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7화 〉 원류회귀.(3)
* * *
“조금 전은 훌륭했어. 미흡한 점도 보이지만, 그 정도면 훌륭해. 넌 심리전을 할 때 가장 돋보이는 편이니, 최대한 그런 방향으로 유도하는 게 유리…”
…옆에서 쉴새 없이 재잘거리고 있는 이 사람은, 신임 교수님인 세레나다.
뜬금없이 세레나가 여기 왜 있는가 하면, 그녀가 이번 올림피아드에서 생도를 지휘·훈련할 지도 교수 중 한 명으로 발탁됐기 때문이다.
내각에서는 신임 교수가 맡기엔 적합하지 않은 자리라며 많은 반대 의견이 나왔지만, 교수진 중에선 세레나의 고집을 꺾을 만한 사람도 없었거니와, 이사장인 클로에도 그녀를 적극적으로 지지해준 터라, 발탁될 수밖에 없었다.
그것을 발탁이라고 해야 할지는 잘 모르겠지만.
“왜 자꾸 저를 괴롭히려고 하세요.”
“그야, 내가 지도 교수니까?”
무슨 이유인지는 모르겠지만, 최근 세레나는 날 괴롭히지 못해 안달이 난 사람처럼 굴었다.
원래도 이따금 내게 자기 제자가 되라는 유혹을 했지만, 이 정도로 심하진 않았었다.
어느 정도로 심해졌는가 하면, 올림피아드 선출 대표 명단이 공개된 이후, 하루도 빠짐없이 나를 비롯한 다른 선출 대표들을 쫓아다닐 정도였다.
단순히 날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부담스러운데, 자꾸 이런저런 참견까지 해대니, 정신이 혼미해지네.
“이제 슬슬 다른 생도들한테 가실 때도 되지 않으셨어요?”
“슬슬 그럴 때가 되긴 했네. 혹시나 내 도움이 필요하면 찾아오렴.”
“그럴 일은 없다니까요.”
“나중에 내 마음이 바뀌어도 후회하진 마?”
그럴 일은 아마 절대 없지 싶은데.
물론, 누구 말마따나 세상에 절대라는 건 없다.
그래도 여부가 매우 불확실하다는 것쯤은 파악할 수 있다.
나와 세레나의 스타일은 서로 양극단에 위치해 있으니까.
굳이 따지면 전략가 타입에 가까운 내가, 압도적인 피지컬로 찍어 누르는 타입의 세레나에게 조언을 구할 일이 생길 일이 뭐가 있겠는가.
“아무튼, 안녕히 가세요.”
“그래, 준비 열심히 하고.”
세레나가 다른 훈련실로 떠나자, 알프레드는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으로 내게 다가왔다.
“대체 넌 세레나 교수님을 쫓아내는 이유가 뭐야?”
“별 도움이 안 되니까.”
“네가 그걸 어떻게 알아. 야, 세레나 교수님 같은 사람이 남한테 관심 가지는 건 흔치 않은 기회야. 지금 당장은 도움이 안 될지 몰라도, 언제 도움이 될지 모른다고. 적어도 좋은 관계를 유지하려고는 해야지.”
“그런가?”
확실히 너무 매몰차게 대하는 감이 없지 않아 있기는 하다.
나야 세레나가 원작에 등장하지 않는 캐릭터기 때문에 등한시하는 것뿐이지만.
“다른 사람들은 세레나 교수님 눈에 들고 싶어서 갖은 똥꼬쇼를 다 해도, 세레나 교수님은 어지간해서 필요 이상의 관심은 주시지 않아. 마음에 들어 하는 생도가 한 손으로 꼽을 정도로 적다고.”
맞아.
이 점은 다소 놀란 점 중에 하나다.
세레나는 다른 생도들에게 굉장히 인기가 많다는 점.
물론 과거에 빌런이었던 사람인 만큼, 모든 교수 중 최고의 인기를 구가하고 있다고 할 정도는 아니지만, 그래도 신임 교수치곤 의아할 정도로 많은 생도의 지지를 받는 교수 중 하나였다.
“신기하긴 해. 세레나 교수님이 그렇게 인기가 많다는 게.”
“난 네가 더 신기해. 어떻게 세레나 교수님한테 그렇게까지 무관심할 수 있냐? 교수치고 되게 젊어서 이야기도 잘 통하시지. 얼굴도 예쁘시고, 성격도 좋고. 다른 생도들 배려도 많이 해주시는데.”
