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6화 〉 새로운 무기.(2)
* * *
한 달 만에 돌아온 트리니티 아카데미는 무척이나 밝은 분위기를 띠고 있었다.
사실, 그럴 수밖에 없긴 했다.
올림피아드 우승 덕에 아카데미의 위상도 많이 올랐고, 중간고사마저 끝났는데, 기분 나쁠 사람이 어딨겠는가.
때문에, 많은 이들이 이 여유를 만끽하는 데 여념이 없었다.
나만 빼고.
“어디 가?”
“급하게 볼 일이 있어서.”
“꼭 지금 가야 해? 올림피아드도 끝났는데 급하게 볼 일이 뭐가 있다고.”
“앨리스 교수님을 만나 뵐 일이 있어서.”
“아… 수고해라.”
그렇게 안쓰럽다는 눈으로 쳐다볼 것까진 없는데.
그러면 내가 무슨 사고를 쳐서 끌려가는 것처럼 보이잖아.
“좋은 일이니까 그렇게 걱정 안 해도 돼.”
“그래, 잘 해결하고 와라.”
뭐, 시험이 끝났음에도 놀지 못하고 교수님과 면담이나 해야 하는 신세가 처량해 보일 수는 있겠지.
하지만, 그 잠깐의 유희보다 이 면담이 훨씬 기분 좋고 중요한 일이었다.
이건 비단 나에게만 적용되는 이야기는 아니다.
아마 나와 같은 상황에 놓인 이들이라면 모두가 그렇게 느낄 테니까.
싸구려 무기에서 벗어나, 멋들어진 새 무기를 장만하는데, 기분 나쁠 사람이 누가 있겠어?
그것도 조금 낫다 수준이 아니라, 거의 현존하는 무기 중에 최고의 사양을 자랑하는 수준일 텐데.
그럼에도 내가 새 무기를 얻었다고 다른 사람들에게 거들먹거리지 않은 데에는 다 이유가 있다.
첫 번째 이유로는, 이 무기는 내 자력으로 얻은 무기가 아니라는 점.
무기를 얻게 된 경위도 정말 어이 없는 이유에서 였고.
RPG 게임으로 비유하자면, 소위 ‘썩은물’이라 불리는 사람들의 소매넣기로 얻은 물건이라고 해야 하나?
물론 나도 한때 게임을 굉장히 즐겨 했던 유저로서, 그들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기껏 아무도 플레이하지 않는 비주류 스킬 트리, 비주류 직업으로 엔드 스펙까지 찍어놨더니, 다른 고인물들은 다 접어버리고, 뉴비는 없는 마당에, 갑자기 자기랑 같은 트리를 타겠다는 뉴비가 나타난다면 도킹을 시도하는 게 코어 게이머들의 기본적인 행동 강령이니까.
두 번째로는, 그냥 다른 사람들을 놀라게 해 주고 싶어서였다.
뜬금없이 새로운 무기를 들고 나타난다면 화제가 될 게 분명하니까.
그것도 갑자기 확 강해진다면 더욱 많은 이야기가 오가겠지.
마지막 이유로는, 이 모든 설레발이 물거품이 될 가능성이 약간이나마 존재했기 때문이다.
아무리 훌륭한 원석이 있다 해도, 그걸 가공할 수 있는 기술자가 없다면, 애물단지에 불과하니까.
뭐, 그래도 말했다시피 그럴 가능성은 희박하다.
앨리스 교수는 자신의 교수실을 거의 벗어나는 일이 없는 사람이니까.
각양각색의 독특한 성격을 가진 교수들로 즐비한 이 트리니티 아카데미에서, 자신의 교수실을 벗어나지 않는 교수라니, 다소 특이하게 느껴질 수도 있으리라.
하지만, ‘트리니티 아카데미’라는 예외적인 장소를 벗어나, 보편적인 방향에서 접근해본다면, 그게 상식적이라는 걸 알아차릴 수 있을 것이다.
교수라는 직업이 어떤 직업이냐.
특정 분야를 심층적으로 다루는, 연구직 아닌가.
물론 사람의 성향에 따라 교사의 역할에 더 큰 비중을 두는 사람도 있겠지만, 앨리스는 그렇지 않다.
골방에 처박혀, 자신의 연구에만 몰두하는 게 일반적인 학자의 스테레오 타입이잖아?
