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66화 〉자색 기사단. (66/173)



〈 66화 〉자색 기사단.

슬슬 글렌류나크에서 기약 없이 기다리기만 하는 것도 지겹다.

이틀째까지는 참을만했다.

멋진 자연경관을 구경하는 것도 그 나름의 운치가 있었으니까.

근데, 그것도 가끔 봐야 멋진 거지.

풀때기 말곤 아무것도 없는 산골짜기의 계곡에서, 가만히 때가 오기만을 바라는 게 얼마나 괴로운 일인데.

이런 걸 보면 여러 장르소설에 등장하는 은거기인들이 대단하다는 생각만 든다.

이 지루한 날들로만 수십 년의 세월을 보내왔다는  아닌가.

그렇게, 산등성이의 한구석에 앉아 계곡만 지켜본 지 나흘째.

마침내 한 무리의 사람들이 글렌류나크의 어귀에서 나타났다.

저놈들이겠지.

과연 저 많은 숫자의 각성자를 단신으로 쓸어버릴 자는 누구일까.

나는 시선을 집중했다.

* * *

“이런 촌구석에 니힐리스가 있다고? 그럴듯한 거짓말을 해야지.”
“토 달지 마라. 우린 받은 만큼만 일하면 되는 거니까.”
“아무리 평생 놀고먹을 수 있는 돈을 받았다지만, 이건 너무한 아뇨? 그 니힐리스와 교섭을 하라니.”
“그러니까 여태까지 이 제안을 수주한 사람이없었던 거겠지. 우리 같이 목숨 아까운 줄 모르는 불나방들 아니면 누가 하겠어.”

니힐리스.

먼 과거에 사라진, 어느 빌런의 이명이다.

 자취를 감춘 지도 어느덧 수십 년이 지났기에, 그를 기억하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지만, 여전히 그를 기억하는 이들은 하나 같이거물들뿐이다.

클로에나, 오스카 같은.

그가 이들에게 화자 되는 이유는단 하나다.

그들과 동시대에 활동했던 네임드 빌런이니까.

“형님은 자신 있는 거요? 나야 잃을  없는 놈이라지만, 형님은 가족도 있잖수.”
“분명히 놈은 눈과 팔을 잃었다. 거기에다 늙기까지 했지. 허나 일말의 승산도 없을 거다.”
“그럼 왜 이런 미친 짓을 하겠다 마음먹은 거요? 죽고 싶다는 소망이라도 있었나?”
“어쩌면 그와 대화가 통할지도 모르니까. 모습을 감춘 뒤로 어떤 사고도 치지 않은 것을 보면, 전성기의 그 성질머리를 죽였을지도 모르니.”

앞장서는 이를 형님이라 부른 이 사내는 입을 다물었다.

그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자신의 언변으로는 이 자를 설득할 수 없으리라는 사실을.

따라서, 그는 하염없이 걷기만 했다.

찰박.

찰박.

유일하게 말수가 많던 그가 입을 다물어버리자, 들려오는 소리라곤 신발 밑창이 젖은 땅에서 떨어지며 내는 질척거리는 소리뿐이었다.

물론, 시간이 흘러감에 따라 그 소리는 차차 멎어 들어갔다.

계곡 상류로 올라가면 올라갈수록, 토양의 자갈 비중이 높아졌으니까.

그렇게 물줄기를 계속 거슬러 올라간 끝에, 그들은 누군가와 마주칠 수 있었다.

정좌를 튼  가만히 앉아있는, 한 남자를 말이다.

“형님, 저 사람 아니오?”
“맞는 것 같다. 접근하자.”
“난 이게 맞는 판단인지 모르겠수.”

장성(壯盛)한 무리가 사내를 에워쌌다.

하지만, 사내는 한 치의 흔들림도 없이, 계속 그 자세를 유지하고 있었다.

“허무의 좌, 니힐리스. 당신에게 제안을 하러 왔소.”
“….”
“스피카를 떨어트려 주시오.”
“보수를… 말하라.”
“죽음.”

자홍색 반딧불이 곡예를 펼쳤다.

초여름의 반딧불이가 지나간 강산은 붉게 물들어있었고, 깔끔하게 분할된 파편들이 남아있었다.

그 광경이, 그들이 본 마지막 순간이었다.

“나에게 죽음을 하사할 수 있는 자는  명뿐이다. 마지막 제자이자, 마지막 단원.”

* *

무슨 일이 벌어진 건지 도저히 모르겠다.

적게 잡아도 스무 명은 되는 인원이 찰나에 쓰러졌다.

