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9화 〉 올림피아드.(2)
* * *
많은 스포츠 팬들이 경기에 패배하고 나서 가장 먼저 하는 행동이 뭐라고 생각하는가.
다양한 답이 나올 수 있겠지만, 정답은 오직 하나다.
바로 범인 찾기.
사실 이것은 비단 팬에게만 해당하는 이야기는 아니다.
감독이나 코치, 선수들조차 때때로 범인을 지목하곤 하니까.
그렇다면, 지금 내가 하는 행동은 무엇이라고 부르면 좋을까.
용의자 색출?
아직 경기가 시작도 되지 않았는데 문제를 일으킬 사람부터 찾는 건 너무한 처사가 아니냐고 생각될 수도 있겠지만, 어쩔 수 없다.
이번 올림피아드는 중요하니.
아, 팀원과의 불화를 걱정하는 거라면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
용의자 색출 작업은 내 마음속으로만 이뤄지는 행동에 불과하니 말이다.
아무리 나라도 경기 시작 전부터 분위기에 초를 칠 정도로 눈치 없는 사람은 아니다.
이쯤 되면 궁금해지겠지.
이번 올림피아드에서 부진한 성적을 거두는, 용의자가 대체 누구인가.
그 대상은 바로 라일라, 다니엘, 그리고 유감스럽게도 아이나다.
여러모로 골치아픈 일이 아닐 수 없다.
라일라와 다니엘은 대장전 다음으로 배점이 큰 경기들을 맡은 녀석들이라 승패와 큰 연관이 있고, 아이나 쪽은 배점이 낮아 승패와는 크게 관련이 없다지만… 나의 연인인 이상 신경이 쓰일 수밖에.
물론 아이나는 지금 서드 어빌리티, 정신 지배를 각성한 상황이니, 원작과는 이야기가 많이 달라지긴 했지만….
큰 기대는 하지 않는 게 좋겠지.
물론, 그녀가 좋은 성과를 거두는 쪽이 더 기쁘긴 할 것 같다.
* * *
어느덧 녹아웃 스테이지인 쿼터파이널의 날이 밝았다.
얼마나 이날을 고대해왔던가.
재미도 없는 그룹 스테이지의 경기를 매일 분석하고, 분석이 끝나면 뻔한 연습 경기만 계속 치르고, 지루해서 미칠 것만 같았다.
그래도 이제 그룹 스테이지의 경기를 볼 일은 없어 다행이네.
트리니티 아카데미입니다! 모두 큰 박수로 환영해주시길 바랍니다!
캐스터의 말과 함께, 무대로 향하는 문이 열렸다.
처음엔 강렬한 스포트라이트 때문에 앞도 잘 보이지 않았지만, 나의 안구도 차츰 그것에 적응해 나가기 시작했다.
…엄청난 숫자네.
이 넓은 경기장을 가득 채운 인파라니.
블레이드 아카데미 측도 입장합니다! 마찬가지로 큰 박수로 맞이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반대편의 문이 열리고 7명의 무리가 우리와 같은 무대에 섰다.
분석 영상에서 지겹도록 봐온 얼굴 그대로네.
우리는 가볍게 악수를 나눈 뒤, 각 팀에게 주어진 대기실로 흩어졌다.
“선봉은 내가 할게.”
“그래, 선봉은 너한테 맡길게. 자신 있지?”
“사무엘이 나오는 게 아니면 누구라도 이길 수 있어.”
“이기고 와라.”
이건 허세가 아니다.
확고한 근거를 가지고 말하는 것이지.
상대가 블레이드 아카데미로 확정이 났을 때부터, 우리는 밤낮을 지새워가며 연구에 몰두했다.
수많은 영상, 표본과 데이터들을 대조하여 어떤 사상력을 가지고 있고, 누구에게 불리하며, 어느 전략을 즐겨 사용하는지 등등….
그 결과, 블레이드 아카데미의 위협적인 상대라곤 둘 뿐이었다.
사무엘과 미나즈키.
사무엘은 애초에 대장이라 블라인드 매치에 등장할 수 없고, 미나즈키는 상성 상 내게 불리하니, 나와주면 오히려 나에게 이득이다.
양쪽 모두 준비가 되었다고 하네요. 아카데미 올림피아드의 쿼터파이널, 박성진 생도와 빅토르 이바노비치 생도의 경기, 지금 바로 만나 보시죠!
버림패인 빅토르를 보냈네.
교환비 때문에 기분이 나쁘지만… 어쩔 수 없지.
