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67화 〉해가 지지 않는 계곡.(1) (67/173)



〈 67화 〉해가 지지 않는 계곡.(1)

차가운 아침 바람이 굽이치는 계곡의 줄기를 따라 흘렀다.

바람이 불어오는 방향을 거슬러 올라가자, 어제 보았던 그 사내는 똑같은 자리에서 명상을 하고 있었다.

“왔군.”
“네.”
“너를 제자로 받아들인다 했으니, 서로에 대해서 알아야겠지. 네 이름은 무엇이냐.”
“박성진이라고 합니다.”
“운명은 돌고 도는 것이라 그러더니, 그 말이 사실이었군. 영식을 개발한 하유성과 같은 국적의 사내가 결국 영식 계보의 마지막을 장식하게 될 줄이야.”

비교적 친숙한 이름이다 싶더니, 진짜 한국인이었구나.

자색 기사단에는 생각보다 이런저런 국적의 인물이 많았네.

“저는 그쪽을 뭐라고 부르면 될까요?”
“니힐리스라고 부르면 된다.”

어디선가 들어본 것 같은 이름인데.

아니, 애초에 이름인지도 모르겠지만.

“그게 이름입니까?”
“그럴리가. 전의 이름은 버린  오래됐다. 자색 기사단의 검좌에 오른 이들에게 붙여주는 칭호가, 이젠 나의 이름이지.”
“그게 니힐리스입니까?”
“그래, 나는 일곱 개의 검좌 중 제 3좌, 허무의 좌였다.”

저렇게 강한 양반이  3좌라면, 1좌나 2좌는 얼마나 강한 건지 가늠도 안 되네.

“다른 검좌들은 모두 죽었습니까?”
“적어도 스스로를 기사단이라 생각하던 검좌는 모두 죽었다. 나의 손에 죽었거나, 다른 제자의손에 죽었거나.”
“그 말은, 살아있는 검좌도 있기는 하다는 이야기군요.”
“살아있기는 할 것이다. 행적은 모른다만.”

진짜로 다 죽지는 않은 모양이네.

뭐, 작품에서 등장하는 걸 본 적이 없으니, 사실상 죽었다고 생각해도 무방하겠지만.

“그럼, 자기소개는 여기까지 하도록 하지. 네가 자신 있는 기술을 선보여 봐라.”

딱히 자신 있는 기술 같은 건 없었기에,그나마 사용할 줄 안다고 할  있는, 벚꽃 흘리기를 사용했다.

“오랜만에 보는 류진이군. 마나글레이브를 잡은 얼마나 됐지?”
“아마 2달 안팎일 겁니다.”
“기이한 일이로군. 2달밖에 되지 않았는데, 검을 다루는 모양새가 내가 알던 누군가의 검과 무척이나 닮았어. 누구에게 배웠나?”
“여자친구요.”

검을 가르쳐준 스승이 여자친구라는 사실이 조금 부끄럽긴 하다.

반대로 말하면, 좋은 여자친구를 뒀다는 이야기가 됐겠지만.

“그녀의 이름을 물어봐도 되겠나.”
“말해줘도 모르실걸요. 미츠루 아이나라고 하는데.”
“미츠루… 그리운 이름이군. 이 정도면 운명이 아니라 숙명이라고 봐야겠어.”
“아시는 사이였습니까?”

어디서 들어봤나 했더니, 예전에 아이나가 니힐리스라는 이름을 언급했던 기억이 난다.

니힐리스와 아이나는 무슨 관련이 있는 거지?

“아이나라는 이름은 모른다만, 미츠루 가문에 대해서는 알고 있지.”
“어떻게 아는 사이십니까?”
“내 제자 중에 미츠루라는 성을 가진 자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 사람도 죽였나요?”
“그렇다.”

아이나의 조상 중에서도 자색 기사단원이 있었다니.

그가 아이나와 어떤 관계인지는 모르겠지만, 내가 자색 기사단에 가입했다는 사실은 최대한 숨겨야겠네.

“슬슬 서로에 대해서도 어느 정도 안 듯하니, 이제부터는 내가 아는 걸 너에게 전수해줄 시간이군.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안정화 작업이다.”
“자홍색 검신을 안정적으로 다루는 법인가요?”
“그렇다. 너는 아직 자홍색 검신을 자유자재로 다루지는 못하더군.”
“네.”

