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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8화 〉해가 지지 않는 계곡.(2) (68/173)



〈 68화 〉해가 지지 않는 계곡.(2)

이른 새벽, 동이 터올 시각이면 항상 같은 목적지로 떠난다.

이제 글렌류나크는 이정표를 보지 않고도 쉽게 찾아갈 수 있는 곳이 되었다.

마찬가지로, 오늘도 별이 서린 그 계곡으로 향하려던 와중.

“매일 아침어딜 그렇게 가?”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프리실라를 깨워버린 모양이었다.

“글렌류나크에.”
“벌써 여자라도 생겼어?”
“무슨 헛소리야.”

차라리 여자라도 생긴 것이었다면 좋겠다.

100살도 먹게 넘은 노땅 주제, 무슨 힘이 그리 넘쳐나시는지, 온종일 나를 괴롭히고도 아무렇지 않은 모습을 보면 넌덜머리가 난다.

심지어 팔  짝, 눈 한 짝도 없는 주제 말이다.

“나 버리고 딴 여자 만나러 가는 건가 했지.”
“차라리 그런 거였으면 좋겠다.”
“우리 사이가 이거밖에 안 돼?”
“우리 사이가 뭔데. 친구잖아.”
“나가!”

프리실라의 베개 전력투구가 날아들었다.

폭발음과 함께 찢어져 나온 솜뭉치들이 나풀나풀 흩날렸다.

다음에 터질 게 내 머리가 되지 않게, 나는 얼른 숙소를빠져나왔다.

그래도 오늘은 좀 일찍 돌아와야 할 것 같다.

 때문에 따라온 거나 다름없는 애들인데, 방치하기도 뭣하니.

* * *

“슬슬 자홍색 검을 뽑는 것에도 익숙해진 모양이군.”
“스승님 덕분에.”
“너는 처음부터 자홍색 검신을 뽑을 재능이 있었으니, 내가 해준 것이라곤 네 재능을 일깨워준 것뿐이다. 아직은 영 불안하긴 하다만,  정도만 해도 충분하겠지.”

자홍색 검신의 등장 빈도가 전에 비해선 훨씬 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의 말대로 아직은 영 불안하다.

자홍색 검신을 자의로는 거의 뽑지는 못하니까.

“류진은 더 이상 갈고 닦을 필요가 없는 건가요?”
“그건 너 스스로가 판단할 일이지. 내가 정할 일이 아니다.”
“영식에 어떤 기술이 있는지 모르니, 감이 오지 않습니다. 류진과 흡사한 기술이 다양하다면  고민 없이 계속 류진만 연마할 텐데요.”
“그런 생각이라면 꾸준히 류진을 연마하는 게 나을 것이다. 영식은 보편적으로 계속 사용할 수 있는 기술들이 많지 않다.”

일종의 궁극기 같은 느낌의 기술들이 다수 포진해있다는 느낌인가.

그렇다면  이야기가 다르네.

“영식은 빠르게 배울 수 없다는  아쉽네요.”
“지금 네 성장 속도도 충분히 빠른 편인데, 욕심도 많구나.”
“그야, 제가 아카데미로 돌아가면 스승님께 배울 시간이 사라지잖습니까.”
“내가 살날이 많이 남지 않았다고해도, 고작 3년 정도도  기다릴 정도로 위중하진 않다. 너는 네 할 일을 해라. 다른 곳이라고 훈련을 못 하는 것도 아니지 않느냐.”

솔직히 조바심이 나는 건 어쩔 수 없다.

지금이야내 성장세가 좋다곤 하지만, 나중에 성장이 막히는 구간에 다다르면 어떻게 할 것인가.

세상은 가만히 날 기다려주지 않는다.

“걱정이 많은 모양이군.”
“제 성미가 급해서요.”
“한 가지만 말해주마. 걱정을 하나,  하나, 일어날 일은 일어나고, 일어나지않을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는 거다.”
“그게 무슨 뜻입니까?”
“네 걱정은 쓸모없다는 뜻이다.”

나름 진지한 걱정인데.

쓸모없다고 말하니 조금은 섭섭한걸.

“하지만, 제게 남은 시간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네가 더 열심히 하는 수밖에 없겠구나. 네 열의를 받아들여, 앞으론 훈련 강도를 더 올려주도록 하지.”
“저, 오늘은 일찍 돌아가야 하는데요. 몸도 멀쩡해야 하고.”
“언제는 내가 너를 죽이기라도 했단 말이냐. 네 몸은 멀쩡하지 않은 적이 없었다.”

매일 산을 기어서 내려가는 경험을 했는데, 그걸 멀쩡하다고 할 수 있는지는 의문이 든다.

