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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6화 〉 누구의 검이 꺾일 것인가.(1) (96/173)

〈 96화 〉 누구의 검이 꺾일 것인가.(1)

* * *

“머리털 난 뒤로 이런 좆같은 경험은 처음이다.”

“난 진작에 때려치우고 나왔다.”

“잘했어. 나도 이틀째에 포기했다.”

기말고사는 내 상상 그 이상이었다.

기껏해야 밥 좀 굶는 것으로 끝일 줄 알았건만.

독사와 벌레들이 득시글거리는 열대우림 한복판에 떨어트려 놓을 줄이야.

징그러운 건 그다지 문제가 되지 않았다.

난 원래 그런 것들에 대한 내성이 강한 편이니까.

그럼 무엇이 문제였느냐.

그건 저것들이 내 잠을 방해한다는 거였다.

개 같은 흡혈 파리 새끼들.

실을 엮어 고치 형태의 은신처도 만들어 보았지만, 큰 효과는 없었다.

숨 쉬려고 뚫어놓은 구멍으로 다 들어오더라고.

덕분에 미련 없이 기말고사를 때려치울 수 있었다.

“너네는 어디 걸렸었냐?”

“난 극지방.”

“난 사막.”

“동굴은 없었냐?”

“몰라, 상상도 하기 싫다. 끝난 이야기는 하지 말자.”

언젠간 저런 곳에 직접 나가야 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끔찍하네.

한편으론 빌런들이 대단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저딴 곳에 아지트를 지을 생각을 한다니.

니힐리스가 머무는 글렌류나크도 사람이 거주하기 그렇게 좋은 환경은 아니라지만, 기말고사에서 등장했던 곳들과 비교하면 극락이나 다름없는 수준이었다.

“와, 근데 충격이다. 이걸 만점 받은 사람이 두 명이나 있다는 게.”

“그 중 한 명이 베아트릭스라는 게 더 충격이지.”

“내가 저런 빡통년한테 지다니… 충격이다.”

베아트릭스가 만점을 받은 것보다, 다른 만점자가 나왔다는 게 내겐 더 충격이었다.

원작의 전개를 벗어나는 일이 일어나서 놀란 것은 아니다.

그런 일이야 전에도 종종 일어났었으니까.

단지, 이 고행을 견뎌내는 사람이 진짜 등장할 줄은 몰랐을 뿐이다.

그녀의 의지엔 경의를 표할 수밖에 없네.

노력하는 것쯤이야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불가능할 거라고 여겼는데.

“기말고사 다들 수고 많았다.”

“교수님도 수고 많으셨습니다.”

“만점 축하한다. 카타리나, 베아트릭스. 만점자가 없는 경우도 빈번한 시험인데, 잘했다.”

“그래서, 진급자는 누구누구인가요?”

“U클래스로 진급하는 사람은 박성진, 미츠루 아이나, 알프레드 아이스너, 천현우, 카타리나 벨랴예바, 프리실라 칼라일, 베아트릭스 발데크. 이상 7인이다.”

지금까지 벌어졌던 사건 중에 원작과 가장 크게 달라진 부분이네.

원래는 알프레드, 천현우, 베아트릭스만 진급했었으니까.

현 S클래스 멤버들이 거의 그대로 가는 점은 좋다만, 한편으론 걱정도 된다.

여러모로 다사다난해질 것 같거든.

갑자기 확 사람 수가 늘어나는 것도 그렇고, U클래스의 교수를 맡게 될 사람이 세레나일 가능성이 높다는 것도 그렇고….

부디 별일이 일어나지 않았으면 좋겠다.

“역대급으로 많네.”

“나도 U클래스 진급자가 이렇게 많은 건 오랜만에 본다. 내년 U클래스 담당 교수는 고생깨나 하겠는걸?”

“저희가 고생하지 않을까요?”

“아, 세레나 교수님이 U클래스를 맡게 될 거라는 이야기가 있었지. 뭐, 너희들이 알아서 할 문제지. 그건. 아무튼 다들 수고 많았고, 방학 즐겁게 보내라!”

이야기를 마친 빈센트는 빠르게 강의실을 떠났다.

옛날에는 조금 매정한 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지금 와서 보니 오히려 한결같아서 좋다는 생각이 들었다.

딱히 우리를 부당하게 대한 적도 없었고.

“제임스, 이번 겨울에 시간 나냐? 오랜만에 스키나 타러 가는 건 어때.”

“나도 그러고 싶은데, 이번 방학은 시간이 안 난다. 공연 스케쥴이 꽉 차 있거든. 근데, 왜 갑자기 마음이 바뀌었냐? 올겨울은 나탈리아랑 보낼 거라더니.”

“묻지 마라, 씨발.”

“쯧, 또 스카이다이빙 하자고 지랄 염병했나 보네. 걔는 그거 절대 안 할 거라니까?”

“아니, 쫄보 같이 왜 그러는 거냐? 진짜 이해가 안 되네.”

스키라.

분명 누가 스키 어쩌고 했던 것 같은데.

아, 맞아. 로렌스가 스키 이야기를 했었지.

슬로바키아는 스키를 타기 좋은 곳이 많다고.

니힐리스가 첫눈을 나에게 양보해 주었으니 한 번 정도는 가 봄 직하지만, 그래도 슬로바키아에 가는 일은 없을 거다.

뭐하러 거기에 가.

“다들 아직 여기에 있었구나.”

“어, 안녕하세요. 세레나 교수님.”

“그래, 다들 안녕.”

“어느 클래스를 가르치실지는 정하셨어요?”

“그 이야기를 하려고 왔어. 아마 나는 내년부터 U클래스를 맡게 될 거 같아.”

생각했던 대로네.