앨리스가 딱 그런 이미지라고 생각하면 편하다.
교사보단 학자로서의 성향이 훨씬 짙은 교수.
이렇게 말하면 앨리스가 교수실을 벗어나는 일은 거의 없어 보이겠지만, 꼭 그렇지만은 않다.
워낙 유능한 사람이다 보니, 여기저기 부르는 곳이 한두 곳이 아니거든.
그래서, 앨리스가 자신의 교수실에 없으리란 가능성을 아예 배제할 수는 없는 노릇인 거지.
과연, 앨리스는 자리에 있으려나?
* * *
앨리스가 연구에 과하게 몰두하는 성격이라는 건, 지금 이런 모습만 보아도 알 수 있다.
내가 찾아온 줄도 모른 채, 자기 일에만 집중하는 모습 말이다.
그래, 노크 소리 정도는 못 들을 수도 있다고 생각해.
하지만, 안으로 들어가 인기척까지 냈는데도 찾아온 줄 모르는 건 좀 너무한 게 아닌가 싶다.
그래도 결과적으론 자리에 있었으니 다행이긴 하지만.
“안녕하세요. 앨리스 교수님.”
“어, 박성진 생도, 오랜만이네요. 소식 들었어요. 올림피아드에서 우승했다죠? 축하해요.”
“감사합니다.”
“그래서, 무슨 일로 저를 찾아오셨나요?”
앨리스가 하던 일을 중단하고, 내 앞의 의자에 앉았다.
눈은 여전히 내 쪽이 아닌, 진행 중이던 연구를 향해 있었지만.
나로선 그녀가 무슨 연구를 하는지 정확히 알 수 없었지만, 아마도 아티팩트에 대한 연구일 것이다.
“그때 했었던 약속, 아직 유효하죠?”
“물론이죠. 오히려 언제쯤 찾아오려나 기다리고 있었던걸요. 너무 오래 기다린 나머지 까맣게 잊고 있었지만요.”
“혹시, 마나글레이브도 제작하실 수 있으신가요?”
“못할 건 없죠. 다만, 결과물은 천차만별일 거예요. 아무리 제가 자신 있는 게 아티팩트 제작이라지만, 결국 마나글레이브의 품질은 왜곡 수정에 따라 결정되는 거라, 다른 것들이 좋아 봐야 큰 의미는 없거든요.”
그렇겠지.
하지만 그런 건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
나에겐 최상급의 왜곡 수정이 두 개나 있거든.
그것도 이미 가공이 완료된 프리즘과 렌즈 모두.
나는 주머니에서 미리 준비해둔 물건을 꺼내서 그녀에게 보여주었다.
“…박성진 생도가 비밀이 많은 사람이란 건 알고 있었지만, 볼 때마다 놀라게 되네요. 이 정도 품질의 왜곡 수정은 어디서 구해온 거예요? 마나글레이브는 주류 무기가 아니라, 유명 공방에서도 잘 취급하지 않아요. 의뢰를 받는다고 쳐도, 재료 공수 단계에서 큰 차질을 겪을 거고요.”
“아는 지인에게서 선물로 받았습니다.”
“저도 한 명의 장인이자 학자로서 자부심이라는 게 있어요. 다른 공방의 장인들도 마찬가지일 테고요. 하지만, 이런 물건은 살면서 본 적이 없네요. 100년 이상의 역사를 자랑하는 공방 내의 수석 장인들이나 한두 개쯤 봤을까요? 그들이라면 일곱 개의 검좌가 쓰던 마나글레이브를 만져봤을 테니까요. 잠깐, 설마… 아니죠?”
“아니, 이게 그렇게 엄청난 물건이에요?”
“검좌들이 썼던 검을 직접 본 적이 없어서 단언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제가 본 마나글레이브 중의 수정 중에선 가장 좋아요. 피터 교수님의 마나글레이브도 어디 가서 꿇린다는 평가를 받을 정도는 아닌데, 그게 초라해 보이는 수준인데요?”
피터 교수라면 그 사람인가?
이 아카데미의 몇 안되는 포톤글레이브 달인.
내 마나글레이브 실력이 무척이나 형편없던 시절엔 그 교수님께 배울까 하던 생각도 있었는데 말이야.
결국엔 아이나에게서 배우게 되었다지만.