“오늘은 정말로 돌아가서 할 일이 있습니다.”
“급한 일인가?”
“급한 일이죠.”

 미래가 걸린 일인데, 당연히 급한 일이지.

잘못하면 영식이고 뭐고 하기도 전에  맞고 죽어버릴지도 모르니까.

“그래, 지금까지 열심히 해왔으니,하루 정도는 쉬어도 괜찮겠지.”
“감사합니다.”

의외로 니힐리스는 자신이 내뱉은 말을 잘 지켰다.

저녁 시간이 되기 전에 알아서 나를 보내주었고, 훈련의 강도도 평소보단 훨씬 가벼웠다.

이렇게 걸어서 산에서 내려올 수 있는 건 처음이었으니.

* *

“웬일로 네가 이렇게 일찍 와?”
“너희한테 너무 소홀했던 것 같아서, 오늘은 좀 일찍 왔지.”
“오, 조금 감동했어.”
“뭐, 가보고 싶었던 곳이라도 있어? 한 곳 정도는 갔다 올 시간이 되니까.”
“나는 있어.”
“나도.”

둘 다 생각해둔 곳이 있던 모양이었다.

둘의 의견이 겹친다면 좋겠지만, 그럴 리는 없겠지.

“재미도 없는 도서관에는 왜 가자고 하는 거야? 놀러 온 의미가 없잖아.”
“개울가에 놀러 가는 데에는 특별한 의미가 있고?”
“그냥 개울가면 가자고 안 했지! 페어리 풀은 나름 하이랜드 지방에서 유명한 장소라고! 게다가 스카이섬은 어업으로 유명해서, 저녁도 거기서 해결하기 좋단 말이야.”
“스코틀랜드 국립도서관도 유명한 장소야.”

그렇게, 또 싸운다.

솔직히, 이야기만 들어보면, 둘  내키는 장소는 아니다.

기껏 여자를 데리고 간다는 곳이도서관이라는 것도 어이가 없고, 멋진 자연경관이야 글렌류나크에서 매일 보는데, 내킬 리가 없다.

처음에는 그냥 숙소에서 있자고 할까도 생각해보았지만, 아무리 봐도 좋은 생각이 아닌 것 같아 그만두었다.

““너는 어디가 더 좋아?””

역시 불똥이 튀어온 쪽은 내 쪽이었다.

불똥이 튀긴다는 말도 조금 어색한가.

내가 꺼낸 이야기니.

굳이 선택하자면 도서관 쪽이 나은 것 같기는 하다.

일단은 프리실라보단 아이나가 내게 우선이기도 하고, 나도 책 읽는 것을 싫어하는 편은 아니니까.

“그럼, 오늘은 도서관으로 갈까.”
“배려해줘서 고마워.”

아이나는 화사한 미소로 내게 응대했다.

그와 반대로, 프리실라는 바짝 약이 오른 표정을 하고 있었다.

당연히 자신의 의견이 받아들여지리라 생각했는지.

미안하다. 프리실라.

노예는 주인님의 말을 잘 들어야 하거든.

“안내해줘. 프리실라. 우리다투지 않고 친구가 되기로 했잖아?”
“응, 그랬지. 가자.”

언제 저런 이야기를 했대?

난 모르는 일인데.

둘 사이에 무슨 협정이 있었는지는 모른다.

다만, 그 언약이 실제로 통하고 있음에 놀랐다.

프리실라는 이를 바득바득 갈면서도 아이나에게 노골적인 적대는 하지 않았고, 아이나도 딱히 프리실라를 견제하려는 행동 같은 건 하지 않았다.

내 앞에서 싸우지 않겠다는, 뭐 그런 의미인 것 같은데, 나한테는 오히려 이게 무섭다.

물밑에서 어떤 암중공작이 오가고 있는지 수가 없으니까.

여자란 생물 특유의 성질이니 어쩔 수 없겠지만.

* * *

스코틀랜드 국립도서관은 거대했다.

심지어, 이마저도 나누어진 세 개의 건물 중 하나라는 게  놀라울 따름이었다.

아쉬운 점을 꼽자면, 현재 내가 있는 본관은 일반 열람실을 제외하면 대부분이 고서나 특별본같은 희소가치가 있는 장서를 보관해두는 곳이라는 것이었다.

수집가들이나, 역사에 관심이 많은 이들에겐 유토피아나 다름없는 공간이겠지만, 나한테는 아니다.

내게  책은 이렇고, 저렇고를 설명해봐야, ‘아, 그런 배경이 있구나’하는 정도밖에 되지 않으니.

하지만, 아이나는 그런 것에 관심이 많은 듯 보였다.

