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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5화 〉 2차원의 세계.(3) (95/173)

〈 95화 〉 2차원의 세계.(3)

* * *

최근 들어 생도들의 입에 내 이름이 다시 오르내리기 시작했다.

‘그 녀석의 기행이 다시 시작됐다’는 식으로.

갑자기 왜 이런 소문이 돌기 시작했는가 하면, 근래 들어서는 내가 딱히 광대 짓을 일삼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동안은 다른 생도들처럼 평범하게 지냈었지.

아니, 솔직하게 말하면 나는 아직도 평범하게 지내고 있다고 생각한다.

단지 사람들이 나를 이상한 눈으로 바라볼 뿐.

물론 그것이야말로 내 안에 내제된 본능적인 광대 기질이라고 한다면 할 말이 없기는 하다.

“나쁘지는 않아 보이는데.”

“근데, 굳이 그런 걸 배울 필요가 있냐? 넌 어차피 그래플링이 있잖아.”

“맞아. 타고 올라갈 벽이 있다면 그냥 실을 걸어서 그래플링을 쓰면 되고, 실을 걸만한 지형지물이 없으면 벽을 타지도 못할 텐데, 무슨 의미가 있어?”

“다 쓸데가 있다니까 그러네.”

그래, 이 벽 타기가 얼마 전부터 연습 중이라던 이동 기술 중에 하나다.

흔히 벽 타기라고 말하면 무협지에서 등장하는 벽호공이나, 익스트림 스포츠로 분류되는 암벽등반 같은 것들을 많이 생각하겠지만, 그런 종류의 기술은 아니다.

그건 멋이 없잖아.

이건 무려 수직인 벽면을 걸어서 올라가는 기술이라고.

별로 쓸데는 없고 멋만을 위해 만들어진 기술 같겠지만, 나름 영식의 기술 중에 하나다.

생각보단 세밀한 마나 컨트롤이 필요한 기술이거든.

그딴 걸 익혀서 어디에 쓰냐는 말이 나오겠지만, 생각보단 인기 있는 기술이기도 하고.

역동적인 움직임이 기반인 류진과 연계했을 때 시너지가 썩 괜찮은 기술이라.

나에게도 나름 잘 맞는 기술이라고 할 수 있지.

“그래, 뭐 네 나름대로 이유가 있겠지. 알아서 잘해봐.”

“저 새끼 이상한 거 시도하는 게 하루 이틀도 아니고. 신경끄는 게 속 편하긴 해. 그나저나, 이 개 같은 기말고사는 진짜 언제 끝나냐? 나 진짜 굶어 뒤질 것 같다.”

“폭식 마렵네.”

녀석들은 흥미를 잃었다는 듯, 금세 다른 곳으로 떠났다.

하긴, 기껏해야 벽 좀 잘 타고, 실뜨기 좀 잘하게 된 게 그렇게 놀랄 일은 아니니니까.

하지만, 머지않아 그 생각을 취소하게 될걸.

* * *

“웬일로 네가 날 부르네.”

“어, 오랜만에 대련 한 번 해보게.”

“나는 상관없긴 한데, 왜 아이나랑 안 하고? 요즘 너희 둘이 분위기가 심상치 않던데… 설마 차였어?”

“아니?”

이 새끼가.

그래도 남들 눈엔 충분히 그렇게 보일만 하니 참는다.

그 일이 있고 나서부터는 아이나가 나를 묘하게 피하기 시작했거든.

부끄럽다나 뭐라나.

대하는 태도 자체는 여전히 사근사근하니, 내가 싫어진 게 아니라는 건 확실하지만.

“아니라면 말고. 근데, 왜 다른 사람도 아니고 나야?”

“다른 애들은 기말고사로 바쁘잖냐.”

“그렇긴 하네.”

내가 대련 상대로 알프레드를 선택한 이유는 세 가지다.

첫째, 이 녀석을 상대로 가장 좋은 퍼포먼스를 보여줄 수 있어서.

