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9화 〉 해가 지지 않는 계곡.(3)
* * *
“이쯤 됐으면, 슬슬 영식을 가르쳐주어도 되겠어.”
뭐가 괜찮다는 것인지 알 수가 없다.
나는 아직도 비슷한 수준에서 빌빌거리고 있었으니까.
그렇다고 발전이 아예 없었던 것까진 아니다.
슬슬 검신의 색에도 노란빛이 감돌기 시작했으니까.
다만 아주 희미해서, 자세히 관찰하지 않으면 알 수 없는, 그런 정도.
“그때는 붉은색의 검신이 아니면 영식을 사용할 수 없다고 그러셨잖아요.”
“그렇다.”
“그런데 어떻게 제가 영식을 써요.”
“짧은 순간 정도는 자홍색 검신을 뽑을 수 있잖느냐.”
그렇기는 하다.
지금까지 해온 훈련에 의미가 없지는 않았는지, 잠깐은 자의로 자홍색 검신을 뽑을 수 있는 영역에 도달한 것이다.
워낙 짧은 시간이라, 큰 의미가 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 짧은 틈에 사용할 수 있는 기술이 있어요?”
“마침 너처럼 미숙한 녀석이 쓰기엔 적합한 기술이 하나 있다. 한 번 보여주도록 하마.”
사실 난 특별한 기대를 하지 않았다.
그의 자세가 무척이나 평범했으니까.
롱소드 검술의 폼 탁에 해당하는, 내려 베기의 자세.
실제로 뒤이어지는 자세도 예상한 것과 전혀 다를 게 없었다.
그저, 아래로 내려 벨 뿐이었으니.
다만, 그 단순한 행동 후에 나타난 결과는, 절대 평범하지 않았다.
“낙린참(???). 지금은 사라진 어느 검좌가 남긴 기술이지. 놈은 자색의 검신을 뽑는 것 따위에는 크게 관심이 없었다. 오직, 완벽한 참격을 완성하겠다는 일념만이 있었을 뿐. 그리고, 그 녀석은 어느 날 홀연히 사라졌다. 단 하나의 무결한 빗금만을 세계에 그은 채. 더할 나위 없이 훌륭한 검이었다.”
비스듬히 드리운 하나의 실선이 건곤(??)에 그어진다.
거대한 틈은 누군가가 부자연스럽게 그려놓은 사선이 아니라, 본래 이 세상을 둘로 구분하기 위해 존재한 것처럼, 그 자리에 있었다.
내 비록 이 기술을 고안한 검좌를 마주한 적이 없었음에도, 그가 얼마나 완벽함에 집착했는지 바로 알아차릴 수 있을 정도였다.
헌데, 이 기술이 나와 어울린다는 이유가 뭐지?
분명 멋있고, 강력한 기술임은 틀림없어 보이지만, 특별히 나랑 어울리는 점은 없어 보이는데.
“굳이 이 기술이 저와 어울리는 이유가 뭔가요?”
“검신에 압축된 마나를 모두 해방하여, 베어 가르기에서 나가는 검압에 싣는 기술이다. 사용 후에는 네 검신이 어떤 색상이었든 간에, 하얀색으로 돌아가게 되지.”
“그렇다면, 자홍색 검신이 가지는 이점을 일시적으로 모두 포기하는, 리스크가 큰 기술이란 소리잖아요.”
“그러니 네게 어울리는 것이지. 당연히 붉은색 이상의 검신을 장시간 유지할 수 있는 검사에겐 사용하는 게 손해인 기술이겠지만, 그게 아닌 너에겐 순간적으로 몰아칠 기회를 얻는다는 소리잖느냐.”
그러네.
어차피 자홍색 검신을 오래 유지할 수 없는 나에겐, 기습적으로 폭발적인 피해를 줄 수 있는 기술이 생기는 셈이다.
다른 마나글레이브 검사들에겐, 영식을 포기하게 만드는 큰 리스크의 기술이겠지만.
“듣고 보니 잘 어울리는 기술 같네요.”
“당연하다. 지금까지 나를 거쳐온 마나글레이브 검사가 몇이라고 생각하나. 나보다 마나글레이브에 대해 잘 아는 자는 몇 안 될 것이다.”
“그래서, 그 기술은 어떻게 쓰는 겁니까?”
“검신에 걸려있는 통제를 풀고, 그 마나를 참격에 실어라. 그것이 전부다.”
듣기에는 엄청 쉬운 거 같은데.
역시 이런 건 시도해보지 않고서는 모르는 거지.
곧바로 주변의 마나를 마나글레이브에 모여들게 했다.
그에 반응해, 하얀색이었던 검신이 빠르게 붉은색으로 물든다.
이제 남은 것은, 검신의 마나 밀도를 유지 시켜주는 제어를 풀고, 마나를 참격에 싣는 것뿐.