이따금 목숨이 위협받는 상황에서만 자홍색으로 변할 뿐, 평상시에는 녹색 위로 올라가는 경우가 없다.

“네가 자홍색 검신을 뽑은 상황은 주로 어떤 상황이었나.”
“스스로가 위급하다고 느끼는 순간이었습니다.”
“생각 외로 평범하군. 좋다. 그렇다면  상황에 자주 노출되면, 자홍색 검신을 다루는 데 익숙해질 테지. 검을 들어라.”

설마, 목숨이 위험한 상황에 자주 노출되게 만들겠다는 것은 아니겠지?

아닐 것이라 믿고, 검을 들었다.

그리고, 그 믿음은 단숨에 배신당했다.

명백히 살의가 담긴 자홍색 검이 날아들었으니.

“무얼 하고 있나. 류진을 배웠으면 상대를 압박하란 말이다! 류진은 수비적인 상황에서 쓰기 위한 검법이 아니다!”

아니, 실력차가 이렇게 나는데, 어떻게 압박하라는 거야.

“네가 쓸 수 있는 기술을 사용해라. 네가 느끼는 살기는 내가 마나로 가장한 거짓된 살기다. 죽음의 분위기를 연출할 뿐이지. 실제로 너를 죽이려는 의지가 있었다면 이미 수만 번은 죽이고도 남았다.”

…맞는 말이네.

극도로 아슬아슬하게 급소를 스쳐 지나가는 공격들과 살기로 가득한 마나의 압박 탓에 느끼기 힘들 뿐이지, 분명 니힐리스 수준이라면  깜짝할 사이에 날 죽일  있는 실력이다.

오히려  구도가 그의 실력이 압도적임을 나타내는 반증이기도 하다.

상대를 확실하게 죽이는 것보다, 상대를 제압하여 생포하는 게 더 어렵다.

상대를 가지고 노는 건, 상대를 제압하기보다 어렵다.

그리고, 상대와 비슷한 수준인 척 위장하여, 상대가 ‘아슬아슬하게 승리했다!’라는 착각을 심어주게 할 수 있는 정도라면, 아예 차원이 다른 수준의 실력자다.

그리고, 니힐리스는 그 마지막 사례를 몸소 실천하고 있었다.

일부러 한두 번씩 틈을 내주어 내가 공격할 수 있는 각을 주면서도, 절대 그 공격을 허용하지는 않는다.

자신의 공격 턴 때도 마찬가지로, 위협적인 공격을 가하면서도, 실제로 내게 피해를 준 적은 없었고.

“벤다는 행위에 집착하지 마라. 류진은 상대를 베는 것에 목적을 두는 검법이 아니다. 큰 동작으로 하여금 상대방에게 심리적 압박감을 줘서 위축되게 만드는 것이 류진의 가장  목표다.”

“실을 써서 상대방에게 이지선다를 걸으란 말이다. 이동용으로만 쓰면 의미가 없다.”

“급하면 몸싸움으로 전환하려는 태도를 고수할 거면 류진을 배울 것이 아니라, 카데르를 배워라.”

…인정하긴 싫지만, 효과는 있었다.

이따금 자홍색 검신이 되는   눈으로  이상, 그 사실을 부정할 수는 없다.

“생각보다 금방 느는군. 섣불리 판단할 수는 없지만, 생각보단 금방 영식을 배울 수 있을지도 모르겠어.”
“제발 그랬으면 좋겠네요.”
“조바심 부리지 마라. 나는 100년이라는 세월에 걸쳐 얻은 것을 네놈이 쉽게 가져간다면, 내가 억울하지 않겠나.”
“그야, 저는 기사단원이 될 생각이 없었으니까요. 아카데미도, 기사단원도, 얼른 졸업하고 싶은 생각뿐입니다.”

물론, 졸업해도 할 일은 산더미 같이 있지만, 조금은 쉴 수 있겠지.

“하고 싶은 일이라도 있는 것인가.”
“반드시 처치하고 싶은 빌런이 몇 있습니다.그놈들을 잡고 나서, 편히 놀고 싶습니다.”
“생각보다 꿈이소박하군.”
“제가 그릇이 작은 인간인지라.”