둘째, 모두가 기말고사 준비로 바쁜 와중에, 몇 안 되게 한가한 사람이라서.

한가한 이유는 당연히 올림피아드 우승자라 그렇다.

진급이 확정됐으니, 굳이 기말고사 성적에 목맬 필요가 없거든.

마지막 셋째, 친한 사람이 별로 없어서….

조금 슬픈 이야기긴 하지만, 사실이다.

아이나, 프리실라, 세레나, 알프레드를 제외하면 딱히 친하다고 할만한 사람이 없으니까.

“그럼 슬슬 들어가자.”

“그래.”

[사용자가 인식되었습니다. 사상력을 동기화 중입니다. 잠시만 기다려주세요.]

[사용자, 박성진, 알프레드 아이스너의 동기화가 완료되었습니다.]

[훈련의 설정이 완료되었습니다.]

“디폴트로 진행하겠다고? 자신 있어?”

“물론이지.”

“뭔가 준비해온 게 있나 보네. 그럼 나도 오랜만에 빡겜 좀 해볼까.”

확실히 디폴트면 내가 불리하긴 하다.

되돌리기를 익혔다고 한들, 원거리 대 근거리, 공중 대 지상이라는 기본적인 상성 구도 자체는 변하지 않으니까.

저번 중간고사 때야, 요행으로 경기를 뒤집을 수 있었다곤 하지만, 지형적 이점이 전혀 없는 기본 설정에선 그런 요행을 기대하기 힘들지.

물론, 알프레드 말대로 내 나름의 준비는 해왔다만.

[카운트 다운, 5, 4, 3, 2, 1, 0, 시험이 시작되었습니다.]

경기가 시작되었음을 알리는 버저음과 동시에 자홍색 검신 상태에 들어간다.

확실히 새 마나글레이브가 좋긴 하네.

예전엔 이 상태에 돌입하는 것조차도 판단의 연속이었는데 말이야.

지금은 자동으로 검에 축적되는 마나 덕에, 비교적 자주 이 상태에 돌입할 수 있지.

유지할 수 있는 시간도 꽤 늘어났고.

그렇다고 자홍색 검신에만 의존해선 안 된다.

이 상태를 유지할 수 있는 데엔 한계가 있으니까.

그래도 이 상태에선 되돌리기를 사용할 수 있으니, 큰 문제는 없겠…

좆됐다.

이건 되돌리기로 받아칠 수 없어.

“되돌리기의 연습 상대가 나였다는 걸 잊지 말자고.”

확실히 이 녀석도 성장했네.

머리나 가슴 같은 중요 부위를 노려봐야 되돌리기에 막힐 거라는 것을 알고, 일부러 받아치기 어려운 신체의 말단 부위 쪽으로만 전격을 쏘다니.

이대로 가면 좋지 않은데.

소모전은 내 장기가 아니니까.

검에 저장된 마나를 전부 소진하고 나면, 나는 거의 감으로만 전격을 피해야 한다.

문제는, 나는 아이나처럼 감이 좋은 사람이 아니라는 거지.

전격을 아무렇지도 않게 버틸 만큼 내구가 튼튼한 사람도 아니고.

이번 전격은 운 좋게 맞지 않았다지만, 여러모로 불편한 상황이군.

일단은 최대한 접근해야겠어.

그러기 위해서 내가 선택한 것은, 겨울나리물수리 떨구기 연계다.

접근기로서는 언제나 최고의 선택인 게 겨울나리고, 공중에 있는 상대를 견제하기엔 물수리 떨구기만 한 기술이 없으니까.

다만, 그렇게 매끄럽게 연계되는 기술은 아니다 보니, 새홀리기를 중간에 사용해야겠지만.

전격을 베어 가르며 치고 나간다.

그 돌진이 끝자락에 도달했을 즈음에, 잔영을 흩뿌린다.

내게 그것은 이지러지는 달같이, 불완전한 상(?)으로 보이지만, 알프레드의 눈에는 그렇게 비치지 않는 모양이다.

그의 판단이 흐려지는 게 보였으니까.

