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3화 〉하트브레이커.
그로부터 며칠이 지났다.
숙취로 고생하던 날이 엊그제만 같네.
이제 상당수의 생도는 모두 자신이 있어야 할 곳으로돌아갔고, 소수의 인물만 아카데미에 남아있다.
교원이라고 다를 건 없다.
빈센트는 새 차를 뽑은 기념으로 미국 횡단 여행을 떠났으며, 오스카는 자신의 요트와 함께 대양 어딘가로 사라졌으니.
본래라면 S클래스의 생도 또한 한 명도 트리니티 아카데미에 남지 않았어야 한다.
그랬어야 할 터인데….
어째서인지, 아이나와 프리실라는 여전히 아카데미에 남아있는 채다.
아이나에게 돌아가지 않느냐고 몇 번이나 되물어도, 전혀 돌아갈 생각이 없다는 대답만 받았다.
프리실라는…딱히 묻지 않았다.
그런 일이 있었는데, 먼저 이야기를 꺼내기도 뭣하지.
이래가지곤 차라리 내가 떠나는 게 나은 상황이 되겠네.
침대에 누워 이 상황을 어떻게 타개해야 할지 고민하던 와중, 프리실라로부터 연락이 왔다.
스카이라운지에서 보자는 연락이.
별 것 아닌 거면 좋겠네.
* * *
“아직도 그렇게 생각해?”
“무슨 소리야?”
프리실라는 마주치자 마자 영문도 모를 소리를 늘어놓았다.
아직도 그렇게 생각하냐니.
무얼 말인가.
“차라리 그때처럼 대놓고 말하라고. 속 시원하게 놓아줄 테니까. 언제까지 날 답답하게 만들 생각인데?”
“정말 모르겠는데.”
그러자, 그녀가 내 정강이를 걷어차며 말했다.
“네가, 나랑 있는 게 불편하니, 거리를 둬줬으면 좋겠다면서!”
“내가 그랬다고?”
고통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프리실라의 말이 너무 황당했기 때문이리라.
“내가 언제 그랬는데?”
“지금 나랑 장난쳐?”
두 번 걷어차이고 말았다.
이번엔 꽤 아팠다.
하지만 난 정말 모르는 일이다.
난 프리실라에게 그렇게 모질 게 대했던 적이 한 번도 없다.
“난 진짜 모르는 일인데….”
“그럼, 네가 한 일이 아니기라도 한 거야?”
“진짜 난 기억에 없어.”
난감함에 머리만 긁적였다.
진짜 난 그런 기억이 전혀 없는데, 프리실라는 자신의 기억이 맞다 박박 우기고 있었으니까.
“잠깐.”
갑자기 프리실라가 내 손목을 붙잡았다.
“너, 왼손잡이지?”
“당연하지. 지금까지 몰랐어?”
“…이 씨발년이.”
갑자기 그녀가어딘가로 향하기 시작했다.
대체이게 무슨 상황이람.
그녀는 주위의 것은 안중에도 없다는 듯, 신경질적인 걸음만 밟았다.
당연히 나도 그녀가 향하는 곳으로 따라갔다.
그리고, 그성난 전진이 멈춘 곳은 아이나가 있는, 북문의 작은 정자였다.
“불청객을 데리고 왔네?”
“야, 이 씨발년아.”
프리실라는 성큼성큼 아이나에게로 걸어가, 아이나의 따귀를 후려쳤다.
그것도 아주 큰 소리가 날 정도로.
그럼에도, 아이나는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때 보여주었던 음산한 미소를 다시 지을 뿐이었다.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건지 모르겠다.
그 유순한 프리실라가 저런 욕까지 해가며 남에게 화를 내는 건 처음 본다.
심지어 손찌검까지.
“서운하네. 당연히 내 편을 들어줄 거라 생각했는데. 괜찮아. 그래도 난 널 좋아하니까.”
아이나는 내 곁으로 다가와 팔짱을 꼈다.
다만, 평소의 온화한 기분은 전혀 느낄 수 없었다.
오히려 차디찬 한기가 내 옆에서 머무는 느낌이다.
여자가 한을 품으면 오뉴월에도 서리가 내린다더니, 그 말이 어떤 의미인지 아주 잘 알 거 같다.
“그런 식으로 남의 걸 훔쳐 가니까 좋아?”
“난 훔쳐 간 적이 없어.”
“네가 박성진을 조종해서 그렇게 말하게 만든 거, 내가 모를 것 같아?”
날 조종해서 그렇게 만들었다고?
