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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4화 〉 2차원의 세계.(2) (94/173)

〈 94화 〉 2차원의 세계.(2)

* * *

올림피아드에서 우승해둔 것이 정말 천만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옆에 있는 생도들의 시들시들해진 안색을 보라.

저번 올림피아드에서 우승을 거머쥐지 못했더라면, 나도 이 녀석들처럼 기말고사라는 압박에 시달려야 했겠지.

특히나 2학기 기말고사는 까다롭기로 유명하니까.

이번 기말고사의 테마만 보아도 알 수 있으리라.

생존.

기본적으론 ‘살아남는다’라는 단순한 의미지만, 이것은 해석하기에 따라 얼마든지 의미가 달라질 수 있는 단어다.

살인귀에게서 도망치는 데 성공하는 것도 분명 생존이라 볼 수 있고, 지독한 병마를 이겨내고 건강한 몸을 되찾는 것도 엄연히 생존의 일환이라 볼 수 있으니.

물론 그 단어의 본질에 가장 부합하는 것은 ‘생명이 존재하기 힘든 척박한 환경에서 살아남기’겠지만.

“기말고사 대충 봐도 되는 거 존나 부럽다.”

“그러게, 잘해서 올림피아드 나왔어야지.”

“씨발, 누구는 가기 싫어서 안 나간 것처럼 말하네.”

“아무튼, 힘내라.”

“어떻게 4kg밖에 안 되는 짐으로 나흘을 버티냐? 이건 청소년 학대지.”

그래, 저게 이번 기말고사의 내용이다.

랜덤한 환경에서 4kg 이하의 짐으로 나흘간 생존하기.

앞서 보았던 시험들과는 다른 영역으로 궤를 달리하는 난이도다.

4kg이면 물 두 병만 가지고 들어가도 끝이니까.

그걸로 나흘을 버틴다?

어지간한 정신력으로는 불가능한 이야기지.

물론 아카데미도 이런 점을 이해는 하고 있기에, 시험장 내부에 추가 생존 물자를 넣어놓기는 했다.

그마저도 숨겨져 있는 터라, 쉽게 얻을 수 없지만.

이렇게 극악무도한 난이도를 자랑하는 시험이다보니, 원작에서는 대부분이 매우 형편없는 점수를 기록했던 걸로 기억한다.

어지간해서는 나쁜 점수를 기록하는 일이 없는 알프레드나 아이나조차도.

하지만 이런 와중에 유일하게 만점을 기록하는 녀석이 있으니, 그게 바로 베아트릭스다.

이해가 가지 않겠지.

맨날 배고프다는 이야기밖에 안 하는 사람이 어떻게 이런 시험에서 1등을 할 수 있냐고.

그 해답은 바로, 베아트릭스의 퍼스트 어빌리티, 피어나는 청록에 있다.

그냥 먹을 걸 만들어 버리면 그만이니까.

베아트릭스에게 압도적으로 유리한 시험일 수밖에.

“이번 기말에서 가장 좋은 성적을 거두는 건 누구일 것 같나?”

“너나 아이나 아닐까. 둘 다 참을성 하난 좆되잖아.”

“아이나보단 카타리나 쪽이 더 가능성 있어 보이는데.”

“이런 것이라면 자신 있긴 하다. 하지만… 만점을 거둘 수 있을지는 확신이 안 서는군. 애초에 만점자가 나올지조차 의문이다.”

카타리나가 참을성으로 누군가에게 질 사람은 아니지.

하지만, 참는 것엔 결국 한계가 있기 마련이다.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해주는 게 아니니까.

베아트릭스에겐 밀릴 수밖에 없지.

“박성진, 이번 시험에 만점자가 나오냐, 안 나오냐? 그 정도는 알 수 있지 않나?”

“나올걸. 아마 확실하게.”

“누군데?”

“궁금하군. 아니다, 말하지 마라. 만약 그게 나라는 걸 알게 되면, 나 자신을 과신하고 시험을 소홀하게 여기게 될 테니.”

“어차피 말할 생각도 없었어.”

나는 베아트릭스 쪽으로 눈길을 돌렸다.

그녀는 세상 모른 채 잠에 빠져있었다.

…내가 생각해도 믿기 어렵긴 해.

자면서도 입맛을 다시는 애가 이번 시험의 만점자라니.

“지금까지 시도해본 바로는, 이틀까지는 어떻게 참을만했다. 사흘부터는 정말 힘들더군. 그 고비만 넘기면, 만점도 불가능한 이야기는 아니겠지.”