단순히 눈으로만 좇을 수 없는 속도라면 이해했을 것이다.

허나, 그렇지 않았다.

세컨드 어빌리티로 감지 능력을 극대화한 상황에서도, 놈들이 쓰러지는 시간의 틈을 거의 느끼지 못했으니.

저 정도면 아무리 기준을 낮게 잡아도 S레벨 이상일 것이다.

당연히 강할 것이라고는 예상했다.

놈들과 적대적인 분위기가 연출되리라는 것도 예상했고.

하지만, 이렇게까지 상황이 빠르게 정리될 거라고는, 전혀 상상 했다.

…아무리 봐도 교섭의 여지가 없어 보이네.

철수하는 게 좋겠다.

그가 떠나기만을 기다리려는 순간.

가면 속 눈동자와 눈이 마주쳤다.

제발 우연이었길 빌며, 숨을 죽인  눈을 감았다.

…눈을 뜬 순간, 가면의 사내는 내 앞에 당도해있었다.

“누군가 나를 찾는 것쯤은 진작 알고 있었다만, 이런 꼬맹이였었나.”

오싹한 목소리가 낮게 울려 퍼졌다.

“알아두어라. 마나를 통한 감지는 역추적 당하기도 매우 쉽다는 것을.”

마나 감지를 역추적했다고?

차원이 다른 괴물이네.

내 세컨드 어빌리티를 극한으로 단련해야 간신히  정도 경지일 텐데.

“그래서, 날 찾던 이유가 무엇이냐. 말해 보아라.”

당신과 손을 잡고 빌런을 토벌하고 싶었습니다.

이걸 말하라고?

저기 놓여있는 시체 중 한 구가 되지 않는 게 다행이지.

“아니, 물어볼 필요도 없었군. 검을 뽑아라.”

검을 뽑으라니.

설마 내 마나세이버를 말하는 건가?

마나세이버를 꺼내 들자, 가면의 사내는 고개를 끄덕였다.

“너에게 자격이 있는지, 지금부터 확인해보겠다.”

그렇게 말하고, 그는 품속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놀랍게도, 그것은 마나세이버였다.

하지만, 그것으로 놀라기엔 아직 이른 모양이었다.

그가 마나세이버를 작동시켰을 때, 나는 더 크게 놀랐으니까.

그의 검신은, 자홍색이었다.

심지어, 매우 안정된 상태로 그 색이 유지되고 있었다.

“좋은 검사의 자세군. 무릇검을 잡은 이라면, 검으로 대화하는 법이지. 너는 어떤 말을 내게 전할  있을지, 기대해도 되겠나.”

그냥 쫄아서 아무 말도 못 하고 있을 뿐인데.

마음 같아서야 그냥 대가리 박고 도망가고 싶지.

하지만, 이미 도망가긴 글렀다.

저놈은 이미 카데르의 기본자세를 잡고 있었으니까.

설마 나 같은 애새끼를 죽이기야 하겠느냐는 마음에, 나 또한 류진의 기본자세로 응대했다.

검끝이 그를 향한 순간, 마나의 격류가 나를 덮쳤다.

그것도, 살의가 잔뜩 담긴.

다시 봐도 대단한 마나 활용력이네.

나는 아직 저런 마나 컨트롤은 할 수 없는데.

과연 내가 저런 괴물새끼의 공격을  합이라도 받아낼 수 있을까?

저런 살기를 내뿜는 것을 보면, 정말로  죽이려는 것 같은데.

“시작하지.”

그리고, 자홍색 검신이 내게 날아들었다.

삼도천이  반기던 그 순간, 다른 세계가 펼쳐졌다.

이 감각, 그때와 같다.

검신이 자홍색으로 물들었던, 그때.

다시 한번, 검로가 눈에 들어온다.

수준 차이가 너무 격심해서 그런지, 반격의 길은 전혀 보이지 않네.

놈의 검을 튕겨낸다는, 단 하나의 검로만이 길을 밝히고 있었다.

 검로를 따라, 상대의마나세이버를 튕겨냈다.

“나쁘지 않은 대답이었다. 자격은 있군.”

가까스로 검을 비껴냈다.

그마저도 종이 한 장의 차이로 내 목을 스쳐 지나갔으니, 사실상 진 승부나 다름없었다.

“기사단의 가입 자격은, 심홍의 검을 뽑는 것이다. 너는 그 자격을 증명했고.”

심홍의 검이라 하면 붉은색 검신을 뜻하는 것인  같은데, 기사단은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

“그랬군…. 그랬어. 두 번째 임무까지 벌써 완수한 것이었나.”

