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7화 〉 누구의 검이 꺾일 것인가.(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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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투가 시작되었음을 알리는 마음속 경종이 울렸음에도, 나는 움직이지 않는다.
선대에 대한 예우를 갖추기 위해는 아니다.
선공권이 그에게 있으니까.
단지, 그뿐이다.
“선수를 양보하겠다는 건가?”
“능력은 익히 알고 있어서 말이다.”
능력이 발동되고 나면, 사용자와 능력의 대상은 시간의 흐름에 따라 ‘혼돈’이라는 수치를 얻는다.
능력이 종료되고 나면, 더 높은 혼돈 수치를 보유한 쪽이 의식의 제물이 되어 소멸한다.
이것이 코스모스의 대표 격 사상력.
질서의 의식.
듣기에는 간략해 보이겠지만, 실제론 아주 난해하고 파훼하기 어려운 능력이다.
왜냐면, 이 혼돈이라는 수치가 현실에 얼마만큼의 영향을 미치느냐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좀 더 쉽게 풀어서 설명하자면, 주변 상황과 환경을 많이 변화시킬수록, 더 많은 혼돈 수치를 얻는다는 뜻이다.
더 높은 혼돈 수치를 기록한 사람이 능력 종료 시에 즉사하고.
듣기만 하면 서로의 행동을 강력하게 제약하는, 단순하고 공평한 패널티 매치로 보이겠지만, 실제론 불공평하기 짝이 없는 게임이다.
왜냐, 사용자 본인인 코스모스에겐 혼돈 수치가 눈에 보이는 데다, 의식의 종료 시각은 코스모스의 임의에 의해 정해지니까.
이렇다 보니, 선공은 어떤 상황에서든 놈의 손에 있는 거나 다름없다.
그것으로 모자라, 의식 대상자는 무조건 코스모스의 공격을 더 간결하고 적은 힘으로 받아쳐야만 하는, 무척이나 골치 아픈 능력이지.
물론, 그의 목숨을 파리 잡듯 쉽게 거둘 수 자라면 별문제가 되지 않겠지만, 한때 제 1의 검좌였던 자를 그렇게 간단히 제압할 수 있는 이는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차라리 직접적으로 상태 이상을 걸거나, 능력치를 저하시키는 쪽이었다면 저항이라도 해보았겠지만, 이 능력은 그런 계통조차 아니기에.
심리적으로든, 물리적으로든, 상대를 제한하기엔 완벽한 능력이 아닐 수 없다.
실력에선 절대 밀리진 않으리라 자부할 수 있지만, 이렇게 제약이 심한 상황에서도 이길 수 있을지는 모르겠군.
“과연, 그렇다면 사양하지 않겠다.”
붉은 반딧불이 바람을 지나 눈앞에 도달했다.
하지만, 그것은 나의 검에 막혀 터럭 하나 건드리지 못한 채 그 자리에 멈추어 섰다.
“제 1의 검좌라는 건 허명이었나?”
“실로 마지막 기사단을 자처할 실력이군.”
일곱 번의 참격이 한 점에 모여든다.
칠무일관(??一?)이로군.
본디 저 기술은 간파하기 어렵지 않은 기술이다.
참격이 겹치는 일점을 돌파하면 끝이니까.
다만, 그러기 위해선 충분한 위력이 나와야 한다.
확실하게 파훼할 수 있는 기술을 쓴다면, 혼돈 수치가 놈의 것을 상회할 테지.
어쩔 수 없다.
참격을 모두 쳐내는 수밖에는.
한 합 한 합을 받아칠 때마다 생기는 충격이 이끼로 덮인 동토(??)를 뒤엎는다.
그 흔적은 단순한 고랑 따위가 아니었다.
섬을 구성하고 있는 암석 전체에 균열을 만들어 낼 정도였으니.
“좋은 판단이었다. 네 늙은 몸은 그 판단을 따라갈 수 없는 모양이지만.”
핏방울이 흘러 떨어진다.
완벽하게 흘려보내지 못한 마지막 일격이 다리를 스치고 지나갔기 때문이다.
한 쪽 눈을 잃어버린 게 체감이 많이 되는군.
거리를 가늠하기 어려워.
그래도 이 정도 수준이면 큰 문제는 없으리라.
“틀니 딱딱거리는 소리는 그쯤 해둬라.”
“괴상한 말을 배워왔군.”
“버릇없는 제자가 입버릇처럼 달고 다니던 말이지.”
천인섬(???).
같은 영식 사용자에 대적하기 위해 만들어진 몇 안 되는 기술.
대기 중에 흩어진 마나를 순식간에 끌어모으는 검격으로, 마나를 사용하는 각성자는 강한 인력에 의해 끌려오게 된다.
여기 있는 이 코스모스처럼.
“이런 기술은 영식에 없었을 텐데!”
“네놈이 기사단을 떠난 이후로 생겨난 기술이지.”
날아오는 녀석의 검을 막아낸 뒤, 목덜미를 깊게 물어뜯었다.
한쪽 팔이 있었더라면 이대로 끝낼 수 있었거늘.
이렇게 옅은 상처밖에 내지 못하는 게 아쉽군.
“퉤, 늙은 짐승의 고기는 맛이 없다더니, 정말이군. 아, 배신자라서 맛이 없는 것일지도.”
“고기 한 점 정도야 옛 제자와의 정을 생각해 얼마든지 내어줄 수 있지.”
그 말과 함께, 곧바로 놈이 달려들었다.
내 도발이 먹혀든 것은 아닐 것이다.
아직 눈에 총기가 남아 있었으니까.
천인섬의 존재가 거슬리니, 접근전으로 승부를 보려는 것이겠지.
