

그러한 마음가짐만 있다면, 언젠가는 분명히 아이나를 앞지르는 구석이 생기겠지.

* * *

프리실라를 태운 비행기가 구름 사이로 사라졌다.

그와 동시에, 하늘에서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여행의 끝을 증명하는 신호일까.

아이나와 프리실라는 자신의 고국으로 돌아갔고, 나는 다시 혼자가 되었다.

짧디짧은 순간이었지만, 실망하지는 않았다.

충분히 만족스러운 시간을 보냈으니까.

“방탕하게 지내느라 수고가 많았다.”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 고개를 돌려보니, 가면을 쓴 거한이 나의 쪽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니힐리스와의 약속을 까맣게 잊고 있었네.

분명 ‘두 번째 눈이 오는 날에 다시 보자’라는 약속을 했었지.

큰일 날 뻔했군.

여행 기간 내에 두 번째 눈이 내리기라도 했으면 실로 난감한 일이 벌어졌으리라.

하지만, 나는 그 약속을 잘 기억하고 있다는 듯, 태연하게 니힐리스를 맞이했다.

“방탕하게 지냈다뇨. 제가 얼마나 성실한 사람인데.”

“계집들 치마폭에 둘러싸인 꼴이 볼만하더구나. 입꼬리가 내려오는 걸 못 봤다.”

날 감시하기라도 했나?

그건 또 어떻게 아는 거야.

“그걸 스승님이 어떻게 아시는 겁니까?”

“그냥 해본 소린데, 찔리는 구석이 있었나 보군.”

꼰대 같은 소리만 지껄이던 양반이 이렇게나 변할 줄이야.

놀랍네.

장난기라곤 눈씻고 찾아볼 수 없던 그 인간이 이렇게 허물없는 농담도 하게 될 줄은.

“그나저나, 평소에 입고 다니던 거적때기는 갖다 버리신 겁니까? 낡아서?”

“선물로 줬다.”

그딴 걸 선물로 받아갈 사람이 어딨는 지는 모르겠지만, 본인이 그렇다고 하니 넘어가기로 했다.

그것에 관한 이야기를 하고 싶지 않아 하는 눈치기도 했고.

여러 가지 사연이 있겠지, 뭐.

“그나저나, 자색 검신을 뽑은 것 같던데.”

“어떻게 아셨습니까?”

“파동으로 느낄 수 있다. 숨길 기색도 없어 보이더군. 마나를 감지할 수 있는 각성자 중에서도 예민한 이들은 이미 어떠한 파장을 느꼈을 것이다.”

그러면, 나는 지금 살아남은 기사단원들에게 노려지고 있다는 이야기 아닌가?

좆됐네.

“걱정할 것 없다. 대부분에겐 일상에 지나지 않는 잡음 정도로 들릴 것이니. 해당 파동의 의미를 알아차릴 수 있는 사람은 기사단원 중에서도 극히 일부 이외엔 없다 봐도 무방할 것이다.”

“살아있는 기사단원들이 몇몇 있다면서요?”

“나와 같은 검좌 수준이 아니라면 그 미세한 차이를 구분해낼 수 없다. 기사단은 마나를 이용한 무예를 갈고 닦기 위해 모인 집단이지, 적을 탐지해내거나 색출하는 데 재능을 보이는 이들이 모인 집단은 아니니까. 유일하게 살아있던 검좌마저도 최근에 직접 목숨을 거두었으니.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

…엄청난 일이 있었군.

비슷한 수준의 사람과 사투를 벌인 것치곤 굉장히 멀쩡해 보이는데, 괜히 최강의 기사라는 칭호가 붙은 건 아니었나 보다.

“그럼, 어디 자색 검신을 한번 뽑아 보아라.”

“저는 몸에 칩이 이식되어 있어서 특정 장소 이외에선 사상력을 사용할 수 없는데요.”

“그렇다면, 지난 번에는 자홍색 검신을 어떻게 뽑았지?”

…그러네?

나는 어느샌가 자연스럽게 일상 속에서 사상력을 사용하고 있었다.

편지를 읽을 때도 아무렇지 않게 자색 검신을 뽑아냈었고, 북문 공원에 해먹을 설치하면서도 전혀 이상함을 느끼지 못했다.

