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91화 〉 자색의 진가. (91/173)

〈 91화 〉 자색의 진가.

* * *

“한 대만 때려달라고 그랬지?”

세레나가 가볍게 팔을 휘두르며 말했다.

검은 어디 가고, 웬 맨주먹이냐고?

일단은 테스트를 해봐야 한다나 뭐라나.

자기 주먹조차 견디지 못하면 검을 쓰는 의미가 없다면서.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맨손으로 마나글레이브를 쳐내겠다니.

생도인 샤를린도 한 일을, 교수인 세레나가 하지 못할 게 뭐가 있냐고?

그거랑 이건 엄연히 다른 이야기지.

샤를린이 쳐낸 건 고작 푸른색의 검신이다.

그마저도 고장 난 상태라, 제대로 된 위력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었고.

하지만, 지금 세레나가 대적하려는 것은 푸른색 따위가 아니다.

모든 마나글레이브 검사들이 염원으로 삼는 꿈의 색채, 보라색이란 말이다.

그런걸 몸으로 받아내겠다니, 당연히 광기 어린 도전으로 보일 수밖에.

그래도 세레나를 말리지는 않았다.

그녀에 대한 신뢰.

그녀를 골탕 먹이고 싶다는 짓궂은 마음.

두 양가감정이 혼재하고 있었기 때문이리라.

“그럼, 간다?”

“네!”

강렬한 권압이 다가온다.

얼마나 포학한 살기인지, 그 기운이 내게 가까워지는 것만으로도 주변의 삶과 죽음이 역전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마치, 여태까지 생도들에게 보여주었던 무력은 장난에 불과하다는 것처럼.

하지만 어찌된 영문인지, 내 마음은 잔잔하고 고요하기만 했다.

그 살기의 근원이 눈앞까지 다다랐음에도.

검과 주먹이 맞부딪히기 일보 직전.

!

…아직 세레나에게 대항하기엔 너무 이른 모양이었다.

결국, 내 몸은 세찬 폭력의 파도를 견디지 못하고 날아가 바닥에 처박혀 버렸으니.

비록 이런 꼴이라지만, 나의 저항이 아예 무위로 돌아간 것은 아니다.

검신은 여전히 곧게 뻗은 채로 자색을 발하고 있었지만, 칼날을 관통한 세레나의 팔은 매끈하게 양분되어 너덜거리고 있었으니까.

* * *

다인슬라이프.

한 번 피를 보기 전까지는 날을 거두지 못하는 저주가 담긴 검.

영원한 파멸을 불러오는 저주가 걸린 검.

죽어서도 안식에 다다를 수 없으며, 설령 살아남는다 한들, 끝나지 않는 고통이 남는 저주를 새기기에, 차라리 죽음을 종용하게 만드는 무기다.

그때야 제자에 대한 경의를 표하기 위해 한 번 뽑아 들었다지만, 애착이 가는 귀여운 사람을 상대로 두 번 다시 쓸 물건은 아니지.

지난번에 훈련실을 부숴 먹은 것도 다 의도한 거였다.

그게 녀석을 베지 않고 이 검을 거둘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으니까.

한데, 이 멍청한 녀석은 나의 그런 세심한 배려도 모르고 이렇게 속을 썩이는 소리나 하고 있지 않은가.

그래서, 조금 겁을 주기로 했지.

진심으로 죽음을 눈앞에 두게 된다면, 분명 꼬리를 말고 도망칠 줄 알았거든.

문제는, 그게 통하지 않았다는 거다.

오히려 당돌하게 내게 검을 들이밀더라고.

그마저도 만용이라고 생각했건만.

역으로 나를 이런 꼴로 만들어 버릴 줄이야.

이렇게까지 각오를 했다면, 피하는 것도 도리가 아니겠지.

어여삐 여겨 예절을 알려주는 수밖에.

…모처럼 피가 끓어오르는 기분인걸.

* * *

척 보기에도 마검이라는 기운이 물씬 느껴진다.

너울거리는 귀기와 삼켜질 것만 같은 원념이 새어 나와 이곳 전체를 장악하고 있었으니까.

털은 곤두서고, 시큰거리는 아린 맛이 목젖을 타고 올라온다.