이런 상황에서 가장 먼저 내밀 확률이 높은 기술은, 혈우다.
낮은 자세로 치고 들어오고 있으니까.
새홀리기가 섞여 있어 정확한 분간은 어렵지만, 아마 확실할 것이다.
하지만, 내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설마 이런 상황에서 와류를 선택할 줄이야.
“이해한다. 한쪽 팔이 없는 너는 등한시할 수밖에 없는 기술이었겠지.”
멱살을 낚아챈 손이 내 몸을 바닥으로 내리꽂았다.
차갑고 단단한 땅은 그 충격을 내 등허리에 그대로 전해주고 있었다.
마나를 생명력으로 즉시 치환하지 않았더라면 즉사했겠군.
목숨이야 간신히 부지했다지만, 앞으로가 문제다.
다량의 마나를 소비해버린 터라, 한동안은 영식을 사용할 수 없으니.
게다가 포르테 리저브의 가능성까지 고려한다면, 합을 주고받는 것은 불가능할 터.
천공 분쇄자를 사용한다면 이 상황을 타개할 수 있겠지만, 그러기엔 혼돈 수치에 영향을 너무 크게 줄 것이 뻔하고.
어떻게든 방비책을 마련해보기 위해 고민하던 찰나, 내가 내리꽂히면서 형성된 구덩이가 눈에 들어왔다.
그 구덩이는 섬 전체에 새겨진 균열과 맞닿아 있었다.
그래, 저걸 활용한다면….
승산이 눈에 보인다.
“네 말이 옳았다. 코스모스.”
“무슨 뜻이지?”
“관습과 낭만에 젖어 현실을 보지 못하던 내가 어리석었다는 말이다.”
꼬마.
난 여태까지 너에게 기사의 자질이 없다고 여겼다.
그저 재능만을 보고 이 자리를 물려주기로 했던 것이었지.
하지만, 어느샌가 너를 닮아가는 나를 보고 깨달았다.
진짜 기사의 자질은 내가 아니라, 너에게 있었다는 걸.
지금 내가 시도하려는 짓조차도 너의 기행을 모방하는 것에 불과하다.
하나, 정작 이 모습을 본 너는 이렇게 말하겠지.
‘또 가오가 뇌를 지배했냐’고
하지만, 원래 기사란 그런 것이다.
돈키호테 또한 그것이 기사의 특권이라고 말했다.
‘믿음을 갖고, 별에 닿는 것.’
우리의 뿌리인 별의 기사단에 실로 걸맞은 울림이 아닌가.
때로는 그의 말대로 고귀한 이상을 위해 목숨을 걸 줄도 알아야 하는 법이다.
아니, 그러기 위해서 이 자리에 섰다.
상반된 두 빛깔의 검이 맞닿는다.
자홍색 검신은 나의 손에 쥐어진 푸른 빛의 칼날을 꺾고 지나가, 내 발치의 구덩이를 강타했다.
그러자, 충격을 이겨내지 못한 섬이 여러 갈래로 찢어지기 시작했다.
“이것으로 네놈의 혼돈 수치는 기하급수적으로 치솟았겠지. 덕분에 의식의 주박에서 풀려날 수 있게 되었다. 감사를 표하마.”
곧바로 생명력을 마나로 치환했다.
쇠약함이 나의 몸을 덮치는 게 느껴지지만, 상관없다.
견딜 수 없는 고통을 견디는 것 또한 기사의 특권이 아니겠는가.
“노회(??)해졌군. 역겨운 짓을 많이 배워왔어.”
“미안하지만, 사사해준 자는 스무 살 언저리의 꼬마다.”
여전히 쏘아붙이는 듯한 말투였지만, 눈에선 독기가 사라진 지 오래였다.
그도 아는 것이다.
의식에 의한 제약 없이는 승산이 없으리라는 것을.
검에서도 느껴진다.
정순한 살의와 기교 따위는 온데간데없고, 그리움과 분노만이 가득한 것이.
그럼에도 포기할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끝나지 않는 사투를 계속해나갈 뿐이었다.
…섬의 조각들은 어느새 대부분이 가라앉아 무저갱의 심해 속으로 사라졌다.
남은 것이라곤 나와 그가 서 있는, 작은 암초 하나뿐이다.
“끝났습니다. 모든 게.”
“처음 겪어 보는 기분이로군.”
이제 코스모스가 선택할 수 있는 것은 단 하나다.
최후의 발악용으로 사용되는 낙린참.
그리고 그 예상은 정확히 맞아떨어졌다.
붉은 광휘가 고요를 가로질러 오고 있었으니.
다만, 나에게는 아무런 의미 없는 행위였다.
하늘을 향해, 하나뿐인 팔을 내지른다.
붉은 광휘가, 나와 그의 눈에만 머무르던 기운이, 빛을 발하던 두 개의 칼날과 마소(??)로 구성된 모든 것들이, 시야에서 자취를 감췄다.
그러니, 지금 나의 눈에 비치는 것들은 진실한 것들 뿐이리라.
앞에 선 사내를 향해 천천히 다가간다.
내가 검을 뽑아 들었음에도, 그는 아무런 저항을 하지 않고 있었다.
“그곳에선 따님과 안식을 찾기를 바랍니다. 코스모스.”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묵묵히 정좌해있을 뿐이었다.
생명과 맞바꾼 불빛이 번뜩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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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르노스 섬은 이제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그 섬이었으리라 추정되는 작은 암초만이 남아 있을 뿐.
그렇게 여겨지는 이유는, 그곳에 사람의 자취가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작은 십자가에 걸려 펄럭이는, 누군가의 망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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