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89화 〉 앞지르는 그림자. (89/173)

〈 89화 〉 앞지르는 그림자.

* * *

높다란 나무들이 울창하게 자라있는 이 북문 공원에는, 나만의 장소가 있다.

나만의 장소라 해봤자, 가지들 사이에 걸린 그물침대가 끝이지만.

그런데도 이 장소를 마치 비밀이라도 되는 양 설명한 데에는 다 나름의 이유가 있다.

여기는 누구도 모르는 곳이거든.

원체 사람들이 잘 오가지 않는 북문인데다, 우거진 풀잎들 사이에 가려져 보이지도 않으니, 이런게 존재한다는 것을 알 턱이 없지.

때문에, 조용히 나만의 시간을 보내기엔 안성맞춤인 장소다.

물론 안락함이야 기숙사의 고급 침대에 비할 바가 못 된다지만, 이곳은 이곳 나름의 매력도 있고.

고른 숨에 맞춰 불어오는 산들바람, 수림 사이를 뛰어다니는 작은 동물들의 발걸음 소리, 탁 트인 장소에서만 느낄 수 있는 맑은 공기.

오늘도 그 모든 것을 누리며 낮잠을 청하던 중이었다.

“여기 있었구나.”

누군가가 내 옆에 나란히 눕는다.

두 명 이상의 사람이 편히 몸을 뉠 만큼 너르다고 할 수는 없는 공간이었기에, 그 누군가는 내 옆에 딱 달라붙어 있었다.

약간의 당혹감이 들었다.

알다시피, 난 그렇게 예민한 사람은 아니다.

하지만, 누군가가 내 목전에 도달했는 데도 인기척을 느끼지 못할 정도로 둔감하지는 않다.

깊은 잠에 빠져있었다면 또 모를까.

게다가 이 장소는 어떻게 알아냈단 말인가.

난 여기를 그 누구에게도 알려준 기억이 없는데.

그렇다고 화들짝 놀라며 일어나는 일 따위는 일어나진 않았다.

그에게서 묘하게 익숙한 기시감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날 선 기운 같은 것도 느껴지지 않았기에, 이대로 계속 잠에 빠져있을까 고민하던 찰나.

그의 손길이 날 쓰다듬는 게 느껴졌다.

이것으로, 나는 내 옆에 있는 사람이 누구인지 대충 유추할 수 있었다.

이런 손을 가진 사람은 내 주변에 한 명뿐이니까.

작고 여린 손 같음에도, 고통과 세월로 번져있는 이 손의 주인은 그 답을 채 도출해내기 전에도, 나는 눈을 뜰 수밖에 없었다.

습윤하면서도 말랑말랑한 무언가가 내 이마에 맞닿았기 때문이리라.

그리고, 내 눈에 비친 것은, 나를 사랑하는… 아니, 이제, 내가 사랑하는 그녀였다.

“뭐 하는 거야.”

“계속 구경하고 있었는데, 세상 모르게 자고 있더라. 그래서 일어나라고.”

“뭘 구경해?”

“너 자는 모습.”

제법 오래 잠들어 있었던 것 같은데, 그 동안 가만히 옆에서 구경만 하고 있었다고?

하긴, 예전에 쓰러졌을 때는 거의 하루 가까이 내 곁을 지켰다고 하니, 그리 놀랄 일까진 아닌가.

“그럼 깨우지. 왜 가만히 보고만 있었어.”

“자는 걸 방해하는 것만큼 기분 나쁜 일도 없잖아. 구경하는 것 나름대로 재미도 있고. 귀엽던데.”

“괜찮으니까 깨워도 돼. 지금 같은 기상 알람이면.”

“마음에 들었어?”

마음에 들지 않을 이유가 없지.

내 인생 최고의 모닝콜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당연하지. 매일 받아도 안 질릴걸?”

“그래? 그러면….”

아이나와 나의 거리가 흔들리며 좁혀져 온다.

둘 사이에 존재하는 희미한 경계가 물결치는 듯한 기분이었다.

…어디까지나 나의 소감이다.

아이나는 아닐 테니까.

그녀는 일찍이 차갑고 메마른 자신의 장막을 거두어들인 지 오래였다.

오직 나의 거리 안으로 발을 들일 때뿐이라지만, 그 순간만큼은 그녀도 베일을 벗어 던지고, 순수한 모습으로 공손히 발을 들인다.

지금처럼.

나도 그에 상응하는 답을 하기 위해, 조금 앞으로 다가간다.

하지만, 아이나는 나의 답을 받아주지 않았다.

아까처럼, 이마에만 입을 맞출 뿐이었다.

나의 답이 그녀의 기대에 상응하지 못했던 걸까.

“날 기다리게 했으니까, 오늘은 여기까지만.”