…예상한 결과지만, 눈으로 보니 더 실망스럽다.
니힐리스가 보여줬던, 예리한 참격 형태의 파동까지는 바라지도 않았다.
근데, 살랑거리는 바람만이 이는 수준은 너무한 거 아닌가?
“실망하지 마라. 아무나 쓸 수 있는 기술이 아니니까, 당연한 거다. 애초에 영식이 그렇게 익히기 쉬운 기술들로 구성되었다면, 나를 포함한 다른 기사단원들이 수십 년 동안 매진하지도 않았겠지.”
어렵네. 여러모로.
사상력도, 마나도 더럽게 많이 처먹는 기술이라, 한 번만 시도해도 진이 다 빠진다.
게다가, 내가 하루에 자홍색 검신을 뽑을 수 있는 횟수는 제한되어 있어, 반복적인 연습마저 불가능하다.
과연 방학이 끝나기 전까지 제대로 다룰 수나 있을까.
* * *
모두가 떠나, 한적하기만 한 트리니티 아카데미.
그곳에, 처음 보는 얼굴이 있었다.
어느 집단에 처음 보는 이가 들어왔다면, 그 사람에게 시선이 쏠리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그걸 고려하고서라도, 세레나는 과하다 싶을 정도의 이목을 끌고 있었다.
거의 같은 공간에 있는 모든 이가 세레나만을 쳐다보고 있을 정도였으니.
하지만, 이상하다고 할 정도는 아니다.
두 갈래로 갈라진 한 쌍의 뿔.
세로로 길게 찢어진 동공.
척 보아도 사람과는 동떨어진 특성을 두 가지나 가진 세레나가 주변의 관심을 독차지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당신이 세레나 스튜어트?”
“누구… 아, 스피카.”
“그 이름으로 불리는 건 오랜만이네요. 젊어진 느낌도 나고요. 하지만 그렇게 부르는 건 자제해주셨으면 해요. 내 나이를 실감하게 돼서.”
“나이를 먹는 건 누구에게나 자연스러운 일이잖아요.”
그 말에, 클로에의 입술이 샐쭉하고 튀어나왔다.
자신의 나이에 관한 이야기를 워낙 하기 싫어하는 클로에의 처지에선, 당연한 반응이었다.
세레나야 별 의도를 가지고 한 말이 아니었다지만.
“하지만, 누구나 말하고 싶지 않은 이야기가 있잖아요. 저에겐 그게 나이일 뿐이랍니다.”
“이해는 해요.”
“그나저나, 조금은 놀랐어요. 정말로 이곳에 오실 줄은.”
“어떤 점이 놀라운 거죠?”
“저희는 짓궂은 장난 정도라고 생각했거든요. 설마 진짜로 교수가 되려고 했던 건지는 미처 몰랐네요.”
세레나가 의아하다는 표정을 짓는다.
이 상황만 놓고 본다면, 감정이 상한 클로에가 세레나를 골탕을 먹이려는 것으로 보이겠지만, 그렇지 않다.
클로에는 정말 순수한 자신의 감정을 밝힌 것에 불과했으니.
상식적으로 생각해 보아도, 클로에의 반응이 악의적이라고 단정 지을 이유는 전혀 없다.
수감 된 전과가 있는 빌런이, 돌연 트리니티 아카데미의 교수직을 맡고 싶다는 소리를 한다면, 누구도 그것을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을 테니까.
“전 진지하게 한 이야기였는걸요.”
“그래요. 이제 알 것 같네요. 장난으로 치부해서 미안해요. 그런데, 우리 아카데미의 교수가 되려 한 특별한 이유가 있나요? 한때 동세대 정점이라고 평가받던 당신이, 어찌 보면, 한직이라 볼 수 있는 이런 자리를 맡고 싶어 하는 것도 의외인데요.”
“아직 누군가의 선배, 스승, 선생을 자칭하기엔 이르겠지만… 이끌어주고 싶은 사람이 생겼어요. 저 또한, 여러 사람을 만나 많은 것들을 배워, 웃고, 기뻐하며, 멋진 사람이 되고 싶고요.”
트리니티 아카데미의 교수 자리는 절대 한직이라고 불릴 만큼 만만한 자리가 아니다.
단지, 이 대화를 나누는 주체가, 클로에와 세레나니, 그렇게 보이는 것에 불과할 뿐.
살아있는 전설 클로에와 신세대 정점이라 평가받던 세레나에게는, 트리니티 아카데미의 교수직 따위, 특별한 감흥을 주지 못하는 게 당연했다.
“신기하네요. 당신이 그리폰 교도소를 습격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만 해도, 그냥 맛이 간 사람이라고만 생각했는데, 그런 다정한 면도 있었군요. 성격이 좀 있는 편이라고 들었는데, 그런 면도 전혀 안 보이고요.”