저런 순수한 악의를 곁에 두고도 아무렇지 않은 모습을 보니, 세레나가 어째서 악마라는 소리를 듣는지 알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주저하지 마. 똑바로 서는 거다. 쓰러지지 않도록.”

세레나가 모자의 챙을 매만지며 말했다.

그녀는 전에 없이 진지한 상태였다.

“준비는 됐지?”

“네.”

리카소를 감싸 쥔 세레나의 권갑(??)이 반짝인다.

칠흑으로 물든 그녀의 세계 속에서도 그 빛이 녹슬지 않는 것을 보아하니, 아마 저것도 아티팩트일 것이다.

“간다!”

세레나의 다운 코트가 펄럭인다.

아니, 사실 그 펄럭임만이 내가 눈으로 좇을 수 있는 유일한 속도였다.

나머지는 제대로 보이지도 않았다.

따라서, 내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곤 그 흐릿한 움직임에 의존하여 세레나의 검로를 예측하는 것뿐이었다.

늦었나?

가까스로 그녀의 움직임을 붙잡은 줄 알았으나, 그것은 잠깐에 불과했다.

고작해야 그녀의 검을 틀어내는 게 끝이었으니.

목을 노리던 칼날이 비껴나, 가슴팍을 그었다.

핏방울이 튄다.

약간의 쓰라림도 느껴졌다.

그럼에도 검을 놓지 않았다.

똑바로 설 수 있게.

쓰러지지 않도록.

“지금, 이 순간을 기억해. 다시는 이런 일을 겪지 않게끔.”

세레나가 얼굴에 튄 피를 닦으며 말했다.

* * *

…기절했었나?

훈련 중에 기절해보는 것은 처음이다.

아니, 처음 본다.

공황 상태에 빠지는 녀석들이야 종종 보긴 했어도.

때려달라 한 건 난데, 정작 내가 기절해 버리다니, 좀 쪽팔리네.

그래도 이번 훈련 덕에 보라색 검신의 효과가 뭔지 어느 정도는 깨달았으니 다행이다.

생각보단 좀 심심한 효과였기 때문에 아쉬웠지만.

상태이상 경감이라.

마냥 나쁘지만은 않은 효과인데 말이야.

다른 게임에서 ‘강인함’, 또는 ‘내성’ 등으로 표시하는 이 효과는 분명 좋은 효과임은 틀림없다.

강력한 저주를 기반으로 한 각성자들에겐 엄청나게 높은 효율을 발휘하니까.

다만, 피해 자체를 직접적으로 줄여주는 효과는 아니다 보니, 애매한 면이 있는 건 사실이다.

체감상 경감되는 수치도 좀 미미한 것 같고.

알프레드의 ‘불멸의 수은’ 같은 효과였다면 좋았을 텐데, 이래저래 미묘한 효과군.

그나저나, 어딘가 익숙한 촉감이 배에서 느껴진다.

몽실몽실하면서도 약간 탄력이 있는 느낌.

이따금 만져보기도 한 것 같은 물건인데.

다만, 평소에 느끼던 것보단 훨씬 묵직하고 부피가 큰 것 같았다.

뭘까.

살짝 눈을 떠보니, 빨려 들어갈 것만 같은 눈동자가 날 기다리고 있었다.

“잘 참았어.”

그녀는 턱을 괸 채 날 바라보고 있었다.

평소와는 무게감이 다르다 싶더니, 세레나라서 그랬구나.

이제야 이해가 간다.

“잘 참았다니, 뭘요?”

“괴롭다거나, 아프다거나 하지 않았어?”

“그런 건 전혀 없었는데요.”

그 대답에, 세레나의 눈이 아주 잠깐, 서글픈 눈으로 변했다.

뭐지.

“그래, 수고 많았어.”

세레나가 날 껴안으며 말했다.

갑작스러운 그녀의 태도 변화에 이상함을 느꼈지만, 그런 건 신경 쓰이지 않았다.

지금 나한테 신경 쓰이는 것은 내 아래의 깊은 수렁 같은 계곡이었으니까.

“고생했어. 오늘은 푹 쉬어도 돼.”

