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64화 〉흑과 백. (64/173)



〈 64화 〉흑과 백.

그가 깨어나기만을 기도했다.

괜찮을 것이란 의사가 당부가 있었음에도, 한사코 그의 곁을 떠나지 않았다.

이대로 그의 곁을 떠난다면, 다시는그의 얼굴을 볼 수 없을 것만 같았기에.

혹여 그의 잠을 방해할까, 소리도 내지 않았다.

잠시라도 그의 모습을 놓치기 아까워서, 자지도 않았다.

잠깐 시간을 확인한 사이에 그가 일어날까, 시계조차 보지 않고, 마음속으로만 숫자를 셌다.

62,177… 62,178… 62,179.

내겐 전혀 길다고 느껴지지 않는 시간이다.

 오랜 시간도 많이 참아보았으니까.

시간 따윈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다.

괴로운 것으로만 따지면, 허기가, 수마(睡魔)가, 하체의 피가 통하지 않는 고통이 훨씬 괴로워야 했다.

하지만, 전혀 괴롭지 않았다.

다시 그와 함께할 수만 있다면.

물론, 그가 나를 다시 받아주리라 생각하지는 않는다.

아쉽다.

설령 그와 이별하게 되더라도, 좋은 모습으로 이별하고 싶었는데.

이렇게 눈물로 얼룩진 자국이 가득하고, 옷에는 주름이 잔뜩 지어있어, 매무새가 엉망이  모습으로 너를 보고 싶지는 않아.

언제나 좋은 모습만을 네게 보여주어야 했는데.

그럼에도 너는 분명히 ‘괜찮다’고 해주겠지.

그런 네가 좋아.

내가 어떤 모습을 하고 있어도, 이해해주던 네가 다시 보고 싶어.

가문의 어른들이 본다면 분명히 호통을 치겠지.

‘가문의 당주 될 사람이 무슨 추태를 보이는 것이냐’며.

그런 건 아무래도 좋다.

지금,  순간만큼은,  미츠루 가문의 당주가 아니다.

그를 사랑하는 한 명의 여자일 뿐.

구태여 연인이라는 말을 덧붙이지는 않으리라.

나에겐 이제 그럴 자격이 없으니까.

하지만, 다시 그때처럼 돌아갈 수만 있다면….

당당히 그의연인이라고  수 있었던, 그때처럼.

* * *

손에서 느껴지는 금속의차가움에 잠에서 깨어났다.

눈을 뜨니, 흑발을  묘령의 여자가 내 손을 붙잡고 있었다.

당연히, 아이나다.

“…몸은 괜찮아?”

그녀의 눈가에 눈물 자국이 번져있다.

항상 정갈했던 그녀의 긴 머리도 헝클어져 있었고.

군복처럼 맵시가 살아있던 옷에도 주름이 잔뜩 지어져 있었다.

정녕, 이 사람이 내가 알던 미츠루 아이나가 맞나 싶을 정도로, 그녀는 본래의 모습을 많이 잃어버렸다.

다른 누군가가 보아도 그럴 것이다.

그만큼 흐트러진 모습을 남에게 보이기 싫어하는 사람이었으니까.

“내가 여기 얼마나 오래 누워있었지?”
“17시간 하고, 38분, 52초.”

저걸 세고 있었다니.

내게 가만히 앉아서 숫자만세고 있으라 한다면, 아마 100도 넘기지 못할 것이다.

“그럼, 그 동안 계속 옆에 있었던 거야?”
“응. 불편해? 돌아갈까?”
“아니야, 고마워.”
“미안해….”

아이나의 눈가에 다시 눈물이 맺혔다.

그녀는 지금 어떤 마음으로 눈물을 흘리고 있을까.

나로서는 알 길이 없다.

하지만, 적어도 그녀에게 항변의 기회 정도는 주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나는 잠자코 그녀의 말을 기다렸다.

“내 잘못이 맞아. 너한테 지은 죄도 깊어. 용서해달라는 말도하지 않을게. 네가 어떤 선택을 해도 받아들일 거야. 대신, 한 가지만 부탁하고 싶어.”

그녀가 나에게 부탁할 게 있나?

나보다 한참 잘난 사람인데.

“앞으로도, 널 좋아하는 이 마음을, 쭉 간직해도 될까.”
“그게 무슨 소리야?”
“말 그대로야. 널 계속 좋아하는 채로 있고 싶어.”
“무슨 의민지 모르겠는걸.”

이해하기 어렵다.

그녀 본인의 말에 따르면, 이미 날 좋아하고 있는 것이 아니었나?

“널 좋아하고 싶다는 말과는 달라. 그 말은 마치, 널 좋아하지 않았다가, 이제 와 좋아한다는 것처럼 들리니까. 하지만, 난 네게 내 마음을 전한 뒤로, 한 번도 널 좋아하지 않았던 적이 없어. 아니, 절대로 그러고싶지 않아. 그렇지만… 이런 나는 더 이상 널 좋아할 자격이 없겠지. 그래서, 너의 허락을 구하고 싶어.”