나는 실제로 그릇이 작은 인간이다.

능력이대단한 것도 아니고, 원대한 야망을 품고 있지도 않으며, 대양에 뛰어들 용기를 가진 것도 아니다.

그냥, 해야  일만 열심히 하는, 지극히 소시민적인 인간군상의 표본이지.

“그런 것치고는 여색을 굉장히 밝히는 것 같다만.”
“제가요?”
“미츠루 가문의 영애와 교제 중이라고 그러지 않았나. 그 재미없기로 소문난 가문의 여자를 꼬실 수 있었다는 이야기를 들어보면,  놈도 보통내기는 아니라는 소리겠지. 게다가, 너한테서 다른 이성의 기운도 느껴진다.”
“그건 저도  모르겠습니다. 어쩌다 그렇게 된 건지.”
“쯧, 젊은 놈이 그렇게 색을 밝혀선. 아니지, 늙어서 추태를 부리는 것보다야 낫겠군.”

이건 좀 억울하다.

적어도 좆 달고 태어난 사내새끼 중에서 색을 밝히지 않는다고 주장하는 놈이 있다면, 그건 세 가지 경우밖에 생각할 수 없다.

첫 번째, 색을 밝히는 수준이 아니라, 아예 그거 말곤 다른 생각을 하지도 새끼들.

두 번째, 좆도 안 서고, 부랄도 쪼그라들어서  이상 남자 구실을 할 수 없게 된 놈들.

세 번째, 게이.

나는 셋 모두 아니니, 오히려 지극히 정상인 것이다.

“평범하게 여자를 좋아하는  죄가 아닙니다.”
“정녕 네가 평범하게 여자를 좋아하는 것으로 그친다고 생각하나?”
“네.”
“허, 그렇다면 더 문제군.”
“어째서입니까.”
“네가 단순히 여러 여자한테 치근덕대는 것으로 그쳤다면, 그냥 네 신세가 초라해지는 것으로 그쳤겠지만, 반대로 여러 여자가 너에게 치근덕거린다면, 네 신세가 비극적으로 변할 테니 말이다.”

신세가 비극적으로 변한다니.

무슨 말이지?

“여자한테 인기있는 삶이 왜 비극적이라는 것입니까. 좋기만 한데요.”
“그건 평범한 사람에게 인기 있을 때나 하는 이야기지.  사랑하는 사람이 평범하지 않다는 게 문제다. 나중에 주검으로 발견되지나 않으면다행이겠군.”
“그럼 스승님은 여자를 멀리하셨나 봅니다.”
“나는 검을 아내로 삼은 사람이다.”

진짜 미치광이였네.

“그래서, 검을 아내로 삼으시니, 행복하십니까?”
“아니.”
“그럼, 제가 옳았군요.”
“그런 말을 하던 단원들도 나중에는  내가 옳았다고 하게 되더군.”

이 사람, 생각보다 성격이 굉장히 유하다.

원래 그런 성격이었는지, 늙어서 유해진 건지는 알 수 없다만.

“보기보다 굉장히 성격이 좋으시군요.”
“원래는 이러지 않았다.”
“그런 것치곤, 제 농담도 잘 받아주시던데요.”
“수십 년 만에 만든 제자니,  대해줘야 하지 않겠나. 네놈이 마지막 제자가 될 텐데.”

아, 같은 똥캐 뉴비를 봐서 환장한 고인물이었구나.

뉴들박은 인정해줄 수밖에 없지.

그보다, 어제부터 굉장히 궁금했던 점이 하나 있는데, 이건 꼭 물어봐야겠어.

“갑작스럽지만,혹시 스타X즈라는 영화를 알고 계십니까?”
“모른다.”
“그럼, ‘내가  아버지다’라는 대사는요?”
“전혀 모르겠군.”

아무리 봐도 스타X즈인데.

이 우주 명작을 모른다니 어쩔 수 없지.

“아무튼, 저는 이만 하산해보겠습니다.”
“무슨 소리냐. 훈련은 이제 시작인데.”
“예?”
“이제 고작 한나절 지났다. 마침 해도 지지 않는 백야 시기군. 훈련하기 딱 좋은 때지.”


이튿 날, 나는 처음으로 산을 기어서 내려가는 진기한 경험을 하게 되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