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65화 〉글렌류나크로. (65/173)



〈 65화 〉글렌류나크로.

난 비행기를 타본 경험이 몇 번 되지 않는다.

전생, 현생을 모두 합해도  숫자를 손으로 셀 수 있을 정도니까.

그리고,  모든 경험은 이코노미 클래스가 아니었던 적이 없다.

비즈니스 클래스?

퍼스트 클래스?

전부 나와는 다른 세계의 이야기다.

가볍게 몸을 트는 것조차 불편할 정도로 협소한 공간.

그게 나에게 어울리는 장소였다.

그럴진 데….

나는 지금, 살면서 타볼 일이 절대 없으리라 믿었던, 퍼스트 클래스 좌석에 앉아있다.

트리니티 아카데미에 입학하기 전까지만 해도 컵라면 작은 컵을 살지, 큰 컵을 살지 고민하던 내가 퍼스트 클래스에 타고 있다니.

그것도 동승자와 함께 말이다.

뭐, 로또에 당첨됐다거나, 사놓은 암호화폐가 떡상했다든가 하는 일이 일어난 건 아니다.

당연히 내 주인님이 예매해주신 거지.

아무리 아이나가 양갓집 공녀라 해도, 퍼스트 클래스면 돈이 제법 많이 들었을 텐데, 배포가  크다.

“그렇게 신기해?”
“퍼스트 클래스는 처음 타 봐.”

진짜 신기하다.

좌석마다 개인용 수납공간도 있고, 의자도 무척이나 편했다.

기내 잠옷도 따로 주고, 화장품이나 간단한 용품이 담긴 파우치 같은 것도 지급해줬다.

나중에 알아보니 어메니티 키트라고 부르는 모양이었다.

남자인 내게는 크게  데가 없어 보이지만.

“나중에 비행기 탈 일 있으면 말해. 내가  대신 끊어줄게.”
“아냐, 괜찮아. 이코노미 클래스라고 못 탈 건 없어.”
“네가 편해야 내 마음이 편해.”
“난 괜찮다니까.”

나는 한사코 거절했다.

퍼스트 클래스 비행기 표가 어디 한두 푼 하는 물건도 아니고.

사실 이번 스코틀랜드행도 원래 같았으면 이코노미 클래스로 따로 갔을 것이다.

단지, 아이나가  명의 표를 미리 끊어버렸기 때문에, 그러지 못했을 뿐.

잠시 시간이 지난 뒤, 웰컴 드링크가 나왔다.

열대과일 스무디  잔, 밀크티  잔, 녹차 한 잔.

다소 뜬금없이 껴있는열대과일 스무디의 주인은 나다.

계집애 같은 취향이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나는 별로 신경 쓰지 않는다.

맛있으면 된 거 아냐?

“나도 그거 먹어볼래.”
“그래.”

나는 흔쾌히 마시고 있던 스무디를 프리실라에게 건네주었다.

그러자, 아이나의 표정에 미묘한 변화가 드러났다.

뭔가 불편한 점이라도 생긴 건가?

…아.

간접키스라고 생각했구나.

최근, 아이나에게서 의외인 점을 하나 발견했다.

생각보다 그녀는 디테일한 면에 신경을 많이 쓴다는 것.

주변을 백안시하는 냉혈한인 줄만 알았는데, 생각보다 섬세한 성격의 소유자였다.

단지, 그런 점에 휘둘리지 않으려고 노력하고 있던 것이지.

“맛있네. 남자애 취향은 아닌 것 같지만.”
“난 단  좋아.”
“애 입맛이네.”
“난 애가 맞아.”

고등학생이면 애가 맞다.

아니, 나는 20대 중반까지도 애라고 생각한다.

30대 정도는 되어야 좀 나이를 먹었다고  수 있는 거지.

어쩌면  세계 기준으론 50대도 애일지 모른다.

40대인 빈센트가 아직 창창한 젊은이로 보이고, 100세를 넘긴 오스카도 중년 정도로 보이는 수준이니까.

100세가 넘었음에도 여전히 10대 같은 외모를 자랑하는 클로에도 있지만, 이건 사상력을 이용한 것이니, 논외고.

“하긴, 우리는 애가 맞아.”
“빈센트 교수님만 봐도 애 같잖아.”
“그건 빈센트 교수님이 이상한  아냐? 오셀롯 아카데미에선 빈센트 교수님보다 젊은데도 완전 꼰대 같은 교수님 많았어.”
“그런가?”

그렇게, 가벼운 잡담을 주고받고 있다 보니, 어느새 비행기는 안정 고도에 진입했다는 안내가 기내에 울려퍼졌다.

그와 동시에 기내 서비스도 시작됐고.