“나중에 찾아 뵐 일이 있으면 어련히 잘 찾아가겠지. 뭐 어때.”
“지금 잘하라고. 나중에 가면 늦는다.”
음, 이렇게까지 말하니 내가 생각을 조금 바꿔야 할 필요성은 느낀다.
알프레드는 어지간해선 남에게 강력하게 의견을 피력하는 캐릭터가 아니니까.
그렇다고 터무니 없는 주장을 하는 것도 아니며, 근거도 충분하고.
“그래, 듣고 보니 네 말이 맞는 거 같다.”
“근데 세레나 교수님은 이미 떠나셨는데, 어떻게 다시 불러오려고?”
“지금이라도 찾아가야지.”
“잘 생각했다.”
* * *
세레나를 찾는 데엔 그다지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나의 예상대로, 로렌스의 훈련실 앞에 서 있었으니.
“세레나 교수님?”
“왜?”
“지금까지 죄송했습니다.”
“왜 갑자기 사과하는 거야? 뜬금없게.”
내가 생각한 것과 전혀 다른 대답이라 조금 당황스럽다.
그간 내가 세레나를 대한 태도를 보면 무례하다고 느낄 만도 할 텐데.
“그동안 교수님한테 너무 매몰차게 대한 것 같아서요. 다 저를 위해서 한 행동인데.”
“난 그런 거 신경 안 쓰니 걱정 마.”
“불편하다고 생각한 적 없으세요?”
“불편할 게 뭐가 있어? 난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행동할 뿐인데. 네가 나한테 오지 말라고 해서 내가 널 찾아가지 않은 적이 한 번이라도 있어? 그런 거야. 나는 가고 싶으면 가고, 가기 싫으면 가지 않아.”
이 세계에는 마이페이스적인 기질을 가진 사람이 수두룩하다지만, 세레나는 그중에서도 정말 독보적인 것 같다.
생각하는 게 완전히 다르네.
“그럼, 지금 제가 도와달라고 요청해도, 하기 싫으니 하지 않으실 생각인가요?”
“유망한 제자의 체면을 봐서, 한 번 정도는 무례를 용서하고 도와줄 수 있지.”
“아까는 불편하다고 생각하지 않으셨다면서요.”
“용서해주는 것도 내 마음이잖아? 불편한 거랑은 상관이 없어.”
참 독특한 캐릭터다.
어디로 튈지 알 수 없는.
“그럼 가볼까?”
“가시죠. 교수님.”
“로렌스, 난 간다?”
“세레나 교수님을 뺏긴 것 같아 섭섭한데요? 다음엔 꼭 저한테 와주실 거라 믿어요.”
훈련을 마치고 나온 로렌스가 과장된 몸짓과 표정으로 말했다.
속이 새까만 로렌스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행동이네.
식도를 타고 올라오는 헛구역질을 간신히 참아내고, 다른 훈련실로 향했다.
“그래서, 무슨 도움이 필요해서 날 불렀니?”
“별 건 아니고, 간단한 문제에요. 어떻게 하면 더 강해질 수 있을까요?”
“너는 어렵게 생각하는 게 문제라고 봐. 네 강점은 심리전이잖아? 그렇다면, 어떻게 하면 심리적 우위를 쉽게 가져갈 수 있을까?”
“상대방이 심리적으로 압박감을 느끼게 해야겠죠.”
“바로 그거야.”
뭐가 바로 그거라는 거야.
너무 당연한 이야기잖아.
“잘 이해가 안 되는데요.”
“간단해. 상대를 심리적으로 위축시키게 만드는 가장 쉬운 방법은, 상대를 빡돌게 하는 거야. 우리가 도발을 하는 이유도 비슷한 맥락이지.”
“그럼, 뭐 상대한테 욕이라도 하라는 겁니까?”
“아니, 이런 의미야. 너는 너무 큰 그림만 그려. 여태까진 사람들이 네가 강한지 잘 몰랐으니 네 전략에 쉽게 당해준 것도 있었지만, 이제 사람들이 너의 강함과 전략을 경계하기 시작했기 때문에, 쉽게 네 전략에 당해주지 않는다고. 그런 상황에서 아무런 토대 없이 완전한 승리만을 노리는, 네 전략이 잘 통하겠어?”
반박할 수 없군.
내가 로렌스에게 진 이유와도 일맥상통한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한다는 말입니까?”