몰아치던 전격이 수그러든 틈을 타, 허공을 향해 뛰어오른다.

당연하지만, 나의 칼끝은 녀석에게 닿지 않았다.

푸른 섬광이 질주하는 속도가 그보다 빨랐으니.

“후….”

가까스로 되돌려냈다.

별다른 피해를 주지 못한 게 아쉽네.

모든 각성자가 그러한 것은 아니지만, 대부분의 각성자는 자신의 공격이나 자신과 비슷한 속성의 공격에 면역이니까.

레빈전 때 피해를 줄 수 있었던 것은 낙린참으로 되돌렸으니까 그런거고.

지금은 상황이 워낙 급해서 낙린참을 쓸 여력도 없었다.

결국, 상황은 원점으로 돌아왔군.

그나마 다행이었던 것은, 나와 알프레드의 뜻이 일치했다는 거지.

녀석도 이 이상 지루한 대치 구도를 지속하기 싫었던 모양인지, 전류를 한데 모으고 있었다.

내가 저걸 두고 보고 있는 것은 변신 중에는 공격하지 않는 낭만적인 악당이라서가 아니다.

주변에 튀기는 불꽃만 보아도, 가까이 가면 좆될 걸 알 수 있으니 그런 거지.

저건 받아치는 것도 불가능하다.

알프레드의 뇌옥(雪?)이 천천히 아래로 떨어진다.

직격하지 않더라도 상관없다.

지면을 타고 비산하는 전류가 땅을 딛고 선 자를 모조리 구워버릴 테니까.

그래도, 피할 방법이 아예 없는 건 아니지.

실을 엮어 장막 아니, 발판을 허공에 자아낸다.

그리고, 그것을 딛고 하늘을 향해 올라간다.

영식(??), 제 3의 명(?), 참우(??).

이 기술 한 번 써보겠답시고 바느질 따위나 연습하던 걸 생각하면 치가 떨리지만, 뭐 어떤가.

멋있으면 그만이지.

내 걸음이 비로소 알프레드의 위치와 나란한 선상에 섰을 때, 나는 발판을 박차고 녀석을 향해 날아올랐다.

녀석도 멋쩍은 표정을 지으며, 겸허히 검을 받아들였고.

[승자, 박성진. 훈련이 종료됩니다.]

* * *

“진짜 참 광대다.”

“너는 그냥 영상 몇 개 추려서 영화 제작사에 보내라. 솔직히 히어로 하는 것보다 많이 벌 거 같다.”

“솔직히 그런 걸 꼭 해야 돼? 그냥 편하게 이기면 안 되나.”

“그래도 낭만이 살아 있어서 좋긴 해.”

나의 유사 허공답보는 빠르게 유명해졌다.

단순히 아카데미 내에서만 유명해진 게 아니라, 아카데미 외부에서도.

어떤 미친 새끼가 ‘화성 갈끄니까’를 합성해놓은 영상이 인기를 끈 모양이었다.

“야, 아이나, 이거 봤냐?”

“뭔데?”

“네 남자친구 동영상.”

“아니, 본적 없는데.”

“그럼 와서 보면 되겠네. 지금 존나 유명해.”

영상의 시청을 마친 아이나의 표정은… 심히 좋지 않았다.

다른 사람들에겐 여느 때와 다를 바 없는 표정으로 보이겠지만, 내 눈에는 보인다.

그녀의 속에서 천불이 끓어오르는 게.

“나 진짜 쪽팔려서 고개 못 들고 다닐 거 같아.”

“받아들여. 그리고 즐겨.”

“세계 최고의 영화배우가 될 남자의 아내가 된 걸 미리 축하한다.”

“그럼, 그럼, 이런 건 뭐 아무나 하는지 아냐? 다 쇼맨십이 있어야 하는 거야.”

아이나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클래스를 떠나버렸다.

아니, 난 나름 멋있다고 생각했는데.

얘들이 웃기게 합성해놓은 걸 나보고 어쩌라고.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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