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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6화 〉 원류회귀.(2) (76/173)

〈 76화 〉 원류회귀.(2)

* * *

내가 기억하는 바로는, 이번 올림피아드의 테마는 바다다.

발을 디딜 수 있는 작은 암초 몇 개를 제외하면, 짜디 짠 소금물 뿐인, 그런 환경.

원작에서 트리니티 아카데미가 고전을 면치 못하는 데엔, 이 환경의 영향도 상당히 크다.

알프레드를 제외한 나머지 녀석들에게 대부분 불리한 환경이니까.

뭐, 주최 측에서도 그걸 알고 이렇게 선정한 것임이 틀림없다.

걸출한 이동 능력이 없다면 고립될 수밖에 없는 환경이니 말이다.

하지만, 이젠 이야기가 다르지.

선출 인원이 나니까.

“확실히 박성진한테 좋은 환경이긴 하네.”

“너무 띄워주지 마. 버릇 나빠져.”

“네가 제일 좋아해 놓고선 무슨….”

“나만이 그럴 자격을 가지고 있어.”

알프레드가 헛구역질하는 시늉을 했다.

내가 들어도 조금 오글거리긴 해.

몇 달 전의 아이나에게선 찾아볼 수 없을 장면이니까.

하지만, 난 그것을 기꺼이 용서해줄 수 있다.

내가 아량이 넓어서가 아니고, 아이나가 그만큼 귀여우니까.

“미친 새끼들….”

“맞아. 나도 요즘 느끼고 있어. 내가 이상해졌다고.”

“네가 이상할 게 뭐가 있어.”

“나답지 않게, 멍청한 사람을 여러 번 기다려주고 있는 거.”

맥락상 보나마나 멍청한 사람이라는 것은 나를 이야기하는 것일 테고.

기다리고 있다는 것은 뭘 기다리고 있다는 것인지 잘 모르겠다.

딱히 그녀를 기다리게 만든 적 따윈 없었는데.

“됐어. 어차피 네가 그걸 알아차릴 정도로 머리가 좋았다면, 오히려 널 싫어했을 거야. 난 어리숙한 네가 좋아.”

“저렇게까지 힌트를 줘도 못 받아먹는 놈이 있다니….”

‘나도 아예 멍청한 캐릭터로 밀고 나가야 하나’라며 알프레드가 중얼거렸다.

개의치 않는다.

나는 내가 멍청하다는 사실을 부정할 생각도 없거니와, 그 사실을 인정해봤자, 너희들은 그 병신에게 진 놈이라는 사실밖에 더 되지 않거든.

“여기 있었구나? 박성진.”

나를 부르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리자, 그곳에는 우뚝 솟은 두 개의 거대한 산봉우리 옆으로, 타오르는 불의 강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올 것이 왔구나.

커다란 가슴에 염발(??)을 지닌 사람이 누구밖에 더 있겠는가.

학생회장 로렌스뿐이다.

“그때 일은 죄송합니다.”

“아니, 난 널 문책하러 온 게 아니야.”

“그럼 무슨 일로?”

“자신감의 근거가 궁금해졌어. 물론 너의 실력 정도야 이미 중간고사에서 봤지만, 그때보다 훨씬 강해졌다고 들었거든. 과연 어느 정도인가, 직접 확인해보고 싶네.”

이건 아닌데.

내가 전에 비해 훨씬 강해진 건 사실이지만, 로렌스와 비견되기엔 한참 모자라다.

으레 그렇듯, 학생회장은 최강자에게 주어지는 자리니까.

괜히 아카데미 내에서 유일하게 교수와 비빌 수 있는 사람으로 평가받는 게 아니다.

곱게 꼬리를 말고 빠지는 게 상책이다.

“사양은 사양할게. 자, 어서 들어가자.”

좆됐다.

* * *

로렌스는 ‘붉은 군단장’이라는 이명으로 더 유명하다.

이러한 이명이 붙게 된 이유는, 그녀의 퍼스트 어빌리티가 붉은색 사병을 소환하는, 소환계 각성자기 때문이다.