“처음부터 완전한 승리를 노리지 말고, 상대방의 화를 돋게 만드는 전략이 주가 되어야지.”
“어떤 예시가 있을까요.”
“일방적으로 상대를 괴롭힐 수 있는, 셋업 위주 플레이 같은거? 특히나 너는 미래를 보는 사상력도, 여러 가지 오브젝트를 설치하기에 좋은 사상력도 있으니까. 셋업 상황을 만들기에 더욱 유리하겠지.”
셋업 플레이라.
대충 어떤 식으로 방향을 잡아야 할지 감을 잡았다.
“감사합니다. 많은 도움이 되었습니다.”
“아이디어가 떠올랐구나?”
“네.”
“그럼, 이제 어떻게 활용하는지 한 번 볼까? 얼른 시작해보자고. 나도 궁금해졌으니까.”
세레나는 나의 대답도 듣지 않은 채 곧바로 훈련실의 설정을 만지기 시작했다.
이게 아닌데.
거절의 말이 입에서 나오려는 순간
[카운트 다운, 5, 4, 3, 2, 1, 0, 훈련이 시작되었습니다.]
훈련은 이미 시작되었다.
“도망치지 마! 맞서 싸워!”
“제가 바란 도움은 이런 게 아닌데….”
“난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할 거라고 했잖아!”
아무래도 난 세레나에 대해 몰라도 너무 몰랐던 모양이다.
* * *
난 스스로가 제법 성실한 편이라고 생각했는데, 실상은 전혀 그렇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성실하기로 유명한 알프레드와 아이나 사이에서 부대끼며 지내며 느낀 점이니, 확실하리라.
이 둘은 정말 노력의 수준이 달랐다.
최소한의 생리 활동을 제외하면, 거의 모든 시간을 다 연습에만 투자하고 있었으니.
물론, 나도 아카데미에 입학하기 전이나, 니힐리스 밑에서 가르침을 받을 적에는 저 정도로 노력하긴 했다만, 그것은 ‘반드시 해야만 하는 상황’에 놓여있었으니 그런 것에 불과했다.
디폴트 값 자체가 저 강도는 아니라는 말이다.
하여간 지독한 녀석들이야.
뭐, 그래도 마냥 나쁜 점만 있던 것은 아니다.
내게도 많은 도움이 되었으니까.
그래도, 힘들었다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다.
“힘들어 죽을 거 같아.”
“너 때문에 다른 사람들은 더 힘들다. 그러게 학장님이랑 그런 내기는 왜 한 거야?”
“재밌으니까.”
“자신은 있냐? 우리 오늘 출국하고 나면 연습할 시간 얼마 없어.”
자신?
당연히 있지.
적어도 내 상대는 전부 이길 자신이 있다.
“당연하지.”
“그래, 그렇다니 다행이네.”
“어차피, 주사위는 이미 던져졌어.”
“말만 번지르르하게 하지 말고. 네 주사위 놀음에 몇 명이 빨려 들어왔는데.”
“슬슬 나가자.”
정문 밖으로 나가자, 눈부실 정도로 맹렬히 타오르는 태양이 나와 알프레드를 맞이했다.
다만, 우리를 반긴 것은 태양만은 아니었다.
빈센트를 비롯한 교수진.
S, U클래스의 생도들.
클로에와 오스카.
마지막으로 이번 올림피아드의 참가자들.
꽤 많은 사람이 우릴 기다리고 있었다.
“빨리 좀 오면 안 되냐? 무슨 계집애처럼 분칠이라도 하고 왔어?”
“곧 자기 백만장자 될 거라고, 급이 떨어지는 애들이랑 겸상하기 싫다. 이거지.”
“카펫이라도 깔아줘야 했나?”
“그러네, 아카데미가 잘못했네.”
이제 이 빈정거림도 익숙하다.
하도 오래 당해와서.
“자, 그럼 인원들이 모두 모였네요. 다들 알아서 잘하던 생도들이니, 이번 올림피아드에서도 좋은 성과를 거둘 수 있으리라 믿어요.”
“이사장님은 걱정 안 되세요?”
“오스카 학장과 박성진 생도가 한 내기 말인가요?”
모두가 나지막이 고개를 끄덕였다.
심지어, 교수진조차도.
“그런 승부사 기질과 독창적인 발상이 박성진 생도의 재밌는 점이죠. 애초에, 그 개성을 빼면 박성진 생도에게 특별히 남는 점도 없지 않나요?”