그녀의 눈가에 맺혀있던 물방울이 아래로 떨어진다.

한 방울.

“한순간이라도, 그대를 미워하고 싶지 않아요.”

 방울.

“부디, 이 마음만은, 간직할 수 있게 해주세요.”

떨어지는 물방울의 줄기가 굵어진다.

나는 눈에서 흐르는 그 적로(滴露)의 수를 세는 것을 그만두었다.

이미 숫자로 세기엔 너무 많이 떨어졌기 때문이리라.

대답은 하지 않았다.

아이나의 간절한 청을 대답만으로 퉁치기에는. 말로는 너무나 부족했기 때문이다.

나는 고개를숙인 채 입술만 짓씹고 있는 그녀를 안아주기로 했다.

떨리는 그녀의 몸에서 냉기가 느껴졌다.

다만, 주변에 대한 적의로 가득한 어제의 한기와는 달랐다.

활력을 잃고, 죽음에 가까워지는 듯한 냉기였다.

내 대답이 마음에 들어서 그런 것인지, 온기를 되찾고 싶어서였는지는 모른다.

아이나는  깊숙이 내 품에 파고들었다.

그녀의 심박을 피부로 알아차릴 수 있을 정도로.

그녀가 내 체온을  갈망함에 따라, 몸은 자연스레 침대 쪽으로 기울어졌다.

아무도 그것에 저항하지않았다.

몸이 이끄는 대로, 나도, 그녀도, 서로를 안은 채 침대에 몸을 뉘었다.

아이나를 모두 품에 넣을 정도로 넓은 가슴이 아닌 게 아쉬웠다.

팔을 옆으로 뻗어야그녀가품에 들어왔지만, 아이나를 위해서라면, 팔 한쪽 정도는 기꺼이 내어줄 수 있었다.

그렇게, 나는다시금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이전과 다른  있다면, 내 곁에는 아이나가 있다는 것이었다.

* * *

문을 열고 병실에 다시 들어섰다.

의료용 침대라기엔 지나치게 호화로울 정도로  침대에, 흑발의  남녀가 누워있었다.

그 아이나가 하잘것없는 필부의 품에 꼭 달라붙어 잠들어있는 모습은 세간을 떠들썩하게 만들기에 충분하겠지.

아까 전까지만해도 분노가 치밀어 올랐는데, 평온해보이는 둘의 모습을 보니 그런 기분이 전혀 들지 않는다.

참, 때어놓기 어렵네.

당장 헤어져도 안 이상할 것 같은 분위기였는데.

시기심이 들었다.

왜 항상 네 옆자리는  년의 것인가, 하고.

물론, 아이나만큼 지극정성으로 옆을 지킨 건 아니지만, 나도 밤낮을 지새우며 옆을 지켰어.

그렇다면, 나도 나머지 옆자리 정도는 차지해도 괜찮은 것 아닐까?

둘이 깨지 않게, 조용히 움직여, 평온한 표정으로 잠들어있는 그의 곁으로 다가간다.

내 연적(戀敵)을 껴안고 있는 팔을 슬며시 풀어, 내 쪽으로 가져왔다.

 팔을 베개 삼아 누웠고.

…뭔가 부족해.

아이나에게 질 수 없다는 마음에, 나도 그에게 더 밀착했다.

그리고,그를 안았다.

그 순간, 반대편에 누워있던 아이나의 눈이 나와 마주쳤다.

묘한 기류가 흐르는 가운데, 생각 외로별다른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싸한 분위기가, 각자의 행복한 시간을 방해하는 것은 좋지 않을 것 같다는, 무언의 합의가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둘은 동시에 눈을 감았다.

백색 성주와 검은 후작의 결투는, 그렇게 잠시 소강상태로 접어들었다.

* *

팔자에도 없는 호사를 누려보는 게 얼마만 인지 모르겠다.

어떻게든 퇴원하는 데까진 성공할 수 있었지만, 안정을 취해야 한다는 의사의 말을 잊었느냐며, 두 명의 미인으로부터극진한 대접을 받고 있었다.

…좋기야 물론 좋지.

근데이렇게 병상에 누워만 있는 것도 지겹다.

아카데미 밖으로 나가고 싶다는 생각도 든다.

아니, 나가야만 하는 일이 생겼다.

“얘들아.”
“왜?”
“슬슬 밖에도 나가 봐야 할  같아.”
““안 돼.””

흑과 백이 일시에 대답했다.

언제부터 죽이 저렇게  맞았는지 모르겠네.

“나도  편하게 내 할 일을 하고 싶어.”
“그 말은, 우리가 불편하다는 소리야?”
“아니, 그건 아니고….”
“우리가 얼마나  편의를 봐주고 있는데?”