임무?

아까부터 이 사람이 무슨 소리를 하는지 당최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기사단의 첫 번째 임무, 가장 소중한 것을 희생하라. 그리고, 너는 무엇보다도 소중한 것, 목숨을 잃었던 적이 있군. 좋다. 너를 제자로 받아들이도록 하지.”

뭐가 어떻게 굴러가는지 알 수가 없었다.

갑자기 제자는  무슨 말인지 모르겠고.

“그다지 기쁘지 않은 눈치군. 무안하게 만들 셈이 아니라면, 대답 정도는 하거라. 아니면, 너는 말을 하지 못하는 것이냐.”
“영문을 모르겠습니다.”
“목숨을 걸고 쟁취한  아닌가? 한 번 죽었던 몸이라면, 다시 얻은 생이 얼마나 값진 것인지 알고 있을 텐데. 그게 아니라면, 이미 한 번 버린 목숨이니, 아깝지 않다는 것인가.”

그야, 내 목숨이 아니었으니, 아까운지, 아깝지 않은 것인지 나야 알 길이 없다.

애초에 죽을 생각도 없었고.

“저는 제자가 될 생각이 없었습니다. 그냥 당신과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서 왔을 뿐이지.”
“무슨 이야기를 하겠다고 나같이 은퇴한 노인네를 만나러 변방의 촌구석까지 찾아왔나.”
“당신의 힘의 빌리고자 합니다.”

그 말을 들은 사내가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운명은 정해져 있다는 말이 있지. 너는 제대로 찾아온 것이다.”
“무슨 말입니까?”
“네가 제자가 될 의사가 있었던, 없었던, 나는 너를 제자로 삼게 되었을 거란 이야기다. 운명에 의해서.”

대체이 양반과 내가 무슨 연줄이 있는데 운명을 논한단 말인가.

갈수록 이해할 수가 없었다.

“보아하니 기사단에 대해서도 전혀 아는 게 없는 눈치로군.”
“모릅니다.”
“잊힌 지도 오래됐으니,  같은 애송이는 모를 법도 한가.”

원작에서는 기사단의 기도 나오지 않는다.

처음 등장하는 조직이라는 말이지.

“나는 본래 별의 기사단이라는 이름의 기사단에 소속되어있었다. 꽤 오랜 역사를 가진 기사단이었지. 마나를 다루는 사상력을 가진 이들이라면 모두 가입할  있었던 기사단으로, 한때는 많은이들이 가입하겠다고 선망하던 기사단이다. 그러나,  기사단은, 단 한 명의 기사, 대런에 의해  개로 갈라지고, 명예를 잃었지.”
“어째서입니까?”
“놈이 힘만이 정의라 부르짖던, 미치광이였기때문이다. 놈이 단순한 미치광이로 끝났다면 거기서 좋았겠지만, 문제는 놈은 실제로 힘이 있었다는 거다. 모두가 한계라고 외치던 녹색 소드 오러의 한계를 최초로 깨부순  놈이었으니.”
“소드 오러는 실제로 초록색이 한계 아닌가요?”

나한테 마나 세이버를 팔아먹은  사람이 거짓말을 한  아니라면, 초록색 너머의 소드 오러는 존재할 수 없었어야 한다.

“대런은 우리가 검에 갇혀있기에 초록색의 한계를 넘지 못하는 것이라 주장했지. 그래서 그 녀석은 검을 버렸다. 아예 마나로 독자적인 검의 형태를 만들어내기 시작했지. 그 끝에, 녀석은 황색의 경지에 다다를 수 있었고.”
“그게 왜 기사단이 갈라서게 된 계기인 거죠? 기사단이 강해질 수 있었으니, 좋은 것 아닌가요?”
“놈은 색과 힘에 광적으로 집착했다. 다음 색으로 넘어가려는 열망이 아주 강했지.  과정에서 자신보다 빠르게 발전하는 기사를 죽이는 일도 심심치 않게 일어났다.”

흔한 클리셰네.

너무 힘만 추구한 나머지 타락해버린, 그런 이야기.

“당연히 그 과정을 좋게 보지 않은 왕께서는 대런과 그의 추종자를 모두 기사직에서 파면시켰다. 덕분에 우리는 별의 기사단에서 추방자로 낙인찍히게 되었지. 하지만 그들은 결국 스스로 독자적인 세력을 구축해서 살아남았다. 다음색으로 넘어가겠다는 열망만 가지고.”
“그래서, 어떻게 됐나요?”
“대런의 의지는 계속 이어졌다. 모두가 어떻게든 다음 색으로 넘어가려 애를 썼고, 자홍색까지는 도달하는 데 성공했지. 하지만 그 누구도 다음 색에 도달할  없었다.”

