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4화 〉 간단한 거래.
* * *
여름이 끝나가고 있다.
다만, 그것을 깨닫기는 쉽지 않다.
외부였다면 한층 풀죽은 열기 때문에라도 쉽게 알아차릴 수 있었겠지만, 이곳은 외부와 철저히 격리된 제 2의 세계, 트리니티 아카데미니까.
따라서, 내가 지금이 늦여름이라는 사실을 알아차리게 된 계기는, 날씨의 변화 탓이 아니었다.
단순히 벽면의 전자 달력 때문이었지.
물론, 전자 달력이 가리키는 날짜가 내게 계절의 변화만을 시사해준 것은 아니다.
그간 내가 잊고 있었던, 이벤트 하나도 기억나게 해주었다.
…내가 이 중요한 걸 잊고 있었다니.
작중에서 일어나는 대형 이벤트 중 하나인, 아카데미 올림피아드.
그것이 치러지는 날이 머지않았다.
* * *
“다들 알다시피, 곧 아카데미 올림피아드가 개최될 예정이다. 우리 트리니티 아카데미에선 S클래스, U클래스에서 각각 3명을 선출할 예정이고. 참가하고 싶은 사람 있나?”
예상했던 의제다.
슬슬 이야기가 나올 거라곤 생각했으니까.
“중요한 건 나가고 싶은 사람이 아니고, 나가야 하는 사람 아닙니까.”
“그래, 좋은 대답이다. 나가야 할 사람을 너희가 알아서 선출하도록.”
원작에서는 알프레드, 아이나, 천현우가 나갔었다.
기준은 설명할 필요도 없이 성적순이고.
출전 성과도 동메달로 꽤 괜찮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기대에 못 미치는 성과였는지, 아쉬워하는 사람이 훨씬 많았지만.
“이런 질문을 하기도 민망하다만, 누가 나가면 좋을 것 같나.”
“이걸 꼭 설문 조사를 해야 하는 거냐? 그게 더 이상한데.”
“나는 안 나갈 거니까, 나머지 중에서 알아서 뽑아.”
“네가 나갈 것이라 생각한 사람은 이 중의 한 명도 없을 거다.”
내가 생각해도 너무 뻔한 결과긴 하다.
나, 아이나, 알프레드가 나가겠지.
“어차피 누가 나가야 할지는 이미 모두 알고 있잖아?”
“그래, 길게 생각할 거 없다고.”
“그렇다면 각자 생각해둔 엔트리를 말해 봐라.”
“박성진, 아이나, 알프레드. 더 생각할 사람이 있나?”
“동의한다.”
“이하동문.”
다른 생도들도 모두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다만, 하얀색의 소녀만큼은 그것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입술을 짓씹고 있었다.
그렇다고 해서, 반대 의견을 내는 일은 없었다.
아카데미 올림피아드가 얼마나 중요한 대회인지도, 자신이 한 명분의 몫을 제대로 하지 못할 것이라는 사실도, 그녀는 알고 있었기 때문이리라.
“그래, 그럼 이제 당사자 의견만 들으면 되겠네. 각자 자기 생각을 말해 봐.”
“당연히 나가야지.”
“나가지 않을 이유가 없어. 한 가지 예외만 제외한다면.”
“박성진, 너는?”
어려운 문제네.
미래를 바꾸는 행동이야 이미 많이 저지르긴 했다만, 그건 내 나름대로 좋은 일을 하겠답시고 한 행동이었다.
딱히 주인공인 천현우, 베아트릭스에게 악영향을 줄 만한 행동도 하지 않았고.
하지만, 이번 이벤트 같은 경우는 이야기가 다르다.
원래 천현우를 성장시키기 위해 준비된 에피소드인 만큼, 내가 그 자리를 대체하게 된다면, 천현우의 성장을 늦추게 되는 셈이니까.
이 제안을 받아들여야 할지, 말아야 할지 고민이 될 수밖에 없다.
“의외로군. 네가 이런 제안을 고민할 줄이야.”
“이런 걸 고민할 이유가 있나? 야, 매년 오는 기회가 아니야. 내년이 되면 너한테 기회가 오지 않을 수도 있다고.”
“쓰잘데기없는 생각하지 말고 그냥 해라.”
아무리 내 등을 떠민다 해도, 난 쉽게 대답을 내놓지 않을 것이다.
이건 가벼이 결정을 내려선 안 될 문제니까.
“네가 나가지 않는다면, 나도 나가지 않을 거야. 그게 나의 유일한 예외였어.”
아예 그렇게 할까?
차라리 나와 아이나, 둘 다 참여하지 않는 게 나을 수도 있다.
그 자리에 천현우와 베아트릭스를 넣으면 되니까.
어떻게 하면 좋을까 끙끙대던 와중, 나의 속을 시원하게 만들어준 것은 놀랍게도 지금까지 잠자코 있던 천현우였다.
“네가 해. 네가 적임자니까.”
내 고뇌를 정확하게 관철하는 천현우의 행동에 조금 찜찜함이 느껴지긴 했지만, 당사자의 허가도 났으니, 딱히 거절할 이유는 없겠네.