어떤 작가의 필사본이니, 19세기의 유명 작가가  책의 초판본이니 하는 것들을 발견하면 굉장히 좋아했다.

나야, ‘유서 깊은 가문 출신의 사람이라 이런  좋아하는가 보다’하고 내버려 두었지만.

“우리, 아이나는 여기 본관에 두고, 다른 건물로 갈래?”

내 눈치를 읽은 프리실라가 귓가에 말을 전했다.

당연히 거절했다.

다른 건물로 가는 게 싫어서 그런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편이 내겐 낫다.

그쪽은 책보다 영상 매체를 많이 보관해둔 곳이다 보니, 영화를 좋아하는 내게 훨씬 나은 공간일 것이다.

프리실라도 그 사실을 알고내게 이런 제안을 한 것일 테고.

하지만, 아이나의 의사를 존중해주기로 한 시점부터, 그런 짓은 하면 안 되는 것이다.

“그럼 말고.”

의외로 프리실라는 순순히 내 말을 인정했다.

본인도 자신의 제안이 통할 것으로 생각하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뒤론, 그러한 종류의 제안을 일절 꺼내지 않았다.

묵묵히 우리들의 뒤를 따를 뿐이었다.

엄밀히 말하면, 우리가 아이나의 뒤를 따르는 것이라고 해야겠지만.

“언제까지 특별 열람실에 있을 거야?”
“아직도 보고 싶은 건 한참 남았는데?”

…아이나의 특별 열람실 투어는 정말로한참 동안 계속됐다.

나조차도 지루함을 견디지 못해 입을 열까, 몇 번이나 고민했지만, 결국 그럴 수 없었다.

보고 싶었던 고서들을 모두 실물로 영접해서 기쁘다며, 그녀답지 않게 무척 기뻐하는 모습을 보니, 뭐라 말할 수가 없었던 것이었다.

이것은 프리실라도 마찬가지였다.

결국, 우리는 아이나가 특별열람실을 완전히  바퀴 돌 때까지 그녀의 뒤만 쫓아다닐 수밖에 없었다.

* * *

아이나의 긴 여정이 끝난 현 시각, 우리는 읽고 싶은 책을 골라, 일반 열람실에서 각자의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슬슬 집중력이 떨어지는  느껴졌기에, 잠시 바람이라도  겸, 산책을 하러 나가기로 했다.

“잠깐 나갔다 올게.”
“응. 갔다 와.”

솔직히 말하면, 당이 부족해서 나온 거지만.

몸만 쓰면 모르겠는데, 안 쓰던 머리까지 쓰려 하니, 몸에서 당이 필요하다고 계속 신호를 보내고 있었다.

따라서, 밖으로 나올 수밖에 없었다.

도서관은 음식물 섭취가 엄격하게 금지되어 있었으니까.

작은 초콜릿 하나를 꺼내 입안에 집어넣는다.

살짝 쌉싸름한 맛이 나는 게, 밸런스가 잘 잡힌 맛이었다.

“나도 하나 줄래?”
“넌 언제 나왔어?”
“너 따라서.”

언제 따라 나온 거야.

전혀 인기척을 느끼지 못했다.

아이나는 종종 이런 행동을 하는데, 당할 때마다 깜짝깜짝 놀란다.

이쯤 되면 그녀도 내 반응을 즐기는 게 아닐까.

“자, 여기.”
“아니, 그거 말고.”
“이거 말곤 없는데.”
“여기 있잖아.”

아이나의 혀가 입술 사이를 비집고 들어와, 내 입안을 굴러다니던 초콜릿을가져갔다.

그녀의 기습 공격에 나는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고.

“갑자기 뭐냐고? 그냥, 답례야. 나도 이게 지루한 일이라는 걸 알아. 그래서 프리실라가 너한테 그런 제안을 한 것도 눈감아준 거고. 설령 네가 그 제안을 받아들인다고 해도, 별로 신경 쓰지 않았을 거야. 그런데, 너는  두고 가지 않았잖아. 그에 대한, 답례.”

무슨 대답이 적절할지 고민하던 와중.

부드러운 촉감이 다시 내 입술에 맞닿았다.

“답례가 마음에 안 들었어? 그럼 다시 가져가.”

초콜릿은,원래 있던 위치로 돌아왔다.

나는 그것이 모두 녹아 사라질 때까지도 입을 열지 못했다.

“재미없는 나랑 어울려줘서 고마워. 프리실라한테도 말해야겠네. 아무튼, 이제 돌아가자.”

초콜릿의 맛은, 돌아오는 순간까지도 입 안에 남아있었다.

이상하게도, 달콤한 맛도, 쌉싸름한 맛도 남아있지 않았지만 말이다.

그렇다면, 남아있는  맛은 무엇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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