자홍색이 실제론 한계라는 소리인가?

그런 것치곤, 내 검신과 이 사람의 검신 색도 약간은 차이가 있었던 것 같은데.

“더욱 애석한 것은, 다음 색이 무엇인지 알고 있는데도, 그 색에 도달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자홍색의 검신에 도달한 이들이 점점 자신들의 기술을 갈고 닦음에 따라, 검신이 점점 보랏빛으로 변하는 과정에서, 다음 색이 보라색이라는 것을 유추할 수 있었지. 하지만, 그 누구도 완전한 보라색의 경지에는 도달하지 못했다.”

그 차이였구나.

나의 검신은 붉은색에 조금 가깝고, 이 사람의 검신은 보라색에 조금 더 가까우니, 맞는 말인 것 같네.

“그래서, 별의 기사단에서 갈라져 나온  조직의 이름도, 자색 기사단이 되었다. 모두가 보라색 검신을 뽑는 것을 목표로 하는 기사단이니까.”
“그런데 왜 당신을 제외한 나머지 자색 기사단원이 거의 다 사라져버린 거죠?”
“자색 기사단의 마지막 임무 때문이지.”
“그게 뭐길래?”

첫 번째 임무는 가장 소중한것을 희생할 것이었던  같은데.

“자색 기사단의 모든 단원에게는  가지 임무가 주어진다.  번째 임무. 심홍의 검을 뽑아라. 지금은 가입 자격으로 바뀌었지만, 과거에는 이것이 첫 번째 임무였다.”

첫 번째 임무부터 엄청 빡센 임무 아닌가?

대부분은 여기서 나가리 될 것 같은데.

“임무에서 자격으로 변한 이유가 있나요?”
“자색 기사단은 모두 영식, 릴리움을 익혀야 한다는 원로회의 주장 때문이었다.”
“0식?”

내가 아는 라이트세이버 검법은 1식에서 7성까지다.

0식이 있다는 이야기는 들어본 적이 없다.

“0식(零式)이 아니라, 영식(影式)이다. 역사의 그림자 속으로 사라진 기사단의 검법이라는 의미에서 지은 이름이지. 하유성이라는 놈이 독자적으로 개발해내고, 이름 붙인 검법이지만, 그 위용이 대단했기에 원로회에선정식으로 자색 기사단의 검법이라 인정해주었다. 네가 아는 7성, 우르도 영식에서 핵심 초식들이 모두 빠진, 껍데기에 불과한 것이지.”

결국, 영식을 완성해야 진정한 마나세이버 검사가 된다는 이야기인가.

참, 갈 길이 멀다.

“그렇다면, 영식이 가장 강한 검법이겠네요.”
“아니, 7성, 우르가  강하다. 영식의 모든 기술엔 마지막 초식이 빠져있기 때문이지. 이것은 실제로 빠져있는 게 아닌,  누구도 단 하나의 기술조차완성하지 못했기 때문에, 마지막 초식이 빠져있다고 하는 것이다. 당연히 기술을 완성하기 위해선 자색 검신을 뽑아야 했지.”
“그럼, 우르는 영식의 미완성인 부분을 개량하여, 실전에서 사용할  있게 만든 건가요?”
“정확하다. 우르가 개개인마다 다른 특성을 가지는 이유도 그것 때문이다. 자신의 입맛에 맞게 영식을 개조한 것이니까.”

생각보다 마나세이버 검법의 역사가 복잡하구나.

이런 뒷배경이 있는지는 몰랐다.

“아무튼, 릴리움을 다루기 위해선 최소한 붉은색의 검을 뽑을 줄 알아야 하기에,  임무가 가입 조건으로 옮겨간 것이지.”
“두 번째 임무는 ‘가장 소중한 것을 희생하라’였죠?”
“그래. 검을 익히는 데 있어, 방해만 되는 것들을 모두 버리라는 의미에서 주어지는 임무다.”

정말 극단적인 조직답네.

나야 어쩌다 보니 완수한 것이지만, 다른 사람은 두 번째 임무에서 입구컷 당할 게 뻔했다.

“마지막세 번째 임무, 하늘 아래 같은 색은 존재할  없다. 만약 너와 색이 같은 단원이 있다면, 그를 죽여라.”