아무튼, 그래도 피터 교수의 주 무기는 포톤글레이브지, 마나글레이브가 아닌 만큼, 최고로 훌륭하다는 미사여구를 붙이기엔 조금 아쉬울 것이다.
하지만, 일단은 마나글레이브의 강의도 함께하고 있는 교수인 만큼, 아무런 시제품 따위를 쓰고 있지는 않을 텐데.
그거보다 훨씬 좋다고?
척 보기에도 엄청난 완성도의 물건이란 건 알아봤지만, 대체 니힐리스는 나한테 뭘 준 거야.
이러면 내가 감당하기 어렵잖아.
“좋아요. 이거라면 못할 것도 없죠. 마나글레이브를 제작해 본 경험은 거의 없지만, 이런 재료가 있다면 얼마든지 도전할 가치가 있어요. 아니, 오히려 제가 만져보고 싶네요.”
“그럼 제작해주신다는 이야기인 거죠?”
“네.”
“감사합니다. 제작에는 어느 정도의 기간이 걸릴까요?”
“글쎄요. 저도 확신이 서지 않네요. 마나글레이브는 제작 경험이 적다 보니… 게다가, 이런 재료가 들어가는 작품들은 섬세한 가공이 필요하거든요. 급하게 필요하신가요?”
“아뇨.”
물론 빨리 만들어주면 당장은 좋겠지.
하지만, 이런 건 결국 완성도가 제일 중요하다.
거의 평생 쓸 물건이니까.
지금 잠깐 좋자고 훗날을 그르칠 순 없잖아.
제작에 오랜 시간이 걸린다고 해도, 내가 참는 수밖에.
“그럼 천천히 여러 가지 테스트를 거쳐 가면서 만들어 보도록 하죠. 마침 시기도 적절하네요. 중간고사와 올림피아드도 끝난 마당이니 박성진 생도도 여유로울 거고, 저도 한동안은 일이 별로 없거든요.”
“제가 도와드릴 일이 있나요?”
“프로토타입, 알파 버젼, 베타 버젼 등을 만들면서 계속 실험을 해야죠. 최고의 물건을 만들어야 하니까요.”
“설마, 실험 때문에 수정이 망가지거나 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겠죠?”
내가 아는 바에 따르면, 왜곡 수정은 소모품의 개념에 가깝다.
많이 사용하면, 결국 교체해야 하는 파츠라는 거지.
“왜곡 수정이 소모품이라곤 하지만, 이런 품질의 수정이라면 이야기가 다르죠. 실험 따위로 망가지는 일은 없을 거예요. 아마 막 굴려도 몇 년은 너끈하게 버틸걸요?”
“그럼, 언젠가는 결국 망가진다는 이야기인 거죠?”
“후, 그게 조금 문제가 될 순 있겠네요. 오래 가기는 하겠지만, 소모품인 이상 언젠가는 망가지기 마련이니까요. 하지만, 이것에 준하거나 비등한 물건을 구하는 건 쉽지 않겠죠.”
“아쉽네요.”
“아무튼, 실험으로 망가질 일은 없으니, 박성진 생도가 제작에 도움을 주시면 좋겠어요.”
그거야 별로 어려운 일이 아니지.
까짓거 검 몇 번 휘둘러주면 되는 거 아닌가.
“그렇게 하겠습니다.”
“좋아요. 그럼 일주일 정도만 말미를 주시겠어요? 저도 알아볼 게 많으니까요.”
“네, 그럼 일주일 뒤에 찾아뵙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나는 거의 바닥에 머리가 닿을 정도로 고개를 꾸벅 숙였다.
이렇게 일이 쉽게 풀릴 줄이야.
기분 좋게 앨리스의 교수실을 나가려던 찰나.
‘흠, 크로스 가드는 넣는 게 좋나? 아니야, 투척 후 회수를 고려하면 불편할지도 몰라. 검신에 곡률을 주는 건? 한손검처럼 쓰던데, 도신의 길이는 적당히 줄여야 하나? 아니지, 어차피 검신에는 무게가 없으니 길이를 늘여도 상관없을지도?’
앨리스가 수정을 든 채, 이리저리 분주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아마 떠오르는 아이디어를 메모하고, 스케치하는 과정 같은데…
들려오는 이야기는 어째 불안하기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