“네, 그러려고요. 좀 피곤했나 봐요.”

“그럼, 난 이만 가볼게!”

왜 세레나가 내게 미안한 태도를 취했는지는 잘 모르겠다.

사실 그것에 대해 깊게 생각할 여유도 없었다.

기억에 남는 거라곤 그 묵직함 뿐.

이럴 줄 알았으면 좀 더 오래 안아달라고 할걸.

* * *

그동안 얼마나 많은 고생을 해왔는지 헤아릴 수가 없다.

다인슬라이프의 저주를 아무렇지도 않게 받아들일 정도라니.

그 정도로 힘들었으면, 가끔은 내색을 할 법도 한데.

보듬어줘야 할 귀여운 아이 정도로 여겼는데, 속은 나보다 강인한 녀석이었다.

뭐, 그렇다고 단순히 아끼는 제자로만 생각한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 이상으로 가까워지기 위해 노력했지.

인간의 모습과 성격을 잃은 지 오래인 지금, 나를 이성으로 생각하는 사람은 드물다.

하지만, 녀석은 나를 분명히 이성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아마 본인은 눈치채지 못하고 있겠지만.

그걸 알기란 어렵지 않다.

향기가 나거든.

호감 가는 이성을 마주할 때 나는, 은은한 단내가.

그 향기가 짙어질 때쯤이면 확 잡아 먹어버릴까 하는 충동이 일기도 한다.

아직은 그걸 잘 제어하고 있지만… 언제까지고 절제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그렇게 신선한 향기를 사방에 흩뿌리고 다니는데, 어떻게 참을 수 있겠어?

* * *

병실을 벗어나고 가장 먼저 찾아간 사람은 프리실라였다.

앨리스에게 주문했던 탄환의 프로토타입이 완성됐다는 이야기를 들었기 때문이다.

마나글레이브는 프로토타입의 완성에만 일주일이 걸렸던 것 같은데, 제작이 빠르네.

“아쉽게도 유도 기능은 형편없는 수준이래. 일단은 백화 분진을 주입하는 것에 초점을 두고 있어서, 유도 기능은 배제하고 나머지 기능만 보라고 하더라고.”

…금방 완성될 만하군.

유도 기능이 핵심인 물건에 유도 기능에 대한 기대를 접으라니.

아니지, 차라리 이편이 나을 수도 있다.

유도 기능이 지나치게 좋으면 탄환에만 의존하게 될 가능성이 크니까.

일단은 기본적인 사격 실력을 갖추는 게 먼저지.

앨리스는 이러한 점까지 계산하고 일부러 유도 기능을 저하시킨건가?

확실히 교수도 아무나 하는 건 아니네.

“어디, 한 번 쏴봐.”

“나, 총은 거의 만져본 적 없으니까 너무 기대하지는 마.”

“괜찮아. 그럴 수도 있지 뭐.”

…끔찍하군.

사격 자세부터가 틀려먹었어.

“잠깐, 다시.”

“왜?”

“쏘는 자세부터가 틀려먹었잖아.”

“이렇게 쏘면 안 돼?”

“당연하지. 줘봐.”

프리실라에게서 거대한 저격 소총을 빼앗았다.

나라고 저격 소총에 대해 빠삭하게 알고 있는 건 아니지만, 기본적인 사격 폼 정도야 게임과 영화에서 숱하게 봐왔기 때문에, 자세 정도는 그럴듯하게 잡을 수 있었다.

“보기만 해선 잘 모르겠어. 다시 자세를 잡아 볼게. 문제 있는 부분은 네가 고쳐줘.”

“그래.”

엎드린 프리실라의 옆에 붙어, 자세를 교정해준다.

고쳐주기 무섭게 원래의 자세를 되찾았지만.

결국, 이날은 사격 자세를 고쳐잡는 데만 대부분의 시간을 투자해버리고 말았다.

…사실 프리실라가 나보다 훨씬 뛰어난 사격 실력을 갖추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린 것은 이틀이 지나서였다.

그래, 그녀는 일부러 그런 괴상한 자세를 취했던 것이다.

단지, 자연스럽게 신체 접촉을 할 명분을 얻기 위해서.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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