“이틀? 미쳤네. 뭐로 버티고 있는 거냐?”

“이온 음료와 대체 식품이지. 무엇이 있겠나.”

“그래서 그렇게 살이 많이 빠진 거였냐? 난 다이어트라도 하는 줄 알았더니만.”

“아니, 근육이 빠진 거다.”

확실히 카타리나의 몸매에는 큰 변화가 있었다.

예전에는 운동선수 같은 몸이었다면, 지금은 늘씬한 모델 체형에 가깝게 변했으니까.

그 때문일까, 평소엔 카타리나에게 큰 관심을 두지 않던 녀석들도 대하는 태도가 묘하게 달라진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빨리 기말고사가 끝났으면 좋겠네. 팔자에도 없는 단식 투쟁이라니. 씨발거.”

“나도 마찬가지다.”

“베아트릭스 저 돼지년은 낙제점 받지 않을까.”

“모르지. 하루 정도는 버틸 수 있을지도. 근데 확실한 건 하나 있다. 시험 끝나고 나면 고기 10인분은 너끈하게 조질 거라는 거.”

“그런 이야기는 너희끼리 하도록. 난 이만 가보도록 하지.”

카타리나는 불쾌한 티를 내며 자리를 떴다.

카타리나가 베아트릭스를 챙겨줄 줄이야.

둘 다 성격이 좋은 편이라곤 하지만, 그렇게 가까운 사이는 아니었던 걸로 아는데.

의외로군.

제임스는 자신 때문에 어색해진 분위기를 어떻게든 수습해 보려 했지만, 큰 의미는 없었다.

모두가 저마다의 핑계를 대고 하나둘씩 대열에서 이탈하기 시작했으니.

나도 하던 연습이나 하러 가야겠네.

* * *

하는 일은 늘 똑같다.

우선, 실을 왕창 만들어낸다.

그리고 씨실과 날실을 엮어, 직물을 만든다.

겉보기엔 구김살로 가득하고, 마감도 엉망이지만, 내가 보기엔 충분히 만족스러운 퀄리티다.

난 손재주가 끔찍하게 좋지 못한 사람이니까.

어느 정도로 심각한가 하면, 중학생이 될 때까지 신발 끈의 매듭조차 제대로 짓지 못하는 수준이었다.

학 접기 같은 건 일찌감치 포기한 지 오래고.

그런 사람이 만든 것치고는 꽤 높은 완성도라 할 수 있었다.

이제, 실전에서 잘 활용할 수 있느냐가 문젠데.

아이나에게 도와달라고 해봐야겠군.

“여보세요.”

“아이나, 나야.”

“알아, 무슨 일로 전화했어?”

묘하게 기대감으로 부푼 목소리가 전화기를 타고 들려온다.

아마 데이트 신청 같은 걸 기대한 모양인데.

미안해, 아이나.

그런 게 아니라서.

“혹시 지금 훈련장으로 나와줄 수 있나 해서.”

아이나는 대답 없이 전화를 끊었다.

사실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전화가 끊기기 전에, 무어라 중얼거리는 소리까지 들었으니까.

그 내용은 딱히 기억하고 싶지 않다.

* * *

혹시 아이나가 올까 하는 마음에 20분 정도를 기다려 보았다.

그럼에도 아직까지 아이나는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있다.

내 불찰이긴 해.

최근에 그녀를 신경 써주지 않은 것은 틀림없으니까.

어쩔 수 없이 혼자 연습을 시작하려던 와중, 샐쭉하게 입술을 내민 그녀가 훈련실 안으로 들어왔다.

“그래서, 뭘 도와달라는 거야?”

아이나가 툴툴거리는 투로 말했다.

예전 같았으면 불안에 떨며 그녀의 눈치를 살폈겠지만, 지금 와서는 그냥 애교로만 보일 뿐이었다.

이렇게나 귀여운데, 어떻게 포옹하지 않고 배기겠어.

“쪽팔리게 뭐해, 떨어져서 용건이나 말해.”

그렇게 말하면서도, 내심 좋아하는 티가 난다.

팔로는 밀어내고 있을지 몰라도, 얼굴은 내 쪽으로 파묻고 있었으니까.

“그냥 날 공격해주면 돼. 암기를 던지던, 그림자로 공격하든 상관없어. 정신지배만 아니면 돼.”

