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2화 〉 올림피아드.(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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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태여 샤를린에 대한 소개는 하지 않겠다.
굉장히 튼튼한 내구, 쩔어주는 재생력, 대단한 근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제외하면 이렇다 할 특징도 없고, 근접전에 특화된 상대라, 어차피 제대로 된 반항도 하지 못하고 패배할 거니까.
상당히 무례하다고 느껴질 수도 있는 말이겠지만, 어쩔 수 없다.
시시한 승부를 포장하는 것은 해설자들의 일이지, 나의 일이 아니니 말이다.
지금부터 단 3분, 10수 이내로 결착을 지어 보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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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바다에는 중요 지점이 한 곳 있다.
바로 정 가운데 위치한 거대 암초.
거의 모든 암초로 이동할 수 있는 연결 포인트이다 보니, 이번 올림피아드의 승리 공식에는 ‘중앙 암초를 먼저 점령하기’가 대부분 포함되어 있다 봐도 무방하다.
물론 중앙 암초를 점령하지 않고 승리하는 경우도 더러 존재하긴 한다만….
그건 원거리 견제 수단이 훌륭해서, 중앙 암초에서 농성 중인 상대를 끌어들일 수 있는 경우에 한해서다.
사실 그마저도 아주 좋은 대책이라고 보긴 어렵다.
통계상으로 중앙 암초를 빼앗겼을 때 승리 확률은 3할에도 못 미치는 수준이니까.
하지만, 나는 샤를린이 중앙 암초를 선점하게 둘 생각이다.
샤를린이 먼저 움직여 주는 쪽이 더 편할뿐더러, 나는 그래플링 덕분에 공간의 제약도 크게 받지 않는 편이라서.
그녀도 이런 점을 모르진 않을 것이다.
문제는 고작 그런 사소한 불편함 때문에 중앙 암초를 포기하기엔, 너무 기분이 나쁘다는 거지.
그래서, 그녀는 달리기 시작했다.
중앙 암초로 향하는 최단 거리로.
그렇다면 나도 행동에 들어가야겠네.
우선, 중앙 암초로 향하기 전, 실뭉치 하나를 허공에 던져두었다.
아주 단단하게 매듭이 지어져 있어 절대 풀리는 일이 없는, 그런 실뭉치.
금방이라도 끊어질 것 같이 팽팽한 상태를 유지하고 있지만, 끊어지는 일은 절대 없다.
내가 만들 수 있는 실 중에서도 가장 강도가 높은 실이라, 어지간한 완력이나 무기로도 끊어지질 않는 걸 확인했으니까.
이쯤 되면 실뭉치라기보단 금속 구체라는 말이 더 어울리네.
그렇다면 다들 궁금해하겠지.
대체 저 쓸데없는 실뭉치의 용도가 무엇이냐고.
뭐, 그건 곧 알 수 있을 거다.
사전 준비도 끝났으니, 중앙 암초로 가 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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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에 비해서 만들 수 있는 실의 개수가 월등히 늘어났다고 하지만, 저렇게 커다란 실뭉치를 만들려면 실이 엄청나게 들어갈 텐데, 왜 실을 낭비한 거지?”
“언제는 우리가 쟤를 이해했냐만은, 참 볼 때마다 희한한 행동만 골라서 한단 말이야.”
“저게 이번 대전의 키 카드가 될 거야.”
세레나의 말에, 다들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렇게 이상한 반응은 아니었다.
고작 실뭉치 따위가 어떻게 전투의 흐름을 바꿀 수 있겠는가.
“저 실뭉치가 경기의 판도를 바꿀 수 있을 정도로 대단한 물건이라곤 생각되지 않는데요.”
“아니, 확실히 그럴 만한 물건이 맞아. 내가 직접 경험해 본 거니까.”
“아, 세레나 교수님은 박성진이랑 연습전을 많이 하셨었지. 뭔지 아시나 보네요.”