“속이 새까맣다?”
“쓰레기다.”
“여자를 밝힌다!”
얘들은 무슨 날 인간말종 취급하네.
내가 모범적인 사람이라는 건 아니지만, 그렇게 욕먹을 정도로 나쁜 사람도 아니란 말이다.
애초에 속이 새까맣다는 건 로렌스에게나 더 어울리는 말이고.
“그게 무슨 소리죠?”
“이미 아이나랑 사귀고 있으면서, 프리실라랑 즐기는 사이…”
화들짝 놀란 프리실라가 베아트릭스의 입을 가린다.
하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
클로에는 호기심 가득한 눈동자로 다음에 이어질 말에 기대감을 드러내고 있었다.
야릇한 기류도 사람들 사이에서 형성되고 있었고.
“재밌는 이야기네요. 그런 뒷 이야기 같은 것도 있을 줄은.”
“어차피 저희 다 알아요.”
“개인의 사생활에까지 개입할 생각은 없지만… 박성진 생도는 이번 내기에서 이기지 못한다면 저와 면담할 시간이 길어지겠는걸요.”
“외부의 시선을 너무 신경 쓰지 말게. 어차피 나도 젊었을 적엔 많이 놀았어.”
“그래, 네 어장에는 물고기가 많기로 유명했지.”
제일 고지식한 면이 강한 오스카가 내 쉴드를 쳐주다니.
의외다.
“뭐가 됐던, 자네는 올림피아드에만 신경 쓰게. 나야 몇십 년째 보는 올림피아드니, 지루한 연례행사보단 젊은 놈들의 치정 싸움에 더 흥미가 동하는 건 사실이지만, 자네는 내가 아니지 않은가.”
“네, 프라하에서 뵙겠습니다.”
“프라하에서 볼지, 이사장실에서 볼지는 자네의 손에만 달린 게 아니야. 다른 생도들의 손에 달렸네. 정 박성진 생도의 머리가 깨지는 게 보고 싶다면, 일부러 기권하는 것도 나쁘진 않아 보이는군.”
“재밌는 발상이지만, 그러기엔 100만 달러가 너무 아깝네요.”
실리주의자인 로렌스에겐 그다지 매력적인 제안이 아니겠지만… 다른 사람들의 생각이 어떨지는 모른다.
올림피아드 입상권이라는 건 단순히 노력한다고 되는 문제가 아니니까.
“그럼 됐네. 슬슬 이륙할 시간이니, 다들 가보게.”
“기대한다. 얘들아.”
“입상해라. 꼭. 그래야 너희들한테 뜯어낼 게 생기지.”
“한 가지 확실한 점은 있네. 이번에 입상권 안에 못 들면, 박성진은 헤엄쳐서 아이니르까지 와야 할 거 같다는 거.”
“맛있는 거 사와야 해! 멋진 기념품도 잊지 말고!”
이래서 내가 베아트릭스를 미워할 수 없는 거다.
바보 같지만, 악의라곤 찾아볼 수 없는 저 순수한 모습.
괜히 주인공이 아니란 말이지.
“그럼, 모쪼록 좋은 여행 되시길.”
클로에의 배웅을 마지막으로, 우리는 프라하행 비행기에 탑승했다.
과연 프라하의 마지막 날엔 어떤 식사가 날 기다리고 있을까.
호화로운 만찬을 들게 될지, 제삿밥을 자시게 될지….
* * *
“나도 살을 조금 찌워야 하나? 요즘 살이 너무 많이 빠진 거 같아.”
“그럼 좋지. 넌 너무 말랐잖아.”
아이나가 자신의 몸을 훑으며 말했다.
물론 아이나의 슬렌더한 몸매도 충분히 매력적이다.
하지만, 굳이 따지자면 나는 약간 건강미 있어 보이는 몸매를 더 선호하는지라.
본인이 몸매를 바꿀 의사가 있다면, 나야 얼마든지 환영이다.
“아, 그런 취향이라서 아까 베아트릭스만 보고 있던 거였구나. 그것도 시선이 머무르는 곳이 정해져 있던데. 어쩐지 평소에도 친하게 지내더라.”
당했다.
그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아이나 또한 잘 걸렸다는 듯, 살벌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뭐, 그래.
내릴 때까진 바가지 긁는 소리를 줄창 들어야겠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