내가 하겠다고 나섰으니.
“다녀와.”
아이나가 가볍게 손을 흔들었다.
확실히, 아이나의 한 마디는 다른 그 어떤 응원보다 효과가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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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쿼터파이널은 시시하네.”
“블레이드 아카데미가 많이 크긴 했어도, 아직 우리한테는 안되지.”
솔직히 너무 쉽긴 했다.
선봉이었던 나를 필두로, 나머지 5명이 전부 승리를 챙겨왔으니까.
라일라와 다니엘을 용의자로 지목하긴 했어도, 고작 8강에서 고전할 정도로 약한 녀석들은 아니다.
“너무 자만하지 마라. 블레이드 아카데미가 약한 상대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고전할 만한 상대도 아니다. 졌으면 우리는 얼굴도 못 들고 다녔을 거다.”
“이겼으면 칭찬도 좀 해주셔야죠.”
“다음 상대가 누군지 생각해봐라. 온슬롯 스파이어가 아니면 제니스 아카데미인데, 이 둘이 블레이드 아카데미랑 비교될 수준이라고 생각하나?”
온슬롯 스파이어는 공격수 육성에 있어선 탑 3안에 들 정도로 뛰어난 아카데미 중 하나고, 제니스 아카데미는 신축 아카데미 중에선 가장 많은 히어로를 배출한 아카데미니, 블레이드 따위와 비교하긴 조금 섭하긴 하지.
다니엘이라고 그걸 모르진 않았기에, 그 이상 토를 다는 일은 없었다.
“일단 마지막 경기나 보도록 하죠.”
“세레나 교수님은 항상 로렌스 회장님 곁에 붙어 계시던데, 애착이 가는 제자인가요?
“애착까지는 아니고. 무리 중 알파니까 자연스레 눈이 많이 가는 거지. 기량도 확실히 뛰어나고.”
“나도 교수직을 오래 해왔지만, 로렌스만한 믿을맨은 보기 어렵긴 하다. 통솔력도 좋고, 개개인의 퍼포먼스도 월등하지. 사고를 많이 치는 성격도 아니고… 능글맞은 성격만 빼면, 뭐 하나 모자란 게 없는 생도야.”
무대의 마지막을 장식할 대장전이니 눈길이 많이 쏠리는 건 당연한 거지만, 그 대장이 로렌스기에 더욱 주목받는 것도 있다.
대부분의 아카데미물 학생회장이 그러하듯, 로렌스도 완벽초인 기질을 보유한 캐릭터니까.
나 또한 로렌스의 경기에 거는 기대가 크다.
과연 트리니티 아카데미 최고의 브레인은 어느 정도이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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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첫 대국이자, 우리의 마지막 대국이다.
다소 수수한 경기가 될 거 같아 아쉽군.
클라이막스는 화려한 게 좋은데.
그러니, 오프닝은 나이트로 시작한다.
그편이 관객들에겐 더 흥미로우니까.
할아버지께서 보면 자신의 조언을 잊은 것이냐며 분개하시겠지만, 아무래도 상관없다.
사람들은 e4로 시작하는 지루한 오프닝 따위 더 이상 원하지 않는다.
물론 퍼포머인 내가 e파일에서 옴짝달싹하지 않는 것부터가 매력적이지 않다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왕이라는 숙명을 가지고 태어난 이상, 어쩔 수 없는 노릇이다.
나, 로렌스 밴더럼은 그러한 존재니까.
때때로 이러한 이야기를 하면 사람들은 ‘스스로가 퀸이 되면 되는 것 아니냐’는 멍청한 질문을 하곤 하는데, 나는 누군가의 명을 받들어 발품이나 팔고 다니는 존재가 아니다.
퀸은 나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지, 어울리는 것이 아니란 말이다.
이런, 시답잖은 생각에 빠진 나머지 나이트를 몇 기 잃어버렸네.
상관없지.
나에겐 아직 체스피스가 많이 남아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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확실히 로렌스는 차원이 다른 레벨이긴 하네.
전략보단 전술의 천재라고 하는 게 맞겠지만, 뭐 어떤가.
천재라는 점은 명백한 사실인데.
“이 이상은 볼 필요도 없겠다.”
“그러게.”
아무리 그래도 대장전인데, 어느 정도의 접전은 이뤄지지 않을까 기대했건만, 그렇지 못했다.
로렌스가 시종일관 압도하고 있었으니까.
사실 로렌스의 성격을 잘 알고 있는 사람이라면, 각성자 간의 전투에 조예가 없더라도 진작 눈치챘을 것이다.
