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8화 〉 올림피아드.(1)
* * *
8월의 풀죽은 열기가 어쩌느니 마느니 했던 말은 취소다.
트리니티 아카데미의 쾌적한 환경이 날 세상 물정에 어두운 인간으로 만들었군.
“더워 죽겠다.”
“익숙해 져야돼. 나도 처음 올 때는 힘들었어.”
프라하의 여름은 불쾌했다.
단순히 덥기만 했다면 이런 불평불만이 나오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이곳 날씨는 흡사 장마가 막 끝난 뒤의 여름 같았던 탓에, 모두가 힘든 기색을 내비치고 있었다.
교수님들, 로렌스, 아이나만 제외하고.
“고작 이 정도로 힘들어하면 어떻게 해? 나중에 너희 사막이나 정글 같은 곳에도 파견 나가야 하는데.”
“그 정도면 양반이다.”
“세자르 교수님은 코스모스 특임대 출신이시잖아요. 거기는 누가 가도 힘들걸요.”
“알프레드가 코스모스 특임대에서 일해보고 싶다 하지 않았나?”
“그랬었지. 근데 지금은 아니야.”
알프레드의 빠른 변심에 다들 웃음을 터뜨렸다.
세자르 교수는 아쉽다는 듯 입맛만 다셨지만.
“뭐가 됐든 일단 스트라흐 스타디움부터 가지. 첫 경기가 시작하기 전에 도착할 수 있어 다행이군.”
“거기는 여기서 얼마나 멀어요?”
“그다지 멀지 않다.”
“설마 걸어가자고 하시는 건 아니죠?”
“당연히 아니지. 가깝다고 해도 걸어갈 정도는 아니니까.”
검색해보니, 프라하 국제 공항에서 스트라흐 스타디움까지는 15㎞ 정도의 거리였다.
확실히 먼 거리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걸어갈 수준은 아니네.
“왜, 걸어가고 싶나?”
“아뇨.”
“실없긴.”
* * *
창밖으로 보이는 프라하의 풍경은 내게 익숙함을 전해주고 있었다.
미래적인 분위기를 띠는 대부분의 다른 도시들과 달리, 이 도시는 여전히 과거 유럽의 모습을 꽤 많이 간직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마음에 드는걸.
“너, 여기 와본 적 있어?”
“아니? 한 번도.”
“근데, 편안해 보이는데? 고향이라도 돌아온 것처럼.”
“데자뷰라고 해야 하나? 뭔가 익숙하네.”
내 대답을 들은 아이나가 미묘한 표정을 짓는다.
이상하다고 느낄 법도 하지.
일반적으로 익숙하다 느낄 이유가 없는 장소를 익숙해하고 있으니 말이다.
그러할 이유도 전혀 없고.
“너, 매번 느끼는 거지만, 되게 옛날 사람 같아. 취향도 늙은이 취향이고.”
“내가 옛날 것들을 좋아하긴 하지.”
“옛 것들을 좋아한다 해서 반드시 늙은이 취향인 건 아니지. 레트로 감성이라는 것도 있으니까.”
갑자기 우리들의 대화에 끼어든 것은 로렌스였다.
내 뒷자리는 언제 온 거람.
“복고라는 개념은 분명히 존재하지만, 얘는 단순히 복고풍을 좋아한다는 말로는 설명하기 어려울 정도예요. 저도 보수적이고 옛 문화를 중시하는 집안 출신이지만, 얘는 정말 과거에서 온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요즘 문화에 대해 너무 모른다니까요.”
“그래서 클로에 이사장님이랑 오스카 학장님이 편애하시나? 자기와 동질감을 느끼는 거지.”
로렌스의 한 마디에, 교수들은 모두 이를 악물고 웃음을 참기 시작했다.
그 세레나조차도 말이다.
오스카와 클로에도 공적인 자리에선 무서운 면이 있나 보네.
‘사회생활 좆까’라는 마인드셋을 가진 세레나가 눈치를 살피게 만들다니.
“난 옛날 것들이 좋아. 내겐 그쪽이 익숙하기도 하고. 특히 여기는 과거 유럽의 모습이 많이 남아있어서 좋아.”
“틀린 말은 아니지만, 과거 유럽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다는 점은 중부 유럽 국가 대부분의 특징인데?”
“그런가요? 저는 체코가 처음 와보는 중부 유럽이라 잘 몰랐는데, 좋네요.”
“슬로바키아도 체코 못지않게 멋진 곳이야. 나중에 한번 꼭 가봐.”
아, 로렌스는 슬로바키아 출신이었지.
애증의 관계인 체코에 관심을 보이고 있으니, 자기 나라에 대해서도 어필을 하고 싶은 모양이었다.