“대체 무슨 소린지 모르겠는데?”
“네 서드 어빌리티가 정신 지배라는 건 이미 자명한 사실이지.”
“사실이지.하지만, 유감스럽게도 난 아직 누군가를 조종할 정도는 못되는데.”
“네가 갑자기 레이븐과의 전투 기록을 급격히 단축하는 데 성공했다는 걸 들었을 때부터 수상하다고 느꼈어. 박성진의 잔머리에도 그렇게 쉽게 당하던년이, 그보다 훨씬 영악한 레이븐과의 전투 기록을 갑자기단축한다? 말도 안 되는 소리지.”
솔직히 나도 뭔가 이상하다고 느끼긴 했다.
근데, 그게 이번 일과 무슨 연관이 있는 거지?
“그 뒤로, 내 주변에서 가끔 이상한 동물들이 보이더라. 보라색 눈을 한 생물들이. 난 자연에서 한 번도 보라색 눈을 가진 생물을 본 적이 없어. 그것도, 내가 박성진이랑 만날 때 유난히 더 자주 보이더라고. 이상하지 않아?”
나도 한 번 본 기억이 있다.
보라색 눈의 청서.
“마지막으로, 박성진은 얼마 전에 내가 부담스럽다며 자신과 거리를 둬 달라고 말했었지. 근데, 당사자는 그런 말을 했다는 기억이 없다네? 거기다, 박성진은 왼손잡이야. 근데, 그날 박성진은 유달리 오른손을 많이 쓰더라고. 이상하다고 느껴서 되돌아보니, 그때 박성진의 눈에도 희미한 보랏빛이 감돌고 있던 게 떠오르더라고.”
이 상황이 이해가 안 되는데.
뭐가 어떻게 굴러가는 거지.
“네가, 박성진에게 서드 어빌리티를 사용해서, 그렇게 말하게 만든 거잖아!”
“…생각보다 눈썰미가 좋네?”
“도대체 나한테 그렇게까지 한 이유가 뭔데? 나는 남을 좋아하면 안 돼?”
“사랑하니까. 나만이 그걸 가져야 해.”
…그러니까, 아이나는 내게 정신 지배를 걸어, 프리실라와 멀어지게 하려 했다는 거 아냐.
이제 이해가 가네.
레이븐과의 전투 시간을 극단적으로 단축할 수 있었던 것도.
나도 모르는 사이에 아이나와 스킨십을 하고 있었던 상황도.
몇몇 상황에서 묘하게 시간이 어긋나있음을 느꼈던 적도.
다 아이나가 내게 서드 어빌리티를 사용했던 순간이었구나.
“그렇게 자신이 없어?”
“무슨 헛소리야?”
“박성진이 널 좋아하는 것도, 다 네가 정신을 조작해서 그렇게 만들면 되는 거잖아? 실제로는 너한테 별 관심이 없었는데.”
…일리가 있어.
정신 지배를 사람에게 걸 수 있다 쳐도, 아직은 그럴 수 있게 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것이다.
타인의 기억이나 감정까지 전부 컨트롤 할 수 있지는 않겠지.
…하지만, 지속적으로 사용한다면, 그마저도 충분히 바꿀 수 있으리라.
“내가 구차하게 그런 짓을 할 것으로 생각해?”
“네 남자친구는 그렇게 믿나 본데?”
“내가 저런 추잡한 짓을 했으리라 생각하는 거야? 나에겐 가문의 명예가, 나 자신의 명예가 걸려 있어!”
“더러운 일이나 하는 가문의 명예가 떨어질 데가 어디 있는데? 아마 이게 다른 사람들에게 알려져도 ‘뭐, 그런 가문이니까’ 하고 넘어가지 않을까? 너 자신의 명예? 알프레드도, 제롬도 못 이기다가, 고등부에갓 입학한 신입에게 마저 진 너의 명예가 어딨는데?”
그 순간, 표창이 프리실라의 관자놀이를 스쳐 지나갔다.
“할 말이 없었나 보지?”
“너 따위를 죽이는 건, 아무것도 아니야. 그럴 만한 가치가 없기에 하지 않는 거지.”
“그래? 그럼 나중에 네 꼭두각시놀음에 장단을 맞춰주고 있는 박성진도, 질려 버리면 언제든지 죽여서 없애겠네? 아, 그러려고 간택한 거야? 박성진은 아무런 뒷배가 없다며? 쥐도 새도 모르게 사라져도 금방 잊힐 테니까.”
속이 메슥거린다.
물론 나도 아이나를 믿고 싶다.