…단원이 다 사라질 만도 하네.

저딴 미친 룰 때문에, 자기네들끼리 다 처죽여 버렸을 테니.

“그래서, 남아있는 단원은 몇 명이죠?”
“둘이다. 너와, 나.”
“저는 가입할 의사가 없는데요.”
“내가 너를 제자 삼겠다고 정했다. 네가 좋건, 싫건, 이미 너는 단원이라는 이야기지. 너는 기사단의 사명을 받들어야 한다.”

갑자기 이야기가 이상하게 틀어지는데.

최강의 마나세이버 검사에게 직접 가르침을받는다는 거야 좋지.

하지만, 난 이런 사이코 집단의 단원이라는 오명을 뒤집어쓰기는 싫다.

“너에게 주는첫 번째이자, 마지막 임무다. 나를 죽이고, 영식을 완성해라. 네가 자색 기사단의 유지를 잇는 거다.”
“저는 그럴 만한 인재가 되지 못합니다.”
“아니, 너는 그래야만 한다. 너에겐 재능이 있어. 너와 같은 나이에 자색 기사단에 가입할 수 있었던 자는 단  명도 없다.”

아니, 그래봐야 내가 자홍색 검신을 뽑을  있는 건 극히 짧은 시간뿐인데.

그마저도스스로는 제어하지 못하고, 이따금 위험한 순간에 드문드문 발동할 뿐이다.

“그렇게 죽기를 바라시는 이유가 뭡니까.”
“난 지난 100년 정도의 세월 간 수십 명의 스승과 제자를 죽였다. 분명 나를 제외한 누군가는 영식을 완성해줄 거라 믿었지만, 결국 살아남은 기사단원은 나뿐이었지. 아무도 완성하지 못할  없고, 도달할 수 없는 영역이라고 믿어, 패배한 잔당으로 죽을 날만을 기다리던 와중, 네놈이 나타났다. 어차피 나는이 삶에  이상 미련도 없다. 구차하게 살아남을 바에야, 영식을 완성한 제자의 손에 죽는 게 나아.”

담담한 어투로 말했지만, 피를 토하는 것 같은 그의 심정이 느껴졌다.

하긴, 제자, 동기, 스승이었던 단원은 모두 자신의 손으로 죽였고, 이제 단원이라고  사람은 자신밖에 남지 않았으니 괴롭겠지.

그렇다고 그를 동정하지는 않는다.

어쨌거나, 그는 명백한 빌런이니까.

“제가 어떻게 하길 바라는 겁니까.”
“이제 나는 내가 가지고 있거나, 알고 있는 모든 기술을 너에게 전수해줄 것이다. 네가 그걸 모두 체득할 때쯤이면, 너는 자연히 나를 앞서가 있을 것이다. 그리고, 날 죽여다오. 완성한 영식으로 말이다.”

이렇게까지 간절하게 부탁하니, 거절하기도뭣하네.

제안을 수락하는 것도 나쁘지 않아 보인다.

어차피 내가 이 자를 앞서는 일은 100년이 지나도 찾아오지 않을 테니.

그동안 나는 기술만 빼먹으면 되지.

“되겠습니다. 기사단원이.”
“잘 생각했다. 너는 이제부터 정식 기사단원이다. 스승으로서, 네가 마지막 임무를 완수할 수 있도록 노력해 보마. 나는 항상 이 글렌류나크에서 기다릴 것이니, 도움이 필요하면 이곳으로 오도록 하여라.”
“그런데, 왜 하필이면 이 장소에 머무는 것입니까?”
“글렌류나크는별의 계곡이라는 뜻이지.내가 별의 기사단 소속일 무렵, 이곳에서 전우들과 맹세를 나눴다. 헤어지는 날이 있더라도, 마음만은 언제나 함께하기로. 지금은 별의 기사단도, 자색 기사단도 남지 않았지만, 여전히 이곳이 나에겐 마음의 고향이야.”

좀생이스러운 빌런은 아니구나.

잔혹한 면은 있어도, 의리는 살아있는 남자네.

“알겠습니다. 지금은 이만 날이 늦었으니, 돌아가 보도록 하겠습니다. 내일 다시 찾아뵙겠습니다.”
“바쁜 게 아니라면 매일 찾아오도록 하여라.노력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고개를 돌려 계곡 아래로 내려간다.

내일부터는 고생깨나 하겠네.

아이나랑 하던 훈련도 힘들어 죽을 것 같았는데, 저런 미친 틀딱한테 붙잡혔으니, 몸이 남아나질 않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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