과연 세레나가 잘 할 수 있을까?

조교수 때 평가는 나쁘지 않았다지만, 담당 교수직도 잘 해낼 거라는 보장은 없잖아.

누군가를 가르치기 그렇게 좋은 성격도 아니고.

대충 그림이 그려진다.

‘다 좆까’를 외치며 아카데미를 때려 부수는 그녀의 모습이.

““잘 부탁합니다.””

“그래, 나도 잘 부탁해.”

“그럼 저희는 이만 가 볼게요. 교수님도 수고하세요.”

“재밌게 놀다 오고, 내년에 보자.”

평소라면 더 많은 이야기를 나눴겠지만, 다들 방학을 만끽할 생각에 바빴는지, 이야기는 거기서 끝이 났다.

나라고 다를 건 없었다.

눈이 오기 전까지 얼마 남지 않았으니까.

남은 시간 동안 많이 놀아 둬야지.

* * *

“오랜만이다. 니힐리스.”

“보고 싶지 않은 얼굴이군.”

“건방진 것은 여전하구나.”

“넌 이제 코스모스가 아니니 말이다. 받들어 모셔야 할 이유 따위도 없는 법.”

제 1의 검좌, 코스모스.

제 3의 검좌, 니힐리스.

그 둘이 맞붙는 모습을 목격하기란 좀처럼 쉬운 일이 아닐 것이다.

하지만, 지금 그 광경이 바로 여기, 오르노스 섬에서 펼쳐지고 있었다.

“요즘 묘한 걸 기르는 모양이던데.”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다만.”

“너도 느끼지 않았나. 마지막 울림을.”

“느끼지 못했다면 거짓말일 터. 그렇다고 해서 네가 간섭할 바는 아니다. 넌 이제 기사단원이 아니니까.”

틀렸다고 볼 수는 없는 말이었다.

그는 더 이상 제 1의 검좌, 코스모스가 아니었으니까.

외지인에 불과한 그가 기사단의 일에 관여할 수 있는 명분 따윈 전혀 없었다.

다만, 이 둘 사이에 존재하는 악연이 그것을 가능케 만들고 있었다.

“현실을 봐라. 니힐리스. 기사단은 끝난 지 오래다. 단원이 한 명뿐인 기사단을 기사단이라 부르는 것은 너뿐일 거다.”

“이젠 둘이니 그렇게 불러도 상관없겠군.”

“말장난 따위를 하자고 이곳에 온 게 아니다.”

“그렇다면?”

“얼마 전에 너에게도 이상한 녀석들이 찾아왔을 테지.”

“잘 알고 있군.”

가면 아래의 눈살이 찌푸려졌다.

이는 당연한 반응이었다.

보수를 지불할 수도 없는 주제, 자신들과 협상해주길 바라는 족속들을 좋게 기억할 사람은 아무도 없으니까.

“나에게도 그 녀석들이 찾아왔었다.”

“…그래서?”

“터무니없는 제안을 하더군. 엄청난 보수를 들이밀면서 말이야.”

“마찬가지였다.”

둘은 담담하게 이야기했다.

이들에겐 익숙한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너에게 온 제안은 어떤 것이었지?”

“대답해야 할 의무는 없다.”

“그렇다면 내가 먼저 이야기하도록 하지. 나에게 제시한 보수는 마리안느의 부활이었다.”

미치광이 집단으로 유명한 자색 기사단이라지만, 그들 모두가 감정이 메마른 도살 기계인 것은 아니다.

한때는 그들에게도 이름이 있었고, 가족이 있었으며, 연인이 있었으니까.

기사단의 수장이라고 다를 게 있겠는가.

그에게도 가족이 있었다.

마리안느라는 이름의 어린 딸이.

비록 피 한 방울 나누지 않은 수양딸이라지만, 코스모스는 그녀를 친자식처럼 소중히 대했었다.

마리안느 또한 그를 진짜 아버지로 여겼었고.

하지만, 그 관계는 그리 오래 지속되지 못했다.

그녀가 세상과 작별했기 때문이다.

그것도 기사단에 의해서.

“부탁한 것은 말하지 않아도 무엇인지 알겠군.”

“그래, 기사단의 완전한 사멸이다.”

‘놈들의 의중을 대충 알 것 같군. 처음부터 나와 기사단을 없앨 심산이었던 거지. 설령 내가 클로에를 제거하는 데 성공하였더라도 토사구팽을 면치 못했으리라.’

“웃기지도 않는군. 기사단은 첫 번째 임무를 상기시켜주었을 뿐이다.”

“난 이미 그 대가를 치렀다. 니힐리스. 두 번 이상 희생할 필요는 없었어.”

“그래서, 기사단의 시대에 막을 내리기 위해 찾아 왔다는 거냐.”

“잘 아는군. 너와 네 제자, 그리고 마지막으로 나까지. 이 시대에 남은 모든 기사단의 흔적을 지울 것이다. 마리안느를 위해서라도 그래야만 한다.”

해풍이 분다.

세계의 끝자락과 맞닿아 있는 이 작은 섬을 향해 불어오는 바람은, 결코 따스하다거나 선선하지 않다.

차갑고 따가울 뿐.

들이치는 바람에도 둘은 물러서지 않는다.

“정말로 네 딸을 되살릴 수 있을 거라 믿는 거냐.”

“그럼, 가능하고말고.”

“미쳤군.”

“우린 미친 지 제법 오래되지 않았나? 인제 와서 정상인 행세를 하려고 드는 것 자체가 더 이상한 거다.”

“사설(??)은 그쯤 하지. 우린 검으로 이야기하던 사람이니까.”

둘은 천천히 검자루를 쥐었다.

그리고 칼끝이 서로를 겨누는 순간, 전투가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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