하지만, 눈덩이처럼 불어나는 의심의 감정은 그리 쉽게 사라지는 게 아니다.
현기증이 느껴진다.
만일, 아이나가 정말로 그런 이유로 나를 좋아한다고 말한 것이라면…
“정말 그런 이유였어? 아이나?”
“내가 그럴 리가 없잖아!”
“미안, 난 잘 모르겠어. 널 정말로 믿어도 되는 건지.”
나는 이때, 아이나의 두 번째 눈물을 볼 수 있었다.
“미안해. 나만 봐주길 바라는 마음에서 그랬어. 결코 널 가지고 장난치려 했던 건 아니야. 프리실라에게 널 뺏기는 게 아닐까 싶어서, 초조해져서 그랬어. 한 번만 나를 용서해주면 안 될까?”
눈물까지 보이는 걸 보면 진심일 가능성이 훨씬 크다.
하지만… 그녀의 가문과 성격을 생각해본다면 악어의 눈물 정도는 얼마든지 흘릴 수 있을 것이다.
어쩌면 이미 그렇게 흘린 눈물이 호수 하나를 메울 수 있을 정도일지도 모른다.
어떻게 해야 할까.
마음 같아선 그녀를 용서해주고 싶다.
다시 그녀의 온기도 느끼고 싶고, 이따금 달콤한 맛이 나던 그녀의 입술도 맛보고 싶다.
근데, 이젠 선뜻 그러기 어렵다는 기분이 들었다.
아니, 이런 상황을 몰고 온 건 내 책임인가.
진작에 프리실라와 선을 그었다면, 그녀도 이런 과격한 수단을 택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세상이 핑 도는 느낌이네.
숨이 가빠진다.
심장을 쥐어짜는 듯한 격통도 밀려온다.
분명 약은 꼬박꼬박 잘 챙겨 먹었는데.
아니지, 이런 상황 정도야 자주 있었으니까.
괜찮을 거야.
괜찮아야만 하는데.
그렇게 의식을 잃었다.
* * *
“뭐야? 얘 왜 갑자기 쓰러져?”
“전부, 내 잘못이야….”
“뭔데? 말을 하라고!”
“얘, 원래 심장병을 앓고 있었어.”
* * *
난, 어떻게 해야 했지?
이대로 널 가만히 뒀다면, 널 빼앗길 것만 같아서.
그걸 두고만 볼 수는 없어서― 아니, 그건 전부 핑계야.
그냥, 내 과욕이 불러일으킨 문제였어.
좀 더 자연스럽게 네가 다가오게 했다면 됐을텐데.
인정하기 싫지만, 프리실라의 말이 맞아.
자신이 없었던 거야.
나에 대한 자신이.
* * *
“뭐해? 빨리 내부 병동으로 데려가야지! 좋아한다며? 죽게 놔둘 거야?”
“아…!”
프리실라가 쓰러진 그를 둘러업으며말했다.
“근데, 내가 할 일이랄 게 따로 있어?”
“적어도 고통스럽지 않게라도 해봐! 정신을 조종하는 능력이라며!”
“…노력해 볼게.”
아이나는 전에 비해 그의 정신을 건드리는 게 곱절로 어려워졌음을 느낄 수 있었다.
전에는 그의 정신세계를 제집 안방처럼 드나들 수 있었지만, 이젠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녀가 쉽게 그의 정신을 조절할 수 있던 이유는, 그녀가 대단히 강해져서가 아니었다.
그가 그만큼 아이나를 신뢰했기 때문에, 마음을 열고 있었기 때문에, 쉽게 지배에 걸리는 것뿐이었다.
어찌 보면, 마음을 내어주었다고도 할 수 있으리라.
그리고, 지금은 그렇지 않았다.
닫힌 문은, 쉽게 열릴 생각을 하지 않았다.
* * *
그래.
처음부터 남의 남자를 건드리려 한 내 잘못이었지.
설령 아이나의 간계에 놀아난 것이라 쳐도, 본인은 행복했을 텐데.
내가그걸 깨버렸으니 말이야.
애초에, 아이나에게 빼앗긴 시점에서, 패배자인 난 널 좋아할 자격이 없었을지도 몰라.
하지만, 그럼에도 널 좋아해.
이 마음을 놓치고 싶지 않아.
* * *
“괜찮겠지?”
“잘 되겠지… 밖에선 내로라 하는 의사들만 모인 데가 아이니르인데.”
“그래.”
어려운 수술은 아니라는 의사의 말에도, 두 명의 근심은 사라질 줄 몰랐다.