소환된 사병 하나하나의 전투력은 별 볼일이 없긴 하다만… 문제는 그것이 아니다.

나머지 사상력들이 퍼스트 어빌리티와 시너지가 아주 잘 맞물리는 능력들 뿐이라.

“그래… 처음은 10기 정도로 시작해볼까?”

로렌스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창과 방패를 든 병사들이 생겨났다.

그리고, 엄청난 빠르기로 내게 전진한다.

이 모습만 본다면, 아까 내가 말했던, ‘소환된 사병 하나하나의 전투력은 별 볼일이 없다’라는 이야기와 상충하는 것이 아닌가 싶기도 할 것이다.

그러나, 나는 결코 틀린 말을 하지 않았다.

그야, 저 속도는 병사 자체의 것이 아니라, 로렌스의 세컨드 어빌리티, 염력의 조종에 의해 나오는 속도니까.

그나마 다행인 점이라면, 로렌스의 염력은 일반적으로 우리가 생각하는 사이킥 능력자가 아니라, 자신의 사병에만 적용이 된다는 점 정도.

그래도 성가신 사상력임은 부정할 수 없다.

“제법 빠르네?”

…이렇게 말이다.

나는 스스로를 대단히 여기지는 않는다.

그렇다고, 많이 낮춰보지도 않는다.

그럭저럭 강한 축에 속한다고 생각하는 정도?

그 근거로, S클래스 내에서도 내 마나글레이브를 쉽게 피하거나, 받아내는 녀석은 거의 없다.

그런데, 이 사람은 아니, 이것은 내 검을 간단히 피해냈다.

아니, 하다못해 본인이 피한 것이라면 또 몰라.

내 마나글레이브를 아무렇지 않게 회피한 건 로렌스의 병사였다!

병사였다고!

당연히 사병들이 자아를 가지고 피한 것은 아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그 미세한 움직임에 곧바로 반응해, 염력으로 사병을 회피시켰다고?

이거 참.

직접 맞붙어 보니, 로렌스는 오히려 그간 평가절하되어 있었다 봐도 무방하겠는걸.

그렇다고 이대로 가만히 로렌스의 병사들에게 포위될 생각은 없다.

광역기는 쓸 일이 거의 없어서 연습을 거의 안 했는데, 제대로 쓸 수 있으려나.

“으음 한 번에 8기라….”

영식(??), 제 1의 륜(), 초승달 칼새.

가장 자신 있는 간판기는 낙린참이지만, 다른 영식의 기술도 아예 못 쓰는 것은 아니다.

완성도가 매우 떨어질 뿐이지.

아쉽군.

아마 제대로 썼다면 10명 전부 처치할 수 있었을 텐데.

“잠깐… 어떻게 된 일이지?”

당황스럽겠지.

병사들이 부활하지 않고 있으니.

로렌스가 강하다고 여겨지는 대표적인 이유 중 하나는 이 병사들이 불사 속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론 처치할 수 없는, 흔히 게임에서 에센셜 유닛이라 불리는 그런 녀석들.

제이드의 무적 같은 완전 내성이라기보단, 무한히 재생하는 형태에 가깝긴 하지만, 일반적으론 불사라고 봐도 무방하다.

하지만, 내겐 아무런 의미도 갖지 못하는 특징이지.

붉은색 이상의 검신을 한 마나글레이브는 영혼을 벨 수 있으니까.

“생각해보니 그렇게 놀랄 일은 아니네. 그렇다면, 이번에는 20기 정도로 허들을 올려볼까?”

그녀가 키득거리며 웃었다.

별로 불쾌하진 않았다.

실제로 나와 그녀에겐 엄청난 갭 차이가 존재하고 있으니까.

아마 로렌스에겐 유흥거리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서드 어빌리티도 사용하지 않고 있고.

솔직히 말하면, 서드 어빌리티 선까지 갈 필요도 없다.

현재의 로렌스가 다룰 수 있는 병사의 수만 해도 50기가 넘는데, 그걸 내가 무슨 수로 이긴단 말인가.