“슬로바키아는 뭐가 유명한데요?”
“여러 개의 성과 자연경관이 대표적이지. 스키를 탈 수 있는 설산도 많이 있고, 온천으로도 유명해. 그 외에도 계곡이나 폭포를 비롯한 관광지도 제법 있고.”
뭔가 익숙한데.
아, 그래.
일본의 홋카이도와 스코틀랜드의 하이랜드 지방을 섞어놓은 것 같네.
…전혀 메리트가 없군.
일본 쪽이라면 아이나라는 연줄이, 스코틀랜드라면 프리실라라는 연줄이 있는 마당에, 굳이 별다른 인상도 없는 슬로바키아에 갈 이유가 뭐가 있겠는가.
“별 관심 없구나?”
“그런 건 아니고, 슬로바키아는 인상이 적은 국가다 보니, 아무래도 별로 떠오르는 게 없어서요.”
“그렇다면 말고.”
나는 재미라곤 찾아볼 수 없는 알프레드라도 이 자리에 있음에 감사해야만 했다.
그가 없었더라면 나는 누구와도 대화를 나눌 수 없었을 테니.
아이나는 출발 전의 일로 여전히 약간 삐져있었기에 섣불리 말을 걸기엔 눈치가 보였고, 로렌스도 내 시큰둥한 반응 탓인지 기분이 썩 좋아 보이진 않았다.
그렇다고 세레나와 대화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녀의 페이스에 말리게 되는 것만큼 피곤한 일은 없으니까.
결국, 내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곤, 바른 생활 사나이 알프레드의 지루한 이야기에 맞장구를 쳐주며, 아이나의 기분이 풀리기를 기도하는 것뿐이었다.
* * *
“도착했다. 내리자.”
여기가 아카데미 올림피아드가 열리는 곳이라고?
원작에서도 스트라흐 스타디움이 넓은 곳이라고 묘사되긴 했었지만, 난 기껏해야 트리니티 스타디움보다 약간 큰 규모일 것이라 생각했다.
헌데, 이건 트리니티 스타디움과도 궤를 달리하는 위용을 자랑했다.
살면서 본 건물 중에 가장 큰 건물 같은데.
“뭘 그렇게 넋 놓고 바라보고 있나? 어서 들어가지 않고.”
“아, 네.”
스트라흐 스타디움의 실내는 바깥에서 본 것보다도 훨씬 넓게 느껴졌다.
아니, 넓다는 단어 따위로 표현하기엔 부족했다.
보통 드넓은 평원 같은 곳을 묘사할 때나 쓸법한, 광활하다는 말을 사용해야 어울릴 정도였으니.
“여기 진짜 넓네. 트리니티 스타디움보다 훨씬 큰데?”
“전 세계에서 가장 큰 경기장이니까.”
“아, 박성진은 스트라흐 스타디움에 처음 와보는 거지?”
트리니티 스타디움이 여러 개 들어갈 정도의 넓이라.
그나마 중간고사 공개 토너먼트라도 경험해본 게 다행이네.
만일 내 첫 데뷔 무대가 이곳이었다면 난 도망쳐버렸을 것이다.
“오늘 경기는 어떤 아카데미끼리 맞붙는다고 했지?”
“크로니클과 이스마엘.”
“이스마엘이 이기겠네.”
VIP석에 착석한 우리는 오늘 치러질 경기에 대한 의견을 나누기 시작했다.
나만을 제외하고.
유명하지 않은 아카데미는 작중에서 별로 언급이 되지 않으니, 어느 아카데미가 언더독 중 강호고, 어느 사람이 특출나게 강한지 나는 알 길이 없다.
그래서, 나는 잠자코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기만 했다.
“올림피아드는 확실히 전략이 중요해. 첫 경기만 보아도 그렇지. 페이스 조절과 기선 제압을 위해 강력한 카드를 투입할 것이냐. 아니면 버림패를 넣어서 뒷심을 줄 것이냐.”
“서로의 선택이 엇갈릴 가능성이 크다고 봐요. 도전자 입장인 크로니클은 하나의 카드라도 아끼고 싶을 테니, 버림패를 내겠죠. 상대적으로 여유로운 이스마엘은 기선 제압을 위해서 어느 정도는 저력 있는 생도가 나올 거 같고요.”
“아마도 그렇겠지.”
한참 첫 경기에 관한 추측이 오가던 도중, 돌연 세자르 교수가 내 쪽으로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박성진 생도는 어떻게 생각하나.”
“저는 양측 아카데미의 전력이 어떤지 잘 몰라서 뭐라 못하겠는데요.”