그래, 그건 분명히 사실이다.

하지만, 아카데미 밖의 상황도 조금은 알아야 하지 않겠는가.

사실, 그보단 잊고 있었던 일이 기억나서였지만.

“퇴원 한지 고작 이틀째잖아.”

아이나가 타이르듯이 말했다.

“약만 꾸준히 챙겨 먹으면 괜찮다고 의사도 말했는데.”
“음… 어디로 가고 싶은데?”
“스코틀랜드.”

한순간, 친절로 가득했던 아이나의 눈에 살의가 깃들었었다.

프리실라의 눈에는 승자의 기쁨이 보였었고.

결코 둘을 차별하려는 의도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단지, 이 시기에 한 빌런 조직의 단원들이 스코틀랜드에서 대거 실종, 사망하는 사고가 벌어지기에, 그것을 조사하기 위해서였다.

이들이 단순히 평범한 빌런 조직이라면 관심도 가지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내가 관심을 가지는 데에는  이유가 있는 법.

이 조직은 추후 솜니엄리버레이터의 산하 조직으로 귀순하게 되는 조직이라는 점에서 조사해볼 가치가 충분히 있다.

그 조직을 쓸어버린 게 누군지는 작중에서도 등장하지 않았지만.

왜, 오월동주(吳越同舟), 용적우아(用敵于我)라고 그러지 않았던가.

그가 나와 뜻을 같이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얼마든지 먼저 손을 내밀 수 있다.

그렇지 아니할 가능성이 더 크겠지만.

“…왜 하필스코틀랜드야?”
“나한테도 기회를 주겠다는 소리겠지. 다른 뜻이 있겠어?”
“만나봐야 할 사람이 있어.”
“그게 누군데?”
“너희는 몰라.”

나도 모르는데, 너희가 어떻게 알겠어.

“꼭 스코틀랜드로 직접 가야만 하는 거야?  사람을 우리가 부르면 안 되고?”
“어, 그래야만 해.”
“그게 어딘데?”
“글렌류나크(Glenrionnag).”

프리실라의 눈살이 찌푸려진다.

자신의 고향이자, 명소인 에딘버러를 거르고, 글렌 코 같은 촌구석에 있는 글렌류나크에 가고 싶다하니, 그럴 만도 하다.

하지만, 미래의 솜니엄리버레이터 단원을 상대로 일어난 대학살이, 글렌류나크에서 일어나기 때문에, 나는 그곳으로 밖에 갈  없다.

“왜 하필이면 글렌류나크야?”
“만나봐야 할 사람이 거기 있어.”
“후, 그 에딘버러에서 같이 있으면 안 돼? 아이나, 웬일로 네가 이런거에 아무 말도 없이 조용히 있어?”
“아무 말 없이 믿어주기로 했으니까.”

사실, 믿어주든 말든 별 상관없다.

저 둘이 날 뜯어말렸어도난 어떻게든 글렌류나크로 떠났을 거니까.

그럼에도 날 지지해주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은 기쁘네.

“그래, 그럼 가자.”

프리실라는 깊은 한숨을 내쉬며 대답했다.

“대신  가지만 약속해. 절대 혼자 다니지 않기로.”
“대신 한 가지만 부탁하자. 글렌 코에서부터는 나 혼자 다닐게.”

의견이 첨예하게 대립한다.

하지만 어쩔 수 없다.

나는 예로부터 궁금한 건 참지 못하는 성격이었으니까.

놈이 빌런인지, 히어로인지는 관심 없다.

그 염병할 솜니엄리버레이터놈들만 다 쓸어버릴 수 있으면, 아무래도 좋은 것이다.

즉, 나는 지금 하려는 행동은, 뜻만 맞는다면, 빌런과 결탁하겠다는 소리나 다름없다.

이걸 들으면 그녀들이 무어라 하겠는가.

아마 다리를 잘라서라도 못 가게 했겠지.

이렇듯, 이번 일은 절대 남에게 떳떳하게 말할 수 없는 일이라, 다른 사람을 데리고 가긴 어렵다.

위험도 도사리고 있고.

나라고 빌런이 두렵지 않은 것은 아니다.

하지만, 나에게는 상당히 좋은 감지 계통의 사상력이  가지나 있으니,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관찰만 하는 정도라면 별문제 없겠지.

손을 잡을 수 있는 상대로 보인다면 손을 잡는 거고.

“안 돼. 그러면 절대 허락 못 해줘.”
“여기에 계속 구금돼 있으라고?”
“보호지.”

그렇게, 유치한 실랑이가 시작되었다.

장장 3시간의 사투 끝에, 결국 나의 승리로 끝났지만.

과연 이번엔 어떤 사건이 나를기다리고 있을까.

기대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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