그녀의 예리한 눈매가 빛난다.

입가는 아주 옅은 호를 그리고 있었다.

아이나도 저렇게 요망한 표정을 지을 수 있는 거였구나.

처음 지어보는 표정일 텐데, 너무나도 자연스럽다.

과연 천재 소리를 들을 만도 하네.

경이로운 학습 속도다.

“왜 그렇게 흐뭇한 표정으로 보는 거야.”

“배우는 게 빠르다 싶어서.”

“뭘 보고 말하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난 옛날부터 뭐든 잘했어.”

“그래. 맞아.”

아이나가 어디 하나 모난 곳 없는 사람이긴 하지.

굳이 단점을 꼽자면 사회성이 부족하다는 거랑 귀여운 맛이 없다 정도인데, 그것도 사실 큰 문제는 아니지.

사회성이라면 나도 바닥을 기는 사람이니까.

오히려 아이나 쪽이 나보다 나았으면 나았지, 못하진 않을걸?

적어도 기행을 벌이지는 않잖아.

귀여운 맛이 없다?

지금 그건 방금 생겼으니 문제없고.

“근데, 내가 여기 있는 건 어떻게 안 거야?”

“나한테는 이자요이가 있잖아.”

아이나가 어깨 위의 부엉이를 가리켰다.

아, 그래 저 부엉이를 잊고 있었지.

처음엔 엄청 신경쓰였는데 말이야.

이젠 아이나의 악세서리 중 하나로 인식될 정도로 익숙해졌다.

하품도 하고, 삐지기도 하고, 애교도 떨고 그러는 게, 귀엽고 똘똘한 맛도 있었고.

때때로는 저 부엉이 쪽이 주인인 아이나보다 더 인간미 있어 보일 정도였으니까.

그녀에겐 미안한 이야기지만.

“그럼, 내가 여기에 가끔 드나든다는 것도 옛날부터 알고 있었겠네?”

“아니, 알아차린 건 비교적 최근.”

“근데, 왜 그때 바로 말하지 않았어?”

“숨어서 뭘 하나 지켜봤지. 넌 수상한 사람이잖아.”

“그렇긴 해.”

예전에 어딘가에서 들은 말이 있다.

‘결혼하면 모든 게 노출되게 되어 있다. 네 괴상하고 음습한 취미나 생각 같은 것도. 아무리 비밀스럽게 꼭꼭 숨겨놓으려 해봤자 다 들키게 되어 있다.’

예전에는 그 말을 그냥 지나가는 농담 정도로 받아들였다.

그냥 그놈이 제대로 숨기지 못한 것이라고 치부했었지.

하지만, 이젠 그 말을 조금 이해할 수 있었다.

여자친구에게도 이렇게 쉽게 노출되는 것이 비밀인데, 결혼 상대라면 더 하겠지.

아니, 사실 다른 사람이면 어떻게든 될지도 모른다.

무덤까지 가지고 가는 비밀 정도야 누구에게나 두어 개쯤은 존재하니까.

문제는, 내 상대는 평범한 사람이 아니라, 미츠루 가문의 당주이신, 아이나라는 거지.

그녀를 상대론 도저히 무언가를 숨길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애초에 물리적으로 그것을 불가능하게 만드는 정신 지배를 배제하고 생각해도 말이다.

그러니 내가 이렇게 그녀 밑에서 빌빌 기면서 살 수밖에 없는 거지.

…그것에 큰 불만은 없다만.

“혹시, 배고프지 않아? 너 점심도 안 챙겨 먹었잖아.”

“그러게. 잊고 있었네.”

“그럼, 이거라도 먹어.”

아이나가 찬합 하나를 내밀었다.

매끈하게 옻칠 된 나무에 금, 자개, 옥 등이 박혀있는, 억소리가 나게 비싸 보이는 찬합.

이거, 분명 아이나가 준비해온 거다.

그렇게 확신할 수밖에 없었다.

어디선가 대충 사 온 것이라면, 척 보기에도 이렇게 고급스러워 보이는 찬합에 담겨있진 않았을 테니까.

“아카데미 내의 식당 음식보단 맛없을 거야. 미안해.”

아무래도 그녀는 요리에는 그다지 조예가 깊지 않은 듯싶었다.

손 곳곳에 새로이 생긴 얕은 상처들이 그것을 대변해주고 있었으니.

“아니야. 해준 것만으로도 충분히 고맙지.”

“다음엔 더 연습해서 만들어 볼게. 다른 사람들 요리에도 지지 않을 거니까.”

찬합 속에는 다양한 종류의 요리가 들어 있었다.

급하게 만든 탓인지, 숙련도가 낮아서인지, 요리의 완성도는 빈말로도 훌륭하다 할 수준은 못 되었지만, 그런 건 아무래도 좋았다.