뭐,기내 서비스라고 특별할  없었다.

주전부리를 곁들인 음료 서비스 정도가 끝이었으니.

첫 기내 서비스로부터 시간이 조금 흐른 뒤, 승무원이 기내식 메뉴판을 우리에게 나누어주었다.

엄청 호화롭네.

메뉴판은 내가 입에도 대본  없는 음식들로 가득했다.

파인 다이닝이나, 5성급 이상 호텔에서나 볼법한, 그런 메뉴만 있었으니.

뭐가 맛있는지 길이 없는 나는, 그냥 아이나가 고른 메뉴를 따라 고를 뿐이었다.

뒤이어, 테이블 세팅을 해준 승무원이 기내식을 내오기 시작했다.

“맛있는데?”
“…네가 좋아할 만한 메뉴들로 뽑았으니까.”
“네가 고른 거 아냐?”
“어차피 나 따라 고를 것 같길레, 기왕이면 네가 좋아할거 같은 메뉴들로 뽑았지.”

이런점이 섬세하다는 거다.

저런 걸 다 기억하고 있는  보면.

나도 내가 좋아하는지 잘 모르는데, 어째 나보다 나를 더  아는 거 같다.

“자, 입 벌려.”

아이나는 먹기 좋게 썰어놓은 고기 한 점을 집어 내 입에 가져다 댔다.

“왜?”
“너 주려고 같은  시킨 거니까.”
“너 먹어.  괜찮아.”
“잔말 말고, 빨리.”

하는 수 없이 아이나가 내민 고기를 베어 물었다.

여기선 그녀도 절대 굽히지 않을 것 같았기에.

 받아먹는 내 모습이 마음에 들었던 것인지, 아이나는 기특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당연히 프리실라는 얼굴을 잔뜩 찌푸리고 있었고.

물론 그런 것 따위 신경 쓸 아이나가 아니었다.

나의 완고한 거절 의사에도 그녀는 손수 떠 먹여주는 행위를 멈추지 않았으니.

결국 나는 억지로라도 그걸 모두 받아먹어야 했다.

그마저도 가족석의 좌석 측면이 열려있지 않아서 그런 것이지.

만약 개방된 좌석이었으면 난 어떻게 해서든지 그것을 거부했을 것이다.

물론 이런 미녀가 먹여주는 상황 자체야 너무 좋지.

그냥, 남들이  보는 앞에서 그러는 게 부끄러울 뿐.

아무튼, 바닥을 드러낼  모르던 접시도 어느새 바닥을 보이고있었다.

프리실라와 아이나는 식사가 끝난 뒤로도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는 눈치를 내게 계속 보내고 있었지만, 나는 그것을 외면했다.

식곤증으로 인해 밀려오는 졸음을 견디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아예 이부자리를 틀고 누워버린 내 모습에, 둘도 포기한 듯, 각자 자신의  일을 시작했다.

덕분에 쉽게 잠들 수 있었으니, 나야 좋았지만.

* * *

따뜻하기만  트리니티 아카데미에서 벗어나, 추운 지방인 스코틀랜드로 오니 감회가 남달랐다.

한국이었으면 이미 무더위로 한참을 고생하고 있을 6월인데, 여기는 차가운 기운이 남아있었기 때문이다.

“내 고향이지만, 이 추위는 참 마음에 안 들어.”

의외로 우리 셋 중에서 추위를 가장 많이 타는 것은 프리실라였다.

가장 추운 지방 출신이면서, 가장 추위를 많이 탄다니.

아이러니하네.

“입어.”

나는 외투를 벗어 프리실라에게 건넸다.

나야 워낙 추위에 무딘 성격이라, 외투 정도야 벗어줘도 상관없었다.

“고마워.”

프리실라는 붉어진 얼굴로 외투를 걸쳤다.

사실 여기까지의 반응은 어느 정도 예상한 바였다.

내가 예상하지 못한 것은, 이다음의 반응이었지.

“나도 추운데.”

아이나가 내 손을 붙잡았다.

아무리 봐도 거짓말이다.

그 미츠루 아이나가 추위를 느낀다니, 상상할 수 없는 일이다.

아니, 설령 느낀다고 한들, 그걸 표현할 인물이 전혀 아닌데.

“춥다니까?”

뭘 어떻게 해줘야 하는 거야.

이미 외투는 프리실라에게로 떠났다.

내가 더 이상 해줄 수 있는 게 떠오르지 않는다.

나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아이나의 눈치만 살폈다.

결국, 이번에도 먼저 행동에 나선 것은 아이나였다.

“내가 참을성이 좋다고는 하지만, 기다리는 걸 좋아하진 않아.”

아이나가  품에 들어왔다.