“그래, 좋아.”

“적당히 손대중해 가면서 해야 돼.”

“알겠어.”

아이나의 자안(??)에 이채가 깃든다.

분명 무언가를 꾸미고 있다는 뜻이었다.

불길한데.

* * *

[사용자가 인식되었습니다. 사상력을 동기화 중입니다. 잠시만 기다려주세요.]

[사용자, 박성진, 미츠루 아이나의 사상력의 동기화가 완료되었습니다.]

[훈련의 설정이 완료되었습니다.]

스멀거리는 그림자가 퍼져나가기 시작한다.

짙은 물결은 주변을 휘저으며, 아직 탁해지지 않은 것들을 그러모은다.

그것의 움직임이 완전히 멎어 들었을 때 즈음, 공격이 시작되었다.

아니, 이건 좀 아닌데.

“적당히 해달라고 했잖아!”

“그러는 중이야.”

최대한 빠른 손놀림으로 장막을 엮어낸다.

급박한 상황이다 보니 형태도 많이 뭉개져 있었고, 크기도 전에 만들던 것에 비하면 훨씬 초라한 크기였지만, 효과가 아예 없지는 않았다.

워낙 튼튼한 강도의 실이다 보니.

하지만, 그것으론 모든 공격을 방어할 수 없었다.

구덩이를 기어 나온 흉수(?手)들은 기어코 연약한 부분을 파고들어, 내 살점들을 도려내기 시작했으니까.

고통스럽지만, 참아야만 한다.

당장은 반격해봐야 큰 의미가 없으니까.

그래서, 기다리고 또 기다린다.

이 어둠을 단숨에 몰아낼 순간을.

물론 나의 그녀는 그것을 윤허해줄 생각이 없어 보였다.

오히려 더 가차 없이 공격할 뿐.

이제 그림자들은 내 장막을 우회하려 들지도 않았다.

어떻게든 장막의 좁은 틈새를 비집고 들어오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마치, 먹잇감을 물어뜯기 위해 굴속으로 턱을 밀어 넣는 짐승들처럼.

사람들에겐 뚫으려는 자와 막으려는 자의 사투로 보일 것이다.

하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나는 지금, 이 순간만을 위해 인고한 거니까.

장막을 엮고 있는 실을 느슨하게 푼다.

헐거워진 틈새로, 그림자들이 순식간에 스며들기 시작했다.

그리고, 나를 향해 달려든다.

하지만, 그것들이 나를 덮치거나, 옭아매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러한 일이 벌어지기 전에, 늘어진 실을 빠르게 조여 맸으니까.

…바닥에는 잘려 나간 그림자의 파편들이 머리를 잃은 뱀처럼 꿈틀거리고 있다.

나름대로 연습한 가치는 있어서 다행이군.

“이만하면 충분한 연습이 된 거 같네. 고마워.”

“나는 아직 안됐는걸.”

그 말과 함께, 세상이 무저갱의 암흑으로 뒤덮인다.

아니, 실제로 세상이 그렇게 변한 것은 아닐 것이다.

외부와 격리된, 이 작은 세계만이 그렇게 변했을 뿐.

구두 굽이 바닥과 부딪히는 소리가 점점 가까워진다.

그리고, 소리의 근원은 나를 덮쳐 넘어트렸다.

“괜찮아. 아무에게도 보이지 않으니까.”

그 말과 함께, 그녀가 나에게 얽혀오기 시작했다.

그녀와 밀착하는 경우는 이전에도 종종 있었다지만, 이번에는 느낌이 달랐다.

이전에는 단순히 서로를 감정을 확인하는 수준에서 그쳤다면, 이번에는 서로를 느낀다는 쪽에 가까웠다.

정말로 우리가 정욕의 나선 아래에 있어서 그렇게 느낀 것인지, 아니면 단순히 감각이 예민해져서 그렇게 느낀 것인지는 모른다.

다만, 둘 다 이 순간을 잊지 않으려고 노력했다는 사실만은 분명했다.

그렇게, 그녀의 전부를 나의 손에 각인시켜갈 즈음, 둘만의 세계를 구성하고 있던 암흑이 녹아내리기 시작했다.

아마 여기까지가 능력의 한계인 모양이었다.

“나쁘지 않았어. 둘 다.”

옅은 홍조로 물든 아이나는, 그 말만 남기고 도망치듯이 떠났다.

…오늘은 손을 씻지 말아야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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