이건 그냥 명승부를 연출해내는 것에 불과하다고.
로렌스와 직접 겨뤄본 내 경험상 확실하다.
그녀는 상대의 깊이를 가늠하고 있을 뿐이다.
만약 진심이었다면 진작에 다른 병사들을 배치했겠지.
“보병, 기병, 궁수… 다양하기도 하네. 저걸 다 일일이 다루는 것도 엄청 성가실 것 같은데.”
“아무나 할 수 있는 건 절대 아니지. 폭격이 떨어지기도 전에 병사들 산개하는 거 봐봐.”
“그러면서 궁수로 견제하는 것도 계속 잊지 않고 있어. 풍향이랑 풍속 고려도 다 하고 있다는 이야기잖아.”
상대라지만 동정심이 드네.
저 녀석은 자기 나름대로 최고의 경기를 보여주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을 텐데 말이야.
“보아하니 저게 마지막 궤도 폭격일 것 같은데.”
“그러게, 벌써 15발 넘게 쐈잖아.”
“회장도 참 대단하네. 궤도 폭격이 못 피할 수준은 아니라지만, 회피와 병사 컨트롤을 동시에 하다니.”
사실 로렌스에겐 한국인의 피가 흐르는 게 아닐까?
저 멀티태스킹과 산개 능력, 허리 돌림은 스X크래프트라는 민속놀이로 단련된 한국인이라고밖에 볼 수 없는 움직임인데.
“사무엘의 주력기인 궤도 폭격이 봉쇄당했으니, 승부는 난 것 같군”
“그렇네요. 사실 상성 상 로렌스 회장님이 지는 게 말이 안 되긴 하죠. 로렌스의 소환수는 생체로 판정되지 않아서 사무엘의 흡수도 안 통하고요.”
사무엘 제너 생도가 기권하였습니다! 로렌스 밴더럼의 승리! 이것으로 트리니티 아카데미가 4강에 진출하는 모습입니다.
대단한데요. 완봉승이라니. 트리니티 아카데미가 전통의 강호라곤 해도, 이 정도로 깔끔하게 마무리 지을 줄은 몰랐습니다.
이 엔트리로 8강에서 떨어진다니, 있을 수 없는 이야기지.
모용린이랑 로렌스라는 든든한 캐리머신이 있는데.
물론 3명 이상이 트롤링을 시전했다면 이야기가 조금 달라졌겠지만, 다행스럽게도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문제는… 4강에선 실제로 그런 일이 일어난다는 거다.
과연, 내가 온슬롯 스파이어를 꺾을 수 있을까?
“왜 그렇게 떨떠름한 표정이야? 우리가 이겼잖아.”
“아무것도 아니야.”
“아, 다음 경기에서 이겨야 100만 달러 타 먹으니까?”
“그래, 맞아.”
올림피아드의 경기 당 배점은 다음과 같다.
S클래스에게 부여되는 배점은 각 5점.
U클래스에게 부여되는 배점은 각 10점.
대장에게 부여되는 배점은 15점.
총합 60점.
원작대로 전개가 흘러간다면, 4강에선 모용린과 로렌스만이 승리할 것이다.
즉, 총점 25점으로 패배한다는 소리.
하지만, 내가 승리하게 된다면, 30점으로 동률을 만들어낼 수 있다.
즉, 4강에서 떨어진다는 스토리를 뒤엎기 위해선, 나는 반드시 다음 경기에서 이겨야만 했다.
가능할지 모르겠네.
한숨만 푹푹 내쉬던 와중, 말랑말랑한 무언가가 날 덮쳤다.
“괜찮아. 넌 할 수 있어. 아니, 설령 너는 못하더라도… 우린 할 수 있어.”
달콤한 말도 좋았지만… 그녀가 먼저 이런 것을 허락해주는 일은 드물었기에, 모처럼 이 감촉을 즐기기로 했다.
“나도 30년 전에는 저랬었던 시절이 있었지.”
“세자르 교수님은 그때 코스모스 특전대에서 임무 수행 중이셨잖아요. 여자를 만나보신 적은 있으세요?”
“닥치게. 내가 그렇다면 그런 거야.”
“나도 그리폰 교도소에 수감되지 않았으면 저러고 있었을까?”
하마터면 정신줄을 놓을 뻔했네.
세레나의 기습 공격은 예측하기 너무 어렵다.
이 감동적인 순간에 저렇게 초를 치는 것도 재능이라면 재능이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