이제는 어느 정도 눈치가 생겼기 때문에, 나도 말없이 그녀를 안아주었다.

꽤 긴 시간 동안.

“이제 됐어?”
“조금만 더.”

당연히 나에게 그 요구를 거절할 권리 따윈 없었다.

그래서, 지금까지 그녀를 품에 안고 있었던 시간만큼, 더 안아주기로 했다.

“이제 됐어. 충분해.”

평소처럼 새침한 표정의 아이나로 다시 돌아왔다.

그런 아이나도 좋지만.

“그래서, 곧바로 글렌류나크가 있는 글렌 코로 갈 거야?”
“그러려고.”

나도 기왕이면 놀고 싶다.

그럴  없으니 문제인 거지.

해당 사건이 일어나는 날짜를 정확하게 알고 있다면 편하게 움직일 수 있었겠지만, 작중에선 이맘때쯤이라는 두루뭉술한 표현뿐이었기에,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글렌류나크에서 미리 기다리는 방법밖에 없다.

“하루만 우리 집에서 머물면 안 돼?”

프리실라의 제안이었다.

고민되네.

솔직히 피곤하기도 하고.

하루 정도만  프리실라네에서 묵을까.

그러겠다고 대답하려는 순간, 아이나가 내 눈을 흘겼다.

그 행동에는, 꽤 많은 의미가 담겨있는 것 같았다.

그걸 일일이 하나하나 다 해석할 수 있을 정도로 내가 눈치가 좋은 편은 아니지만, 딱 하나의 의미만큼은 알아차릴 수 있었다.

그러리라 대답하면 용서하지 않겠다는, 그런 의미.

차라리 평소처럼 냉소적인 표정이라면  모르겠는데, 입은 웃고 있는 게,  불안하다.

“아냐, 그냥 글렌 코 근처의 숙소를 잡는 게 나을 것 같아.”
“그래? 아쉽네.”

프리실라에게서 이글거리는 분노가 느껴진다.

아이나의 훼방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것이겠지.

“글렌 코까지는 따라가도 되지?”
“뭐,  정도까지는 괜찮지.”

글렌 코까지야 얼마든지 따라와도 된다.

다만, 글렌 코 같은 촌구석에 따라와봤자, 재미없는 건 너희지.

“그럼 얼른 가자. 날이 어두워지기 전에. 글렌 코는 이쪽에서 공항 버스 타면 금방이야.”
“가자, 아이나.”
“응.”

* * *

프리실라의 말대로, 글렌 코까지 오는 데엔 그리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오히려, 숙소를 정하는 데 걸린 시간이  오래 걸렸다.

“우리 집이 더 좋겠다.”
“동감이야.”

샤워를 끝마치고 나오니, 프리실라와 아이나는 숙소에 대한 불만을 토로하고 있었다.

사실, 불만이 나오는 게 당연했다.

나름 고르고 고른 숙소라는  트리니티 아카데미의 기숙사보다시설이 좋지 못했으니까.

허나, 글렌 코 자체가 그리 번화한 동네가 아니다 보니, 좋은 숙박 시설이 드문 게 당연했다.

트리니티 아카데미는 무식할 정도로 돈을 많이 때려 박는 곳이니, 시설이 좋을 수밖에 없고.

“오래 머물 것도 아니니까. 이 정도로 만족해.”
“너는 이런 곳에서 자도 괜찮아?”
“나는 등따시게 누울 수 있는 공간만 있으면 어디든 상관없는데?”

그렇게 대답하고, 침대에 몸을 던졌다.

음, 확실히 트리니티 아카데미의 침대보다 별로인  사실이네.

사람들이 업그레이드는 체감이 잘 안 되지만, 다운그레이드될 때 역체감은 무척이나 심하다던데, 그 말이 사실이었다.

“너희가 왜 별로라는 지는 알겠다. 차라리 기숙사가 나아.”
“그래, 그렇다니까?”
“그래도 어쩌겠어. 받아들여야지.”

원래 불편해하는 놈이 지는 거다.

주변에 빨리 적응해야 살아남는 법이라고.

“근데, 왜 벌써 누워? 자려고?”
“자야지. 나 피곤해.”

별로  것도 없는 주제 피곤하다는 이야기를 꺼낸다니 우습기도 하지만, 거짓말은 아니었다.

온종일 이리저리 이동만 해댔으니, 피곤할 수밖에 없지.


“그래, 잘자.”

그러나, 나는 쉽게 잠들  없었다.

 옆에서 자겠다는 아이나와, 피곤할 테니혼자 자게 놔두라는 프리실라의 사투가 벌어졌기 때문이다.

이럴  알았으면 그냥 글렌 코에 혼자 온다고 할 걸 그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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