“알지. 근데 뭔지는 안 알려줄 거야. 직접 확인해 봐.”
세레나가 선을 긋자, 다른 이들은 로렌스와 세자르 쪽으로 눈길을 돌렸다.
혹시 그들이라면 무언가 눈치채지 않았을까 해서.
하지만, 그들이라고 다를건 없었다.
자신들도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가볍게 어깨만 으쓱할 뿐.
결국, 그들이 할 수 있는 것은 하나였다.
잠자코 경기를 지켜보는 것.
물론, 세레나를 제외한 나머지는 속으로 조바심을 내고 있었다.
샤를린이 비로소 중앙 암초에 도달하기 전까지도, 그는 느긋하게 여유나 부리고 있었으니.
“왜 아무것도 안 하지?”
“애초에 중앙 암초를 선점하려는 생각이 없는 거 같은데. 그래플링을 쓰면 훨씬 빠르게 붙을 수 있는데, 그래플링도 안 쓰고 있잖아.”
“오, 이제 뭐 하려나 본데.”
날카로운 검기가 바다를 가로질러 샤를린의 바로 옆을 비껴갔다.
핵심 기술이나 다름없는 낙린참이 빗나갔다는 사실에 탄식의 아우성이 나오려던 찰나, 또 하나의 검은 물체가 검기보다 한 박자 느린 속도로 날아와 샤를린을 덮쳤다.
* * *
어차피 샤를린이 내 낙린참을 회피할 수 있으리란 것쯤은 이미 알고 있었다.
내 낙린참은 불완전할뿐더러, 그녀는 좋은 동체시력과 반사신경을 가지고 있으니까.
하지만, 그렇다고 너끈하게 피해낼 수 있을 만큼 검기는 느리지 않다.
즉, 샤를린은 그것을 회피하는데 온 신경을 쏟아내야만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실뭉치의 존재 따위, 까맣게 잊고 있을 수밖에.
그래, 샤를린을 덮친 저것이 바로 내가 설치해둔 실뭉치의 정체다.
그 실뭉치는 사실 그물을 말아놓은 것으로, 매듭이 풀리는 순간에 일정한 방향으로 발사되게 되어있다.
그리고, 그 매듭 일부는 마나실로 구성되어있지.
내가 트리거만 입력하면, 해당 부분의 마나 실이 제거되고, 매듭이 풀려 그물이 날아가는 구조란 말이다.
눈썰미 좋은 녀석들이라면 아마 진작 알아챘으리라.
샤를린을 덮친 물체는, 아까 설치해둔 실뭉치라는 것을.
물론 이 계획을 성공시키기 위해선 그녀가 낙린참을 회피할 위치를 예측하여 그물의 방향을 사전에 정해놔야만 한다는 불편함이 있지만, 그건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샤를린은 보통 오른쪽으로 회피한다는 습관을 알고 있었으니까.
첫수도 성공적으로 들어갔으니, 나머지는 연습하던 대로 하면 끝이겠네.
샤를린이 그물에서 완전히 빠져나오기 전에 두 번째 그물을 설치한 뒤, 류진의 최속 접근기인 겨울나리로 따라붙는다.
물론, 피해는 전혀 없다.
고작 그녀의 머리칼 끝자락을 스친 것에 불과하니.
하지만, 이것만으로도 충분한 압박이 될 거다.
한 자리에 오래 붙잡혀 있으면, ‘또다시 그물에 걸리게 될지 모른다’라는 생각에 사로잡히게 될 테니까.
하지만, 생각과 현실은 크게 달랐다.
아무리 내게 그래플링이 있다지만, 암초라는 공간의 특성상, 류진의 다채로운 움직임을 선보이기도 어려웠을뿐더러, 샤를린도 결승전에 괜히 올라온 것은 아니라는 듯, 예상외의 분전을 시작했기 때문이다.
확실히 보통내기는 아니네.