적어도 열심히 만들려 했다는 마음은 확실히 확인할 수 있었으니.

사실 열심히 만들지 않았어도 괜찮았다.

살면서 나한테 도시락을 싸준 사람은 부모님밖에 없었거든.

해줬다는 것만으로도 감동이지.

이제 내가 해야 하는 건, 이것들을 맛있게 먹는 것뿐이다.

설령 그것이 끔찍하게 맛없더라도.

“…어때?”

“맛있는데?”

빈말이 아니라, 실제로 맛이 나쁘지 않았다.

누구나 무난하게 먹을 수 있는, 그런 맛.

처음 한 것치곤 굉장히 훌륭한데?

실패하기 어려운 구성의 요리가 대부분이었다곤 하지만, 그걸 고려하고서도 이 정도면 칭찬받아 마땅한 수준이었다.

대부분은 첫 요리를 태워 먹거나, 간을 맞추는 데 실패하거나, 설익히거나 하기 마련인데, 딱히 그런 실수도 거의 없었고.

“…정말?”

“그럼, 내가 뭣 하러 그런 거짓말을 하겠냐.”

“다행이다.”

“못 믿겠으면 네가 먹어 봐.”

그녀가 자연스럽게 입을 벌렸다.

나는 가장 만족스럽게 먹었던 것 하나를 집어 그녀의 입에 넣어주었다.

“봐봐, 맛있지?”

“나쁘진 않은데, 그렇다고 맛있지도 않네. 하아, 이럴 줄 알았으면 어렸을 적에 할아버님의 말을 더 잘 들을 걸 그랬어.”

“뭐라고 하셨는데?”

“적어도 요리는 할 줄 알아야 한다고 그러셨어.”

음, 이 부분은 잘 모르겠다.

애초에 아이나 정도 되는 집안이면 따로 요리사를 고용하지 않나?

가문의 당주 자리에 있는 사람이 직접 요리를 해먹을 필요가 있나 싶기도 하고.

“그래서, 너는 뭐라고 대답했는데?”

“어린 마음에 한 소리였지만, 나는 그런 것하지 않아도 잘 살 수 있는 사람이라고 대답했어. 시집갈 생각도 없다고 그랬고.”

“그래서, 네 조부께서는 뭐라고 하셨는데?”

“네가 홀몸으로 살다가 죽든 말든 그건 곧 죽을 자기가 신경 쓸 일은 아니지만, 자기 밥 정도는 자기가 챙겨 먹을 줄 알아야 때깔이 곱게 죽을 수 있다고 잔소리하셨어.”

아이나가 자신의 조부를 그리워 하는 이유를 알 것만 같았다.

엄하고 딱딱하기로 소문난 미츠루 가문이니, 저렇게 자유분방하고 유쾌한 영혼을 가진 사람은 저 사람이 유일했으리라.

설령 그런 성격을 가진 사람이 더 있다 한들, 짬밥 때문에라도 그런 이야기를 하기 힘들었을 테니까.

“뭐 어때. 지금이라도 열심히 하면 되지.”

“그럼… 다음에도 맛봐줄래?”

“가져만 오면.”

“좋아.”

어느샌가 찬합은 텅 비어있었다.

혼자 먹기엔 제법 많은 양이었지만, 나는 기꺼이 그것들을 모두 해치워 주었다.

이따금 부엉이가 아이나의 눈치를 살펴 가며 몇 점의 고기를 집어가 준 덕택도 컸다만.

어찌 됐든, 아이나는 기쁘다는 듯이 날 바라보고 있었다.

내 어깨에 몸을 기댄 채 말이다.

“있잖아.”

“응?”

“나는 우리 집안이 그림자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것을 싫어했어. 늘 누군가의 그늘막에 가려져 있다는 소리니까. 그래서 나의 이 능력도 그다지 달가워하지 않았지.”

아마 그녀의 인생을 대변하는 단어 같아서 더욱 그랬을지도 모른다.

1등의 그림자에 묻힌 채, 가주라는 이름에 묻힌 채 살아가고 있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그림자도 그렇게 나쁜 이름이 아닌 것 같아.”

“왜?”

“항상 누군가의 뒤를 쫓고 있잖아. 영원히 떨어지지 않으며.”

“그렇지?”

“그렇게 생각하면, 누군가의 그림자로 살아가는 것도 마냥 나쁘기만 한 건 아닐지도.”

“언젠간 네가 앞서 있을지도 모르지. 그림자의 위치는 광원에 따라 변하잖아.”

아이나는 내 대답이 마음에 들었다는 듯, 싱긋 웃어 보이고는 눈을 감았다.

처음 보는편안한 표정으로.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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