“그래, 할게.”
“어차피 할 거면서 뭘 그렇게 질질 끌었나. 우유부단함과 망설임은 딱 질색이다.”
“확 줘 패버리고 싶네.”
“하기 싫으면 하지 마. 이 새끼야.”
미약하게 날 선 분위기가 날 위축되게 만들 법도 했지만, 결과적으론 그리되지 않았다.
내 눈에 들어오는 것은 수줍게 웃는 아이나의 미소뿐이었으니까.
“분위기를 보아하니, 대충 정해진 것 같구나. 그래서, 누가 나가기로 한 거지?”
“박성진, 알프레드, 아이나입니다.”
“이 뻔한 엔트리를 내겠다고 그렇게 긴 시간을 낭비했냐? 내 강의가 그렇게 듣기 싫었구나. 미안하다. 다 내 업보니, 어쩔 수 없지.”
“당사자인 박성진과 약간의 마찰이 있었습니다. 지금은 잘 해결됐으니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말을 마친 카타리나가 신경질적인 눈으로 날 째려보았다.
다른 녀석들이 그랬다면 대수롭지 않게 넘겼을 일이지만, 하필이면 그 대상이 남다른 포스와 카리스마의 보유자인 카타리나였던지라, 나는 조용히 눈을 내리깔 수밖에 없었다.
“이 엔트리 그대로 학장님께 제출해도 아무런 불만이 없는 거지?”
““네.””
“그래. 그럼 강의를 다시 시작해볼까?”
““아뇨.””
이때, 삐진 빈센트를 달래는 데엔 제법 오랜 시간이 걸렸던 것으로 기억한다.
* * *
강의가 끝난 현 시각.
우리의 위치는 학장실 문 앞이다.
우리라 함은, 당연히 나, 알프레드, 아이나고.
갑자기 이곳에는 왜 와있는가 하면… 빈센트가 우리에게 학장실로 이동하라는 명을 내렸기 때문이다.
무슨 이유로 불렀는지는 안 봐도 뻔하다.
아카데미 올림피아드 선출 인원들에게 할 이야기라도 있는 거겠지.
“빈센트 교수님 명으로 왔는데, 계세요?”
알프레드가 가볍게 문을 두들겼다.
“들어오게.”
내부에서 오스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허가를 받은 우리는 문을 열고, 학장실 내부로 들어섰다.
다행히, 그곳에는 오스카를 제외한 다른 인원은 보이지 않았다.
혹여 늦기라도 했다면 눈치를 봤어야 했을 텐데, 가장 먼저 도착한 게 우리라 다행이네.
“멀뚱멀뚱 서 있지 말고 앉게.”
“네.”
다른 이들을 기다리는 데 걸린 시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
그것이 단순한 나의 착각이었는지, 아니면 그들이 실제로 빠르게 도착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어찌 됐든, 확실한 점 하나는 학장실의 이 너른 소파가 무척이나 안락하다는 사실이다.
덕분에 편하게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모두 왔군그래. 이번 아카데미 올림피아드에 선출된 대표 인원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우리 아카데미가 우승할 수 있을 거라 보십니까?”
“어떻게 될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지. 멤버 구성 자체는 나쁘지 않아. 다만, 예상했던 것과 다른 게 하나도 없어서 진부하군.”
“그렇다고 다른 사람을 뽑을 수는 없는 노릇이죠.”
자연스럽게 오스카와 대화를 나누는 걸 보면, 이 누나가 로렌스인가 보네.
나야 이름만 알지, 얼굴을 모르니 정확히는 알 수 없다만, 예상했던 것과 다를 게 없다는 오스카의 말을 들으면 원작과 동일한 엔트리인 것 같다.
나라는 이레귤러만을 제외하면 말이다.
“대부분은 서로를 익히 알고 있겠지만, 한 명의 뉴페이스가 있으니, 간략히 멤버를 읊어주겠네.”
“알겠습니다.”
“S클래스의 대표로는 박성진, 알프레드 아이스너, 미츠루 아이나가 선출되었고, U클래스의 대표로는 모용린, 라일라 디아브, 다니엘 멘데스가 뽑혔으며, T클래스엔 현재 재학 중인 생도가 로렌스 밴더럼 이외엔 없기에 자동으로 로렌스가 발탁되었네. 궁금한 점 있나?”
변한 것은 없었다.
아마, 변하는 일도 없을 것이다.
트리니티 아카데미는 똑같이 동메달을 받겠지.
그렇기에, 궁금한 점도 없다.
“학장님의 솔직한 의견이 궁금합니다. 저희가 이번 올림피아드에서 어느 정도의 성적을 거둘 수 있을 거라고 예상하십니까.”
“정말로 내가 솔직하게 말하길 원하나?”
“그렇습니다.”
“5위. 운이 좋다면 3위 정도.”
정확한 판단이라 할 수 있다.