마나글레이브를 맨주먹으로 쳐내다니.
자홍색에 비하면 훨씬 떨어지는 밀도라지만, 푸른 검신도 강철 정도는 너끈하게 잘라낼 수 있는데.
원래의 계획보다 빠르게 두 번째 트리거를 작동시켜야겠어.
그물이 다시 한번 샤를린을 향해 발사되었다.
다만, 이번에는 그녀도 순순히 그물에 걸려주지 않았다.
날아오는 그물을 가볍게 잡아 던지고는, 나와 거리를 벌리기 시작했으니까.
…별로 마음에 들지 않네.
아직 오차범위 내라곤 하지만, 처음 설정한 계획이 조금 어그러진 점이 아쉽다.
이런건 완벽하지 않으면 보는 맛이 떨어지는데.
뭐, 그래도 계획을 전면 수정할 필요까진 없으니, 상관없겠지.
마지막 그물을 꺼내 든다.
대신, 이번에는 하나가 아니라, 두 개.
이렇게 보면 실이 남아도는 것처럼 보이겠지만, 그렇게까지 넉넉하진 않다.
이번 그물이 마지막이니까.
게다가, 하나는 퍼스트 어빌리티로 만들어 낸 그물이 아니라, 마나실로 짜낸 그물이라, 실질적으로 내가 설치 가능한 그물 함정은 세 개가 마지노선이다.
하지만, 난 확신이 있다.
앞으로 남은 네 수 이내로 끝낼 수 있다는 확신이.
7수, 트리거 하나를 발동시킨다.
이 트리거는 마나실 그물의 트리거가 아닌, 일반 그물의 트리거다.
하나밖에 남지 않은 그물 함정을 낭비하는 것이 아니냐는 생각이 들 수도 있겠지만, 이 그물은 여기서 사용해야만 한다.
그물에 대한 샤를린의 경계도 최고로 올라와 있고, 어떻게 대처하는지도 방향을 잡았으니, 그냥 그물은 맞아줄 일은 거의 없기 때문이다.
차라리 8수와 연계하여 9수를 확정적으로 먹여주는 쪽으로 방향을 잡는 게 훨씬 이득이지.
8수, 마찬가지로 겨울나리.
이렇게 보면 마치 내가 겨울나리 만을 고집하는 사람처럼 보일 텐데, 그것은 착각이 아니다.
실제로 니힐리스도 ‘류진은 깊이가 있는 검처럼 보이지만, 겨울나리만 익히게 되면 그 깊이를 잃게 되는 무식한 검법’이라고 할 정도로, 류진 사용자들이 가장 애용하는 기술이니까.
물론, 그러는 데엔 다 이유가 있다.
일단, 류진의 기술이지만, 시오레의 찌르기에 더 가까운 형태의 기술이라, 워낙 속도가 빨라서 대처하기도 어렵다는 점이 가장 큰 이유다.
게다가, 이 기술은 시오레의 찌르기 기술들과 달리, 리스크도 아주 적은 편이라, 생각 없이 막 지르기에도 좋고.
다만, 아쉬운 점이 있다면, 익히는 데 굉장히 오랜 시간이 걸린다는 점 정도.
거의 숙달된 나에겐 별 의미 없는 이야기지만.
마나글레이브와 그물이 샤를린을 교차하는 이 순간, 마지막 트리거를 발동한다.
다행히 계산은 정확하네.
딱 알맞은 시간에 쿨이 돌아왔어.
나의 검신이 자홍색으로 물들기 시작하는 것을 본 샤를린이, 빠르게 거리를 벌린다.
하지만, 그렇다고 좁혀져 오는 패배의 틈새를 벌릴 수는 없는 법.
자홍색의 거미줄은, 그녀를 옭아매지 않았다.
아니, 그러할 겨를조차 없었다.
흩어진 퍼즐 조각 위를 덧칠해줄 사람은 아무도 없으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