“그냥 전술에 관해서만 설명해도 괜찮으니 말해 보도록. 정 그것도 못 하겠다면, 촉이 오는 쪽을 짚기만 해도 괜찮아. 그냥 자네의 생각이 궁금할 뿐이니까.”
나의 생각이라.
다전제에서 첫 경기가 중요한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서로의 경기력이 엇비슷하다는 전제가 깔려 있을 때 하는 이야기지.
인재풀이 널널한 상위권 아카데미라면 모를까, 엔트리 구성조차 빡빡한 중하위권 아카데미라면 개개인의 경기력의 차이도 들쑥날쑥할 것이다.
그렇다면, 답은 뻔하다.
“상황에 따라 다르지만, 여기서는 버림패를 쓰는 쪽이 좋다고 생각합니다. 기선 제압이 중요한 건 사실이지만, 상대적으로 강한 생도가 적은 하위권 아카데미들은 최대한 카드를 아껴야 하니까요. 고작 기선 제압 좀 하겠다고 배점이 높은 경기에 도박수를 던지는 걸 긍정적으로 볼 사람은 역배에 거는 사람밖에 없어요.”
“좋은 대답이군. 전략에 대해 많이 고민한 티가 나.”
고민이라고 할 게 있나?
스포츠 경기만 떴다 하면 해당 팀 감독과 코치진들보다 열심히 토론하는 게 현대 사회의 남성인데, 그냥 익숙한 일이지 싶다.
“칭찬 감사합니다.”
“하지만 꼭 모든 게 예상대로 흘러가리라는 법은 없지. 실전은 이론과 많이 다르거든.”
“저는 실전에서 더 강한 쪽인데요.”
“그건 경기의 결과가 말해주겠지.”
* * *
대장전이었던 만큼 화끈한 경기였습니다!
역시 라시드는 강했습니다. 이로써 레오폴드를 제압한 라시드가 속한 이스마엘 아카데미 쪽이 올라가는군요!
경기는 꽤 재미있었다.
원래 세상에서 제일 재밌는 게 좆밥 싸움 아닌가.
어떻게든 이겨 보겠다고 몸을 비틀어대는 모습은 좆밥이 아니더라도 웃기기 마련인데, 심지어 그 대상이 좆밥이면 정말 한없이 재밌을 수밖에 없지.
그래도 경기의 복기와 분석에는 제법 진지하게 임했다.
각 팀이 어떤 전략을 들고나왔는지는 상당히 중요했기 때문이다.
“크로니클의 판단 미스다. 블라인드 매치인 첫 경기에 너무 과한 투자를 했어. 교환비가 최악이었다.”
“3차전에 제니퍼를 투입한 판단도 구려. 그냥 지겠다는 거나 다름없는 선택이었어.”
“그래도 주나이드가 열심히 삽질해준 덕에 크로니클도 기회가 없던 건 아니었는데 말이지.”
“우리라고 크로니클 꼴이 나지 말라는 법은 없어. 남은 일정 동안은 빡세게 연습해야 해.”
올림피아드 기간 내로 연습 경기를 해줄 상대를 찾는 것도 일일 텐데.
교수님들도 여러모로 준비할 게 많겠네.
“근데, 웬일로 박성진 네가 이렇게 의욕이 넘치냐? 맨날 모르겠다. 귀찮다. 이 두 개를 입에 달고 살았잖아.”
“100만 달러.”
4음절로 구성된 이 단어만큼 나의 마음을 간결하게 대변해주는 단어도 없을 것이다.
실제로도 이 한 마디에, 모두가 납득했다는 듯 조용히 고개만 끄덕였고.
역시 돈이 전부는 아니지만 그만한 게 또 없지.
“근데, 그렇게 돈에 집착하는 이유라도 있니?”
“노후 대비는 일찍 해둘수록 좋대.”
옛말에 이런 말이 있다.
‘전쟁을 하려면 세 가지가 필요하다. 돈, 돈, 그리고 더 많은 돈이다.’
그래, 내가 큰 돈을 필요로 하는 데엔 특별한 이유가 있는 것이 아니다.
미래에 벌어질 빌런들과의 전쟁에 대비하기 위함이지.
그러니, 노후 대비라는 말도 틀린 소리는 아닌 셈이다.
일단 전쟁에서 이겨서 살아남아야 늙든 말든 할 것 아닌가.
죽으면 늙을 수도 없다.
물론 다른 사람들은 나의 이러한 뜻을 이해할 리가 없으니, 그냥 그러려니 하고 가볍게 넘겼다.
아이나만은 제외하고 말이다.
어째서인지, 그녀는 얼굴을 붉히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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