“사상력을 억제하는 모듈은 내가 파괴해둔 지 오래다. 전격을 방출하는 일도 없을 거다.”

“하지만, 제 칩은 멀쩡한데요. 핸드폰에 연결된 이 어플도 정상적으로 작동 중이고요.”

“해당 회로만 파괴했으니까. 칩에는 아무런 영향이 없다.”

“그런 게 가능합니까?”

“마나를 통제하는 능력이 극의 경지에 도달한 자라면, 그렇게 어려운 일은 아니지.”

얼마나 섬세한 수준의 조작이 가능한 거야.

나도 이 정도면 나름 많이 따라잡았다고 생각했는데, 현실은 니힐리스의 발치에도 못 따라가는 수준이었군.

과연 내가 그를 앞서는 날이 오기나 할까?

“너무 상심하지 마라. 쌓아온 세월 자체가 다르니까. 너는 그런 것에 신경 쓸 필요 없이, 검이나 뽑으면 된다.”

“이렇게 하면 됩니까?”

“흠, 아직 완전한 청자(?)색은 아니군. 자홍색에 더 가까워.”

그 말이 끝나는 순간, 니힐리스의 칼날이 나의 목덜미 바로 옆에 도달했다.

“‘하늘 아래 같은 색의 검을 가진 자는 존재할 수 없다’라는 말을 잊은 것은 아니겠지?”

“…기억합니다. 하지만, 저는 아직 스승님을 이길 수 없는데요.”

“나도 안다. 장난 좀 쳐본 것이지.”

그는 웃음과 함께 검을 거두었다.

장난을 쳐도 이런 섬뜩한 장난을 치냐.

지릴 뻔했네.

“어차피 네 능력으로 뽑은 검이 아니지 않느냐. 무기의 힘을 빌린 것이니, 너의 실력과는 무관하다.”

“그렇다면, 저는 아직 스승님과 생사를 건 사투를 할 필요가 없다는 말이죠?”

“내가 악인인 것은 사실이지만, 비겁자인 것은 아니다.”

하긴, 명예에 죽고 명예에 사는 사람이 그런 졸렬한 짓을 하진 않겠지.

일단은 니힐리스도 ‘자칭 기사’ 되시는 몸 아닌가.

적어도 자신의 신의에 어긋나는 행동은 절대 하지 않는 인간이었다.

조금은 마음이 놓이는군.

“그래서, 새로 만들어온 마나글레이브는 어떻습니까?”

“괜히 으스댄 것은 아니었군. 확실히 나의 것보다 낫다. 다만, 만든 녀석이 마나글레이브에 대한 조예가 없다는 것만은 확실히 알겠다.”

“그런가요? 많이 연구해서 만든 건데.”

“아름답지 않아. 이런 건 마나글레이브가 아니다.”

고작 이 농담을 하겠다고 저 빌드업을 쌓은 거였어?

그동안 촌구석에서 현대 문물에 관한 연구를 오래 한 모양이었다.

“농담따먹기 연구라도 하고 오셨나 봅니다.”

“알아먹게 말을 하라해도 듣지를 않으니, 내가 공부하는 수밖에.”

“훌륭한 교육자의 자세입니다.”

분명 짓궂은 농담이었지만, 그는 큰 반응을 내보이지 않았다.

짧은 한숨만 내쉴 뿐이었다.

“됐다. 이런 일로 진을 빼고 싶지는 않구나. 고민이 있는 모양인데, 그것이나 이야기해 보아라.”

“그렇게 티가 납니까?”

“표정이나, 행동거지는 잘 숨겼다. 하지만, 마나의 기척을 지우는 경지에는 도달하지 못했으니, 뻔히 표가 날 수밖에.”

“뭐… 맞습니다. 큰 고민이 하나 있어요.”

나는 그간 있었던 일과, 레온에 관한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큰 도움이 될 거라 생각하고 털어놓은 것은 아니다.

많은 사람들이 인사치레로 자신의 소식을 전하지 않는가.

나 또한 그런 느낌으로 말한 것이었다.

하지만, 그것이 이렇게 큰 반향을 불러일으킬 줄은 몰랐다.

“그건 내가 도와줄 수 있을 것 같군. 내 고향이 남아프리카공화국이니까.”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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