“누가 그런 이야기를 했는데요?”
“에스메랄다요.”
“음, 제가 승부욕이 강해서 그런 이야기를 한 것 같네요.”
그 말에, 클로에는 어떤 느낌인지 단번에 이해 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클로에도 자부심과 승부욕이라면 누구에게도 지지 않는 사람이니.
“만나보기 전에도 관심이 있었지만, 실제로 보니 더 호감인데요? 영입하길 잘한 것 같네요.”
“좋게 봐주시니, 감사하네요.”
“그래서, 맡고 싶은 클래스는 따로 계신가요? 편의를 봐 드리는 정도는 가능하지만, 지금은 빈자리가 그렇게 많지 않아서, 원하는 클래스의 담당 교수가 되는 건 어려울 거예요.”
“S클래스 아니면 U클래스를 맡고 싶네요.”
클로에는 고심하는 듯한 표정을 짓기 시작했다.
S클래스는 누구나 맡고 싶어 하는 인기 직책인데다, 어지간한 성과로는 넘보기도 힘든 자리인지라, 아무에게나 맡길 수는 없는 자리였기 때문이다.
“그건 고민을 좀 해봐야 할 것 같네요. 제 의사로 단독 결정할 수는 없는 사안이라.”
“단순히 제 생각일 뿐이에요. 저는 당연히 아카데미의 의사를 존중할 거고요.”
“네, 그럼 논의를 통해서 답을 드리도록 할게요.”
“알겠습니다.”
둘은 약속이라도 한 듯, 동시에 자리에서 일어났다.
두 개의 그림자가 사라질 때까지, 사람들의 시선은 그 두 사람에게서 떨어지지 않았다.
* * *
“나랑 상의도 없이 그런 중대한 결정을 내렸나?”
“그래서 지금 상의하러 왔잖아.”
오스카가 한숨을 푹푹 내쉬었다.
클로에가 상식에서 벗어나는 일을 벌이는 거야 매번 있는 일이라지만, 막상 당하는 처지에선 당황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으니.
“그 사람이 실제로 좋은 인품을 가지고 있다고 해도, 대외적으론 이미지가 좋지 않은 만큼, 많은 구설수가 오갈 텐데. 빌런을 교수로 영입한 건 그다지 좋은 선택이 아니라 본다.”
“뭐 어때. 그전에는 이미지 좋았잖아?”
“하아… 골치 아프군. 이미 엎질러진 물이니, 주워 담을 수도 없고. 그래서, 원하는 조건이 뭐라고?”
“S클래스, 아니면 U클래스의 교수를 맡고 싶다던데.”
“그건 안돼. 신임 교수에겐 절대 맡길 수 없는 직급이다.”
오스카가 완강한 태도로 거부했다.
어지간해선 고집을 꺾지 않는 클로에도, 이렇게까지 극단적인 오스카의 반응에, 한 수 접어줄 수밖에 없었다.
물론, 오스카가 자신의 절친한 친구가 아니었다면, 씨알도 안 먹혔겠지만.
“그래, 그럼 그냥 조교수나 시키지. 뭐.”
“어차피 S클래스랑 U클래스 교수직은 자리도 이미 다 차 있지 않나.”
“내년에 U클래스 자리가 비지 않던가?”
“그럴 거다.”
“그럼, 내년에 한 번 U클래스 교수를 맡겨 보는 건?”
“그럴 일은 없겠지만, 반년 내로 인정할만한 성과를 낸다면, 고려해보지.”
클로에의 눈이 밝게 빛났다.
오스카의 대답이 클로에의 승부사 기질에 불을 지를 것이라는 것쯤은, 오스카 본인도 알고 있었다.
그렇다면 오스카는 어째서 저런 대답을 한 것인가.
당연히 클로에와 내기를 유도하기 위해서였다.
혹자는 과묵한 오스카의 성격에 어울리지 않는 반응이라 생각할지도 모른다.
허나, 그것은 오스카에 대해 잘 모른다는 반증에 불과하다.
오스카는 과묵하기만 한 옛날의 아크투르스가 아니었으니까.
오스카.
클로에.
둘은 오랫동안 친밀한 관계를 유지한 만큼, 서로를 닮아버린 것이었다.
“고려만으론 안 돼. 확실하게 정하자고.”
“좋다. 그렇다면 세레나가 그럴듯한 성과를 내지 못한다면 어쩔 셈이지?”
“네가 하던 일을 내가 전부 처리할게. 한 달 동안.”
“그건 처음부터 네가 해야 할 일이었다. 내가 떠맡았던 거지. 하지만… 그 협상, 체결하지.
세레나는 자신도 모르게, 어느 두 노년의 내기 거리가 되어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