그나마 숨겨두고 있는 패를 한 번 꺼내면 어떻게 반기를 들어봄 직은 하다만… 그것도 일회성이라 이번 군세를 막아내는 데 써야 한다.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하던 와중, 돌연 로렌스가 바닥을 보고 씨익 웃었다.

설마, 눈치챘나?

“아냐. 이 정도면 볼 만큼 본 것 같네. 들어가도 좋아.”

다행이네.

설마 눈치챘나 했더니만.

훈련실을 나가려던 순간, 로렌스가 돌연 내 어깨를 붙잡고, 귓가에다 속삭였다.

“너, 귀여운 짓을 좋아하네. 근데 있잖아. 나한테는 뻔히 보여.”

그녀가 내 앞의 발치를 꾹 눌렀다.

그러자, 훈련장 전체를 덮고도 남을 만큼 거대한 그물이 바닥에서 튀어 올랐다.

그래, 이게 내가 준비한 수다.

퍼스트 어빌리티의 실로 만들어낸 그물 함정.

…어떻게 눈치챈 거지?

“아, 어떻게 알아차렸냐고? 티가 너무 나잖아. 의식적으로 그 부분을 밟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게.”

“눈썰미가 되게 좋으시네요.”

“아마 대부분의 사람에겐 여전히 통할 방법이지. 하지만 가끔은 나 같은 사람도 있다는 걸, 유념해둬야지. 그래도 귀여운 후배의 애쓰는 모습은 보기 좋았어.”

그렇게 말하고, 로렌스는 훈련실에서 나갔다.

자존심이 조금 구겨지네.

원래 나이 한정이긴 하지만, 나보다 어린 년한테 귀여운 후배 소리를 듣다니.

안 되겠다.

이 설움을 아이나에게 가서 풀어야겠어.

나는 곧바로 훈련실에서 뛰쳐나와, 아이나의 가슴팍에 얼굴을 파묻었다.

“역시, 네가 제일 좋아. 아이나.”

뭐지?

당연히 엄청 화를 내며 밀쳐낼 줄 알았는데, 의외로 아이나는 얌전했다.

아니, 오히려 포옹해주었다.

“화 안 내?”

그 질문에, 아이나는 이렇게 속삭였다.

“죽여버리고 싶었지만… 100점짜리 대답을 해서, 면책권을 주기로 했어. 그 대답만을 계속 기다려왔으니까.”

“무슨 대답?”

“나는 너한테 줄곧 해주었지만, 너는 지금 처음 하는 말.”

이제 알았다.

난 한 번도 아이나에게 좋아한다고 말해준 적이 없었다.

그래서 줄곧 기다려왔다고, 어리숙하다고 말했던 거구나.

그래, 아이나는 한 번도 틀린 말을 한 적이 없었지.

분명 그것은 옳았다.

“미안하다.”

“그럴 때는, 미안하다는 말이 아니라, 방금 했던 말을 다시 하는 거야.”

“그래, 난 네가 좋아. 아이나.”

아이나는 웃음으로 화답했다.

여태까지 한 번도 본 적 없을 정도로, 맑게.

그녀는 많은 것을 바라지 않았다.

누군가의 진심 어린 마음, 그 소박한 것을 기다려왔던 것에 마지않았다.

“이번엔 진심이 부족해서 감점.”

“그래도 면책해줄 거야?”

“뭘?”

“이런 거.”

그녀의 가슴을 살짝 매만졌다.

사근사근한 마시멜로 같은 촉감이 더할 나위 없이 좋았다.

“…집행유예야. 잠시 참작할 기회를 줄게.”

요컨대, 원하는 대답을 다시 해주지 않으면, 즉결심판에 들어가겠다는 이야기다.

하지만, 난 그렇게 싸게 흥정이 가능한 사람이 아닌 고로, 그녀가 했던 똑같은 말로 대답했다.

“그건 싫어. 자주 해주면 버릇 나빠져서 안 돼.”

그리고, 그녀의 주먹이 내 머리통에 맞닿았다.

그 뒤의 기억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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