그간 부동의 1위 아카데미니, 뭐니 실컷 나불거려놓고, 이제 와서 운이 좋아도 3위라고 말하는 게 부끄럽지 않냐는 이야기가 나올 수도 있겠지만, 그건 올림피아드의 사정을 몰라서 하는 이야기일 뿐이다.
거의 모든 대회의 상을 트리니티 아카데미가 독식하는 것을 아니꼽게 본 주최 측이, 다양한 방법으로 견제를 놓았기 때문이다.
그 결과, 트리니티 아카데미의 장기집권은 끝을 맺게 되었고.
“정말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그렇네. 하지만 자네들을 탓할 생각은 없어. 불가항력적인 이야기니까.”
“만약, 저희가 그 이상의 성과를 거둔다면요?”
“성공과 명예를 얻겠지.”
너무나 진부한 대답이다.
우리가 그 정도로 만족할 리도 없고.
하지만, 아무리 학생회장인 로렌스라고 해도, 더 이상 무언가를 요구할 자격 같은 것은 없었기에, 그녀는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다만… 나는 다물지 않았다.
진부한 대답이 싫은 만큼, 진부한 결과에 만족하며 살고 싶지 않았으니까.
“엉클 샘이나 할 법한 이야길 하시네요. 더욱이, 저희는 남극 탐험대도 아니고요.”
나의 돌발행동에, 다들 굳은 표정으로 날 쳐다보기 시작했다.
그것은 방금 전까지만 해도 여유만만한 표정을 짓던 로렌스도 마찬가지였다.
아이나라 해서 다를 건 없었다.
그녀도 내 귓가에 대고 ‘미쳤어?’라는 말을 하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오스카만은 내 포부가 마음에 들었는지, 호탕하게 웃었다.
“그래… 확실히 그런 시대는 지났지. 원하는 게 있나?”
“돈이 필요합니다. 아주 많이. 크레딧 따위가 아니고, 현물 말입니다.”
“나보다는 졸부 클로에 녀석에게 적합한 제안이군. 난 무욕한 사람이라서 말이지. 하지만… 그렇게 가난하지는 않아.”
“제안을 받아들이시는 겁니까?”
“그래. 성공 시 인당 50만 달러. 어떤가.”
한화로 계산하면 대략 5억원이 좀 넘는 돈이다.
생도에게 거금임은 틀림없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일반 생도에게 통용되는 이야기일 뿐.
S클래스 이상의 생도라면 그 정도 돈은 그렇게 큰돈이 아니다.
만일 유명 히어로팀에 입단하게 된다면, 그것보다 훨씬 많은 돈을 만질 수 있으니까.
이럴 때는 그 대사가 나올 수밖에 없잖아.
“묻고 더블로 가죠.”
“미친 새끼 아니야. 이거. 죄송합니다. 학장님. 실언이었습니다. 잊어주십시오.”
누군가가 내 뒤통수를 세게 후렸다.
등 뒤에서 들려온 남자의 목소리로 보아하건대, 다니엘인 것 같다.
하지만, 그게 누군지는 내게 중요하지 않았다.
나는 지금, 이 순간, 누구보다 진지하니까.
“700만 달러… ‘올림피아드의 메달 따위’라고 하고 싶지만, 그 정도로 내 배포가 작지는 않지. 판돈은 큰 게 좋으니까. 한 번 쯤은 태워보는 것도 나쁘진 않고 말이야. 좋아, 그렇게 하지.”
“감사합니다. 반드시 만족할 만한 성과를 가져다드리겠습니다.”
“말은 필요 없네. 나는 성과를 원해.”
피차일반이다.
아무런 성과도 내지 못할 것이라면, 이런 미친 짓은 하지도 않았을 테니까.
“알겠습니다.”
“아카데미 올림피아드는 8월 17일, 프라하에서 개최될 예정이네. 자네들은 녹아웃 스테이지인 8강부터 참여하니, 실질적으로는 8월 30일부터 대회에 나가는 셈이지.”
“폐막은 언제입니까.”
“9월 12일.”
올림피아드 참가자라 그런지, 중간고사도 빼주는군.
아주 좋아.
“그럼 9월 12일에 다시 뵙는 것으로 하죠.”
“부디 승자의 자리에서 만날 수 있다면 좋겠군.”
“더 하실 말씀은 있으십니까?”
“고지할 사항은 다 고지한 것 같으니, 나가봐도 좋네.”
학장실을 빠져나오는 이들은 모두 넋이 나간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나마 제정신을 유지하고 있는 아이나조차도 많이 긴장했던 모양인지, 얼굴이 제법 창백했다.
언제까지 이러고 있을 순 없지.
우린 최소 2위를 해야 하니까.
“다들 열심히 훈련하고, 다음에 만납시다. 9월 12일의 저녁은 프라하에서 먹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모두가 흐느적거리며 어딘가로 흩어질 뿐이었다.
“박성진, 넌 꼭 기억해두도록 하지.”
그 말만 남기고, 로렌스도 어딘가로 훌쩍 떠나버렸다.
홀로 기숙사로 돌아가는 길은 쓸쓸하구나.
…이튿날, 나는 미친 협상가로 불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